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산행을 준비는 꾸준히 해왔지만 오늘 걸음이 올겨울의 첫 눈꽃산행이 될 줄은 몰랐다. 밤 사이 눈이 내렸다는 소식에 대수롭지 않게 '아이젠만 챙겨 가면 되겠지'라고 생각하고 나선 길이었는데 산은 이미 눈으로 가득 덮여 있었다. 그동안 작은 산들은 여러 곳을 다녔지만 큰 산은 오랜만이었기에 느낌이 남달랐고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사람이 있었기에 포근했던 겨울 지리산행이었다.


지리산. 3개의 도에 걸쳐있고 백두대간의 종착점인 우리나라 명산 중의 한 곳이다. 우리가 택한 길은 백무동에서 출발해 한신계곡을 따라 올라가 세석대피소에서 1박을 하고 장터목을 거쳐 천왕봉에 이르는 길이었다. 


백무동에서 거리만으로 볼 때는 천왕봉까지 큰 무리없이 다다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산행을 시작하고 나니 만만한 길이 아니었다. 


동서울터미날과 백무동터미날을 잇는 버스 시간표다. 17일부터 12월 15일까지는 산불방지기간으로 세석대피소가 한 달간 문을 닫기 때문에 백무동쪽으로 산행은 불가능하다. 원래 세석대피소의 폐쇄는 15일부터였는데 어쩐 일인지 이틀이 연장되었고 덕분에 계곡 풍광이 좋은 길로 오를 수 있어서 무척 다행이었다.


세석길의 시작. 산 아래에는 눈의 흔적을 볼 수 없었고 오히려 늦가을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지리산은 소위 '큰 산'이다. 이런저런 경로로 해서 정상까지 오르는 길이 크게 어렵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정말 겸손하게 많은 준비를 해야 산 자체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무턱대고 덤벼들어서는 산은 쉽게 길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석과 장터목 갈림길. 이곳에서 우리는 세석으로 향하는 길로 접어 들었는데 천천히 걸으며 주변의 경치들을 즐기며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며 저무는 가을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왼쪽 길로 가면 마치 설악산의 오색약수길을 연상시키는 계단길을 만나게 되는데(물론 오색의 계단에는 미치지 못 한다) 선택은 본인의 몫이지만 등산보다는 하산 루트로 권해본다. 


그리고 도착한 세석대피소. 군데군데 녹지 않은 눈의 흔적들이 보인다. 입산통제가 이틀 연장됐지만 많이 알려지지 않은 까닭인지 이날 대피소에 머문 사람은 우리 두 명과 남성 등산객 두 명 이렇게 4명이 전부였다. 대피소가 이렇게 텅텅 비는 경우도 있나 싶었고 덕분에 여유있게 쉴 수 있겠다 했는데 사람이 적어서 그런지 우렁찬 코고는 소리가 온 방에 울려퍼지는 부작용도 있었다.


세석을 벗어나 조금 걸으면 이제 사방이 눈밭이다. 한겨울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은 풍경들이 사방에 가득 했다. 눈이 온전히 자리잡기 전이어서 굳이 아이젠이 없어도 그럭저럭 다닐만하긴 했지만 오늘 이후로 이곳을 찾는다면 아이젠은 초반부터 착용하는 것이 좋겠다. 세석에서 장터목에 이르는 길은 풍광이 참 멋드러졌다. 1박 장소를 바로 장터목으로 잡지 않고 세석으로 잡은 것도 이 경치를 놓치기 아깝다는 그녀의 판단이었고 덕분에 이른 설산의 풍경을 온몸으로 감상할 수 있었다.


멀리 촛대봉이 보이고 풍경을 만끽하는 등산객의 모습이 보인다. 11월 중순에 이런 눈밭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참 즐거운 일이다. 얼마 안 있으면 사방이 눈으로 덮일 날이 오겠지만 시간을 앞서 이런 풍경 속에 빠져보는 것도 꽤 매력적인 경험이 아닐까 싶다. 세석에서 장터목에 이르는 길은 역시나 사람이 많지 않았다.


지리산의 매력은 무엇보다 마치 벨벳을 늘어놓은 듯 산자락이 겹겹이 펼쳐져 있는 이런 모습이다. 어디가 끝인지 모르게 산자락이 이어지고 또 이어져 장관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사진으로 담아내기에 풍경이 워낙 압도적인 것이냐 사진 실력이 부족한 것이냐면 당연 후자일테지만 한참을 서서 바라보던 이 풍경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 아쉬움은 산행 내내 남아있었다.


멀리 보이는 낮은 봉우리들은 눈이 녹아 가을산이지만 내쪽으로 가까워질 수록 봉우리들이 높아지면서 눈이 그대로 남아 있어 겨울산의 모습을 하고 있다. 좀처럼 보기 힘든 이 모습은 요즘이 아니면 만나기 어려운 풍경이다. 여름을 뺀 3개의 계절이 시간의 순서에 따라 아래에서부터 위로 변화하는 그래프처럼 그림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능선길을 따라 걷다보면 눈 사이사이로 때이른 눈에 놀란 푸른 잎새들이 보인다. 한겨울이 오면 이 약간의 푸름마저 사라져버릴텐데 참 재밌는 경험이었다. 그녀는 오늘 날씨가 도왔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는데 생각해보니 초입부터 장터목에 이르기까지 쨍한 날씨였고 능선길에서 마주하는 바람도 그리 강하지 않아 경치를 진득히 감상할 수 있었으니 운이 좋았다기보다는 산이 도와주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다.


한발한발 내딛는 걸음마다 눈 밟는 소리가 조용한 겨울산에 잔잔하게 퍼진다. 오고가는 이들이 거의 없으니 정말 여유를 가지고 산의 면면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갑자기 내린 눈에도 이런 멋진 설경이 펼쳐지니 정말 제대로 눈이 내린다면 이 풍경이 또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라는 기대도 한껏 해 본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면 여기도 이른 눈에 놀란 나무들이 보인다. 몇몇은 내린 눈을 그대로 받아들여 눈꽃을 피우고 있고 몇몇은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내린 눈을 털어내 원래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렇게 하나의 계절과 또 하나의 계절이 맞물리며 눈으로 볼 수 없는 시간이라는 존재를 볼 수 있게 해 주고 있었다.


