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 한자로 '無情'이다. 뜻풀이를 보자면 '남의 사정에 아랑곳하지 않음.' 이라는 의미가 있다.

다른 표현을 빌려보자면 '삭막'이라는 단어가 이 '무정'과 일맥상통한다.

요즘의 우리네 삶이 정이 없고 삭막해진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디지털'이 미친 영향이 압도적이지 않을까. '편리'를 위해 끝을 모르고 발전하고 있는 기술의 뾰족함에 아날로그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몸과 마음이 이리저리 찟기고 있는 모습이다. 집 밖으로 나가 몇 걸음만 걸으면 고개를 푹 숙인 채 스마트폰 속의 세상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모습들이 더 이상 어색하거나 낯설지 않다

스스로 세상과 벽을 만들어 가고 있는 셈이다. 누구도 스마트폰 속에 빠져들라고 강요한 적이 없는데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들 거북목이 되어 거리를 떠 돈다. 디지털이라는 거창해보이는 단어에 빠진 유령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다.

'영화일 뿐이지'라며 가볍게 넘겨버린 데몰리션맨의 세계가 현실 속에서 벌어질 날도 얼마 남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두려운 것은 그런 세상이 바로 눈 앞의 현실로 펼쳐져도 우리는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스캔한 필름들을 뒤적여본다. 한 장 한 장 마운트 되어 박스 안에 들어있는 아날로그 세상을 형광등에 비춰본다. 내개 남은 얼마되지 않는 슬라이드들은 그렇게 방 한 구석에서 먼지에 덮여 가고 있지만 난 이것들을 버릴 생각은 없다. 고장난 턴테이블 위에 낡은 LP판을 올려보는 어리석음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여름의 한복판으로 시계바늘이 움직인다. 가만히 있어도 등 뒤로 땀이 흐르는 계절이다. 

여름이니 어쩌겠어? 라고 생각하는 외에 달리 방법은 없어 보인다.

어제 서점에서 한참을 들여다본 실존주의 몇몇 문장이 여전히 두통을 불러오는 밤이다.

담배를 끊은 지 한 달이 되어 간다. 엄밀하게 말하면 연초를 끊은 것이지만...

2014년 여름은 이렇게 흘러간다.


Nikon F5, 135mm f/2 DC, Soft filter, LS-40



인연이라는 단어를 다시 생각해봅니다. 우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수 많은 만남들 속에서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마주 보게 되고 그리고 같은 풍경을 바라 보게 된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이 아닐까요? 

우리는 길에서 처음 마주쳤죠. 아직도 그날의 기억은 생생하답니다. 걸음을 함께 한다는 것은 참 소중한 기억입니다. 서로 같은 방향으로 그리고 같은 목적을 가진 만남이기 때문이죠.. 내가 언제부터 그대를 내 마음속에 담아두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여러 번의 걸음과 마주침 속에서 천천히 내 마음에 젖어들게 되었다는 것이 가장 어울리지 싶습니다.

천천히 마음에 새겨지는 인연은 어느날 갑자기 마주치는 인연보다 여운이 큰 것 같습니다. 첫눈에 반하는 인연도 물론 좋겠지만 우리의 경우처럼 몇 년의 시간을 두고 이어진 인연이라면 그 깊이가 더 깊지 않을까요. 아직 어색하고 왠지 쑥스럽고 마주 보면 어디로 눈을 두어야할지 모르는 우리지만... 그대라는 이유로...나라는 이유로 시작된 인연이기에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어떤 말보다 글보다 행동이 더 중요하죠. 그렇게 해 나가자고 이야기했죠. 그 안에서 다른 모든 것들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해 나가고 있지요. 그것이 우리의 인연이 이어지는 동안 당신에게서 내게로 그리고 내게서 당신에게로 전해질 수 있는 가장 무거운 인연의 끈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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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날 등산을 생각해본 적은 별로 없다. 물론 비를 맞으며 걷는다는 것이 꽤 즐거운 일이긴 하지만 도시 생활이란 애초에 걱정할 것들이 워낙에 많은지라 비가 오면 우산을 쓰거나 가만히 실내 활동을 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것이 요즘의 모습이다.


