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내 인생을 통털어서 요즘처럼 평화로운(?) 시간은 아마 없지 않을까 싶다. 이직을 준비하는 기간이라는 부담감이 있고 하루하루 생활해나가야 한다는 경제적인 부담감이 있지만 적어도 마음만큼은 세상사의 번거로움으로부터 해방된 시기가 아닐까 한다. 물론 여전히 처리되지 않은 퇴직금때문에 사장에게 메일을 쓰느라 모처럼 스트레스를 받기는 했지만 말이다.

사실 이 기간을 어떻게 보내야할까 많은 생각을 했다. 원래의 계획이라면 한 달정도 전국일주라도 가 볼 생각이었는데 역시나 문제는 돈이었고 한 달을 전국을 돌아보려면 생활비마저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아 일찌감치 접어야 했다. 이런 면에서 보면 1년치 월급을 털어 세계일주를 떠났던 지형 선배는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시간을 효과적으로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했는데 역시 책과 사진이 가장 좋은 해답이었고 어떻게 보면 그나마 내가 잘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것들이기도 하니 나름대로의 타협점을 찾은 듯 하다. 특히 그동안 모아두기만 하고 읽지 못했던 책들을 미친듯이 읽을 수 있다는 것은 회사를 그만두지 않았으면 누릴 수 없는 특권(?)이랄까?

책을 읽는다는 것은 여행 이상의 경험을 얻을 수 있다. 물론 오감이 느끼는 만족과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점에서는 대단하다. 아마 책이 없었다면 나는 굳이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약간 어려운 책 한 권과 약간 가벼운 책 한 권을 동시에 읽는다. 어려운 책을 연속으로 읽는 두뇌의 피로감을 해소하기 위한 방법으로 생각해낸 것인데 가금은 주객이 전도되기도 한다. 어제 마무리한 책은 제수알도 부팔리노의 '그날 밤의 거짓말'인데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 세기의 눈'과 같이 읽다보니 아무래도 이 책을 읽는 속도가 더 빨랐다. 덕분에 대체할 책을 다시 찾아야 했는데 이번에는 조금 유쾌한 책인 폴 오스터의 '우연의 음악'을 골라보았다.


지난 7월 25일 미국의 카네기멜론 대학의 종신 교수인 랜디 포시가 세상을 떴습니다. 다른 나라의 교수가 세상을 뜬 것이 중요한 일이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는 이미 우리나라에도 책으로 소개되어 있는 '마지막 강의'의 저자이자 주인공입니다.

사실 이전까지는 이책이나 랜디 교수에 대해 알지 못했습니다. 우연히 팀원 한명이 이책을 사주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고 서점에서 책에 대한 내용을 보고 팀원 모두에게 한권씩 선물해주었죠. 그러면서도 정작 저는 이책을 사지 않았는데 뻔한 내용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 그러고나서 얼마 후 랜디 교수의 임종 소식을 접했고 뒤늦게 그의 강의를 직접 들어보기로 했습니다.





이 강의의 제목은 "Really Achieving Your Childhood Dreams"으로 책에도 소개되어 있지만 어린 시절 자신의 꿈은 어떤 것이었고 그것을 어떻게 이루었는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원본은 1시간이 넘는 분량인지라 편집본을 링크로 걸어둡니다) 누구나 어린 시절 꿈을 갖기 마련인데 랜디 교수는 평생을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루기 위해 살았고 나름대로 대부분의 꿈을 실현시켰습니다. 그리고 강조하죠. 어린 시절의 꿈은 무엇이었느냐? 그리고 지금은 그꿈을 이루기위해 무엇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또 무엇을 할것이냐고 묻습니다.

어떻게보면 참 단순한 이야기인데 실제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루기위해 노력하는 사람 그리고 그꿈을 현실로 만드는 사람은 정말 적습니다. 그저 막연하게 마음 속으로만 그꿈의 향수에 가끔 잠기는 것이 평범한 우리네들의 삶의 모습이겠죠.

살림출판사에서 '마지막 강의'를 출간한 것이 6월말이었으니 이책은 그가 살아있다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 책이고 책을 읽어나가는 많은 이들이 그가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일어서주기를 바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운명을 달리했고 그가 남긴 메시지들이 더 절실한 느낌으로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랜디 교수의 이 강의는 그가 살아있는 동안의 마지막 강의였고 우리가 흔히 접하는 소설이나 드라마에서처럼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죠.

당장 시한부선고를 받는다면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까요? 그동안 갈 수 없었던 긴 여행을 떠나보는 것도 좋고 잔뜩 밀린 책들을 읽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랜디 교수처럼 앞으로 세상을 살아갈 남은 가족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남겨두는 것도 큰 가치가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이책은 그런 의미에서 가족들에게 최고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이책은 랜디 교수가 세상 사람들을 위해 쓴 책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사후 세상에 남겨진 아내와 아이들을 위한 책이라는 성격이 강합니다. 그런 면에서 보게 되면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계속 남의 일처럼 공감이 이루어지지는 않을 수도 있는데 그럴 때는 마음을 조금 넓게 열고 내가 남겨진 그의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읽어나가기를 권합니다.

