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을 위한 장난감. 건프라를 부르는 다르게 부르는 말이다. 건프라란 건담 프라모델의 줄임말인데 일본의 애니메이션인 건담을 주제로 반다이에서 만든 쉽게 말하면 프라스틱 장난감이다.

내가 건프라에 한참 빠져 있었던 것은 뭐랄까...일종의 완성이 주는 즐거움때문이었지 싶은데 지금은 그저 한때의 즐거움 정도로 기억된다.


오랜만에 사진첩을 뒤적이다가 예전에 찍은 건프라 사진이 있어 기록도 남겨둘겸 올려볼 생각이다. 그러고보면 참 별별 취미도 다 있었다.

 
이 녀석은 SD킷의 하나인데 도색은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둔 녀석이다. 임펄스 건담으로 디자인은 괜찮지만 스토리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시리즈다.


작지만 2시간 정도의 작업 시간이 걸렸다. 도색은 없지만 약간의 먹선을 주어 그나마 심심함을 덜어보려고 했던 녀석이다.

 

[도서]도덕경

노자 저/오강남 풀이
현암사 | 1999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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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갈 수록 진가를 발휘하는 책


도덕경이라는 책의 제목을 보면 21세기의 첨단 시대에 과연 어울리는 책일까 우선 고개를 갸우뚱하게 될런지도 모르겠다. 혹자는 그거 학교에서 배우는 도덕이야기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다. 나도 처음에 도덕경이라는 책이 지금의 시기에 읽을만한 책일까 의문을 가졌었다. 그러나 도덕경은 지금의 시대뿐만 아니라 미래의 시대에도 어울리는 몇 안 되는 책 중의 하나라고 감히 말할 수 있으리라...

도덕경은 수 많은 해석본이 존재한다. 그중에서 굳이 이책을 선택한 것은 다분히 출판사의 영향이 컸는데 대학 시절 법률용어사전이라는 책으로 현암사를 처음 접한 후 갖게 된 선입견이랄까..아무래도 현암사의 책은 깊이가 다를 것이다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책을 읽어갈 수록 오강남 선생의 해석이 마음에 와 닿았고 다른 여타의 해석본들보다 뭐랄까 내게는 적합한 풀이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은 도덕경의 어쩌면 진부한 이야기들 그리고 뻔한 이야기들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시각에 맞추어 유연하게 풀어가고 있다. 덕분에 그저 막연한 철학이야기로 치부될 수도 있었던 현자의 이야기가 바로 현실에 짝맞추어 마치 물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었다. 

무엇보다 도덕경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시사하는바가 크다. 특히나 물질에 찌들어 살아가는 우리네 삶에 '비움'을 알려준다. 생활이 바쁘고 치열한데 무슨 자연이고 비움이냐고 주장하는 이가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에는 자연으로 돌아가기 위함이고 삶을 살아가는 주체가 '나'라는 점을 생각하면 분주한 일상이지만 한 번쯤 아니 두 번쯤은 일상의 번거로움을 잠시 놓고 스스로에 대한 생각을 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선생의 도덕경을 읽어 나가다 보면 마치 신영복 선생의 강의를 읽는 것과 비슷한 착각이 드는데 두 분 모두 동양 철학을 통한 인간성의 회복과 실천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물론 서양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돈과 시간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의 모습은 너무도 서양적이다. 동양적인 비움과 삶에 대한 관조가 사라진 하루하루는 그저 남에 의해 살아지는 모습일 뿐이다.

도덕경의 주제는 도덕이다. 그리고 도덕이란 도와 덕이 합쳐진 말이다. 그렇다면 도는 무엇이고 덕은 무엇인가...도덕경 1장은 이런 물음에조차도 정형화된 답을 주지 않는다.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는 말로 말이다. 삶에 너무나 많은 단정과 규정을 지으려 하지 말자..그렇지 않아도 번잡하고 짧은 것이 인생이다.  




신영복 선생에 대해 처음 알게된 것은 고등학교 동기가 빌려 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에서였다. 그러나 처음 그책을 접했을 때는 왠지 그렇게 마음에 많이 와 닿았다는 느낌은 적었다. 그리고 신영복이라는 이름이 내 기억에서 사라지고 세월이 제법 흘렀다. 