비오는 날 얕은 산이라도 걸어보는 것이 우중산책 기분이 나지 않겠냐는 그녀의 말에 그렇게 묻어 두었던 빗속을 걷는 느낌에 대한 향수랄까.. 멀리 가는 대신 집 근처에 있는 그래도 제법 산 느낌이 나는 곳으로 가 보기로 했다. 집을 나설 무렵 조금씩 내리기 시작하던 비는 산 초입에 들어설 무렵에는 제법 장대비가 되어 있었지만 마음만은 상쾌했다.


그러고보니 빗속에서 카메라를 꺼내어 든 게 얼마만일까. 나름 사진에 대해 애착을 가지고 있음에도 이런저런 핑계로 먼지만 쌓여가는 카메라에게 새삼 미안한 마음도 든다. 산은 언제나 거기에 있으니 내 마음만 있다면 오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 마음이 선뜻 동하지 않아 마냥 먼 곳으로만 느껴지는 것이 또한 산이라는 존재였는데.. 굳이 먼 길을 나서지 않더라도 가까운 동네산이라도 자주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삶이란 워낙에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것이고 그 진리를 작년과 올해에 걸쳐 절절하게 느끼고 있는 입장이다 보니 하루하루 주어진 삶의 시간들이 소중하고 그 시간 안에서 벌어지는 일상이 소중하다. 삶의 무게추가 바닥까지 내려갔다고 절망해서도 안 되고 구름 위까지 떠 올라있다 해서 기뻐할 일만도 아닌 것이다. 물론 나 역시 사소한 일에 감정이 들쑥날쑥 하루에도 천국과 지옥을 오르내리곤 하지만 예전에 비하면 비교할 수도 없을만큼 나아졌고 그것을 나 스스로 느끼고 있으니 다행이랄까..


삶의 길이 언제나 곧은 길만은 아니기에 그 길에서 만나게 되는 작은 풀 하나라도 소중한 나의 인연으로 생각하는 겸손한 자세를 언제나 간직해야 겠다고 생각해본다. 이렇게 산은 내게 끊임없이 나 자신을 돌아볼 이야기들을 건넨다. 초여름에서 본격적인 여름으로 넘어가는 6월이 어느 날. 쏟아지는 빗속에서 산은 나에게 오늘도 열심히 살고 있냐며 손을 내민다. 


Panasonic LX-7



한창 북한산둘레길을 걷고 있을 때 두 번정도 산의 유혹을 받은 적이 있었다. 한 번은 북한산이고 또 한 번은 사패산이다. 둘중 사패산을 먼저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지난 겨울 둘레길을 걸을 때 먼 발치에서 바라본 사패산의 느낌이 참 좋았기 때문이다. 사패산을 가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고 정상에 오르는 길도 몇 가지나 된다. 등산 초보인 내 입장에서는 그래도 수월한 길이 어디일까 찾아보다가 의정부 회룡역에서 출발하는 코스로 정하고 집을 나섰다.

사패산이라는 이름은 조선 선조 당시 6째 딸인 정휘옹주가 시집을 갈 때 하사한 산이라 하여 賜牌山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원래 이 지역에서 부르는 이름은 갓바위산, 삿갓산이었다고 한다. 북한산도 삼각산이라는 순 우리말 이름이 있는 것처럼 사패산도 이전의 이름을 찾아 부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지하철 1호선 회룡역에서 내려 15분 정도 걸으면 '회룡사'로 길을 안내하는 표지판을 만날 수 있고 그 길을 따라 걸어들어가면 된다. 길을 조금 걷다보니 익숙한 표지판이 보인다. 1년여에 걸쳐 걸었던 북한산둘레길. 한 해를 정신적으로 버티게 해 준 힘이 되었던 그 길을 다시 만나게 되니 감회가 새로웠다. 둘레길은 틈나는 대로 다시 걸어보고 싶은 마음이다.


