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선생에 대해 처음 알게된 것은 고등학교 동기가 빌려 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에서였다. 그러나 처음 그책을 접했을 때는 왠지 그렇게 마음에 많이 와 닿았다는 느낌은 적었다. 그리고 신영복이라는 이름이 내 기억에서 사라지고 세월이 제법 흘렀다. 

나이가 어느 정도 들면서랄까.. 철학에 대한 생각들이 많아지면서 동양철학과 서양철학 그리고 인문학 서적들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대학 시절 어설프게나마 읽은 책들을 바탕으로 한 권 두 권 읽어갈 무렵 이책을 나에게 권해준 이가 있었다. 이전과 달리 고전에 대한 생각이 많은터라 덥썩 받아들고 왔지만 일단 책의 두께에 질렸는지 한동안 책꽂이에 놓아두기만 했었다.

그리고 어느날 이책을 처음 펼치게 되었는데 그때의 느낌은 아직도 생생하다. '아, 이책을 왜 이제야 읽게 되었을까..'라는 생각과 '이제라도 읽게 되었으니 참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동시에 교차했다. 

분명히 책이다. 종이에 찍힌 활자인데 마치 선생과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존댓말로 쓰여진 글때문만은 아니다. 뭐랄까 어려운 주제, 심각하고 오묘한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마음에 부담이 들지 않는다. 정말 선생의 수업을 듣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수업은 여느 주입식 교육에서처럼 일방적인 정보의 전달이 아닌 학생과의 교감을 원하는 그런 수업이었다.

내가 읽어본 책들 중에서 이책처럼 서론이 긴 책도 찾기 힘든데 그만큼 선생은 독자들에게 자상하고 친절하게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어떻게 하면 독자들에게 모두 그리고 온전하게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한 흔적이 너무 크게 드러나 있다. 덕분에 책을 마주 하는 동안 내내 선생에 대한 존경심과 애정 그리고 선생이 풀어내는 지식과 지혜에 깊게 빠져들게 되었다.

무엇보다 서양철학에 경도되어 있던 내게 동양철학의 단아함과 깊이를 알려준 책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우리네 사고 방식이며 생활 양식은 대부분이 서구적이다. 그런 방식과 양식 속에서 살아가다보니 우리네 삶 역시 서양일변도의 가치관에 물들여져 있어 자신도 모르게 이해타산적이고 감각적인 분위기에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우리는 본디부터 동양인이고 동양철학의 뿌리에서 자라온 민족이다. 서구식 사고 방식의 유입으로 인해 마치 서양의 것이 참이고 동양의 것은 이단인양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의 뿌리는 어쩔 수 없는 동양인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선생은 강의 내내 우리에게 그 점을 깊이 새겨주려고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나 역시 이책을 읽으며 그동안의 내가 얼마나 편향된 사고와 생활에 익숙해있었는지 반성하게 되었다. 

물론 동양적인 사고와 철학이 사람에 따라서는 진부하고 시대착오적으로 들릴 수도 있음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네 삶의 뿌리가 된 양식과 방식을 잊은채 무작정 서구적인 사고에 빠져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소중한 지혜들을 잊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내 인생에서 데미안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었다. 사춘기 시절 데미안을 접하고 두 개의 세계와 아프락사스에 대한 생각에 온통 사로 잡혀 지냈으니 말이다. 스스로의 판단력이 부족했던 그 시절..어쩌면 대중적으로 너무 알려져 있는 두 개의 세계, 그리고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로 시작하는 문구는 한창 갈등과 사춘기적 방황에 시달리던 내게 마치 밤하늘을 가득 메운 불빛과 같았다.

결국 당시 나는 나의 감정을 데미안에 투영했는데 문제는 데미안 전반에 펼쳐진 긍정적인 그리고 개혁적인 시각보다 부정적이고 현실도피적인 시각에 집중함으로써 어린 시절의 나의 치기를 합리화해버렸다는데 있었다. 내가 이 부정적인 데미안에서 빠져 나오기까지는 무려 십 수년의 시간이 걸렸는데 데미안의 후속이라고 해도 좋을 싯다르타를 통해서였다.

학창 시절 이후 나는 다시 이책을 읽지 않았다. 아마도 두려움이 컸기 때문인데 방황과 고독..얼룩진 감성을 합리화하고 나 스스로를 위로했던 길고도 길었던 시절들이 사실은 내 일방적인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도 다시 이책을 읽기는 쉽지가 않다. 싯다르타를 통해 결국 데미안이 내게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알아차렸음에도 선뜻 용기가 나지 않는다.