문명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온전히 생존본능만 가지고 버텨야 하는 시간이었지만 함께 하는 이가 있어 힘겨움보다는 따뜻함으로 지낼 수 있었던 이틀이 아니었나 싶다. 지리산 초행인 나를 챙겨가며 열심히 걸어준 그녀에게 감사한 마음이다. 


장터목 대피소에 다다르니 이제야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취사장을 가득 메운 산객들. 무엇이 이들이 이 높은 곳까지 사서 고생을 하며 오르도록 만들었을까. 산의 부름. 그 이상의 다른 대답은 생각나지 않았다. 몸 어느 한 구석 아프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의 고통을 감내하며 산을 오르는 것은 그 부름을 들은 사람의 몫이다.


Panasonic LX-7


북한산의 많은 봉우리들 중에 유독 나와 인연이 있는 봉우리를 고르라면 '족두리봉'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된다. 예전 북한산둘레길을 걸을 때의 기억이 가장 강렬하겠지만 그 이후에도 몇번을 오를 수 있는 기회를 다음으로 미룬 일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오늘 그 인연의 시작을 확인해보고자 그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족두리봉에 오를 수 있는 등산로는 크게 2-3개 정도가 되는데 이번에 고른 등산로는 둘레길 중 하나인 구름정원길을 지나는 길이다. 이곳에서 출발하게 되면 약간 난이도가 높아지는 단점은 있지만 내게 있어서는 오늘만은 이길을 가야한다는 묘한 마음의 부담을 안고 출발했다. 주말이어서 상당히 많은 이들이 북한산을 찾았는데 사람이 없는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길의 시작은 구름정원길이다. 벌써 이곳을 걸었던 것이 1년도 넘은 일이라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곳인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구나..시간은 흘러도 자연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구나. 사람의 삶이란 얼마나 짧고 보잘 것 없는 것인지..


이 표지판은 작년과 약간 달라졌다. 전에는 머리조심이라고 적혀 있어서 어쩐지 재미도 있었는데 이번 표지판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오히려 저 그림을 바라보다가 위험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며 천천히 발길을 옮긴다. 내 산행 속도는 상당히 느린 편인데 아마도 사진을 찍느라 멈추는 일이 많아서가 아닐까 싶다. 


원만한 길을 조금 걷다보면 이 지점을 만나게 된다. 오른쪽에 보이는 탐방객 확인을 위한 문을 지나면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물론 둘레길을 걷는 것도 산행이지만 걷기와 오르기는 묘한 뉘앙스가 분명 존재하기는 한다. 아무튼 이제 1년이 지난 약속을 지키려 이곳에 왔다. 늘 닿을 것만 같으면서 좀처럼 닿지 않았던 인연에 내가 먼저 다가서기로 한다.


둘레길 걷기와 다르다는 것은 초입에서부터 적나라해진다. 족두리봉에 오르는 길을 이곳으로 정했을 경우에는 오르는 내내 이런 모양의 길을 만나게 된다. 북한산의 특징인 바위를 아주 지겹도록 볼 수 있는데 등산화의 선정에 조금은 주의가 필요하지 싶다. 맑은 날이라면 큰 문제는 없겠지만 습기가 많은 날에 이 루트를 탈 경우 비브람창은 다소 미끄러울 수 있기 때문이다.(물론 사람 나름이기는 하다)


한여름이었다면 제법 숨이 벅찼을 길을 따갑지 않은 한낮의 햇살을 맞으며 천천히 올라본다. 내 산행이란 급하지도 않고 정상에 올라야 한다는 사명감도 없기에 아무런 부담이 없다. 물론 정상에 다다르면 잠깐은 기쁘겠지만 몸과 마음이 힘들다면 좋은 산행이라 부르기 어렵다. 일상에서 그렇게 목표달성에 치이며 살아가면서 모처럼 만난 자연에조차 그런 세상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어쩐지 어색하다.


이런 곳에 사람이 쌓은 돌벽이 있을까. 한참을 멈추고 바라본다. 그러고보면 자연이라 해도 어딘들 사람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있을까 싶다. 그렇게 사람들은 자기들의 편의를 위해 자연을 이리 재단하고 저리 재단하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 남는 것은 여전히 변함없는 자연과 어설픈 인간의 흔적이 아닐까. 아무튼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겨본다.


이쪽 등산로는 흙을 만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돌로 만들어진 길은 어쩐지 차가운 느낌이 강하다. 흙이 주는 따스함보다는 '왜 굳이 이리 올라오느냐'며 채근하는 느낌이다. 돌길은 흙길에 비해 체력소모가 확실히 많고 계절의 뜨거움이나 차가움이 그대로 몸에 전해지기 때문에 조심스럽다. 그나마 습기가 없어 미끄러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이 뿌리들이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얼마나 많은 등산화가 이 뿌리를 밟고 지나갔을까. 가파른 경사로의 이어짐 속에 바닥 한 번 내려다 보기 어려운 길에 이렇게 뿌리는 묵묵히 그 존재를 남기고 있었다. 사람이 걷는 길을 막아서는 나무가 있다면 그 나무를 베어내고 길을 가는 것이 옳을까 아니면 그 나무를 에둘러 가는 것이 맞을까...


주말이어서 제법 많은 이들이 둘레길에 있었지만 족두리봉으로 넘어가는 이쪽 등산로에는 그렇게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 그래도 환갑이 훨씬 넘은 어르신들이 성큼성큼 걷는 모습을 보면 내 체력이 영 부실하다는 느낌은 족두리봉을 오르는 내내 지울 수가 없었다. 하루종일 앉아서 씨름해야 하는 직장생활 속에서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산은 꾸준히 와야지 싶다.