사진이 작아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클릭하면 약간 커진다) 오늘 가게될 길은 회룡사를 지나 회룡사거리, 범골삼거리를 지나 사패산 정상에 이르는 코스다. 전체적으로 난이도가 높은 산은 아니지만 산에 오를 때는 늘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특히나 홀로 걷는 산행이라면 더더욱 한발한발 조심스럽게 내딛을 필요가 있다. 물론 빠르게 속전속결식으로 산에 오르는 분들도 있지만 나는 그저 거북이 스타일이다.


회룡탐방지원센터인데 이른 시간이어서 그런지 아직 영업개시(?) 전이다. 이곳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북한산국립공원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몇 장 안 되지만 여기까지는 아이폰으로 사진을 찍었는데 작은 화면으로 볼 때는 그래도 괜찮아보이더니 모니터로 옮겨오니 '영 아니올시다'라는 느낌이다. 뭔가 인화된 사진을 물에 담가둔 느낌같기도 하고... 아이폰으로도 사진을 잘 찍는 분들도 있던데.. 내 둔한 감각을 탓해본다.


어디 가서 길치라는 소리는 듣지 않는 편인데 산에만 오면 어디가 어딘지 아니 어느 봉우리가 무슨 산이고 지금 내가 있는 위치가 산의 어디쯤인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는다. 산행 경험이 적어서 그런가 싶기도 한데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것 중의 하나다. 아무튼 저기 뒤쪽으로 보이는 머리가 벗겨진 봉우리가 사패산 정상인가라고 추측만 해본다.


전에 만난 적이 있는 북한산둘레길 중 하나인 보루길이다. 보루길로 올라가면 사패산 보루들을 만날 수 있다.(이전 글 참조) 그렇다는 것은 보루길을 통해서도 사패산에 오를 수 있다는 셈인데 이전 글을 뒤적여보니 포대능선으로 향하는 표지판이 있는 것으로 보아 능선따라 죽 이어진 모양이다. 사실 사패산도 북한산 자락이니 어디로든 길은 이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길을 조금 더 가면 만날 수 있는 '사패공방'. 주인장은 안 계신지 조용했고 벽 쯤에 붙어 있는 문구가 참 마음에 들었다. 그러고보니 누군가를 기다려본 지도 제법 오래됐다. 기다림은 만남을 전제로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던가. 그래도 역시 누군가 만날 사람을 기다리는 일이 조금 더 행복하다. 머지 않아 나 역시 '당신을 기다리고 있으면 마음이 설레인다'라는 말을 건넬 수 있기를 바라며 걸음을 옮긴다.


이곳이 회룡골계곡인지 정확하지는 않다. 지도앱이라도 켜서 확인을 했어야 하나 싶기도 했지만 이내 마음을 접었다. 산행은 그저 산과 내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거기에 다른 요소들을 끼워넣는게 내키지 않아서였다. 산을 걷는 것은 그 자체로 아날로그인데 굳이 거기에 인간 세계의 날카로움을 덧입힐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러면서도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것은 변명의 여지는 없지만...


사패산 등산코스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안내도다. 내가 가는 길은 가운데에 있는 회룡사를 지나 위로 올라가 사패능선에서 우회전하는 코스다. 등산 정보를 찾아보니 4코스라고 한다. 사패능선 그러니까 회룡사거리에서 좌회전으로 하게 되면 포대능선을 지나 도봉산 자운봉으로 갈 수 있다. 언젠가 산행이 조금 더 익숙해지면 가 볼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하고 오늘은 사패산만 바라보고 올라가보자.


조금 더 올라가면 회룡사를 만날 수 있다. 부처님오신날이 막 지난 터라 아직 연등이 곳곳에 매달려 있다. 큰 행사가 끝나서인지 인적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혼자 돌아다니자니 어쩐지 어색해져서 사진만 살짝 찍고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보니 산에 있는 절에서는 점심 때 절밥을 준다는데 아직 먹어본 적은 없다. 하산할 때 이쪽으로 다시 돌아오면 혹시 가능하지 않을까..라고 이때까지는 생각을 했었다.


