때로는 글보다 그림에서 더 많은 느낌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림 한 장, 사진 한 장이 건네는 말은 도무지 글로 다 표현하기 어려울 때 적당한 소통수단이 되지요. 그래서 어린아이들에게는 글이 많은 책보다 그림이 큼직큼직한 책들을 읽게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에게 "인생"을 설명하려한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글로 혹은 말로 그것이 쉬우리라 생각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림 한 장이라면 그것이 가능하지요. 적어도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그림책에 대해서는 뭐랄까 편견이랄까요 그런게 있어서 나이가 들면 읽지 않는 책정도로 치부했었지요. 사실 소설보다 만화책이 재미있는데도 말이죠. 그리고 어느날 제손에 이 큼직한 책 한 권이 건네졌습니다.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라는 긴 이름을 가진 친구가 주인공이지요. 아이는 학교를 열심히 다니는 그러니까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하고 열심인 그런 착한 아이입니다. 그런데 학교에 가는 길에 자꾸 문제가 생깁니다. 악어가 나타나 장갑을 물어가기도 하고 산더미만한 파도에 옷이 모두 젖기도 합니다.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에게는 그런 모든 일들이 실제로 벌어진 일입니다. 아이는 그런 일들에 불만이나 불평을 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요. 그리고 지각을 하게 된 이유를 묻는 선생님에게 그대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어른"인 선생님은 "아이"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아이가 집에 늦게 들어왔는데 오는 길에 악어를 만나 장갑을 잃어버려 그것을 찾느라 늦었다면 뭐라고 대답하실 건가요? 사실 이 부분을 읽을 때 뭔가 마음이 아려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 역시 어린 시절 비슷한 일을 겪었기 때문이지요. 분명히 일어난대로 느낀대로 이야기를 했지만 아무도 그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는 사실을 말하고도 반성문을 300번이나 써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아이는 묵묵히 반성문을 적습니다. 무어라 반발을 한만한데 그러지 않았지요. 그것이 더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비슷한 일이 반복되고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는 여러 번의 반성문 쓰기를 반복해야했지요. 아이의 마음속에 어떤 감정이 생겼을까요. 그러던 어느 날 털복숭이 고릴라가 선생님을 잡아 천장으로 끌고 올라갑니다. 선생님은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에게 도와 달라고 소리칩니다. 분명 아이의 눈에도 고릴라가 보이고 선생님을 잡아 천장으로 끌고 올라간 모습이 보였겠지요.


하지만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는 선생님이 이제까지 자기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그대로 돌려줍니다. 이것이 이책의 마지막 장면인데 복수나 앙갚음을 해서 통쾌하다는 감정은 전혀 들지 않고 마음속이 뭔가 짠해오는 느낌입니다. 이책에 쓰인 글자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글자만 따로 뽑아놓고 보면 한 페이지도 될까말까 하지요. 하지만 이책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림을 봐야 합니다. 아주 작은 부분까지도 말이죠. 그림의 구석구석에 우리에게 던져주는 이야기들이 정말 많이 담겨있으니까요.

이책은 아이들보다는 어른을 위한 책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물론 아이들이 읽기에 부족함은 없지만 담겨져 있는 이야기가 제법 깊이 있는 주제이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늘 자기가 바라보는 눈높이로 세상을 재단질합니다. 비단 세상뿐 아니라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지요. 특히나 선생이나 부모와 같은 '교육'을 맡은 이들은 아이들에 대해 그 재단질을 좀더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많은 경우 그 재단에 사용되는 자와 가위가 어른의 손에 들린 것이라는 데 있는 것이죠. 아이들의 눈과 생각으로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결국 아이들은 어른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자신들이 느끼는 감정과 순수함을 마음속 깊은 곳으로 던져 버립니다. 흔히 순수함이 사라졌다. 아이같지 않다. 라는 말을 하는데 그건 어른들이 아이들의 마음을 그렇게 만든 것이죠. 어른의 잣대를 아이에게 들이대니 아이 입장에서는 그 자의 길이에 그리고 그 눈금에 맞추는 것이 옳은 것이라 생각하고 그 순수함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비단 어린아이뿐 아니라 다 큰 어른이 되어서도 이런 일은 제법 많이 일어납니다. 

아무튼 참 오랜만에 읽은 그림책 한 권이 많은 생각과 가르침을 전해 줍니다.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고 어쩌면 그것이 진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좀처럼 가시지를 않는 하루였습니다. 





사람인지라 마음이 늘 한결같을 수는 없지 싶다. 이것도 나약함에서 오는 변명이라면 어쩔 수 없으려나 싶지만...

살다보면 슬럼프를 겪는 때도 있고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하며 앞으로 죽죽 달려가는 때도 있는 것을 알면서도

가끔은 푹 주저 앉고 싶기도 하고 그렇게 주저 앉아 있을 때 누가 손을 내밀어 일으켜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나름 꿋꿋하게 죽 달려오다가 철퍼덕 넘어졌는데... 마음이란 역시 간사해서 나약해질 때는 끝을 모르고 나약해지나보다.