나이가 어느 정도 들면서랄까.. 철학에 대한 생각들이 많아지면서 동양철학과 서양철학 그리고 인문학 서적들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대학 시절 어설프게나마 읽은 책들을 바탕으로 한 권 두 권 읽어갈 무렵 이책을 나에게 권해준 이가 있었다. 이전과 달리 고전에 대한 생각이 많은터라 덥썩 받아들고 왔지만 일단 책의 두께에 질렸는지 한동안 책꽂이에 놓아두기만 했었다.

그리고 어느날 이책을 처음 펼치게 되었는데 그때의 느낌은 아직도 생생하다. '아, 이책을 왜 이제야 읽게 되었을까..'라는 생각과 '이제라도 읽게 되었으니 참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동시에 교차했다. 

분명히 책이다. 종이에 찍힌 활자인데 마치 선생과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존댓말로 쓰여진 글때문만은 아니다. 뭐랄까 어려운 주제, 심각하고 오묘한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마음에 부담이 들지 않는다. 정말 선생의 수업을 듣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수업은 여느 주입식 교육에서처럼 일방적인 정보의 전달이 아닌 학생과의 교감을 원하는 그런 수업이었다.

내가 읽어본 책들 중에서 이책처럼 서론이 긴 책도 찾기 힘든데 그만큼 선생은 독자들에게 자상하고 친절하게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어떻게 하면 독자들에게 모두 그리고 온전하게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한 흔적이 너무 크게 드러나 있다. 덕분에 책을 마주 하는 동안 내내 선생에 대한 존경심과 애정 그리고 선생이 풀어내는 지식과 지혜에 깊게 빠져들게 되었다.

무엇보다 서양철학에 경도되어 있던 내게 동양철학의 단아함과 깊이를 알려준 책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우리네 사고 방식이며 생활 양식은 대부분이 서구적이다. 그런 방식과 양식 속에서 살아가다보니 우리네 삶 역시 서양일변도의 가치관에 물들여져 있어 자신도 모르게 이해타산적이고 감각적인 분위기에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우리는 본디부터 동양인이고 동양철학의 뿌리에서 자라온 민족이다. 서구식 사고 방식의 유입으로 인해 마치 서양의 것이 참이고 동양의 것은 이단인양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의 뿌리는 어쩔 수 없는 동양인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선생은 강의 내내 우리에게 그 점을 깊이 새겨주려고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나 역시 이책을 읽으며 그동안의 내가 얼마나 편향된 사고와 생활에 익숙해있었는지 반성하게 되었다. 

물론 동양적인 사고와 철학이 사람에 따라서는 진부하고 시대착오적으로 들릴 수도 있음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네 삶의 뿌리가 된 양식과 방식을 잊은채 무작정 서구적인 사고에 빠져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소중한 지혜들을 잊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내 인생에서 데미안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었다. 사춘기 시절 데미안을 접하고 두 개의 세계와 아프락사스에 대한 생각에 온통 사로 잡혀 지냈으니 말이다. 스스로의 판단력이 부족했던 그 시절..어쩌면 대중적으로 너무 알려져 있는 두 개의 세계, 그리고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로 시작하는 문구는 한창 갈등과 사춘기적 방황에 시달리던 내게 마치 밤하늘을 가득 메운 불빛과 같았다.

결국 당시 나는 나의 감정을 데미안에 투영했는데 문제는 데미안 전반에 펼쳐진 긍정적인 그리고 개혁적인 시각보다 부정적이고 현실도피적인 시각에 집중함으로써 어린 시절의 나의 치기를 합리화해버렸다는데 있었다. 내가 이 부정적인 데미안에서 빠져 나오기까지는 무려 십 수년의 시간이 걸렸는데 데미안의 후속이라고 해도 좋을 싯다르타를 통해서였다.

학창 시절 이후 나는 다시 이책을 읽지 않았다. 아마도 두려움이 컸기 때문인데 방황과 고독..얼룩진 감성을 합리화하고 나 스스로를 위로했던 길고도 길었던 시절들이 사실은 내 일방적인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도 다시 이책을 읽기는 쉽지가 않다. 싯다르타를 통해 결국 데미안이 내게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알아차렸음에도 선뜻 용기가 나지 않는다.

