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신과 다윈의 시대

EBS 다큐프라임 제작팀 저
세계사 | 2010년 09월

내용     편집/구성    




사람이 어디에서 왔느냐..하는 문제는 아마도 유사 이래로 끊임없이 제기되어 온 문제 중의 하나가 아닐까? 논의의 깊이나 과학적인 증명, 이론의 무장 정도는 과거와 지금이 다를지 모르겠지만 근본적인 의문 즉 "사람은 다른 동물이 진화한 것인가 아니면 원래부터 있던 존재인가?"라는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큰 틀에서의 변화는 없다고 생각된다.

이책은 그 논란의 중심을 주제로 삼고 있다. 다른 방송이 아니라 EBS이기 때문에 주제를 다루는데 있어 조금은 여유가 있었다는 느낌도 든다. 물론 결론은 내려지지 않고 있다. 한 번의 방송으로 혹은 한 권의 책으로 답이 나온다면 이 문제가 이토록 오랫동안 남아 있지는 않았을테니 말이다.

아무튼 이 주제가 어려운 것은 과학과 종교라는... 양립이라는 것이 부적당할 수도 있는 두 개념이 양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과학과 종교가 부딪히는 것이 맞는 것일까라는 개인적인 질문은 차치하고라도 이 충돌 역시 제법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최근에는 천사와 악마 같은 책(영화)을 통해 일반인들에게도 제법 심난한 주제가 되기도 했지만..

이책에는 양극단의 입장이 소개되어 있다. 한편의 생각을 지지하고 있는 입장이라면 다른 한편의 생각이 와 닿지 않을 수도 있지만 종교나 과학에서 조금은 중립적인 입장을 가진 내가 보기에는 제법 괜찮은 내용이다. 작은 바람이라면 극단의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른 극단의 생각을 좀 더 이해해주었으면 하는 것인데 책을 읽어 봐도 역시나 쉽지 않은 일은 분명하다.

종교와 과학이 다루는 분야는 많이 다르다. 한쪽은 증명하기 어려운 정신적인 부분을 다루고 있고 한쪽은 증명해야 하는 사실적인 부분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어느 한쪽도 완벽하게 자신의 분야를 해석한다거나 풀어내고 있지는 못 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상황에서 그러니까 각자가 자신들의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한 상황에서 너무나 극단적인 부분으로 충돌을 하는 것은 오히려 더 많은 오류와 문제들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 싶다.

세상을 움직여 온..그리고 지금도 세상을 움직이고 있는 두 분야다. 종교와 과학.. 극단적인 대립이 아니라 같이 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물론 그런 작업도 진행 중이지만)...

결국은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문제를 다룬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기존 블로그가 외부 도메인을 사용하던 것이었는데 이 도메인을 굳이 유지할 필요가 없어 그냥 티스토리로 복귀했다. 제법 오래 사용하던 도메인을 버리고 나니 블로그 유입 수가 상당히 줄어들었다. 네이버에서는 친절하게도 기존 도메인으로 접속이 안 되니 접속 주소를 바꿔달라는 메일을 보내왔다.

그러고보면 초기 블로그를 시작할 때는 참 여기저기 열정적으로 돌아다니며 홍보에 열을 올렸었다. 여기저기 도메인 등록도 하고 각종 메타블로그에서 활발하게 활동도 하고 그랬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제법 시들해진 것도 사실이다. 이번에 티스토리로 돌아오면서 최대한 블로그를 간단하게 변화시켰다. 광고도 없고 위젯도 없다. 말 그대로 처음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더 기분이 상쾌해진다. 무엇에건 그것이 얽매어버리면 주종이 뒤바뀌기 마련이다.


요즘은 SNS의 열풍으로 트윗이 소위 대세가 되어 가고 있다. 사실 블로그라는 것도 실시간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가장 빠르게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트윗같은 어플리케이션이 인기다. 사람들은 그렇게 마음이 급해져간다. 내가 어떤 말을 하면 바로 그에 대한 답을 듣고 싶어 한다. 하지만 시간이 갈 수록 직접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는 것보다 휴대폰 문자나 메신저 트윗과 같은 대안을 통해 소통하기를 원하는 것같다.

이러다가 인류는 손가락은 길고 머리와 눈만 큰..그리고 발은 퇴화되어 버릴지도 모르겠다...


내가 인간의 양면성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데미안을 읽고 나서다. 헤세의 소설은 전반적으로 내 인생에 일종의 방향타와 같은 역할을 해 주고 있는데 어린 시절 접했던 데미안은 '두 개의 세계'에 대해 내게 강한 인상을 심어줬고 그 영향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번에 읽은 책은 고전이라면 참 오래된 고전 중의 하나인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다. 오래 전 이 책을 읽을 때 같이 있던 책이 스탕달의 '적과 흑'이었는데 A와 B라는 제목 형식이 두 권이 유사해서인지 제법 흥미가 있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두 권 중에 내게 좀 더 자극적이었던 책은 적과 흑이었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베게로 써도 좋을만한 두께의 죄와 벌을 다시 읽었다.