물론 과거의 데미안에 빠져 있던 나를 현실의 데미안을 찾는 나로 돌리기 위해서는 읽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한편에서는 무언가 그 상태 그대로 잠시만 놔두고 싶은 마음도 있달까...삶에 있어 어느 정도는 실수와 잘못을 남겨 두고자 하는 또 하나의 어리석음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써는 당분간 그대로 감정을 놓아두는 편이 낫겠다 싶다. 이 또한 나의 치기라면 달리 변명의 여지는 없다.

이책을 읽는 이들에게 혹은 읽고자 하는 이들에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세상에 떠도는 말로 지레 짐작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인격이 존재하듯 사람은 그 나름대로 느끼는 감정과 감성이 다르다. 그런데도 자기 스스로는 어딘가로 던져 두고 남들이 말하는(혹은 광고문구에) 단어나 문장에 혹해 자신의 판단을 보류한다면 그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지 싶다. 무엇보다 책을 책 자체로 받아들일 수 없고 결과적으로 책을 읽고 나서도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다고 생각된다.

수많은 책들이 모두 마찬가지다. 다만 굳이 내가 이 데미안을 예로 들어 이야기하는 것은 온전히 내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가능하다면 책에 대한 아무런 선입견없이 들어가자. 비단 책을 읽는 것에만 한정되는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말이다.


이책은 도발적이다. 띠지에 적힌 카피는 "돈이 모이는 곳에서 예술은 태어나고 발전한다"이다. 흔히 예술가들은 가난하다고 하는데 이건 무슨 소리인가? 이책은 기존의 예술작품을 바라보는 시선과는 다른 면에서 예술작품을 바라본다. 한편에서 생각해보면 천박한 것처럼 생각되지만 화가들의 작품이 고가에 판매되야 화가들도 먹고 살 수가 있고 그래야 또 많은 작품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시선이다. 일응 타당한 이야기다.

꽤나 성공한 사업가의 아내인 리자 게라드디니의 초상이라는 게 거의 확실시 되고 있다. p.22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돈을 받고 초상화를 그리지 않았으면 모나리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마네의 사회비판적인 시각이 없었으면 풀밭 위의 식사나 올랭피아는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예술=돈의 공식을 적절히 활용한 앤디 워홀이나 데미안 허스트를 돈만 밝히는 속물이라고 비판만 할 수 있을까? 초야에 묻혀 있는 예술품들을 전 세계적으로 알리는 것은 다름 아닌 경매장이다. 이율배반적으로 들리지만 이렇게 예술은 시대와 돈 그리고 권력과 떼기 어려운 관계인 셈이다.


누드에 대한 위선, 그에 대한 거침없는 반격. 마네의 올랭피아. p99

또한 예술가들의 권력, 사회통념과의 대결 구도를 그린다. 돈과 권력...어쩌면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큰 세력들과 때로는 어울리기도 하고 때로는 그들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며 이제까지의 역사를 만들어온 장본인이다. 이책에서는 이 두 가지 구조를 큰 틀로 삼아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물론 권력과 사회통념에 맞서 싸우는 일종의 투쟁에 대한 언급은 많지는 않다. 과거 TV프로그램에서 다루어졌던 내용이다보니 아무래도 시청자들의 시선을 끌만한 주제와 이야기 위주로 풀어갔기 때문이리라..


 워홀의 오렌지 마릴린. 이 작품의 가격은? 145억 원이다. p 157

책은 크게 다섯 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언뜻 보면 시대순이지만 꼼꼼하게 다시 들여다보면 가치관의 변화에 따른 진행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에서 파리로 다시 뉴욕에서 영국으로 그리고 중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로 넘어 오는 이야기의 진행은 단순히 시대의 흐름에 따른 예술 작품에 대한 평가라기보다는 시대에 따른 권력의 이동, 경제의 이동에 대한 흐름이라 보는 것이 더 어울린다.


시대에 대한 교묘한 비판.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 p121

그 흐름 속에서 흐름에 동화하며 혹은 흐름에 역행하며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했던 예술가들을 통해 예술이라는 것의 사회적인 면을 조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책이 주는 의미는 각별하다. 미술사와 작가들이 다루어지기 때문에 어려운 책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사회상과의 긴밀한 연관을 다루기 때문에 전문적인 지식이 없더라도 읽기가 수월하다. 무엇보다 기존에 잘 모르던 이야기들이 펼쳐진다는 점이 매력적이고 신선하다. 요즘 방영되고 있는 명작스캔들과의 비교도 재미있을 것 같다.





