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이준구 교수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물론 강단의 선생님을 뵌 것이 아닌 책으로 만나게 된 것이지만 평소의 이 교수의 스타일이 그대로 녹아있는 책이어서 무척이나 반가웠다.

이 교수는 이 책의 제목을 "쿠오바디스 한국 경제"라고 붙여 두었다. 왜 쿠오바디스라는 말을 넣었을까는 저자의 머리말만 읽어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정도로는 경고의 의미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부제가 "이념이 아닌 합리성의 경제를 향하여"다. 조중동이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쓴다면 제법 재미있게 나올 문구가 아닌가 싶다. 이 교수가 일부러 이런 문구를 선택한 것도 한 판 붙어보자는 의욕에서가 아닐까 싶다.

이준구 교수는 재정학의 전문가이고 미시경제를 오래 공부한 학자다. 덕분에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본인은 그렇게 보수적이지는 않다고 반론을 펼치기도 했지만 아무튼 이준구 교수는 이번 정권에 들어서 소위 '좌빨'인사가 됐다. 학생들에게 보수적인 교수라는 타이틀을 받던 입장에서 갑자기 좌익의 선구자가 되어 버린 이 교수 본인도 상당히 당황스러웠을 것 같다.

이 책에는 이 교수가 왜 좌빨이 되었는지 그 과정을 객관적인 사실과 주관적인 감정으로 적어 내려가고 있다. 단초가 된 대운하 사업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분들이 이 교수의 글을 읽어보셨겠지만 상당히(?) 과격해 보인다. 이념지향적인 정권이 펄펄 뛰는 것은 당연하고 조중동이 들썩일 만도 한 글이다. 하지만 이 교수는 그런 분위기 자체가 만들어진 것이라고 단정 짓고 있다. 전체적인 분위기 자체가 워낙에 보수적이다보니 조금만 그 범주에서 벗어나도 금세 빨간색으로 보인다는 말이다. 순수한 비판조차 쉽지 않은 이번 정부의 색깔에 대한 시각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하다.

이 교수가 책 처음에 적고 있는 부분 특히 "신문을 펴들고 그 안을 들여다볼 필요도 없다. 어느 신문인지만 알면 내용도 짐작할 수 있다. 다른 언론사의 칼럼이라도 이름만 가리면 누가 썼는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똑같다"는 문장은 대체 내가 지금 21세기를 살고 있는 것인지 중세 봉건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인지 생각하게 할 정도로 우울한 대목이다.

이 책의 뛰어난 장점은 각 장의 머리에 "독자에게 드리는 글"이 들어있다는 점이다. 학자로서 이 교수는 상당히 대중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잘 하는 교수 중의 한 분이다. 그런 성향이 그대로 반영된 이 글에는 각 장의 글들을 어떤 의도에서 쓰게 되었는지 당시의 상황과 본인의 심정을 적고 있다. 독자 입장에서는 마치 강의실에서 직접 교수와 대면하는 듯한 인상을 받을 수 있어서 좋고 저자 입장에서도 곡해의 우려가 있는 부분을 미리 독자들에게 주지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편집의 묘미가 두드러진다.

상당히 최근에 나온 책이고 바로 우리의 현실이 직접적으로 묘사되고 있어 시간이 지나면 그 의미가 사라질 것 같지만 오히려 현실에 대한 사례의 적용이 상당히 구체적이고 논리적이라는 점에서 관련 과목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도 일종의 사례집으로 매우 유용할 것 같다.

조금 걱정되는 점이라면 집권 세력이나 기득권 세력이 보기에 이 책은 말 그대로 "반역문서. 선동문서"에 가깝다. 서울대학교 교수라는 국가의 녹을 먹었던 사람이 이럴 수 있나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교수가 굳이 이 책을 낸 것은 그의 서문의 제목 그대로 "마지못해 사회비평의 붓을 든 것"인데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만 선생께 피해가 가지 않았으면 싶다. 그리고 이런 것까지 생각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 많은 이들이 공감은 하지만 막상 시간을 내어 고전을 보기는 쉽지가 않다. 21세기 첨단 문명 시대에 논어나 맹자를 읽는 것이 한편에서 보면 꽤나 낭만적인(?) 일이기도 하지만 한편에서 보면 왠지 고루하고 진부해보이기 때문이다. 고전 속에 나오는 말들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면서도 막상 책을 펼치기가 쉽지 않은 것도 후자의 영향이 더 강하기 때문일 것 같다.

