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라는 이름은 우리나라의 어떤 시기에는 금기시되는 이름이었다. 막스 베버도 오해를 사곤 했었던 시절이니 칼 마르크스라는 이름은 아무래도 조심스러운 그러나 한편에서는 호기심의 대상인 양면성을 가진 그런 존재였다. 대학 시절 김수행 선생의 자본론을 들고 다니며 폼을 잡았지만 정작 그안에 담긴 내용들은 거의 소화해내지 못했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지금 류동민 교수의 마르크스을 만나게 되었다.

이책은 마르크스의 저작은 아니다. 정치경제학 교수인 저자가 마르크스 철학을 이 시대의 상황에 대입해 좀 더 이해하기 쉽게 풀어쓴 책이다. 쉽게 풀어쓴 책이지만 마르크스 철학의 큰 틀을 가능한 많이 담고자 노력을 한 까닭에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아니 글자글자를 읽어가는 동안 제법 오랜 생각을 해야한다는 표현이 옳을 것 같다.

류동민 교수는 마르크스 철학을 사랑과 희망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마르크스의 이미지와는 많이 다르다. 아마도 시대적인 흐름에 의해 마르크스가 왜곡된 탓이리라. 류 교수는 마르크스 철학과 오늘날 우리나라의 현실을 연결지어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래서인지 공감되는 부분이 많고 이해가 조금 쉬워진다. 마르크스와 시대 모두를 이해하지 않고는 쓰기 어려운 작업을 담담히 이어가고 있다.

류 교수가 사랑과 희망을 마르크스에 대입한 이유. 그것이 이책의 주제다. 책의 마지막장을 덮을 때 독자 스스로 그 해답을 어렴풋하게나마 깨닫는다면 필자의 노고는 위로받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어려울 것 같지만 천천히 그리고 꼼꼼하게 문장을 읽어가다보면 '왜'라는 처음의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된다.

책을 읽기전 우선 제목을 들여다봤다.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 아프다...아프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 아픔은 사람마다 느끼는 것이 다르고 그 원인 역시 제각각일테다. 실연이 원인일 수도 있고 경제적인 것이 원인을 수도 있고 세태가 혹은 정치하는 모양새가..등등 나를 둘러 싼 모든 것들이 나를 아프게 하는 원인일 수 있다. 

류 교수는 이런 원인들 그리고 그 해결책을 마르크스로부터 찾는다. 그리고 참 신기하게도 우리를 아프게 한 많은 원인들이 마르크스의 언어로 풀이가 되어 가는 것을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느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체제의 바깥에서 체제를 전체로서 비판하는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견해를 바탕으로 관계성을 끌어 내고 연인들의 관계로 이어간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서로의 사람이라는 관계 속에서만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 사랑이 갖는 진정한 한계를 깨닫지 못합니다'라고 류 교수는 풀어 간다. 그리고 그 관계의 바깥에서 그 체계를 성찰할 때 그 사랑의 한계를 깨닫게 된다고 설명 한다. 책 전체가 대개 이런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어 마르크스 철학의 딱딱함과 인간적인 부분들을 적절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저자가 서두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책은 인간의 개인적인 소외에서 출발하여 사회적인 관계로 그리고 그 사회적인 관계에서 규정되는 개인으로 돌아오는 흐름을 타고 있다. 그리고 그 관점은 비록 마르크스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는 다를지 몰라도 마르크스를 이해하는데는 더없이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동안 마르크스라는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저었다면 류 교수가 이끄는 여행에 참가해보자. 조금은 친근해진 마르크스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아무것도 아니란다 얘야
그냥 사랑이란다
 