유난히 정에 약한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럴 땐 곁에 누군가 있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커진다.

하지만 내가 힘들 때 누군가 곁에 있다는 것은 상대에게도 그만큼의 짐을 지워야 하니 역시나 이기적인 생각이다.

아무튼 요 며칠새 정신이 달에 갔는지 별에 갔는지 모르겠다. 시간은 꽤나 빨리 지나가는데 일상은 뭔가 어긋난채 돌아간다.

이럴 때는 그저 숨을 죽이고 웅크리고 앉아서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지 싶다. 물론 가능한 빨리 정신을 수습하고 일어서야 하지만...


Leica M6, Summicron 35mm f/2.0 asph, Kodak EBX, LS-40



내게 오늘은 특별한 날이다. 2010년 오늘 하나의 삶의 길을 접고 돌아왔으니 특별하다는 말로는 뭔가 부족해보이는 그런 날이 오늘이다. 벌써 그날로부터 만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는게 참 믿기지 않을 정도다. 

어떤 일을 겪을 때 그 순간에는 세상이 무너지고 모든 것이 덧없어 보이기도 하고 혹은 세상을 모두 얻은 것처럼 대단해 보이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 그때를 돌아보면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었네'라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 물론 정말 큰일이 일어나는 때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사실 살아가면서 손꼽을 정도다. 굳이 꼽아보자면 출생과 죽음 정도일까? 하지만 그 출생과 죽음이라는 것도 큰틀 안에서는 흐름 속의 일부이기에 특별한 것이 되지는 못한다.

살다보면 삶의 반전이 이루어지는 기회가 주어지고 그 기회에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남은 삶이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변하게 될 수도 있다. 많은 이들이 그렇게 믿고 있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소위 인생역전(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그 생각에 묻혀 깨닫지 못한 것이 있으니 그 무한함이 0으로의 무한함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어떤 특정한 일을 겪고나서야 혹은 특정한 사람을 만나고나서야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허구라는 말이다. 사실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는 것 자체가 특별한 일이다. 의미부여를 어디에 어떻게 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그런데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또 무엇일까?

예전에는 어떤 사건이나 사람에 지나칠 정도로 의미를 부여하는 자기 최면을 걸기도 했었는데 원래 모습보다 과장된 이미지를 부여했던 탓에 본연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면 그것이 원래의 모습임에도 쉽게 실망을 하고 상처를 받곤 했다. 결국 특별한 것과 평범한 것을 구분한다는 것이 스스로 무언가를 합리화하기 위한 교묘한 생각의 장난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예로 들어보면 '당신이 이럴 줄 몰랐다"는 말은 가장 흔한 경우가 아닐까 싶다. 상대는 가만있는데 자기나름의 의미를 상대에게 부여한 경우다. 게다가 이 의미부여에 특별하다는 생각을 덧붙이면 '-의 시너지 효과'가 일어난다. "나만의 당신이.."가 되어버리면 일은 더 복잡해진다. '당신은 원래 그렇다'는 말 역시 다름 아니다.

그런 생각으로 처음의 문장을 되짚어보면 특별한 것은 없었다. 내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했고 그 의미를 크게 부풀렸을뿐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를 나 자신에게 그리고 대외적으로 설득하려했으니 거품 속에 감추어진 미약한 본질을 덮기 위해 끊임없이 거품을 더 만들어 내는 의미없는 일상이 반복되었던 것이다. 

비단 어떤 일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고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서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 저 사람이야말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충성을 바칠 인물. 이런 식의 자기최면(혹은 집단최면)과 거품덮기에만 급급하다면 그리고 상대방 역시 그런 거품으로 덮여있다면 그 거품이 꺼지고난 후에 마주치는 서로를 감당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모든 것을 다 드러내놓은 상태에서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아무튼 결국 중요한 것은 생각이라는 것이 얼마나 간사하고 그때그때를 모면하기 위한 변명으로 가득찬 모순덩어리라는 것을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는 점이다. 사람은 컴퓨터처럼 0과 1로 그 생각을 구분지을 수 없기 때문에 0과 1의 사이에 정말 셀 수 없을만큼의 선택과 결정이 가능하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보면 0부터 1까지도 가지 못할 정도의 일로 고민 속에 빠져 있거나 감정을 소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너무 심각하지 말자는 작은 결론에 도달한다. 

또한 인생에 특별한 일이라거나 평범한 일이라거나 하는 식의 구별은 별 소용이 없다는 것.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는 아닐지라도 무언가에 지나칠 정도로 의미를 부여해 자기모순에 빠지는 것처럼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는 것도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오늘 내게 던져진 이야깃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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