저는 건강한 리뷰문화를 만들기 위한 그린리뷰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인문학' 고리타분한 단어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이런 생각을 할테고 내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인문학 관련 서적을 읽을라치면 일단 어느 정도의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마 국내에서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계기로 인문학에 대한 편견이 많이 해소된 것 같지만 그래도 여전히 단어 자체에서 풍겨나는 독특한 향기가 선뜻 책장을 넘기기 어렵게 한다.

길 위에서 만나지는 학문이 제대로 된 학문이다. 책을 덮고 거리로 나가자

그래서인지 최근 들어 쉽게 인문학에 접근할 수 있도록 지침서 역할을 해 주는 책들이 선보이고 있는데 이책 '길 위의 인문학'도 그런 류의 책이다.

중간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책은 '현장의 인문학', '생활 속의 인문학'을 위한 모음집이다. 여러 명의 인문학 관련 저자들이 모여 어떻게 하면 인문학을 일반 대중들의 생활 속으로 파고 들게 할 수 있을지를 연구하고 집필한 책이다.

책의 구성은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어 있다. 전반부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조선시대의 학자들, 저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고 후반부는 우리나라의 지리적인 장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제법 신선한 편집 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1부·사람의 자취를 따라 떠나는 길 위의 인문학

2부·역사의 흔적을 따라 떠나는 길 위의 인문학

이렇게 두 개의 주제를 잡고 그 안에서 우리에게 친숙한 인물과 장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간다. 물론 조선시대라는 시대적인 한계와 그리 많지 않은 장소의 여정이라는 공간적인 한계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만 한 인물이나 한 장소에 대해 제법 많은 이야기를 풀어 가면서 독자들에게 '봐라, 이렇게 보니 어렵고 지루하지 않지 않느냐"고 말하고 있다.

무엇보다 각각의 인물과 장소에 대한 개별 저자들 특유의 경험과 감상을 마치 내 눈 앞에서 펼쳐 지는 것처럼 그려나가고 있어 딱딱한 인문학 서적이라는 느낌보다 가벼운 기행문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그렇게 글을 읽다 보면 어느새 나도 과거로 돌아가 그 인물의 곁에서 혹은 그 장소에서 또 다른 삶과 학문을 느낄 수 있었다.

이책의 주된 배경은 과거다. 그러나 그 과거를 돌아보지 않고서는 현재의 우리를 알 수 없고 현재의 우리를 알 수 없다면 미래의 우리 또한 알 수 없다. 인문학이 따분하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은 직접적으로 우리가 체감할 수 없기 때문인데 이책에서처럼 과거의 일을 마치 현재의 일처럼 혹은 장소처럼 여기고 죽 따라가다보면 과거를 온전히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재로 끌어올 수 있을만한 나름의 요령이 생긴다.

특별히 목차에 집착할 필요도 없고 가끔 손이 가는대로 눈이 가는대로 아무 구석이나 펼치고 읽어도 좋은 것도 이책의 장점이다. 아니면 무언가 리포트를 쓰거나 나름의 글을 쓸 때 참고 교재로 사용해도 손색이 없다. 공동 저자의 책은 책 전체에 흐르는 일관성은 약하지만 책 전체에서 느낄 수 있는 다양한 필체와 언어 그리고 지식이 그 부족함을 지워주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렇게 책을 마무리 짓고 있다.

"무지개를 잡으러 간 일이 있었다. 무지개는 나를 반기며 웃었고, 일곱 색깔 자태를 뽐내며 산 위에 걸려 있었다. 그렇게 무지개를 따라가다 무지개를 잃어버렸다. 돌아오는 길엔 온갖 사상이 나를 마중했다. 집에 왔을 때 무지개를 여전히 산 위에 걸려 있었다."

어쩌면 우리네 삶도 그럴테고 학문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삶의 화려함과 일의 고단함, 생활의 습관에 빠져 헤메다가 어느 덧 시간이 지나 나를 돌아봤을 때 애초에 내가 원하던 삶과 거리가 있는 것을 밝견하게 되는 것처럼 학문 역시 깊게 공부했다고 자부했지만 결국은 학문의 언저리에도 도달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때로는 인생이건 학문이건 멀리서 그 전체를 바라보며 즐길 수 있는 여유도 필요하리라..