사랑은 원래 달고 쓰라리고 떨리고 화끈거리는
봄밤의 꿈 같은것
그냥 인정해 버려라.
그 사랑이 피었다가 지금 지고 있다고

그 사람의 눈빛,
그 사람의 목소리,
그 사람의 몸짓

거기에 걸어 두었던 너의 붉고 상기된 얼굴,
이제 문득 그 손을 놓아야 할때
어찌할바를 모르겠지

봄밤의 꽃잎이 흩날리듯 사랑이 아직도 눈앞에 있는데
니 마음은 길을 잃겠지.
그냥 떨어지는 꽃잎을 맞고 서 있거라.
별수 없단다
소나기처럼 꽃잎이 다 떨어지고 나면 삼일쯤 밥을 삼킬수도 없겠지
웃어도 눈물이 베어 나오겠지.
세상의 모든거리, 세상의 모든 음식, 세상의 모든 단어가
그 사람과 이어지겠지

하지만 얘야
감기처럼 앓고 지나가야 비로소 풍경이 된단다
그곳에서 니가 걸어 나올수가 있단다.

시간의 힘을 빌리고 나면
사랑한 날의 , 이별한 날의 풍경만 떠오르겠지
사람은 그립지 않고
그날의 하늘과 그날의 공기, 그날의 꽃향기만
니 가슴에 남을거야

그러니 사랑한 만큼 남김없이 아파해라.
그게 사랑에 대한 예의란다.
비겁하게 피하지마라
사랑했음에 변명을 만들지마라.
그냥 한 시절이 가고 ,너는 또 한 시절을 맞을뿐

사랑했음에 순수했으니
너는 아름답고 너는 자랑스럽다.

-서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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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박완서 저
현대문학 | 2010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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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지 못한 길은 어디였을까..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가 있다. 시의 내용이야 어떻든 우리는 살아가면서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다. 그 길이 나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가지 않은 길이건 아니면 어떤 외적인 의지에 의해 가지 못한 길이건 그 길은 우리에게 늘 미련아닌 미련으로 남아 있기 마련이다.

박완서 작가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라는 생각이 책장을 넘기게 한다. 그러나 실상의 내용은 못 가본 길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오히려 그가 걸어왔던 길에 대한 이야기였다. 마치 작가의 앞에 앉아 담소를 나누듯이 차분하게 쓰인 글을 읽어가면서 어느샌가 나는 이책의 제목을 잊고 말았다.

소설가는 분명 소설을 쓰는 사람이지만 그네들이 쓰는 산문, 수필은 소설 못지 않게 읽을거리가 많다. 특히 익히 그 소설가의 소설을 읽은 다음에는 뭐랄까 작가에게 좀 더 친근감을 느끼게 된다고나 할까.. 일반적인 산문을 읽는 것에 비해 좀 더 글에 몰입되는 느낌이다.

이책 역시 마찬가지여서 조용조용한 어조로 작가의 살아온 날들의 이야기를 듣고있노라면 자연스레 미소도 지어지며 말 그대로 책 속으로 빠져 드는 느낌이다. 굳이 책의 첫 장부터 읽어나갈 필요도 없다. 그저 손이 가는 페이지 아무 곳이나 읽어나가면 된다. 

책을 읽으면서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독자들에게 제법 큰 혜택(?)이 된다. 그리고 그런 글을 쓰는 작가를 만난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 아닐까 싶다. 박완서 작가와 같은 시대에 살면서 그의 글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그래서 행복한 일이다. 

물론 이제는 그의 새로운 글을 읽을 수는 없겠지만 한편에서 생각해보면 이제까지의 그의 글을 되돌이켜 읽어볼 수 있는 시간이 준비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소리 없이 나를 스쳐간 것은 시간이었다. 시간이 나를 치유했다. 나를 스쳐간 시간 속에 치유의 효능도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이 사랑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

 
한국인의 에로스
김열규

남자와 여자, 여자와 남자는 떼어놓고 이야기하기 어려운 존재다. 인류가 이어지기 위해서는 가족이 필요하고 가족이란 남자와 여자가 합쳐 자식을 낳음으로써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사랑의 의미에 대해서도 유물론자들은 종족번식을 위한 가상의 감정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분명 이성으로서 남자와 여자, 여자와 남자 사이에는 종족번식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다. 그럼에도 요즘은 어떤가? 늦은 밤 앞서 가는 여자와 뒤에서 가는 남자 모두 불안을 느껴야 하고 엘리베이터에 단 둘이라도 타는 경우가 생기면 서로 고개를 돌리기 바쁘다.