끝으로 이 강의의 스크립트를 링크로 걸어둡니다. PDF니 리더가 있어야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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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책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거슬러 올가면 군 시절부터다. 신병교육대대 교육장교를 지내면서 신병교육지침서를 제작했는데 아직도 그책 뒷면에는 중위 OOO라는 내 이름이 고이 간직되어 있다. 물론 대학시절에 선배를 도와 석사논문 작업을 같이 하기도 했지만 정식으로 다른 사람들이 보는 책에 내 이름이 들어간 것은 제한적이긴 하지만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후 잡지사에 들어가 기자생활을 하면서 내 이름을 세상에 찍어 내기 시작했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에 서서히 이름이 노출되기 시작할 무렵에는 "야, 이 정도만 해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곤 했다. 누군가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은 대단히 흥미진진한 일인데 특히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잡지나 서적을 통해 그런 작업이 이루어지는 것은 나름대로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후 단행본과 잡지, 온라인 미디어 등에 글을 쓰면서 제법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에 익숙해졌지만 본격적으로 책 한권을 온전히 내손으로 기획부터 인쇄까지 만든 것은 바로 이전 직장에서가 처음이었다. 따라서 나 개인적으로는 대단히 큰 욕심이 있었지만  어수선한 회사 분위기 탓에 좀 더 완성도를 높일 수 없었던 것은 앞으로도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다.

책 한권을 혼자서 만든다는 것은 아마 직접 해보지 않고서는 그 고충을 알 수가 없지 싶다. 어떤 책을 만들지 기획을 하고 일정을 잡고 저자와 부지런히 면담을 한다. 내부 구성은 어떻게 할지 각각의 구성에 따른 리드문의 발췌, 책 전체를 관통하는 철학 만들기, 표지 디자인과 내지 디자인, 카피 문구와 이후 홍보 계획 등은 책상 앞에서 이루어지는 머리를 감싸쥐게 하는 작업이고 출력소와 인쇄소를 왔다갔다하며 없어진 폰트는 없는지 페이지가 넘치지는 않는지 색상은 어떻게 갈 것이며 실제 인쇄시 어떤 배색이 이루어지는지를 살피는 일 등은 발로 뛰는 작업이다.

이외에도 여러가지 부수적인 작업들이 있겠지만 이 모든 것을 나 혼자서 하기는 확실히 벅찼다. 그나마 내뜻대로 책을 만들 수 있는 여건도 아니었고 나가기 전에 만들고 나가라는 압박 역시 좀더 책에 집중하지 못하게된 원인이 아니었나 싶다. 결국 모든 작업이 마무리되고 제본된 책이 내손에 도착했을때는 기쁨보다는 아쉬움이 많았다. 누구 하나 도와주지 않는 상황에서 1인다역을 해가며 만든 책인만큼 감회도 남달라야 했는데...

아무튼 책의 마감과 동시에 나는 회사를 그만둬야했다. 이후 책의 판매나 피드백 같은 것은 들을 수 없었다. 마치 아이를 낳자마자 빼앗겨버린 어머니의 심정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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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라는 책도 있지만 짧은 인생을 돌아봤을 때 가장 열정적으로 살았던 시기는 책을 곁에 두고 있었을 때였던 것 같다. 그 책이 두꺼운 법률 수험서였건 그렇지 않으면 가벼운 소설이었건 내가 제일 집중할 수 있었고 하루하루의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던 때였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 세트씩은 있을법한 전집류를 무식하다 싶을 정도로 읽어나갔던 영향일까? 사회에 나와서도 글을 쓰고 책을 만들 때가 가장 열정적이었고 일에서건 연애에서건 나름대로 멋지게 살 수 있었던 시기였다. 책이 주는 매력은 대단하다. 내가 살아보지 못한 그리고 결코 살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을 체험할 수 있는 데다가 책 속에 빠져 있는 동안은(그것이 독서건 책을 만드는 일이건) 영혼이 평화롭다고나 할까?

그런 영향인지 사회에 나온 이후 지금껏 책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물론 지금은 책이 주가 아닌 것이 아쉽지만 언젠가는 다시 책 속에 파묻히는 내 모습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해본다. 앞으로 꿈이 있다면 내가 찍은 사진과 글로 채워진 책을 내보는 것인데 언제가 되야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만으로도 제법 유쾌해진다. 책이 주는 매력에 한참 빠져있을 때는 대학로 어느 극단에라도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고 실제로 모 극단의 단원 모집 공고를 놓고 오랜 시간 고민에 빠졌었던 적도 있다.

보통 한 인간의 삶이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비교적 단조롭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책이나 연극은 또 다른 삶을 체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잠들기 전 한 시간씩은 무슨 일이 있어도 책을 읽는 시간으로 하려고 노력 중이다. 예전의 열정을 되찾기 위한 노력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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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고 기다리던 책이 나왔다. 망설일 틈도 없이 바로 주문...

에코의 책은 늘 내게 심란함과 경외감을 동시에 불러들이는 매력이 있다. 아니 마력이라고 해야지 싶다.

오늘 집에 가면 도착해있을텐데... 읽으려고 쌓아둔 책은 갈수록 늘어가는데 대체 언제 다 읽을지...

책읽고난 소감은 차차 올리도록 하겠다. 간만에 흥분되는 날....

원제는  'La Misteriosa Fiamma della Regina Loana' 이고 원본 표지는 이렇게 생겼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우리나라에서는 에코 책들을 주로 펴온 열린책들에서 이세욱 번역가의 손을 빌어 출간했다.

도서 상세정보는 여기를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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