지하철에서 양복을 입고 단정한 자세로 논어를 읽고 있는 누군가를 발견했을때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야 이런 시대에도 고전을 탐독하다니"라며 존경의 눈빛을 보낼 것인가 아니면 "왠 논어?"라며 가볍게 무시해줄 것인가?

특히 젊은 세대라면 고전을 접하기는 더욱 어렵고 손도 가지 않는다. 시아에서 출간한 "지혜의 숲에서 고전을 만나다"는 바쁜 현대인들을 위한 일종의 고전 다이제스트 북이다. 재밌는 것은 이책의 저자는 3-40대의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 적어도 이 세대라면 학창시절 암기용으로라도 고전의 이름 몇 개는 아직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일단 책은 상당히 딱딱하다. 나름대로 고전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 입장이지만 역시나 한문과 고전 특유의 문체는 말랑말랑한 문체에 길들여진 요즘의 나로서는 술술 읽어내려가기가 어렵다.
하지만 한편 생각해보면 고전이라는 것이 술술 읽어내려가면서 머리에 쏙쏙 들어온다면 그것 또한 문제가 있다.

한 문장을 읽고 그것을 머릿속에서 되새기고 마지막에 가서는 실제 생활에서 그것을 실천에 옮길 때 고전의 진가가 드러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해가 간다. 애초에 독자타깃을 명확하게 해 두었으니 청소년들이 이 책을 읽느라 골머리를 썩힐 것은 전혀 고려치 않고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의 장점은 논어 한 권을 완벽하게 읽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요즘 세상에 논어를 통독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는 저자의 생각이 아닐까 싶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혹은 책 이름만 들어보았음직한 고전들에서 발췌한 내용들을 소개하고 있다. 저자도 어느 정도 요즘 세상과 타협을 한 부분이다.

그리고 각 장을 인간관계에 대한 지혜, 사람을 쓰는 지혜, 소박한 일상의 지혜, 상황을 대처하는 지혜, 인생을 위한 지혜, 세상을 현명하게 사는 지혜로 구분해 골라서 읽도록 유도한 점도 저자의 배려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정말 책 한 권 읽기도 어려울 정도로 바쁘다면 필요한 부분만 골라서 보면 된다.

다만 뭐랄까 고전의 특성을 생각하면 저자의 의도도 어느 정도 공감은 가지만 가볍다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다. 한 번에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고 한 부작용일까? 다이제스트의 장단점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책이라는 점은 독자들이 사전에 알아두어야할 부분이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건 고전은 누군가 입에 떠 먹여주지 않으면 읽기 어렵다는 점에서 이책의 가치가 있다.

"아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 어렵다'

서경의 문장은 시공을 초월한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유효한 문장이다.




내가 인간의 양면성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데미안을 읽고 나서다. 헤세의 소설은 전반적으로 내 인생에 일종의 방향타와 같은 역할을 해 주고 있는데 어린 시절 접했던 데미안은 '두 개의 세계'에 대해 내게 강한 인상을 심어줬고 그 영향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번에 읽은 책은 고전이라면 참 오래된 고전 중의 하나인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다. 오래 전 이 책을 읽을 때 같이 있던 책이 스탕달의 '적과 흑'이었는데 A와 B라는 제목 형식이 두 권이 유사해서인지 제법 흥미가 있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두 권 중에 내게 좀 더 자극적이었던 책은 적과 흑이었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베게로 써도 좋을만한 두께의 죄와 벌을 다시 읽었다.




죄와 벌이라는 어쩌면 두 개의 양립하는 단어의 나열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책은 내 기준에서 생각하면 반드시 양면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아무튼 그 문제는 차치하고 책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자. 아마 이 책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책 전체를 읽지는 못했어도 이런 책이 있다는 사실은 대충 알고 있을 수도 있고 제목에서 시사점을 얻어 누군가 죄를 짓고 벌을 받았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여기서 좀 더 나아가면 '나폴레옹은 수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도 영웅이 되었는데 왜 나는 쓰레기같은 인간 하나를 죽인 것으로 이런 대가를 치러야 하나"라는 문장을 기억할 수도 있다.




내가 바라보는 죄와 벌의 주제는 어쩌면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숙고라던가 신으로의 귀환 혹은 사회주의적인 시각에서의 논평과는 거리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역시 이는 앞서도 적은 데미안과 두 개의 세계의 영향이라고 보면 좋을 것 같다.

