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새 올 한 해도 달력 마지막 장만 남기고 있다. 시간이 흐르는 물과 같다는 이야기를 굳이 꺼내지 않아도 세월이라는 단어의 한자를 곱씹어보지 않아도 우리네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인지 아마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또 절실하게 느끼고 있지 않을까? 돌아보면 매 해마다 겪는 일들이 새롭다. 전에는 겪을 수 없었던 아니 관심조차 갖지 않았던 일들이 내게 직접 일어난다. 하지만 한편 생각해보면 이 새로움들이라는 것이 다른 어떤 이들에게는 이미 겪은 일일 수도 있는 것. 결국 우리네 삶이란 대개 비슷한 경험들을 공유하며 서로 엮이는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겨울을 좋아하고 겨울에 어디건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나지만 올해는 예전처럼 그렇게 자주 밖으로 돌아다니지는 못한다. 아직 혼자 잠드는 것이 걱정스러운 어머니때문이다. 올해는 내게 '가족'이라는 단어를 가슴 시리게 새겨주었다. 그리고 '삶', '생명'이라는 단어를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고 고민하게 해 주었다. 또 하나 얻은 것이 있다면 이 짧은 삶 속에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라는 것. 부귀영화를 좇으며 살아갈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들은 정말 봄날 눈녹듯 사라져버리는 허상 자체다. 인간으로서 세상에 태어나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이제는 더 고민하게 되었다.


자연 앞에 서면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작고 하찮기 그지 없다. 여행을 통해 배울 수 있는 큰 교훈 중의 하나인데 요즘은 돌아다니지를 않으니 예전 사진첩을 꺼내어 들춰보는 것으로 대리만족을 하고 있다. 예전에 찍은 사진들을 지금 다시 보면 그 때 찍었던 느낌과 생각과는 또 다른 느낌 그리고 또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어서 좋다. 물론 사진에 반영되는 이미지는 셔터버튼을 누르는 순간의 감정과 당시의 마음상태가 고스란히 찍혀 나오지만 과거의 그 감상을 현재에 극복할 수 있다면 같은 사진으로 두 장의 서로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사진과 여행, 이 두 가지가 정말 축복된 것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아무튼 정신없이 분주하던 한 해의 큰 일들을 마무리하고 이제는 나의 일을 찾기 위해 조금씩 나아가는 요즘이다. 사람과 사람의 인연도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듯히 사람과 일의 인연도 전혀 생각지도 않게 마주치는 인연이 있으리라 생각해본다. 그리고 새로운 인연과 만나게 되는 날. 다시 카메라를 들고 겨울을 걸어보고 싶다. 



시간이 제법 흘렀다. 물론 언제 어떻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득한 기억이 되기에는 아직 부족한 시간이지만 이제까지 살아온 삶을 돌아보고 현재의 삶을 생각하고 앞으로의 인생을 계획하기에는 그리 짧지만은 않은 시간이었다. 사실 살아가는 동안 겪는 일들은 대부분 언젠가 과거에 한 번쯤은 겪었던 일들의 비슷한 반복이지만 완전히 똑같은 반복은 아니기에 매일매일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해도 좋으리라. 

예전에는 그 반복에 조금은 낙담을 하곤 했었지만 그 반복 속에 무언가 다른 모습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는 어떻게 하면 그 반복의 모습을 조금씩 -그리고 내가 주도적으로- 바꾸어나갈 것인가를 생각하게 됐다면 그래도 괜찮은 변화가 아닐까 싶다.

사람에게 하도 실망을 많이 해서 사람과 거리를 두고 싶었지만 결국 삶 그 자체가 사람과의 관계이기에 사람과의 거리를 멀리하면 할 수록 삶 자체와도 멀어진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을 이제야 조금은 이해를 하는 모양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실망을 했다면 그 원인은 그 누군가에게 그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이상의 기대를 내가 주었기 때문이다. 