이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왼쪽으로 보이는 좁은 길이 등산로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산 정상만 목표로 하고 길을 나서본 적은 그리 많지 않다. 태백산, 인왕산, 청계산 정도가 아닐까? 물론 객기로 올랐었던 설악 대청봉도 있었지만 그건 도무지 산행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어서..(이전에 올린 글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아무튼 산행은 둘레길 걷기보다는 준비할 것들이 많다. 오늘은 스틱을 두고 왔는데 하산길에 생각하면 가져오는 것이 나았다.


산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돌탑(?)이다. 산을 오르는 이들의 작은 소원들을 모아놓은 돌무더기. 크고 높은 것들도 많지만 이렇게 앙증맞게 있는 것이 오히려 사람 냄새가 나서 좋다. 돌 하나를 주워 올려볼까 하다가 이내 그만 두었다. 누군가 올려 놓은 돌 위에 내 소원까지 올리면 소원을 이루어주는 분(?)에게 부담이 될까 싶어서다. 그냥 저 돌을 올린 분들의 소원만 이루어져도 충분하다.


산을 조금이라도 다녀온 분들은 아시겠지만 산에서 만나는 이정표의 거리는 진짜 별 의미가 없다. 단순히 사패능선까지 800미터다라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단 등산길은 꾸준한 오르막이고 사패산의 경우는 일직선에 가깝지만 어느 산들은 구불구불한 길들이 제법 많기도 하기 때문이다. 저 거리만 생각해서 등산이나 하산 혹은 휴식 계획을 세우면 낭패를 보기 쉬우니 페이스 조절을 잘 하도록 해야 한다. 나는 저런 표지판이 보이면 대충 곱하기 2를 해버린다. 사패능선까지 1.6km 남았다고 보고 간다는 말이다.


갈림길에서 내가 길을 잘못 든 지점이다. 양쪽 길 모두가 등산로처럼 되어 있어서 어느 길을 가야 하나 고민하다가 이쪽 길로 접어들었는데 이길의 끝은 막다른 곳이다. 그럼에도 들머리는 제법 운치가 있었다. 표지판이 하나 있으면 어땠을까 싶지만 결과적으로는 없는 것이 나았다. 왜냐하면 이길의 끝에서 만나는 곳이 꽤나 멋진 곳이었기 때문이다.


골짜기 사이로 물이 흘러나오는 약수터 비슷한 것이 있었다. 약수터라고 하기에는 물이 고여있지 않으니 아닌 것 같지만 바가지가 있는 것으로 봐서는 물을 먹으라는 소리니 약수터가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물은 제법 시원하다. 요즘에는 산에 흐르는 물도 안심하고 마시기 어렵다지만 산행 중간에 만나는 물마저 외면해야 한다면 너무 인간미가 없는 것은 아닐까. 다만 바가지에 봄벌레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파이프를 들어 올려 한 모금 산의 느낌을 맛본다.


내가 좋아하는 산은 겨울산이지만 봄의 산도 그 나름의 매력이 있다. 지난 겨울의 못 다 지워진 흔적들과 다가오는 여름을 미리 알리는 징조들이 섞인 느낌인데 이도저도 아닐 수도 있지만 그 또한 봄의 산이 주는 매력이다. 요즘은 봄이 워낙 짧아 봄의 산을 느끼려면 4월말에서 5월초 정도가 적당하다. 그전은 겨울의 느낌이 강하고 그 후는 여름의 느낌이 강한 까닭이다. 사실 엄밀히 따지만 오늘도 입하가 지났으니 이미 여름인 셈이지만...


이쪽 계곡에는 물이 전혀 흐르지 않는다. 아마도 여름이 오고 비가 내리면 이 계곡에도 물이 흐를 것 같은데 다른 계절을 겪어보질 않아서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겠다. 여름에 다시 한 번 와야 하나하는 생각이 들었던 순간이다. 사패산은 북한산국립공원 안에서도 가장 자연림이 보존이 잘 되어 있다고 한다. 확실히 나무들이 어느 곳보다 울창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는데 곳곳에 짙에 깔린 이끼들을 보면 이 산이 얼마나 깨끗한지 알 수 있다.