이 책에 등장하는 두 명의 주인공(적어도 내 기준에서는)인 라스꼴리니코프와 쏘냐 모두 두 개의 세계 안에 존재한다. 하지만 그 두 개의 세계는 결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라스꼴리니코프가 대학중퇴자에서 살인자로 쏘냐가 여염집 처녀에서 창녀로 그 신분을 바꾸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바로 1분 전만 해도 대학중퇴자와 숙녀였던 존재가 살인자와 창녀로 변하지만 그들의 본질에는 차이가 없다. 살인자가 되었건 창녀가 되었건 그 사람은 그 사람 자체인 것이다-물론 여기에 1분 전의 나와 1분 후의 나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해석(상당히 유효한 해석이지만)을 붙일 생각은 없다.

다시 말하면 누구나 대학생에서 살인자가 될 소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누구나 양가집 규수에서 창녀가 될 소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신분의 파격적인 변화도 아니고 갑자기 나락으로 떨어져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것도 아니다. 단지 그 사람의 존재의 양식이 순간적으로 변할 것일 뿐인 것이다. 사실 이런 생각으로 이 책을 해석하면 마지막 장면에 대한 해석은 제법 어려워질 수도 있다. 하지만 신으로의 귀환 역시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모습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큰 무리는 없다.

아무튼 나는 이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가질 수 있는 변화의 양식이 얼마나 많은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나 라스꼴리니코프의 심리 변화의 모습을 보면 무척 흥미진진하다. 결국은 동일한 존재 안에서 얼마나 많은 인간의 모습이 존재하는가...

제 아무리 고상한 척 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구석에서는 음탕한 범죄의 계획을 짜고 있는 것이고 지독하게 처절한 운명 속에서 고통의 날들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천상에서의 행복을 꿈꿀 수 있는 것이다. 단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껍질에 갇힌 현실의 모습이기 때문에 정확한 평가를 내리기 어려울 뿐이다.




한 가지 기존의 많은 감상들과 엇갈린 내 생각 하나를 더 말하자면 주인공이 결국은 신의 품으로 귀의하여 새 사람이 되는 겉으로 보이는 주제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이 쏘냐의 애정이라는 것에 나는 공감하지 않는다. 아마 작가와도 상충되는 생각이 아닐까 하는데 적어도 앞서 언급한 내 기준에서는 양가집 규수나 창녀는 본질은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한 신분인 쏘냐에게 고결한 성품이 내재해 있다는 식의 해석은 어울리지 않는다.

만약 고등교육을 마친 전도유망한 어느 가정집의 숙녀가 집안의 파산을 막기 위해 창녀가 되었다고 해서 이 아가씨의 근본이 변했다고 생각하는가? 그건 어디까지나 겉으로 드러난 외양에만 집착하는 인간의 얇디 얇은 착각과 허세일 뿐이다. 바로 내일이라도 당신 역시 창녀가 되거나 살인자가 되어 쫓겨다닐 수도 있는데 그럴 경우에 당신은 자신 스스로를 부정할 것인가 자문해보면 대답은 간단히 나온다.


호밀밭의 파수꾼10점

공각기동대 1기를 본 사람이라면 '웃는 남자'의 로고를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테두리에 뭐라고 씌여져 있는 영문을 자세히 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애니 상에서 이 로고는 계속 회전하고 있기 때문에 화면을 멈추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는 수고를 해야 비로소 전문을 이해할 수 있다.

I thought what I'd do was, I'd pretend I was one of those deaf-mutes.

라고 적혀 있는 이 문장은 공각기동대 1기를 관통하는 주제다. 원문의 출처는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The Catcher in the Rye, 1951)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여러가지면에서 역사에 미친 영향이 지대한 작품이다.