이렇게 사진을 찍으니 제법 험해보이는데 실제로도 이렇다. 가끔은 네발(?)로 돌에 붙어서 올라가기도 해야 한다. 등산화가 미끄러지면 참 낭패인 구간이 곳곳에 있으니 이쪽으로 족두리봉을 오르시려는 분들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 물론 신발 종류에 관계없이 잘 오르는 분들은 잘 오른다. 나처럼 기술보다는 장비에 의존해야 하는 초보등산객은 바위에 잘 붙는 신발은 좀 더 유리하다는 말이다.


족두리봉은 불광역에서 접근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올라가면 서울의 한 구석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저 아래 수 많은 아파트들과 건물들 안에서 수 많은 인생들의 희로애락이 펼쳐지고 있겠지만 이렇게 산에 올라 바라보면 그깟 인생이 참 뭐가 대단한가 싶다. 결국은 다시 저곳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잠시 떠나있는 지금만큼은 도시 이야기는 완전히 잊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저 방향으로 오르는 것이 아니어서 조금은 다행이지만 이쪽도 만만치는 않다. 그래도 조금은 벅찬 길로 산을 오르는 느낌은 꽤나 즐겁다. 위험요소에 대한 준비만 잘 한다면 천천히 오르면 아주 어렵지는 않으니 너무 겁내지는 않아도 된다. 다만 계절이 서서히 겨울에 가까워지는 요즘이기 때문에 체온 유지를 위한 겉옷과 비상식량 등은 이전보다는 좀 더 신경을 쓰는 것이 좋겠다.


한참 앉아서 쉬던 곳인데 고소공포증이라도 있다면 제법 무서울만한 장소다. 금방이라도 미끄러질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면 꽤 긴장했을 것같다. 겨울에 눈이라도 쌓이면 바닥 보기도 힘들텐데..라는 생각에 한동안 앉아 이곳저곳의 지형들을 살폈다. 멀리 바라보니 이제까지 올라온 길이 보인다. 능선길을 따라 이렇게 올라왔구나라는 생각 그리고 사람들이 참 길을 잘도 만드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리면 어김없이 바위와 바위로 이어진 길이 등장한다. 이쪽 코스에 대한 사전 정보라고는 가파른 곳이라는 게 전부였던지라 오늘은 참 바위를 질리게도 오르는구나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가을이 서서히 저물어가는 북한산은 어렴풋하게 남아있는 여름의 흔적과 조금씩 다가오는 겨울의 징조가 어울릴듯 어울리지 않을듯 묘하게 얽히곤 했다.


오르막이 멈추고 난 후 나타난 능선길은 이번 산행의 절반이 끝나가는구나라는 조금은 안도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늦가을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한낮의 햇살은 여전히 따가워 그늘만 보이면 조금이라도 그 그늘에 의지해 쉬곤 했다. 산행은 마음 맞는 이와 같이 가는 것이 제일 좋고 그렇지 않다면 혼자서 가는 편이 낫다. 개인별로 체력이 다르고 산행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이다.


정상인 족두리봉에 다다를 수 있었다. 해발 370미터면 사실 오르기 크게 어렵지 않은 동네 뒷산(?) 정도일 수도 있는 높이지만 초보등산객의 입장에서는 참 높고 멀기만 한 등산이 아니었나 싶다. 나름 천천히 오른다고 시작한 등산이지만 실제 걸린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내 기준에서 천천히지 다른 사람이 보기엔 빠를 수도 있지 않나 싶기도 했다.


족두리봉 정상에는 그다지 경치와 어울리지 않는 송신기 비슷한 것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일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달갑지 않은 이물질일뿐이다. 아무튼 이렇게 인연이라면 인연인 족두리봉과의 만남은 일단 끝이 났다. 그동안 내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내게 무엇을 전하고 싶었는지 바로는 알 수 없었지만 언젠가 그 의미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저 아래 아주 조그맣게 보이는 집이 무엇일까 궁금했지만 굳이 알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저렇게 어우러진 모습 자체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이번 사진들은 이전 사진들과는 아마 색감이 다르게 느껴지지 싶은데 라이트룸에서 VSCO 필터를 적용한 덕분이다. 어떤 필터가 적용된 것인지 짐작이 가는 분이 있을까? 100VS라는 이름이 낯익다면 아마도 스크롤을 다시 위로 올라 한참 사진을 보지 않을까? 나 역시 필터를 적용시키고 나서 한참을 화면을 바라봤는데 아주 오래 전.. 이제는 추억의 이름이 된 Kodak 100VS를 이렇게 어설프게나마 다시 만날 수 있어서 무척이나 반가웠다.


Panasonic LX-7, Lightroom + VSCO Kodak 100V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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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날 등산을 생각해본 적은 별로 없다. 물론 비를 맞으며 걷는다는 것이 꽤 즐거운 일이긴 하지만 도시 생활이란 애초에 걱정할 것들이 워낙에 많은지라 비가 오면 우산을 쓰거나 가만히 실내 활동을 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것이 요즘의 모습이다.


비오는 날 얕은 산이라도 걸어보는 것이 우중산책 기분이 나지 않겠냐는 그녀의 말에 그렇게 묻어 두었던 빗속을 걷는 느낌에 대한 향수랄까.. 멀리 가는 대신 집 근처에 있는 그래도 제법 산 느낌이 나는 곳으로 가 보기로 했다. 집을 나설 무렵 조금씩 내리기 시작하던 비는 산 초입에 들어설 무렵에는 제법 장대비가 되어 있었지만 마음만은 상쾌했다.


