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사진 폴더를 뒤적이다보면 미처 지우지 못한 기억들을 담고 있는 사진들과 마주할 때가 있다. 조금은 소심한 일이겠지만 이별을 하고 나면 그 사람과의 기억이 담긴 사진은 모두 삭제를 하는데 연애를 하는 동안에는 대개 사진을 많이 찍는 데다가 여기저기 백업본을 만들어두다보면 온전히 지우지 않고 남아있는 폴더가 어디선가 툭 튀어나올 때가 있다. 

사람의 흔적이 남아있는 사진은 그 자리에서 바로 지우지만 장소가 남아있는 사진은 한동안 들여다본다. 사람은 잊을 수 있지만 장소는 잊기 어려운 까닭이다. 이전에도 비슷한 글을 적은 적이 있는데 우리의 기억이란 특정한 장소에 남겨진다. 그리고 그 장소에 남아있는 기억 속의 우리는 10년 전이건 20년 전이건 혹은 다른 어떤 시기건 그때의 우리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 세월이 지나 백발이 되어 그 장소를 다시 찾더라도 그곳의 우리는 10대의 혹은 20대의 젊은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그곳을 찾은 우리는 한동안 그 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다. 남겨진 기억 속의 나를 만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추억이라는 것은 어쩌면 그런 이미지들이 주는 평온함이나 행복감이 아닐까 싶다. 이제 세월이 지나 떠나간 이의 손을 잡을 수도 없고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지만 함께 걷던 길을 함께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던 장소를 오늘도 여전히 걷거나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비단 연인의 경우만이 아니라 가족 혹은 반려동물과의 기억도 다르지 않다. 고향을 떠난 이들이 고향에 대한 향수를 느끼고 끝내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물론 그 장소가 반드시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때는 무의식 중에도 특정한 장소를 피해 돌아가곤 하는데 이것 역시 장소가 우리에게 남겨둔 기억 때문이다. 사람은 떠났지만 그 장소에는 여전히 우리의 모습이 남아있으니까... 그 모습과 마주하는 것이 내키지 않는 것이다. 그래도 가능하면 어떤 장소에 남아있는 기억들은 좋은 것이길 바란다. 

사람이 기억을 자신의 마음속에서 되새기지 않고 어떤 장소나 어떤 사물에 의지하는 것은 사실 그렇게 바람직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 어쩌면 그만큼 각별한 마음이 희미해져간다는 의미도 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이성적으로 하나하나 따져가며 추억을 되새길 일은 아니지 않을까? 우연이건 혹은 일부러 시간을 내서건 그래도 좋은 기억이 남아있는 곳을 찾아가 이전의 행복했던 모습을 떠 올려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너무 복잡하게 너무 어렵게 혹은 너무 이성적으로 살 일은 아니다. 삶이란 그리 길지 않고 그 삶 속에서 만나는 많은 인연들과의 기억은 나라는 사람의 삶 자체기 때문이다. 이제 한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어디건 자신에게 좋은 기억이 남아있는 장소를 한 번 찾아가 걸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과거에 연연하고 미련을 못 버리고 그런 차원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행복했던 기억과 마주해보는 일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느 새 올 한 해도 달력 마지막 장만 남기고 있다. 시간이 흐르는 물과 같다는 이야기를 굳이 꺼내지 않아도 세월이라는 단어의 한자를 곱씹어보지 않아도 우리네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인지 아마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또 절실하게 느끼고 있지 않을까? 돌아보면 매 해마다 겪는 일들이 새롭다. 전에는 겪을 수 없었던 아니 관심조차 갖지 않았던 일들이 내게 직접 일어난다. 하지만 한편 생각해보면 이 새로움들이라는 것이 다른 어떤 이들에게는 이미 겪은 일일 수도 있는 것. 결국 우리네 삶이란 대개 비슷한 경험들을 공유하며 서로 엮이는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겨울을 좋아하고 겨울에 어디건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나지만 올해는 예전처럼 그렇게 자주 밖으로 돌아다니지는 못한다. 아직 혼자 잠드는 것이 걱정스러운 어머니때문이다. 올해는 내게 '가족'이라는 단어를 가슴 시리게 새겨주었다. 그리고 '삶', '생명'이라는 단어를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고 고민하게 해 주었다. 또 하나 얻은 것이 있다면 이 짧은 삶 속에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라는 것. 부귀영화를 좇으며 살아갈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들은 정말 봄날 눈녹듯 사라져버리는 허상 자체다. 인간으로서 세상에 태어나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이제는 더 고민하게 되었다.


