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극적인 제목이다. 안철수의 표정도 우리가 익히 접하는 웃는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이책의 저자는 왜 그리고 무엇을 알리고 싶었을까?

대선을 맞아 대선주자들에 대한 책들이 정말 봇물 터지듯이 쏟아져나온다. 이런 류의 책들은 대개 두 부류인데 하나는 '용비어천가'이고 하나는 '불씨잡변'이다. 극단적인 칭송 아니면 비난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책은 조금 다르다. 용비어천가도 불씨잡변도 아니다. 결론적으로 이도저도 아니라는 말이다.

저자의 성향을 파악해보자면 안철수에 대해 비판하는 성향이 강하다. 그러나 무작정 하는 비판이라기보다는 조사에 기초를 둔 비판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무언가 근거가 있다는 것은 글에 힘을 실어준다. 그런데 이책의 필자가 근거로 들고 있는 '사실'들이 정확한 '진실'이냐의 문제는 독자로서는 검증할 방법은 없으니 이런 류의 책을 읽을 때는 최대한 객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3명의 대선주자들은 정말 특이하게도 각 인물의 캐리커쳐가 명확하게 그려진다. 그런데 이 '만들어진' 외양을 하나하나 따지고 들어가는 경우는 많지 않다. 박근혜는 어떻고 문재인은 어떻고 또 안철수는 어떻다는 식으로 정형화된 패턴이다. 아마 이 패턴은 대선이 끝날 때까지 그리고 누군가 정권을 잡아 그 정권이 끝날 때까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그런 패턴인데 이책의 저자는 안철수의 정형화된 모습을 하나하나 짚어 보고 있다. 본인 외의 가족사항에까지 펜을 댄 것은 드문 일이지 싶기도 하다.

부제로 달려있는 '우리는 정말 안철수를 알고 있는가?'는 그런 의도로 보인다. 갑이라는 후보가 좋으니 그의 모든 점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고 을이라는 후보는 싫으니 그의 장점까지도 비난과 비판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양비론에서 조금은 물러서 과거 그리고 현재의 상황과 행적들, 배경들을 조목조목 짚어가는 점은 이책이 가진 의도 부분만 놓고 보면 장점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 '의도'만이 이책의 유일한 장점일 수도 있겠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글을 쓸 때 그 글이 필자의 주관에 의해 어떤 식으로 극단적인 양상을 보이게 되는지를 학습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꽤나 유익하다.

그리고 저자가 극구 부인함에도 불구하고 시류에 편승한 책임은 분명하다. 제목이나 중제의 선택이나 필체에 이르기까지 그런 부분들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이책을 읽은 것은 한 사람에 대한 여러 생각들을 모두 접해봐야 한다는 판단때문이다. 콩깍지가 씌워진 양 좋으면 무조건 좋다는 식으로는 누군가를 진정 좋아할 수 없다. 단점도 정확하게 알고 그 단점마저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진실로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내 의도는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았음에도 '이책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버렸다.

아무튼 앞서도 적었지만 정치적인 서적은 선택을 할 때 신중함을 요한다. 스스로 아무리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책을 일단 펼치고 읽어나가다보면 필자의 감정에 빠져드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정도까지 이르려면 상당히 필자의 필력이 우수해야겠지만- 시대적인 흐름이나 상황 등에 휩쓸리다보면 그런 냉정한 객관성을 유지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어떤 책을 읽건 결국 최종적인 선택은 독자의 몫이다. 차동엽 신부가 이야기한 것처럼 세상에 나쁜 책은 없으니 말이다. 그책을 좋게 혹은 나쁘게 받아들이는 것은 언제나 독자의 몫이다.