그 대상이 가족이건 연인이건 혹은 사회에서 만나는 동료나 친구이건 말이다. 크게 바라지 않고 작은 부분에 만족하면 되는데 사람의 욕심이 그렇지 못했고 내 욕심이 그렇지 못했다. 어떤 관계건 내가 희생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준 만큼 받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관계는 틀어져버린다. 아니 준 것과 받은 것의 비교를 애초에 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그런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이 흔히 말하는 성인이나 되야 가능하다고 치부해버릴 수도 있지만 일상의 아주 작은 순간순간을 떠올려보면 그리 어렵지만은 않은 일이다. 우리네 삶이 얼마나 짧고 얼마나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지를 절절하게 겪고 나서야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되니 나도 참 둔한 사람이다. 

삶에 그렇게 대단한 것은 없다. 내 나이에 할 말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담담하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다보면 마음 속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욕심과 욕망 같은 감정들을 조금씩 몰아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렇다고 현실로부터 도피해버리면 안 될 일이다. 

아무튼 올해는 해가 저물어가는 이 시기까지 정말 한치도 예상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다. 살아가는 것 그 자체가 과제가 된 이후의 변화들이 무엇보다 크겠고 그 변화 속에서 돌아본 지난 과거의 시간들이 사실은 그렇게 거창하고 대단한 것들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 또 올해 느낀 소회랄까. 어떤 일이건 어떤 사람이건 그 대상에 의미를 너무 부여하지 않을 일이다. 

그동안 나는 너무 편하게 쉽게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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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2001년 겨울로 기록이 남아있는데 강화 어디쯤이 아니었을까. 그때만 해도 자세하게 기록을 남기지는 않았으니... 필름 스캔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게 어쩐지 마음에 든다. 기종은 F100에 렌즈는 80-200mm, 필름은 코닥 수프라였던 것 같다. 스캐너는 늘 같은 LS-4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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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으로 한 걸음 돌아가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일까 생각을 하다가 예전부터 내게 익숙한 일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내게 가장 익숙한 일이라면 역시나 글을 쓰는 일, 사진을 찍는 일 그리고 운전을 하는 일인데 일단은 글과 사진을 다시 추스려보는 것이 좋겠다 싶었다. 사실 과분한 카메라를 2대나 가지고 있으면서도 늘 먼지만 쌓이게 방치해두고 있는 것이 현실인지라 어디 장터에라도 내놓으면 좋은 값을 받을지는 몰라도 지금의 내게는 장식품 정도의 역할도 못 하고 있기 때문에 꽤나 미안한 마음도 들었기 때문이다.

사진이란 어디를 가야 비로소 찍을 수 있는 것이 아닌데도 예전에는 '출사'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였었다. 특히나 디지털이 일반화되기 이전의 필름카메라 시절에는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것 자체가 남들의 시선을 끄는 일이어서 어쩐지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요즘은 카메라 둘러메고 다니는 것(오히려 SLR은 촌스러워 보일 지경이다)이 전혀 어색하지 않으니 숫기없는 내게는 꽤나 좋아진 시절이다.

테라야마 슈지의 "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라는 구호(?)도 있듯이 일단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나가면 무언가 세상이 달리 보이기 마련이다. 한 가지 늘 잊는 것이 있는데 카메라 파인더를 통해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만큼 세상 역시 나를 다르게 본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이것을 좀처럼 알아차리지 못하고 '나' 위주의 사진을 찍었었는데 그래서는 일방적인 사진만 나올 뿐이다. 참 깨닫기 어려웠던 부분이다. 

모델 사진을 찍어도 모델과 눈이 맞았을 때 찍은 사진이 좀 더 실감이 나듯이 일상의 소소함을 찍을 때도 그 일상이 나를 바라보는 순간들을 잡아보자라고 생각하면 좀 더 사진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앞으로 사진을 찍으면서 늘 염두에 두고 싶은 생각이다.

아무튼 조금씩 일상으로 돌아가려고 노력 중이다.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그런 일상에 익숙해야 하기 때문이다.