그러고보니 빗속에서 카메라를 꺼내어 든 게 얼마만일까. 나름 사진에 대해 애착을 가지고 있음에도 이런저런 핑계로 먼지만 쌓여가는 카메라에게 새삼 미안한 마음도 든다. 산은 언제나 거기에 있으니 내 마음만 있다면 오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 마음이 선뜻 동하지 않아 마냥 먼 곳으로만 느껴지는 것이 또한 산이라는 존재였는데.. 굳이 먼 길을 나서지 않더라도 가까운 동네산이라도 자주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삶이란 워낙에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것이고 그 진리를 작년과 올해에 걸쳐 절절하게 느끼고 있는 입장이다 보니 하루하루 주어진 삶의 시간들이 소중하고 그 시간 안에서 벌어지는 일상이 소중하다. 삶의 무게추가 바닥까지 내려갔다고 절망해서도 안 되고 구름 위까지 떠 올라있다 해서 기뻐할 일만도 아닌 것이다. 물론 나 역시 사소한 일에 감정이 들쑥날쑥 하루에도 천국과 지옥을 오르내리곤 하지만 예전에 비하면 비교할 수도 없을만큼 나아졌고 그것을 나 스스로 느끼고 있으니 다행이랄까..


삶의 길이 언제나 곧은 길만은 아니기에 그 길에서 만나게 되는 작은 풀 하나라도 소중한 나의 인연으로 생각하는 겸손한 자세를 언제나 간직해야 겠다고 생각해본다. 이렇게 산은 내게 끊임없이 나 자신을 돌아볼 이야기들을 건넨다. 초여름에서 본격적인 여름으로 넘어가는 6월이 어느 날. 쏟아지는 빗속에서 산은 나에게 오늘도 열심히 살고 있냐며 손을 내민다. 


Panasonic LX-7



한창 북한산둘레길을 걷고 있을 때 두 번정도 산의 유혹을 받은 적이 있었다. 한 번은 북한산이고 또 한 번은 사패산이다. 둘중 사패산을 먼저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지난 겨울 둘레길을 걸을 때 먼 발치에서 바라본 사패산의 느낌이 참 좋았기 때문이다. 사패산을 가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고 정상에 오르는 길도 몇 가지나 된다. 등산 초보인 내 입장에서는 그래도 수월한 길이 어디일까 찾아보다가 의정부 회룡역에서 출발하는 코스로 정하고 집을 나섰다.

사패산이라는 이름은 조선 선조 당시 6째 딸인 정휘옹주가 시집을 갈 때 하사한 산이라 하여 賜牌山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원래 이 지역에서 부르는 이름은 갓바위산, 삿갓산이었다고 한다. 북한산도 삼각산이라는 순 우리말 이름이 있는 것처럼 사패산도 이전의 이름을 찾아 부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지하철 1호선 회룡역에서 내려 15분 정도 걸으면 '회룡사'로 길을 안내하는 표지판을 만날 수 있고 그 길을 따라 걸어들어가면 된다. 길을 조금 걷다보니 익숙한 표지판이 보인다. 1년여에 걸쳐 걸었던 북한산둘레길. 한 해를 정신적으로 버티게 해 준 힘이 되었던 그 길을 다시 만나게 되니 감회가 새로웠다. 둘레길은 틈나는 대로 다시 걸어보고 싶은 마음이다.


사진이 작아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클릭하면 약간 커진다) 오늘 가게될 길은 회룡사를 지나 회룡사거리, 범골삼거리를 지나 사패산 정상에 이르는 코스다. 전체적으로 난이도가 높은 산은 아니지만 산에 오를 때는 늘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특히나 홀로 걷는 산행이라면 더더욱 한발한발 조심스럽게 내딛을 필요가 있다. 물론 빠르게 속전속결식으로 산에 오르는 분들도 있지만 나는 그저 거북이 스타일이다.


회룡탐방지원센터인데 이른 시간이어서 그런지 아직 영업개시(?) 전이다. 이곳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북한산국립공원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몇 장 안 되지만 여기까지는 아이폰으로 사진을 찍었는데 작은 화면으로 볼 때는 그래도 괜찮아보이더니 모니터로 옮겨오니 '영 아니올시다'라는 느낌이다. 뭔가 인화된 사진을 물에 담가둔 느낌같기도 하고... 아이폰으로도 사진을 잘 찍는 분들도 있던데.. 내 둔한 감각을 탓해본다.


어디 가서 길치라는 소리는 듣지 않는 편인데 산에만 오면 어디가 어딘지 아니 어느 봉우리가 무슨 산이고 지금 내가 있는 위치가 산의 어디쯤인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는다. 산행 경험이 적어서 그런가 싶기도 한데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것 중의 하나다. 아무튼 저기 뒤쪽으로 보이는 머리가 벗겨진 봉우리가 사패산 정상인가라고 추측만 해본다.


전에 만난 적이 있는 북한산둘레길 중 하나인 보루길이다. 보루길로 올라가면 사패산 보루들을 만날 수 있다.(이전 글 참조) 그렇다는 것은 보루길을 통해서도 사패산에 오를 수 있다는 셈인데 이전 글을 뒤적여보니 포대능선으로 향하는 표지판이 있는 것으로 보아 능선따라 죽 이어진 모양이다. 사실 사패산도 북한산 자락이니 어디로든 길은 이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길을 조금 더 가면 만날 수 있는 '사패공방'. 주인장은 안 계신지 조용했고 벽 쯤에 붙어 있는 문구가 참 마음에 들었다. 그러고보니 누군가를 기다려본 지도 제법 오래됐다. 기다림은 만남을 전제로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던가. 그래도 역시 누군가 만날 사람을 기다리는 일이 조금 더 행복하다. 머지 않아 나 역시 '당신을 기다리고 있으면 마음이 설레인다'라는 말을 건넬 수 있기를 바라며 걸음을 옮긴다.


이곳이 회룡골계곡인지 정확하지는 않다. 지도앱이라도 켜서 확인을 했어야 하나 싶기도 했지만 이내 마음을 접었다. 산행은 그저 산과 내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거기에 다른 요소들을 끼워넣는게 내키지 않아서였다. 산을 걷는 것은 그 자체로 아날로그인데 굳이 거기에 인간 세계의 날카로움을 덧입힐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러면서도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것은 변명의 여지는 없지만...