산에 오를 때는 가능하면 작은 것들을 좀 더 많이 보려고 노력한다. 정상에 오르는 것은 그런 걸음의 결과일 뿐이지 끝까지 오르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무작정 정상에만 오를 생각으로 급하게 산을 오르다보면 그 중간에 있는 수많은 이야깃거리들을 그냥 지나쳐버리게 된다. 산이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정상에만 있지 않다. 그 많은 것들을 버리고 끝에 있는 하나의 이야기만 들으려하는 것은 인간의 오만함은 아닐까?


경사가 급해지는 것을 보니 사패능선에 거의 다 와가는 모양이다. 둘레길을 걸을 때도 그랬지만 역시나 별 다른 식량(?)준비를 해가지 않는 탓에 여기쯤 오니 제법 숨이 차다. 준비를 잘 해야 한다고 이야기는 잘 하면서 정작 나는 제대로 준비를 안 한 셈이다. 혼자 하는 산행이다보니 이것저것 챙기는 것이 번거롭다고 스스로 변명도 해보지만 그대로 짊어지고 돌아가게 되더라도 최소한의 먹거리는 챙겨와야 한다.


사패능선 그러니까 회룡사거리인데 이곳에서 만나는 표지판은 자운봉과 사패산이 정반대의 거리에 있음을 알려준다. 거리가 만만해보이지만 위에서 적은 것처럼 저 숫자에 곱하기 2를 해보면 어느 곳도 만만하지가 않다. 표지판을 가만히 보니 자운봉은 '봉'이고 사패산은 '산'이다. 이건 산의 규모에서 오는 차이인데 사패산은 여러 봉우리들이 없는 반면에 도봉산은 자운봉, 만장봉, 선인봉 등 여러 봉우리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도봉산의 주봉은 자운봉이다.


능선길은 거의 평지도 되어 있어 걷기가 어렵지 않다. 다만 가림막이 없다보니 바람을 있는 그대로 맞기 때문에 제법 쌀쌀한 느낌이다. 아마 겨울에 이곳에 왔다면 이쯤에서 바람막이 정도는 입어야 체온유지가 되지 싶다. 물론 여름에도 올라오는 동안 땀이 많이 흘렀기 때문에 능선에 오르면 순간적으로 춥게 느껴질 수 있으니 바람막이는 사시사철 배낭 안 구석에 넣고 다니는 것이 좋다.


사패산은 흔히 말하는 꼴딱고개는 없다고 봐도 좋을 것 같지만 사패능선에 도착하기 바로 직전 그리고 이 계단과 이어 등장하는 바위들에서는 체력을 적절하게 조절하는 것이 좋다. 이 계단은 갯수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촘촘하게 이어져 있기 때문에 두 칸씩 성큼성큼 올라가기 보다는 한칸씩 천천히 올라가는 것이 좋다.


그리고 정상 부근의 바위인데 여기는 경사에 비해 어렵지는 않지만 일방통행 코스로 되어 있기 때문에 오고 가는 사람들이 있다면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오늘 신고간 신발은 바위적응형 등산화는 아니어서 약간 미끄러웠는데 바위 위에 흙 등이 있는 경우는 특히 조심하자. 바위에 척척 달라붙는 등산화가 아니라면(물론 붙어도 마찬가지지만) 무리는 금물인 지점이다.


정상에 오르면 평평한 모습의 작은 운동장 같은 느낌이 드는데 계절마다 그리고 날마다 다르겠지만 오늘은 바람이 제법 강하게 불었다. 정상의 경우는 바람을 온몸으로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특히 조심할 필요가 있는데 사패산 정상은 그냥 통바위들이 듬성듬성 연결된 형태이고 조금 내려가면 경치가 더 잘보이기 때문에 별 생각없이 아래 쪽 바위로 향하게 되는데 바위 끝이 아무 것도 없이 바로 절벽으로 이어지므로 조심하도록 하자.