Nikon F5, AF Nikkor 24-85mm F2.8-4D, Ilford Delta 400, LS-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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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내게 매년 어김없이 커다란 기억의 선물 보따리를 안겨 주곤 했다. 올 겨울은 아직 뭔가 크게 기억이 될만한 일은 없지만 1월과 2월이 남아 있으니 무슨 일이 일어날지 한편에서는 기대도 되고 한편에서는 불안한 마음도 없지는 않다. 겨울은 무채색의 계절이고 무채색과 어울리는 사진은 역시 흑백이다. 흑백사진은 언뜻 보면 색이 없는 것같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컬러사진보다 더 많은 빛의 흐름을 발견할 수 있다. 디지털로 넘어오면서 흑백현상이라는 단어가 사라져버리고나서는 좀처럼 흑백 사진을 찍지 않게 되지만 그래도 역시 사진은 흑백..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분명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컬러인데 왜 흑백이 주는 느낌이 더 강할까 생각을 해본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흑백 사진을 찍을 때 좀 더 신경을 쓰는 것도 한 원인이 아닐까 한다. 흑백사진을 찍을 때는 소위 존 시스템을 머릿속에서 부지런히 계산해야 한다. 여기는 얼마고 저기는 얼마니 전체적으로 얼마나 나오겠다..이런 계산을 하고 구도를 잡고 조리개와 셔터 속도를 조절하고 하는 그 모든 과정이 순식간에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사실 흑백 사진을 찍는 일은 꽤나 고된 작업이기도 하다. 


요즘이야 그냥 RAW모드로 차라락 찍어 버리고 집에 와서 컴퓨터로 수정을 하면 되니 예전의 그런 고됨이 없어 편리할지는 몰라도 왠지 사진에 영혼이 없는 느낌이 든다. 막말로 쨍하고 화려한 사진은 많지만 마음에 와 닿는 사진은 갈 수록 적어진다는 말이다. 사진을 마우스로 이리저리 클릭해서 만들어낸다는 게 여전히 어색하지만 이것도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면 받아들여야 할텐데 그게 쉽지가 않다. 

하지만 세상이 변화하고 있는데 계속 제자리에 앉아서 '디지털 세상은 반갑지 않아. 아날로그가 제일이야'라고 외쳐보아야 그저 과거에 집착하는 것일뿐이다. 디지털 시대에 어울리는 아날로그를 찾아야 그것이 제대로 아날로그를 즐기는 법이다. 나는 여태 이런 생각은 하지 않고 변화된 세상이 낭만이 없네 하며 팔짱만 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래서는 그저 과거에 매여 사는 꼴밖에 되지 않는데도 말이다. 마찬가지로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에 영혼이 있네 없네 하는 것도 같은 속좁음이다. 그래도 옛것이 좋아라고 하기보다 좋은 옛것을 요즘의 것과 어울리게 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흑백 사진은 인화물을 받아 들고 그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에 뭔가 쿵하고 내려 앉는 것들이 있다. 물론 이 모든 느낌들이 나 혼자만 느끼는 그런 것이라 해도 나는 그런 느낌이 좋다. 현상된 슬라이드를 라이트박스에 비추어 보는 일보다 흑백 사진이 인화된 인화지가 더 반가운 것이 내 사진 생활의 특징이라면 특징이었다. 지금도 방 한 구석에 가지런히 쌓여 있는 필름 보관함과 인화된 사진 앨범을 열어보면 그렇게 오래된 내 추억들이 하나 둘 현실처럼 느껴지곤 한다. 분명 2차원의 종이인데도 말이다.

디지털로 넘어온 지금도 흑백에 대한 미련은 여전하다. 하지만 아직 디지털 카메라로 적극적으로 흑백 사진을 만들어본 적은 없다. 다음에 카메라를 들고 나가면 온전히 흑백만으로 찍어볼 생각이다. '디지털이니 현상도 안 되고 아날로그의 느낌이 없어!' 라고 계속 이야기하는 것보다 그래도 이 녀석들을 가지고 이전의 느낌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를 연구해보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RAW모드에도 흑백 모드가 있다. 단순히 컬러 사진을 흑백으로 변환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흑백으로 이미지를 잡아내는 것인데 아직 이 모드는 사용해본 적이 없다.