사패산 등산코스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안내도다. 내가 가는 길은 가운데에 있는 회룡사를 지나 위로 올라가 사패능선에서 우회전하는 코스다. 등산 정보를 찾아보니 4코스라고 한다. 사패능선 그러니까 회룡사거리에서 좌회전으로 하게 되면 포대능선을 지나 도봉산 자운봉으로 갈 수 있다. 언젠가 산행이 조금 더 익숙해지면 가 볼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하고 오늘은 사패산만 바라보고 올라가보자.


조금 더 올라가면 회룡사를 만날 수 있다. 부처님오신날이 막 지난 터라 아직 연등이 곳곳에 매달려 있다. 큰 행사가 끝나서인지 인적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혼자 돌아다니자니 어쩐지 어색해져서 사진만 살짝 찍고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보니 산에 있는 절에서는 점심 때 절밥을 준다는데 아직 먹어본 적은 없다. 하산할 때 이쪽으로 다시 돌아오면 혹시 가능하지 않을까..라고 이때까지는 생각을 했었다.


이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왼쪽으로 보이는 좁은 길이 등산로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산 정상만 목표로 하고 길을 나서본 적은 그리 많지 않다. 태백산, 인왕산, 청계산 정도가 아닐까? 물론 객기로 올랐었던 설악 대청봉도 있었지만 그건 도무지 산행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어서..(이전에 올린 글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아무튼 산행은 둘레길 걷기보다는 준비할 것들이 많다. 오늘은 스틱을 두고 왔는데 하산길에 생각하면 가져오는 것이 나았다.


산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돌탑(?)이다. 산을 오르는 이들의 작은 소원들을 모아놓은 돌무더기. 크고 높은 것들도 많지만 이렇게 앙증맞게 있는 것이 오히려 사람 냄새가 나서 좋다. 돌 하나를 주워 올려볼까 하다가 이내 그만 두었다. 누군가 올려 놓은 돌 위에 내 소원까지 올리면 소원을 이루어주는 분(?)에게 부담이 될까 싶어서다. 그냥 저 돌을 올린 분들의 소원만 이루어져도 충분하다.


산을 조금이라도 다녀온 분들은 아시겠지만 산에서 만나는 이정표의 거리는 진짜 별 의미가 없다. 단순히 사패능선까지 800미터다라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단 등산길은 꾸준한 오르막이고 사패산의 경우는 일직선에 가깝지만 어느 산들은 구불구불한 길들이 제법 많기도 하기 때문이다. 저 거리만 생각해서 등산이나 하산 혹은 휴식 계획을 세우면 낭패를 보기 쉬우니 페이스 조절을 잘 하도록 해야 한다. 나는 저런 표지판이 보이면 대충 곱하기 2를 해버린다. 사패능선까지 1.6km 남았다고 보고 간다는 말이다.


갈림길에서 내가 길을 잘못 든 지점이다. 양쪽 길 모두가 등산로처럼 되어 있어서 어느 길을 가야 하나 고민하다가 이쪽 길로 접어들었는데 이길의 끝은 막다른 곳이다. 그럼에도 들머리는 제법 운치가 있었다. 표지판이 하나 있으면 어땠을까 싶지만 결과적으로는 없는 것이 나았다. 왜냐하면 이길의 끝에서 만나는 곳이 꽤나 멋진 곳이었기 때문이다.


골짜기 사이로 물이 흘러나오는 약수터 비슷한 것이 있었다. 약수터라고 하기에는 물이 고여있지 않으니 아닌 것 같지만 바가지가 있는 것으로 봐서는 물을 먹으라는 소리니 약수터가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물은 제법 시원하다. 요즘에는 산에 흐르는 물도 안심하고 마시기 어렵다지만 산행 중간에 만나는 물마저 외면해야 한다면 너무 인간미가 없는 것은 아닐까. 다만 바가지에 봄벌레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파이프를 들어 올려 한 모금 산의 느낌을 맛본다.


내가 좋아하는 산은 겨울산이지만 봄의 산도 그 나름의 매력이 있다. 지난 겨울의 못 다 지워진 흔적들과 다가오는 여름을 미리 알리는 징조들이 섞인 느낌인데 이도저도 아닐 수도 있지만 그 또한 봄의 산이 주는 매력이다. 요즘은 봄이 워낙 짧아 봄의 산을 느끼려면 4월말에서 5월초 정도가 적당하다. 그전은 겨울의 느낌이 강하고 그 후는 여름의 느낌이 강한 까닭이다. 사실 엄밀히 따지만 오늘도 입하가 지났으니 이미 여름인 셈이지만...


이쪽 계곡에는 물이 전혀 흐르지 않는다. 아마도 여름이 오고 비가 내리면 이 계곡에도 물이 흐를 것 같은데 다른 계절을 겪어보질 않아서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겠다. 여름에 다시 한 번 와야 하나하는 생각이 들었던 순간이다. 사패산은 북한산국립공원 안에서도 가장 자연림이 보존이 잘 되어 있다고 한다. 확실히 나무들이 어느 곳보다 울창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는데 곳곳에 짙에 깔린 이끼들을 보면 이 산이 얼마나 깨끗한지 알 수 있다.


산에 오를 때는 가능하면 작은 것들을 좀 더 많이 보려고 노력한다. 정상에 오르는 것은 그런 걸음의 결과일 뿐이지 끝까지 오르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무작정 정상에만 오를 생각으로 급하게 산을 오르다보면 그 중간에 있는 수많은 이야깃거리들을 그냥 지나쳐버리게 된다. 산이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정상에만 있지 않다. 그 많은 것들을 버리고 끝에 있는 하나의 이야기만 들으려하는 것은 인간의 오만함은 아닐까?