안철수의 두 얼굴


오래 전 대학로 사진입니다. 2003년이니 햇수로는 10년 전이네요. 지금의 대학로와는 또 다른 모습이지요. 요즘도 저런가 모르겠지만 대학로에는 천막을 쳐 놓고 점을 보는 간이 점집(?)들이 많았습니다. 문득 점이라는 게 어떤 것일까 생각을 해 봅니다. 미래를 내다 본다는 것은 아마 인류가 지구상에 생긴 이래로 가장 중요한 관심사 중의 하나는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당장 1분 후의 일도 알지 못 하는 것이 사람이지요. 무엇인가 알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불안이 '점'에 대한 수요를 만든 것이겠지요. 죽음 역시 사람이 겪어볼 수 없기에 막연한 두려움으로 다가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점을 보는 것은 대개 현실에 불만이 있거나 너무 행복한 경우로 나뉘지 않을까 싶습니다. 현재가 막막하기에 앞으로는 좀 나아질까 싶어 점을 보기도 하고 현재가 너무 만족스럽기에 그 만족이 얼마나 더 지속될 수 있을까 알고 싶어지는 것이지요. 결국 궁극적인 이유는 앞서 적은 '알 수 없음에 대한 불안'이지요. 불안의 이야기가 나오니 프로이트의 격리에 관한 이야기와 알랭 드 보통의 책이 떠오르는데 찬반의 의견이 있겠지만 불안이 격리(떨어짐)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에는 제법 공감하고 있습니다.

'점'을 치는 것도 어찌 보면 이 격리되지 않으려는 의지와 관계가 있을 것 같습니다. 독야청청 홀로 살아간다면 굳이 점을 볼 일은 없겠지요. 하지만 누구와 살아야 한다거나 어떤 조직에 들어가야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관계'를 맺으려는 의지 그러니까 격리되지 않으려는 의지가 강해지면 불안이 생기는 거죠. 그렇게 생각하면 점을 보는 것을 그저 구시대의 풍습이라고 치부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뭔가를 모색하는 과정으로 긍정적으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점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니 저도 무언가 '불안'하거나 혹은 '관계에 대한 의지'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렇다고 점을 보러 나가거나 타로카드를 펼쳐놓지는 않습니다. 번거로움에 대한 습관적인 거부감도 있지만 무엇보다 '알 수 없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큰 동기부여수단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이지요. 미래를 알 수 있다면 현재를 적극적으로 살아갈 의지를 잃게 마련입니다. 애매모호함과 불확실함.. 삶은 결국 이런 모양인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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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사진은 전형적인 흑백 필름입니다. 일포드사의 FP4라는 필름인데 ISO125의 특이한 필름이지요. 자주 사용하던 XP2에 비해 소위 선예도가 높고  콘트라스트가 강한 경향을 보이는데 라이카와 결합하면 이렇게 더 강한 이미지가 구현됩니다. XP2는 크로모제닉 특성을 가진 필름이라 전반적으로 부드러운 느낌이 강한데 FP4의 경우는 노출에 제법 민감한 모양을 보이는 흑백필름입니다. 두 사진 모두 노출은 언더로 잡았는데 조금 우울한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Leica M6, Summicron 35mm f/2.0 asph, Ilford FP4, LS-40



한때는 연탄은 우리네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필수품이었다. 연탄이 없으면 추운 겨울날을 보낼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오래 전 기억 속에서 떠올려보는 그런 존재가 되었다.

문득 나를 둘러 싼 주변에서 사라진 것들은 무엇이고 새롭게 얻은 것은 무엇일까 생각을 해 본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것이 있는가 하면 시간이 흘러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아 억지로 사라지게 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얻는 것이 있는가 하면 시간이 흘러도 좀처럼 얻을 수 없어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어떤 것을 잃고 어떤 것을 얻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을 하지만 "자연스럽게" 잃고 얻는 것들에 대한 생각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

'욕망'이 '자연'에 앞서는 것이 우리네 사람의 본성이지 싶다. 

하지만 때로는 그저 시간의 흐름에 몸과 마음을 던져보는 것도 좋으리라 싶다.

'무엇'을 얻고 잃는 것에 몸과 마음을 집중하지 말고 그저 흘러가는대로 놓아두면 어떨까..

굳이 노자의  '上善若水"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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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을 담은 필름은 RDPIII이라는 녀석입니다. 시중에는 '프로비아'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후지의 슬라이드 필름이죠.

후지의 슬라이드는 프로비아와 벨비아(RVP)가 유명한데 벨비아는 ISO가 50인 특이한 필름이죠 

이 두 필름은 아마 올해말에 모두 단종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오래 전 많은 추억과 이야기들을 만들어 준 필름도 시간이 흐르면서 제 의지와 관계없이 사라져버리네요..

시간되면 슬라이드 필름 이야기를 한 번 써볼까 싶기도 하네요..

사진 윗부분은 슬라이드 스캔의 흔적인데 자를까 하다가 그냥 두었습니다.


Canon EOS 1-Vhs, EF 28-70mm f/2.8L IS USM, RDPIII, LS-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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