디지털로도 이전의 필름 카메라가 만들어낸 느낌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도구가 아니라 그 도구를 이용하는 사람이다. 만약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필름 카메라로 만들어냈던 그 느낌을 만들어낼 수 없다면 기계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내가 변한 것일 것이다. 과거가 아름답고 추억이 아름답다고 느끼면서 현재에는 그런 기억을 만들려 하지 않는 것 역시 내가 변한 것일뿐이다. 바라봐야 하는 것은 더 이상 지난 기억이 아니라 지금 눈을 뜨고 바라보는 오늘의 하늘이다.


Leica M6, Summicron 35mm f/2.0 asph, Ilford PanF, LS-40



새벽 4시 50분, 세상이 깨어나기에는 약간 이른 시간 집을 나선다. 왜 태백에 가려고 했는지 뚜렷한 이유는 없었다. 비우고 싶다는 생각이 우선이었고 차가운 바람을 좀 맞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달까. 


시외버스를 타고 태백시외버스터미널에 내려 유일사행 버스로 갈아탄다. 예전에 올랐던 코스와 반대로 걷는다. 1년 전에 이곳을 지나며 남겼던 발자국과 기억들을 홀로 걸으며 하나 둘 떠올려 보고 또 그렇게 지워나간다. 조금은 가라앉은 기분으로 산행을 하게 된 것이 조금 아쉽긴 했지만 언젠가는 거쳐야할 일이라고 생각을 하고 천천히 발길을 옮겨본다. 유일사 입구는 어느 산악회인지 단체로 와서 줄을 서서 올라가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바위 위에 나무가 자란다. 생명력이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살아있다는 것에 새삼 감사하게 된다. 비록 유한한 삶이지만 그 살아가는 동안에 적어도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가족이 있다면 그 가족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스스로의 삶을 온전하게 지켜가는 일이다. 자신을 우선 지키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유일사에서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제법 가파른 오르막의 연속이고 사방이 막혀있어서 경치를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어느 정도 올라가면 서서히 주변이 밝아지며 산의 웅장함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순간이 온다. 그래서 한 걸음 한 걸음이 소중하다. 앞으로 걷지 않으면 아무 것도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주목 군락지에 다다랐지만 아쉽게도 눈꽃은 피지 않았다. 내심 지난 날에 눈이 내려 눈꽃을 기대했지만 고고하게 서 있는 나무들은 가지 위에 눈이 쌓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슬슬 칼바람이 불어 온다. 머릿속이 하얗게 될 정도로 차고 강한 바람. 그 바람에 그냥 기대본다. 발 아래로는 어디가 끝인지 모를 긴 산자락이 펼쳐져 있다. 


역시 태백산은 설경이 제맛이다. 눈이 이렇게 아름답다는 것에 그저 감탄할 따름이다. 새벽같이 일어나 집을 나온 피로도 이곳에 이르면 느껴지지 않는다. 올라오는 동안 숨을 헐떡이며 내뱉었던 땀방울들도 찬바람에 날아가 버리고 이곳 민족의 영산이라 불리는 태백산 정상에서는 그저 바람 소리만 거세게 들려올뿐이었다. 


좁고 급경사인 길을 올라오니 이런 넓은 공간이 있다는 게 참 신기할 정도. 여기서부터는 거의 평지로 이동하게 된다. 날이 제법 맑아서 눈에 반사되는 햇살이 강하다. 손을 내밀어 만져본 눈은 도시의 그것보다 훨씬 차갑고 투명한 느낌이 든다. 분명 같은 눈인데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이렇게 다르다. 이곳의 눈은 그냥 집어 입에 넣어도 괜찮을 것같다.