경사가 급해지는 것을 보니 사패능선에 거의 다 와가는 모양이다. 둘레길을 걸을 때도 그랬지만 역시나 별 다른 식량(?)준비를 해가지 않는 탓에 여기쯤 오니 제법 숨이 차다. 준비를 잘 해야 한다고 이야기는 잘 하면서 정작 나는 제대로 준비를 안 한 셈이다. 혼자 하는 산행이다보니 이것저것 챙기는 것이 번거롭다고 스스로 변명도 해보지만 그대로 짊어지고 돌아가게 되더라도 최소한의 먹거리는 챙겨와야 한다.


사패능선 그러니까 회룡사거리인데 이곳에서 만나는 표지판은 자운봉과 사패산이 정반대의 거리에 있음을 알려준다. 거리가 만만해보이지만 위에서 적은 것처럼 저 숫자에 곱하기 2를 해보면 어느 곳도 만만하지가 않다. 표지판을 가만히 보니 자운봉은 '봉'이고 사패산은 '산'이다. 이건 산의 규모에서 오는 차이인데 사패산은 여러 봉우리들이 없는 반면에 도봉산은 자운봉, 만장봉, 선인봉 등 여러 봉우리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도봉산의 주봉은 자운봉이다.


능선길은 거의 평지도 되어 있어 걷기가 어렵지 않다. 다만 가림막이 없다보니 바람을 있는 그대로 맞기 때문에 제법 쌀쌀한 느낌이다. 아마 겨울에 이곳에 왔다면 이쯤에서 바람막이 정도는 입어야 체온유지가 되지 싶다. 물론 여름에도 올라오는 동안 땀이 많이 흘렀기 때문에 능선에 오르면 순간적으로 춥게 느껴질 수 있으니 바람막이는 사시사철 배낭 안 구석에 넣고 다니는 것이 좋다.


사패산은 흔히 말하는 꼴딱고개는 없다고 봐도 좋을 것 같지만 사패능선에 도착하기 바로 직전 그리고 이 계단과 이어 등장하는 바위들에서는 체력을 적절하게 조절하는 것이 좋다. 이 계단은 갯수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촘촘하게 이어져 있기 때문에 두 칸씩 성큼성큼 올라가기 보다는 한칸씩 천천히 올라가는 것이 좋다.


그리고 정상 부근의 바위인데 여기는 경사에 비해 어렵지는 않지만 일방통행 코스로 되어 있기 때문에 오고 가는 사람들이 있다면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오늘 신고간 신발은 바위적응형 등산화는 아니어서 약간 미끄러웠는데 바위 위에 흙 등이 있는 경우는 특히 조심하자. 바위에 척척 달라붙는 등산화가 아니라면(물론 붙어도 마찬가지지만) 무리는 금물인 지점이다.


정상에 오르면 평평한 모습의 작은 운동장 같은 느낌이 드는데 계절마다 그리고 날마다 다르겠지만 오늘은 바람이 제법 강하게 불었다. 정상의 경우는 바람을 온몸으로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특히 조심할 필요가 있는데 사패산 정상은 그냥 통바위들이 듬성듬성 연결된 형태이고 조금 내려가면 경치가 더 잘보이기 때문에 별 생각없이 아래 쪽 바위로 향하게 되는데 바위 끝이 아무 것도 없이 바로 절벽으로 이어지므로 조심하도록 하자.


바위 끝 쯤에서 내려다보면 이런 모습이다. 조금 더 자세히 보겠다고 앞으로 내려가지 않도록 하자. 사실 조금 더 간다고 해서 뭐가 더 잘 보이는 것도 아니다. 정상에서 장비를 다시 점검하고 하산을 준비한다. 원래는 올라온 길로 내려갈 생각이었는데 이전 둘레길의 기억이 떠올라 다른 방향으로 진로를 잡아본다. 하산길은 거의 사진이 없는데 내려갈 준비를 하면서 카메라를 배낭에 넣어버렸기 때문이다. 이건 내 습관이라면 습관인데 등산보다 하산길이 좀 더 위험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산의 방향은 원각사 쪽으로 정했다. 이곳으로 내려가면 상당히 빠른 시간에 하산이 가능한데 문제는 교통편이 별로 좋지 않다는 점이 하나고 길이 약간 험하다는 게 또 하나의 문제다. 보통 폭포가 있는 루트는 길이 험하다고 하는데 예전에 북한산에서 한 번 제대로 고생을 해본지라 고민을 조금 하긴 했지만 일단 내려가보기로 한다. 여기서부터는 다시 아이폰으로 촬영.


세월이 계단을 만들었다. 이 나무는 얼마나 많은 이들의 걸음을 지탱하며 살아왔을까 한참 바라본다. 그리고 그 걸음에도 이 나무는 여전히 이곳에 버티고 서 있다. 이 길을 지나려면 이 나무를 밟지 않으면 안 되고 그 고통 속에서 나무는 점점 더 단단해졌으리라. 사람도 역경을 이겨내면 강하진다고 말을 하는데 요즘은 그말이 그렇게 신뢰가 가지는 않는다. 역경 안에서 오히려 가라앉는 모습을 더 많이 봐서일까.. 결국 모든 것은 사람 나름이다.


원각사 길을 선택한 이유는 바로 이곳에 있다. 내가 사패산에 올라야겠다고 생각을 하게 된 곳. 산너미길로 오는 길에 먼발치에서 바라본 사패산이 그리도 정겨워 보여서 이길을 걷던 날 사패산에 오르겠다고 약속을 했었다. 그리고 1년 하고도 몇 개월이 지나 나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곳에서 사패산의 정상을 다시 바라봤다. 지난 겨울의 약속을 이제야 지켰다고 산에게 이야기 해 주었다.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시간이 지나 나를 둘러싼 많은 것들이 변했어도 여전히 산은 그 자리에 서서 내가 다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기다림이란 만남을 전제로 할 때 그 의미가 더 큰 것 같다. 그리고 산은 내가 그 초입에서 산을 바라볼 때 그 모습 그대로 내가 그를 떠나는 순간에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Nikon D700, AF 35mm f/2.0D & iPhone 5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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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522미터인 사패산은 '강북5산'이라 불리는 '불수사도북' 그러니까 불암산, 수락산, 사패산, 도봉산, 북한산의 하나로 난이도는 그리 어렵지 않은 편에 속한다고 한다. 이 부분을 인용한 것은 다른 산을 올라본 적이 없어서 내 판단기준이 없기 때문인데.. 나중에 내 기준에서 느낌은 다시 적어보겠다. 아무튼 오늘 오른 코스는 지하철 1호선 회룡역에서 출발해 회룡사를 거쳐 사패능선을 통해 정상에 오른 다음 원각사 방향으로 하산해 송추에서 버스를 타고 구파발역으로 돌아오는 코스다. 