바위 끝 쯤에서 내려다보면 이런 모습이다. 조금 더 자세히 보겠다고 앞으로 내려가지 않도록 하자. 사실 조금 더 간다고 해서 뭐가 더 잘 보이는 것도 아니다. 정상에서 장비를 다시 점검하고 하산을 준비한다. 원래는 올라온 길로 내려갈 생각이었는데 이전 둘레길의 기억이 떠올라 다른 방향으로 진로를 잡아본다. 하산길은 거의 사진이 없는데 내려갈 준비를 하면서 카메라를 배낭에 넣어버렸기 때문이다. 이건 내 습관이라면 습관인데 등산보다 하산길이 좀 더 위험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산의 방향은 원각사 쪽으로 정했다. 이곳으로 내려가면 상당히 빠른 시간에 하산이 가능한데 문제는 교통편이 별로 좋지 않다는 점이 하나고 길이 약간 험하다는 게 또 하나의 문제다. 보통 폭포가 있는 루트는 길이 험하다고 하는데 예전에 북한산에서 한 번 제대로 고생을 해본지라 고민을 조금 하긴 했지만 일단 내려가보기로 한다. 여기서부터는 다시 아이폰으로 촬영.


세월이 계단을 만들었다. 이 나무는 얼마나 많은 이들의 걸음을 지탱하며 살아왔을까 한참 바라본다. 그리고 그 걸음에도 이 나무는 여전히 이곳에 버티고 서 있다. 이 길을 지나려면 이 나무를 밟지 않으면 안 되고 그 고통 속에서 나무는 점점 더 단단해졌으리라. 사람도 역경을 이겨내면 강하진다고 말을 하는데 요즘은 그말이 그렇게 신뢰가 가지는 않는다. 역경 안에서 오히려 가라앉는 모습을 더 많이 봐서일까.. 결국 모든 것은 사람 나름이다.


원각사 길을 선택한 이유는 바로 이곳에 있다. 내가 사패산에 올라야겠다고 생각을 하게 된 곳. 산너미길로 오는 길에 먼발치에서 바라본 사패산이 그리도 정겨워 보여서 이길을 걷던 날 사패산에 오르겠다고 약속을 했었다. 그리고 1년 하고도 몇 개월이 지나 나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곳에서 사패산의 정상을 다시 바라봤다. 지난 겨울의 약속을 이제야 지켰다고 산에게 이야기 해 주었다.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시간이 지나 나를 둘러싼 많은 것들이 변했어도 여전히 산은 그 자리에 서서 내가 다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기다림이란 만남을 전제로 할 때 그 의미가 더 큰 것 같다. 그리고 산은 내가 그 초입에서 산을 바라볼 때 그 모습 그대로 내가 그를 떠나는 순간에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Nikon D700, AF 35mm f/2.0D & iPhone 5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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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522미터인 사패산은 '강북5산'이라 불리는 '불수사도북' 그러니까 불암산, 수락산, 사패산, 도봉산, 북한산의 하나로 난이도는 그리 어렵지 않은 편에 속한다고 한다. 이 부분을 인용한 것은 다른 산을 올라본 적이 없어서 내 판단기준이 없기 때문인데.. 나중에 내 기준에서 느낌은 다시 적어보겠다. 아무튼 오늘 오른 코스는 지하철 1호선 회룡역에서 출발해 회룡사를 거쳐 사패능선을 통해 정상에 오른 다음 원각사 방향으로 하산해 송추에서 버스를 타고 구파발역으로 돌아오는 코스다. 


대략 전체 이동 경로는 위 사진과 같은데 평소 걸음은 빠른 편이지만 산행은 최대한 느릿느릿 가는 편이라 전체 소요시간은 3시간 20분, 이동거리는 8.2km였다. 하산 후 교통편은 하산한 지점에서 바로 건널목을 건넌 다음 34번이나 360번을 타면 구파발역으로 갈 수 있으니 그곳에서 지하철을 이용하면 된다.



무슨 이야기를 더 할 수 있을까.. 참담해지는 하루하루다. 

위기상황이 되면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알 수 있다.


그것이 인간관계건 사회건 국가건...

그리고 그 어려움 속에서 우리는 진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 진실이 씁쓸한 것이 아니기만을 바랄 뿐이지만

대개 드러나는 진실은 우리를 절망하게 만든다.


가장 도움이 필요한 원초적인 순간에 고개를 돌리는 그 모습에

상대에 대한 절망이 아니라 그 사람을... 사회를... 국가를... 믿었던 자신에 대한 절망이 가슴을 짖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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