아마 눈이 없었다면 나무들이 을씨년스러운 느낌을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견딘다는 주목. 내가 보고 있는 이 나무들은 어느 천년의 흔적들일까 한참 바라본다. 천 년이라는 세월동안 나무들은 얼마나 많은 바람을 맞고 또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았을까. 그 세월동안 나무들은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모두 견뎌온 것이다. 인고의 세월. 태백의 주목이 살아온 시간은 그런 것은 아닐까.


그래서인지 나무들이 내밀고 있는 가지의 방향이며 모양은 우리의 상상을 넘어선다. 애초에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의 단위를 넘어선 것이고 나무들에게 내가 지금 바라보는 이 순간은 정말 찰라도 아닌 짧은 순간일테니 지금 내 눈으로 보는 나무의 모습은 그저 오묘하고 신기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저 나무들은 이곳에 서서 세월의 바람을 견디어 나갈테지..


여기쯤 오면 사람들의 흔적이 제법 줄어든다. 올라갈 때 그렇게 북적이던 사람들이 얼마 남지 않은 천제단으로 서둘러 이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풍경을 놓치고 빨리 정상에 오른다한들 아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 산행을 하다보면 무조건 빨리빨리 정상에만 이르는 것에 집중하는 이들을 보게 되는데 그 사람의 취향이니 뭐라 할 것은 아니지만 빨리 오르면 빨리 내려가야 하는 법이다. 힘들여 멀리까지 와서 눈만 돌리면 볼 수 있는 장관을 그냥 지나쳐버리는 것은 조금 안타깝다.


그리고 도착한 천제단 중의 하나인 장군단이다. 이 제단은 보존 상태가 조금 열악하고 규모도 작아 사람들이 몰리는 곳은 아닌데 내게는 태백산의 기억의 정점에 이른 곳이기도 하다. 한참을 이곳에 머문다. 


이 표지석은 기존에는 없던 것인데 작년 9월에 이곳에 새로 세워진 것이다. 1년만에 다시 찾은 태백의 정상에서 마주치게 된 유일하게 달라진 풍경은 이 표지석이었다. 백두대간의 중추이며 민족의 영산이라 불리는 태백산은 우리나라의 12개의 명산 중의 하나로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는 의미가 큰 산이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 태백의 정기를 받는다는 표현을 많이들 쓰는데 오늘 산행에서 정기를 받았을지 아니면 정기를 산에 나누어 주었을지는 감이 오지 않았다.


멀리 보이는 천왕단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태백산 사진에 자주 등장하는 모습인데 정상에 눈꽃이 피지 않아 극적인 느낌은 적었지만 나름 사람들이 걸어가는 모습이 멋드러져 보인다. 산이란 하루에도 수십 번 날씨가 변화하는지라 어느 방향에서 하늘을 바라보면 푸른물이 떨어질 정도로 새파랗지만 어느 방향에서 바라보면 당장이라도 뭔가 내릴 것처럼 어둡기도 하다. 내심 눈이라도 내리길 바랐지만...


어지간해서 이 표지석을 제대로 찍기란 불가능하다. 평일인데도 사람들이 제법 많았고 이 표지석 앞에는 늘 사진을 남기려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기 때문에 이리저리 카메라를 돌려 최대한 사람이 안 보이는 시점에 찍어야 하는게 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은 편이 아닌가 싶은데...표지석 위에는 사람들이 뭔가를 남기고 간 흔적이 조금은 흉물스럽게 남아있다. 자기들이야 떠나면 그뿐이지만 앞으로 수 천년의 세월을 이곳을 지켜야할 돌 입장에서는 반가운 일은 아니지 싶다.


여기서 한 번 고민을 한다. 문수봉까지 갈 것이냐 말 것이냐인데 오늘의 이동이 상당히 치밀한 동선을 따라 움직이는 지라 아직 가 보지 않은 문수봉을 거칠 경우 차 시간이 어찌될지 몰라 일단 오늘은 생각을 접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내려가보니 차 시간까지 20여 분 정도 여유가 있었는데 다음에 올라온다면 문수봉을 거치는 코스로 이동해볼 생각이다. 아마도 내년 겨울이 되어야겠지만...