영화나 음악은 물론이고 존 레논의 암살범인 마크 채프먼이 암살 동기로 지적하기도 한 것은 익히 알려진 바와 같다. 그동안 제대로 보지 못했던 책 중의 하나라 모처럼 시간을 내어 읽어내려갔다. 줄거리와 대략적인 주제는 알고 있었기에 이번에는 행간을 읽는 작업에 주력했다. 책이건 음악이건 그것을 받아들이는 주체의 심리적인 상태에 따라서 느낌은 매번 다르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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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읽을 때 느껴졌던 10대의 방황과 호기심, 일탈에 대한 욕구와 환상이 이번에 읽을 때는 '자유로의 도피'라는 주제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만약 이 책을 단지 남들이 권해서 혹은 공각기동대의 모티브가 되었던 책이라는 점에서 구해보는 것은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 않다. 시대적인 배경도 오래 전이고 10대 소년이 느끼는 감정의 기복이나 다소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 설정, 그리고 미국적 문화 패턴에 대한 압박이 독서를 더디게 하거나 짜증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남들이 대단하다고 느끼는만큼의 이미지가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음에 대한 좌절을 맛볼 수도 있는 책이 이 책이기 때문이다. 마치 외눈원숭이 나라에 두눈원숭이가 방문한 것처럼 말이다. 남들은 다 감명깊게 읽었다는 데 내가 보기에는 영 아닌데..라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면 오히려 이 책을 제대로 읽은 것이다.

적어도 이 책을 이해하려면 3번은 봐야할 것같다. 처음 읽을 때의 짜증과 답답함이 두 번째 읽을 때는 호기심을 다가오고 세 번째 읽을 때는 감정의 동화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나는 번역본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번역가에 따라서 원문의 의미를 잘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고 도무지 현실에서는 쓰지도 않을 문장들을 읽고 있자면 내용보다 활자에 연연하게 되니 말이다. 영어가 딸리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겠지만 가능하다면 원서로 읽기를 추천하는 책 중의 하나다.
http://ilifelog.net2009-03-16T04:33:550.31010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아니었다면 아마 우리나라가 세계에 지금처럼 알려지지는 못 했을 것입니다. 영국 같은 나라에서는 올림픽을 보고나서야 많은 사람들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있는 것을 알았다고 하니 그동안 우리나라의 존재가 세계사적으로 얼마나 미미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푸른숲에서 출간된 "세계의 교과서 한국을 말하다"는 그런 의미에서 상당히 직설적입니다. 교과서라고 하는 것은 교육의 근간이 되는 자료인데 이를 통해 어린 학생들의 역사관이나 세계관이 정립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 중요성은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현대가 지구촌 시대라고 해도 사실 당장 내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모두 알기가 어려운데 굳이 나라의 일까지 알기는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서의 내용이 어쩌면 한 사람이 평생 가지고 갈 지식의 전부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책은 그런 점에 착안하고 있다는 점이 우선 특별합니다. 전 세계의 40여 개국의 500가지가 넘는 교과서를 일일히 들여다보고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세계 각국이 바라보는 우리나라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선진국의 대열로 접어드는 대한민국과 세계가 바라보는 아시아 변방의 작은 나라의 격차는 제법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의 역사를 정확하게 세계 각국에 알리는 것은 정부의 역할임에도 역대 어느 정부도 변변하게 우리의 정확한 모습을 세계에 알린 적이 없지 않나 싶습니다. 오히려 민간단체인 반크와 같은 곳이 있었기에 그나마 지금 정도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쉬운 생각이 많이 듭니다.




저자는 우리나라에 대한 잘못된 정보의 원인을 이와 비슷하게 진단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외국 교과서를 수정하도록 할만큼의 정확한 자료도 부족하고 연구나 개발도 부족하다고 꼬집고 있습니다. 너희 교과서에 이런이런 부분이 틀렸다. 그 근거로 이 자료를 봐라..고 말한만한 자료가 우리는 턱없이 부족한 것입니다.

우리는 삼성이나 LG와 같은 소위 글로벌 기업이 전 세계적으로도 유명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저자가 찾아간 멕시코에서는 이들 기업을 일본의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고 합니다. 이는 기업에도 책임이 있지만 역시 국가적인 홍보가 부족한 탓이라고 할 수 있는 사례입니다.




430페이지가 넘는 제법 두꺼운 분량의 이책에는 상당히 자세한 실제 사례들이 실려있습니다. 그렇다보니 읽는 입장에서는 술술 넘어가지는 않습니다. 편한 마음으로 읽는 책이라기보다는 연구의 참고자료로 활용하기에 제격인 책이라고 하겠습니다. 아마 국내의 어느 책도 이 정도로 자세한 실제 사례들을 담고 있지는 못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례를 가능한 많이 소개해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목적으로 써진 책인지라 읽기가 쉽지 않은 점만 빼면 자료로서의 소장가치는 매우 높은 책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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