대략 전체 이동 경로는 위 사진과 같은데 평소 걸음은 빠른 편이지만 산행은 최대한 느릿느릿 가는 편이라 전체 소요시간은 3시간 20분, 이동거리는 8.2km였다. 하산 후 교통편은 하산한 지점에서 바로 건널목을 건넌 다음 34번이나 360번을 타면 구파발역으로 갈 수 있으니 그곳에서 지하철을 이용하면 된다.



새벽 4시 50분, 세상이 깨어나기에는 약간 이른 시간 집을 나선다. 왜 태백에 가려고 했는지 뚜렷한 이유는 없었다. 비우고 싶다는 생각이 우선이었고 차가운 바람을 좀 맞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달까. 


시외버스를 타고 태백시외버스터미널에 내려 유일사행 버스로 갈아탄다. 예전에 올랐던 코스와 반대로 걷는다. 1년 전에 이곳을 지나며 남겼던 발자국과 기억들을 홀로 걸으며 하나 둘 떠올려 보고 또 그렇게 지워나간다. 조금은 가라앉은 기분으로 산행을 하게 된 것이 조금 아쉽긴 했지만 언젠가는 거쳐야할 일이라고 생각을 하고 천천히 발길을 옮겨본다. 유일사 입구는 어느 산악회인지 단체로 와서 줄을 서서 올라가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바위 위에 나무가 자란다. 생명력이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살아있다는 것에 새삼 감사하게 된다. 비록 유한한 삶이지만 그 살아가는 동안에 적어도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가족이 있다면 그 가족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스스로의 삶을 온전하게 지켜가는 일이다. 자신을 우선 지키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유일사에서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제법 가파른 오르막의 연속이고 사방이 막혀있어서 경치를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어느 정도 올라가면 서서히 주변이 밝아지며 산의 웅장함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순간이 온다. 그래서 한 걸음 한 걸음이 소중하다. 앞으로 걷지 않으면 아무 것도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주목 군락지에 다다랐지만 아쉽게도 눈꽃은 피지 않았다. 내심 지난 날에 눈이 내려 눈꽃을 기대했지만 고고하게 서 있는 나무들은 가지 위에 눈이 쌓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슬슬 칼바람이 불어 온다. 머릿속이 하얗게 될 정도로 차고 강한 바람. 그 바람에 그냥 기대본다. 발 아래로는 어디가 끝인지 모를 긴 산자락이 펼쳐져 있다. 


역시 태백산은 설경이 제맛이다. 눈이 이렇게 아름답다는 것에 그저 감탄할 따름이다. 새벽같이 일어나 집을 나온 피로도 이곳에 이르면 느껴지지 않는다. 올라오는 동안 숨을 헐떡이며 내뱉었던 땀방울들도 찬바람에 날아가 버리고 이곳 민족의 영산이라 불리는 태백산 정상에서는 그저 바람 소리만 거세게 들려올뿐이었다. 


좁고 급경사인 길을 올라오니 이런 넓은 공간이 있다는 게 참 신기할 정도. 여기서부터는 거의 평지로 이동하게 된다. 날이 제법 맑아서 눈에 반사되는 햇살이 강하다. 손을 내밀어 만져본 눈은 도시의 그것보다 훨씬 차갑고 투명한 느낌이 든다. 분명 같은 눈인데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이렇게 다르다. 이곳의 눈은 그냥 집어 입에 넣어도 괜찮을 것같다.


아마 눈이 없었다면 나무들이 을씨년스러운 느낌을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견딘다는 주목. 내가 보고 있는 이 나무들은 어느 천년의 흔적들일까 한참 바라본다. 천 년이라는 세월동안 나무들은 얼마나 많은 바람을 맞고 또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았을까. 그 세월동안 나무들은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모두 견뎌온 것이다. 인고의 세월. 태백의 주목이 살아온 시간은 그런 것은 아닐까.


그래서인지 나무들이 내밀고 있는 가지의 방향이며 모양은 우리의 상상을 넘어선다. 애초에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의 단위를 넘어선 것이고 나무들에게 내가 지금 바라보는 이 순간은 정말 찰라도 아닌 짧은 순간일테니 지금 내 눈으로 보는 나무의 모습은 그저 오묘하고 신기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저 나무들은 이곳에 서서 세월의 바람을 견디어 나갈테지..


여기쯤 오면 사람들의 흔적이 제법 줄어든다. 올라갈 때 그렇게 북적이던 사람들이 얼마 남지 않은 천제단으로 서둘러 이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풍경을 놓치고 빨리 정상에 오른다한들 아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 산행을 하다보면 무조건 빨리빨리 정상에만 이르는 것에 집중하는 이들을 보게 되는데 그 사람의 취향이니 뭐라 할 것은 아니지만 빨리 오르면 빨리 내려가야 하는 법이다. 힘들여 멀리까지 와서 눈만 돌리면 볼 수 있는 장관을 그냥 지나쳐버리는 것은 조금 안타깝다.


그리고 도착한 천제단 중의 하나인 장군단이다. 이 제단은 보존 상태가 조금 열악하고 규모도 작아 사람들이 몰리는 곳은 아닌데 내게는 태백산의 기억의 정점에 이른 곳이기도 하다. 한참을 이곳에 머문다. 