자연 앞에 서면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작고 하찮기 그지 없다. 여행을 통해 배울 수 있는 큰 교훈 중의 하나인데 요즘은 돌아다니지를 않으니 예전 사진첩을 꺼내어 들춰보는 것으로 대리만족을 하고 있다. 예전에 찍은 사진들을 지금 다시 보면 그 때 찍었던 느낌과 생각과는 또 다른 느낌 그리고 또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어서 좋다. 물론 사진에 반영되는 이미지는 셔터버튼을 누르는 순간의 감정과 당시의 마음상태가 고스란히 찍혀 나오지만 과거의 그 감상을 현재에 극복할 수 있다면 같은 사진으로 두 장의 서로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사진과 여행, 이 두 가지가 정말 축복된 것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아무튼 정신없이 분주하던 한 해의 큰 일들을 마무리하고 이제는 나의 일을 찾기 위해 조금씩 나아가는 요즘이다. 사람과 사람의 인연도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듯히 사람과 일의 인연도 전혀 생각지도 않게 마주치는 인연이 있으리라 생각해본다. 그리고 새로운 인연과 만나게 되는 날. 다시 카메라를 들고 겨울을 걸어보고 싶다. 



인생은 늘 새옹지마와 같아서 한 치 앞을 섵불리 내다 볼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생각이 그 어느 때보다 내 머릿속을 가득 메우는 한 해가 바로 올해다. 아버지가 쓰러지시고 그 이후 정말 숨 쉴 틈도 없이 몰아치던 폭풍우 속에서 어머니와 동생 그리고 나 세 사람은 각자 큰 생각들을 가지게 되었을 테고 햇수로 2년이라는 시간을 병간호와 뒷수습으로 보내다보니 개인적으로는 참 잔인한 시간들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상처가 클 수록 혹은 슬픔이 클 수록 뒤이어 오는 기쁨이나 행복도 큰 법이라는 아주 단순한 진리를 우리는 너무 쉽게 잊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 사후 경제적인 마무리 중에 우여곡절 끝에 남겨두었던 청약통장... 그리고 우연치않게 알게 된 공고문 한 장은 우리 가족을 그동안의 힘겨움 속에서 잠시 벗어나게 해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일에는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다. 어떤 결과가 있다면 그에 이르는 길은 사소한 어긋남도 없이 완벽한 계획 속에서 그 결과에 다다르게 된다. 어쩌면 운명론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가볍게 넘길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오늘 계약서 한 장을 받아왔다.


아버지가 평생 내 집을 갖기를 바랐었지만 이루지 못하고 가신 것을 자식 대에 이르러서 비로소 이루게되었다. 그리고 이제 살게 될 곳은 그동안의 우리 가족의 삶의 영역이 되었던 곳과는 정반대로 한참을 가야 다다를 수 있는 곳이다. 지금 사는 동네에서의 우리 가족의 삶은 어머니 말처럼 '자식 둘 대학 보낸 것이 전부'라고 할만큼 그리 괜찮은 삶은 아니었다. 동생은 결혼을 하면서 이곳을 진즉에 떠났지만 어머니와 나는 이제사 떠나는 셈이다. 섭섭하다는 감정보다는 시원하다는 감정이 많은 곳이다.

무척이나 힘겨웠던 일들 속에 전혀 예상도 못 하던 좋은 일이 있는 것을 보니 역시 새옹지마라는 말이 어긋나지 않음을 느끼게 되었고 그 기쁨 뒤에 언젠가는 또 다른 힘겨움이 다가올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겸손함을 느끼게 되었던 한해가 아닌가 싶다. 물론 아직 올해가 마무리가 되지는 않았기에 아직 또 다른 기쁨이나 혹은 슬픔이 다가올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참 크고도 큰 두 가지 사건이 벌어진 해였기에 다른 일들은 어지간해서는 담담하게 받아들이지 않을까?

아무튼 하나의 일이 끝난다는 것은 다시 출발점에 선다는 것이다. 우리네 삶에 끝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항상 진행형이고 항상 현재형인 것이 우리네 생이고 일상이다. 비록 죽음이라는 단절이 있을지언정 끝이 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이제 공은 내게로 넘어왔다. 남은 삶이 방향을 잡고 그 방향으로 배를 저어가는 것은 온전히 내 몫이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어 그것이 내 생각에 혹은 내 행동에 어떤 영향을 주었더라도 이제는 그것을 그대로 묻고 완전히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

내년에는 아니 바로 이 시간부터 내 삶은 달라지고 있고 그렇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게 살아가는 방법이고 걸어가는 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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