죄와 벌이라는 어쩌면 두 개의 양립하는 단어의 나열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책은 내 기준에서 생각하면 반드시 양면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아무튼 그 문제는 차치하고 책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자. 아마 이 책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책 전체를 읽지는 못했어도 이런 책이 있다는 사실은 대충 알고 있을 수도 있고 제목에서 시사점을 얻어 누군가 죄를 짓고 벌을 받았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여기서 좀 더 나아가면 '나폴레옹은 수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도 영웅이 되었는데 왜 나는 쓰레기같은 인간 하나를 죽인 것으로 이런 대가를 치러야 하나"라는 문장을 기억할 수도 있다.




내가 바라보는 죄와 벌의 주제는 어쩌면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숙고라던가 신으로의 귀환 혹은 사회주의적인 시각에서의 논평과는 거리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역시 이는 앞서도 적은 데미안과 두 개의 세계의 영향이라고 보면 좋을 것 같다.

이 책에 등장하는 두 명의 주인공(적어도 내 기준에서는)인 라스꼴리니코프와 쏘냐 모두 두 개의 세계 안에 존재한다. 하지만 그 두 개의 세계는 결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라스꼴리니코프가 대학중퇴자에서 살인자로 쏘냐가 여염집 처녀에서 창녀로 그 신분을 바꾸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바로 1분 전만 해도 대학중퇴자와 숙녀였던 존재가 살인자와 창녀로 변하지만 그들의 본질에는 차이가 없다. 살인자가 되었건 창녀가 되었건 그 사람은 그 사람 자체인 것이다-물론 여기에 1분 전의 나와 1분 후의 나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해석(상당히 유효한 해석이지만)을 붙일 생각은 없다.

다시 말하면 누구나 대학생에서 살인자가 될 소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누구나 양가집 규수에서 창녀가 될 소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신분의 파격적인 변화도 아니고 갑자기 나락으로 떨어져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것도 아니다. 단지 그 사람의 존재의 양식이 순간적으로 변할 것일 뿐인 것이다. 사실 이런 생각으로 이 책을 해석하면 마지막 장면에 대한 해석은 제법 어려워질 수도 있다. 하지만 신으로의 귀환 역시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모습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큰 무리는 없다.

아무튼 나는 이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가질 수 있는 변화의 양식이 얼마나 많은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나 라스꼴리니코프의 심리 변화의 모습을 보면 무척 흥미진진하다. 결국은 동일한 존재 안에서 얼마나 많은 인간의 모습이 존재하는가...

제 아무리 고상한 척 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구석에서는 음탕한 범죄의 계획을 짜고 있는 것이고 지독하게 처절한 운명 속에서 고통의 날들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천상에서의 행복을 꿈꿀 수 있는 것이다. 단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껍질에 갇힌 현실의 모습이기 때문에 정확한 평가를 내리기 어려울 뿐이다.




한 가지 기존의 많은 감상들과 엇갈린 내 생각 하나를 더 말하자면 주인공이 결국은 신의 품으로 귀의하여 새 사람이 되는 겉으로 보이는 주제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이 쏘냐의 애정이라는 것에 나는 공감하지 않는다. 아마 작가와도 상충되는 생각이 아닐까 하는데 적어도 앞서 언급한 내 기준에서는 양가집 규수나 창녀는 본질은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한 신분인 쏘냐에게 고결한 성품이 내재해 있다는 식의 해석은 어울리지 않는다.

만약 고등교육을 마친 전도유망한 어느 가정집의 숙녀가 집안의 파산을 막기 위해 창녀가 되었다고 해서 이 아가씨의 근본이 변했다고 생각하는가? 그건 어디까지나 겉으로 드러난 외양에만 집착하는 인간의 얇디 얇은 착각과 허세일 뿐이다. 바로 내일이라도 당신 역시 창녀가 되거나 살인자가 되어 쫓겨다닐 수도 있는데 그럴 경우에 당신은 자신 스스로를 부정할 것인가 자문해보면 대답은 간단히 나온다.



Unreal City,
under the brown fog of a winter dawn,
a crowd flowed over London Bridge, so many
I had not thoght death had undone so many


T.S 엘리엇의 황무지 중 60행부터 63행까지다.

문득 바쁜 일상 중에 발걸음을 멈추고 거리를 바라보면 이제까지 느낄 수 없었던 공허함이

내 주위를 가득 메운다. 거리, 흔적, 사람들이 만들고간 궤적

테두리조차 선명하지 않은 인간군상들의 모습 속에 나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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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된 질서

강자에 의한 착취

부패한 구조

허나 가장 날 실망시킨 것은 사람들의 무책임함이었다

자신들은 무엇하나 창조하는 일 없이

아무 것도 이해하고 있지 못한 주제에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를 발견하면

재빨리 그것을 받아들인 후

타인의 생각에 따라 춤추는 집단들

네트워크라는 인프라가 무턱대고 휘두르는

동기없는 행위가  어떤 무책임한 결과를 가져온다 해도

아무런 책임도 느끼지 못하는 자들

인간은 애초부터 낮은 곳으로 흐르도록 되어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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