아무튼 기획 의도가 참신하고 적극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 글들을 읽다 보면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인물편을 다루고 있는 전반부는 일반 대중들에게 익히 알려져 있는 인물들을 주제로 선택했음에도 저자 스스로가 그 인물의 세계에 빠진 나머지 독자들을 외면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안내서라는 점을 감안했다면 차라리 지역을 다룬 후반부를 앞으로 빼내었다면 좀 더 많은 이들에게 관심을 끌지 않았을까?





책을 읽는 데 기술이 필요한가? 라고 이전에 스스로 질문을 해 본 적은 없다. 어릴 적부터 그저 손에 잡히는대로 책을 읽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교과서라면 사정은 달라서 밑줄도 긋고 노트에 요약도 하며 읽지만 수험용 책이 아닌 일반 서적을 그렇게까지 정성을 들여(?)읽지는 않았던 것이다.


생각해보니 그렇게 읽은 책들은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곧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감동을 많이 받았거나 완전히 새로운 지식을 습득해 나 스스로 감탄한 정도가 아니면 얼마 후에는 이책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가물가물해지고 나중에는 분명히 읽은 기억은 있음에도 내용이 생각나지 않는 난감한 상황을 겪게 되곤 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이었을까?

분명 무언가 내 독서 방법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정확히 그 문제점은 무엇이고 어떻게 해결을 하면 좋을지 문제 의식만 가질 뿐 굳이 해결해야겠다는 적극적인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접한 책이 애들러의 '독서의 기술'이다. 마치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연상시키는 책 제목인데 '사랑의 기술'이 그러하듯 도대체 책을 읽는데도 기술이 필요한가에 대한 의문을 증폭시키는 제목이었다.

책장을 넘겨갈 수록 처음의 생각, 그러니까 책을 읽는데 기술따위는 필요없어! 라는 내 생각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이런, 내가 왜 읽은 책이 다시 기억이 나지 않는지 이제 이해가 가는군..' 출근길에 지하철에서 스스로 감탄을 했다.

책 자체의 느낌은 조금 낡은 느낌이다. 범우사에서 출간된 이책은 번역체도 다소 딱딱하고 종이질이라던가 디자인도 어쩐지 오래되어 보인다. 거기에 제목까지 독서의 기술이니 어지간해서는 책장을 넘기기 힘든 책임은 분명했다. 그럼에도 내가 이책을 끝까지 그리고 줄을 치며 메모를 해가며 읽은 것은 그동안의 잘못된 독서 습관에 대한 반성은 물론이고 이제부터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내 나름의 방향을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번역이 조금 오래된 맛이 있기는 하지만 책장을 넘기기에 어색할 정도는 아니어서 중고등학생들도 조금만 집중을 하면 읽어나갈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이책은 중고등학생들에게 적합하기도 하다. 단지 수험 목적이 아닌 앞으로 대학에서 학문을 해 나가는데 있어 참 많은 시사점이 될만한 내용들이 많기 때문이다. 물론 애들러의 일종의 독서의 공식은 일반론이다. 자기 스스로 이 방법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서법을 찾고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흔히 물고기가 아닌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말을 하는 데 내 생각으로는 바로 이책이 그 방법을 가르쳐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자세히 책을 읽다보면 이미 본인이 알고 있는 내용들도 상당수 될 것이다. 책을 읽어 나갈 때 메모를 한다던가 주제를 뽑는다던가 목차를 먼저 읽고 요약을 해본다던가 하는 내용이다. 뻔히 알고 있는 내용임에도 오히려 우리는 실천에는 더디다. 애들러는 그 점을 정확하게 짚고 있고 나아가 우리가 뻔히 알고 있는 것들을 이어붙여 완성된 독서로 이르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열심히 책을 읽고는 있는데 도무지 내가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 곤란을 느낀다면 다른 책은 일단 접어두고 이책을 읽기를 권한다. 그리고 이책을 읽어나갈 때는 애들러가 제시한 독서의 기술을 바로 적용해서 읽어보기를 권한다. 어쩌면 지루하고 단순한 작업의 연속일 수도 있겠지만 그 작업을 마친 후 상당히 진보해 있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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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글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스스로를 드러내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인식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그가 많은 지식으로 무장을 하고 있더라도 기본이 되어 있지 않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짧은 지식과 숫자놀음..화려한 형용사로 현학적인 글로 상대방을 비난해봤자 스스로의 위선을 드러내는 것외에는 별것도 아니다. 비평과 비난의 차이조차 모르는 그런 글을 굳이 내 블로그에 남겨둘 이유가 없어 삭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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