물론 과거의 데미안에 빠져 있던 나를 현실의 데미안을 찾는 나로 돌리기 위해서는 읽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한편에서는 무언가 그 상태 그대로 잠시만 놔두고 싶은 마음도 있달까...삶에 있어 어느 정도는 실수와 잘못을 남겨 두고자 하는 또 하나의 어리석음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써는 당분간 그대로 감정을 놓아두는 편이 낫겠다 싶다. 이 또한 나의 치기라면 달리 변명의 여지는 없다.

이책을 읽는 이들에게 혹은 읽고자 하는 이들에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세상에 떠도는 말로 지레 짐작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인격이 존재하듯 사람은 그 나름대로 느끼는 감정과 감성이 다르다. 그런데도 자기 스스로는 어딘가로 던져 두고 남들이 말하는(혹은 광고문구에) 단어나 문장에 혹해 자신의 판단을 보류한다면 그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지 싶다. 무엇보다 책을 책 자체로 받아들일 수 없고 결과적으로 책을 읽고 나서도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다고 생각된다.

수많은 책들이 모두 마찬가지다. 다만 굳이 내가 이 데미안을 예로 들어 이야기하는 것은 온전히 내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가능하다면 책에 대한 아무런 선입견없이 들어가자. 비단 책을 읽는 것에만 한정되는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말이다.


이책은 도발적이다. 띠지에 적힌 카피는 "돈이 모이는 곳에서 예술은 태어나고 발전한다"이다. 흔히 예술가들은 가난하다고 하는데 이건 무슨 소리인가? 이책은 기존의 예술작품을 바라보는 시선과는 다른 면에서 예술작품을 바라본다. 한편에서 생각해보면 천박한 것처럼 생각되지만 화가들의 작품이 고가에 판매되야 화가들도 먹고 살 수가 있고 그래야 또 많은 작품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시선이다. 일응 타당한 이야기다.

꽤나 성공한 사업가의 아내인 리자 게라드디니의 초상이라는 게 거의 확실시 되고 있다. p.22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돈을 받고 초상화를 그리지 않았으면 모나리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마네의 사회비판적인 시각이 없었으면 풀밭 위의 식사나 올랭피아는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예술=돈의 공식을 적절히 활용한 앤디 워홀이나 데미안 허스트를 돈만 밝히는 속물이라고 비판만 할 수 있을까? 초야에 묻혀 있는 예술품들을 전 세계적으로 알리는 것은 다름 아닌 경매장이다. 이율배반적으로 들리지만 이렇게 예술은 시대와 돈 그리고 권력과 떼기 어려운 관계인 셈이다.


누드에 대한 위선, 그에 대한 거침없는 반격. 마네의 올랭피아. p99

또한 예술가들의 권력, 사회통념과의 대결 구도를 그린다. 돈과 권력...어쩌면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큰 세력들과 때로는 어울리기도 하고 때로는 그들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며 이제까지의 역사를 만들어온 장본인이다. 이책에서는 이 두 가지 구조를 큰 틀로 삼아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물론 권력과 사회통념에 맞서 싸우는 일종의 투쟁에 대한 언급은 많지는 않다. 과거 TV프로그램에서 다루어졌던 내용이다보니 아무래도 시청자들의 시선을 끌만한 주제와 이야기 위주로 풀어갔기 때문이리라..


 워홀의 오렌지 마릴린. 이 작품의 가격은? 145억 원이다. p 157

책은 크게 다섯 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언뜻 보면 시대순이지만 꼼꼼하게 다시 들여다보면 가치관의 변화에 따른 진행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에서 파리로 다시 뉴욕에서 영국으로 그리고 중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로 넘어 오는 이야기의 진행은 단순히 시대의 흐름에 따른 예술 작품에 대한 평가라기보다는 시대에 따른 권력의 이동, 경제의 이동에 대한 흐름이라 보는 것이 더 어울린다.


시대에 대한 교묘한 비판.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 p121

그 흐름 속에서 흐름에 동화하며 혹은 흐름에 역행하며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했던 예술가들을 통해 예술이라는 것의 사회적인 면을 조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책이 주는 의미는 각별하다. 미술사와 작가들이 다루어지기 때문에 어려운 책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사회상과의 긴밀한 연관을 다루기 때문에 전문적인 지식이 없더라도 읽기가 수월하다. 무엇보다 기존에 잘 모르던 이야기들이 펼쳐진다는 점이 매력적이고 신선하다. 요즘 방영되고 있는 명작스캔들과의 비교도 재미있을 것 같다.





저는 건강한 리뷰문화를 만들기 위한 그린리뷰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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