이 표지석은 기존에는 없던 것인데 작년 9월에 이곳에 새로 세워진 것이다. 1년만에 다시 찾은 태백의 정상에서 마주치게 된 유일하게 달라진 풍경은 이 표지석이었다. 백두대간의 중추이며 민족의 영산이라 불리는 태백산은 우리나라의 12개의 명산 중의 하나로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는 의미가 큰 산이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 태백의 정기를 받는다는 표현을 많이들 쓰는데 오늘 산행에서 정기를 받았을지 아니면 정기를 산에 나누어 주었을지는 감이 오지 않았다.


멀리 보이는 천왕단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태백산 사진에 자주 등장하는 모습인데 정상에 눈꽃이 피지 않아 극적인 느낌은 적었지만 나름 사람들이 걸어가는 모습이 멋드러져 보인다. 산이란 하루에도 수십 번 날씨가 변화하는지라 어느 방향에서 하늘을 바라보면 푸른물이 떨어질 정도로 새파랗지만 어느 방향에서 바라보면 당장이라도 뭔가 내릴 것처럼 어둡기도 하다. 내심 눈이라도 내리길 바랐지만...


어지간해서 이 표지석을 제대로 찍기란 불가능하다. 평일인데도 사람들이 제법 많았고 이 표지석 앞에는 늘 사진을 남기려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기 때문에 이리저리 카메라를 돌려 최대한 사람이 안 보이는 시점에 찍어야 하는게 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은 편이 아닌가 싶은데...표지석 위에는 사람들이 뭔가를 남기고 간 흔적이 조금은 흉물스럽게 남아있다. 자기들이야 떠나면 그뿐이지만 앞으로 수 천년의 세월을 이곳을 지켜야할 돌 입장에서는 반가운 일은 아니지 싶다.


여기서 한 번 고민을 한다. 문수봉까지 갈 것이냐 말 것이냐인데 오늘의 이동이 상당히 치밀한 동선을 따라 움직이는 지라 아직 가 보지 않은 문수봉을 거칠 경우 차 시간이 어찌될지 몰라 일단 오늘은 생각을 접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내려가보니 차 시간까지 20여 분 정도 여유가 있었는데 다음에 올라온다면 문수봉을 거치는 코스로 이동해볼 생각이다. 아마도 내년 겨울이 되어야겠지만...


당골로 하산하는 코스에서 단종비각을 마주칠 수 있다. 역사의 지난 끈들. 당사자들은 이미 없고 기억의 흔적조차 사라진 지금이지만 세월 속에 당시의 장면들은 이렇게 남아 오가는 이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우리네 삶 역시 언젠가 그 끝에 이르러 우리와 우리를 기억하는 이들조차 사라지겠지만 우리가 남겨 놓은 흔적들은 조각조각일지라도 여전히 남아 누군가 우리를 기억하게 해 줄 끈으로 남아있을 것을 생각하면 뭔가 마음이 애잔해지는 느낌도 든다.


용정의 물은 예나 지금이나 마셔볼 기회가 없다. 이곳을 찾을 때면 언제나 얼어있기 때문인데 용정의 물을 한 모금 마시기 위해서라도 눈이 내리지 않는 계절에 이곳을 다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라도 이유를 하나 만들어두면 된다. 그 이유가 비록 나에게만 해당되는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것만으로도 내몸을 움직여 다시 태백을 찾기에 충분할 테니 말이다.


그리고 휴게소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 먹는 사발면 한 그릇. 늘 그렇듯이 나는 산행을 할 때 무엇을 먹지 않는 나쁜 버릇이 있다. 물 한 통이나 이온 음료 한 통이 전부인데 습관치고는 몸을 꾸준히 움직여야 하는 산행에서는 좋지 않은 것이다. 아마도 예전에 운전을 할 때의 습관이 산행에 그대로 옮겨온 모양이다. 하지만 오늘은 어느 층계참에 앉아 멀리 산을 보며 라면을 먹는다. 다 내주었으니 이제 채우고 가야 한다는 생각이었을까. 뭔가 짠한 마음이 들어 라면을 먹는지 다른 무엇을 먹는지 모르고 먹는다. 하얀 수증기가 안경을 온통 뿌옇게 만든다.


하산길은 조금은 지루한 내리막의 연속이다. 이 사진에는 나도 나와있다. 이렇게 어느 겨울 날의 태백산에 내 그림자를 찍어 두었다. 해가 뜨면 이 길가에 내 그림자는 깨어나고 해가 지면 깊은 잠에 빠져들며 앞으로 남아 있는 시간들을 기억하겠지. 그리고 돌아서서 내려오는 길에 내 마음의 한 조각을 떼어 그림자의 주머니에 넣어 준다. 잘 간직하고 있으라고 말하면서...


"아직 만나지 못한 내 그리움을 찾으러" 나뭇가지에 묶여 있는 작은 천조각에 쓰인 글을 보고 또 본다. 오늘 내가 태백에 온 것은 이것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산행에서는 그 산행을 나 스스로에게 납득시킬 수 있는 이유가 불현듯 찾아지기도 한다. 기억을 지우려..라는 조금 엇갈린 이유로 집을 나섰지만 결국 내가 이곳을 찾은 것은 아직 만나지 못한 내 그리움때문이었다. 그 그리움의 대상이 무엇인지 혹은 누구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지만 그저 저 글귀를 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것이면 됐다.


그리고 다시 도시로 내려왔다. 짧고도 또 짧은 하루였다. 이른 새벽에 집을 나서 자정이 가까울 무렵 다시 집에 들어갔음에도 오늘 하루는 내게 너무나 짧았다. 


오늘 글은 산행기라 하기보다는 하루의 일기같은 느낌이다. 

하루의 일기라 하기보다는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는 해묵은 일기장같은 느낌이다.

해묵은 일기장이라 하기보다는 아직 만나지 못한 그리움을 찾아 떠나야 할 도착하지 않은 기차 시간표 같은 느낌이다.


Nikon D700, AF Nikkor 35mm f2D, Panasonic LX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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