당골로 하산하는 코스에서 단종비각을 마주칠 수 있다. 역사의 지난 끈들. 당사자들은 이미 없고 기억의 흔적조차 사라진 지금이지만 세월 속에 당시의 장면들은 이렇게 남아 오가는 이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우리네 삶 역시 언젠가 그 끝에 이르러 우리와 우리를 기억하는 이들조차 사라지겠지만 우리가 남겨 놓은 흔적들은 조각조각일지라도 여전히 남아 누군가 우리를 기억하게 해 줄 끈으로 남아있을 것을 생각하면 뭔가 마음이 애잔해지는 느낌도 든다.


용정의 물은 예나 지금이나 마셔볼 기회가 없다. 이곳을 찾을 때면 언제나 얼어있기 때문인데 용정의 물을 한 모금 마시기 위해서라도 눈이 내리지 않는 계절에 이곳을 다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라도 이유를 하나 만들어두면 된다. 그 이유가 비록 나에게만 해당되는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것만으로도 내몸을 움직여 다시 태백을 찾기에 충분할 테니 말이다.


그리고 휴게소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 먹는 사발면 한 그릇. 늘 그렇듯이 나는 산행을 할 때 무엇을 먹지 않는 나쁜 버릇이 있다. 물 한 통이나 이온 음료 한 통이 전부인데 습관치고는 몸을 꾸준히 움직여야 하는 산행에서는 좋지 않은 것이다. 아마도 예전에 운전을 할 때의 습관이 산행에 그대로 옮겨온 모양이다. 하지만 오늘은 어느 층계참에 앉아 멀리 산을 보며 라면을 먹는다. 다 내주었으니 이제 채우고 가야 한다는 생각이었을까. 뭔가 짠한 마음이 들어 라면을 먹는지 다른 무엇을 먹는지 모르고 먹는다. 하얀 수증기가 안경을 온통 뿌옇게 만든다.


하산길은 조금은 지루한 내리막의 연속이다. 이 사진에는 나도 나와있다. 이렇게 어느 겨울 날의 태백산에 내 그림자를 찍어 두었다. 해가 뜨면 이 길가에 내 그림자는 깨어나고 해가 지면 깊은 잠에 빠져들며 앞으로 남아 있는 시간들을 기억하겠지. 그리고 돌아서서 내려오는 길에 내 마음의 한 조각을 떼어 그림자의 주머니에 넣어 준다. 잘 간직하고 있으라고 말하면서...


"아직 만나지 못한 내 그리움을 찾으러" 나뭇가지에 묶여 있는 작은 천조각에 쓰인 글을 보고 또 본다. 오늘 내가 태백에 온 것은 이것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산행에서는 그 산행을 나 스스로에게 납득시킬 수 있는 이유가 불현듯 찾아지기도 한다. 기억을 지우려..라는 조금 엇갈린 이유로 집을 나섰지만 결국 내가 이곳을 찾은 것은 아직 만나지 못한 내 그리움때문이었다. 그 그리움의 대상이 무엇인지 혹은 누구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지만 그저 저 글귀를 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것이면 됐다.


그리고 다시 도시로 내려왔다. 짧고도 또 짧은 하루였다. 이른 새벽에 집을 나서 자정이 가까울 무렵 다시 집에 들어갔음에도 오늘 하루는 내게 너무나 짧았다. 


오늘 글은 산행기라 하기보다는 하루의 일기같은 느낌이다. 

하루의 일기라 하기보다는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는 해묵은 일기장같은 느낌이다.

해묵은 일기장이라 하기보다는 아직 만나지 못한 그리움을 찾아 떠나야 할 도착하지 않은 기차 시간표 같은 느낌이다.


Nikon D700, AF Nikkor 35mm f2D, Panasonic LX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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