인터넷에서는 연일 남자의 군대이야기와 여자의 임신이야기가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양성이 만나 하나가 되는 것이 자연적인 순리라면 요즘의 모양새는 양성이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야단이다. 사정이 이러니 아예 독신을 선언하기도 한다. 가족을 만들기 위한 성적인 욕구가 아닌 쾌락을 위한 성적인 욕구가 판을 친다. 주객전도라는 말은 오늘날의 남녀관계에 잘 어울리지 않을까?


김열규 교수의 '한국인의 에로스'는 이런 시점의 우리에게 참 적절한 문제 제기를 해 준다. '에로스'라는 제목에 혹시 야한 이야기라도 나오지 않을까 책장을 펼치면 금방 후회하게 된다. 출판사도 지적하듯 "라틴어인 Eros는 사랑의 신을 가리키면서도 Amor와 마찬가지로 남녀 간의 사랑을 가리키기도 한다. 동시에 남녀 간의 성적인 관계도 의미한다. 저자는 Eros가 이런 복합적인 뜻을 가진 점을 취해 남녀 간의 더 넓은 관계를 포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과거 역사와 신화 속의 남녀 관계를 짚어 간다. 이를 통해 오늘날의 남녀관계를 진단하고 처방을 내린다. 기본적인 구조는 이렇지만 문제의 제기와 풀이라는 경계조차 없을 정도로 유연하게 글을 이끌어 간다.

1. 한국의 남과 여 2. 짝짓기와 혼례 3. 또 다른 짝짓기 이야기 4. 사랑, 그 만다라의 얼굴 이렇게 총 4개의 커다란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제목에 대한 선입관과는 전혀 달리 훌륭한 참고문헌의 역할을 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자료와 이야기가 곳곳에 담겨 있다. 우리 선조들의 이야기에서부터 오늘날의 이야기까지 시간과 공간을 넘나든다. 조선 시대의 이야기가 바로 눈 앞에서 펼쳐지고 고교 교과서에 등장하는 작품들의 속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처음 이 책을 읽을 때는 아무런 선입견 없이 처음부터 죽 읽어 가자. 각 장마다 특별한 연계성이 없기 때문에 두 번째 읽을 때에는 아무렇게나 마음 내키는 페이지를 펼쳐 읽으면 된다. 어느 곳을 읽어도 쉽게 빠져 들 수 있는 재미. 김열규 교수의 말빨(?)의 힘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김 교수는 왜 굳이 '한국인의'라는 부분을 강조했을까? 우리 사회가 현대화되면서 등장한 정체불명의 현대식 결혼식은 형식적이고 상업적이다. 가정의례준칙이라는 괴물이 등장하면서 우리만의 고유의 남녀관계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우리의 전통 혼례는 단지 양성이 만나 한 살림을 꾸리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닌 가족과 가족의 만남,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었는데 이제는 그런 정적인 의미는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았다는 것이다. 인륜지대사라는 혼인의 형식이 그렇게 되었으니 혼인의 내용이 알찰 리가 없다. 김 교수가 개탄하는 점은 그런 것이 아닐까..

김 교수는 남녀 관계가 세상 모든 관계 중에 가장 까다롭고 성가시다고 한다. 그말은 곧이곧대로 들을 것이 아니라 그만큼 많은 경우가 있고 지켜야 할 것들이 많은 것이라고 받아들이면 어떨까? 생면부지의 남녀가 만나 혼인을 하고 살을 맞대어 자식을 낳는다는 것은 세상 어느 관계보다 대단한 관계가 아닐까. 그렇기에 어느 관계보다 조심스럽게 그러면서도 진실되게 다가서야 하는 관계가 아닐까 생각된다. 남녀는 적이 아니다. 다른 성으로 받아 들이기보다는 둘이 합쳐 하나의 완성체가 된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신체적인 차이는 눈에 보이는 외양일 뿐이다. 오히려 그 외견 상의 차이를 결합을 통해 완성시키는 것이고 이전에 서로의 마음이 온전히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이런 진부한 이야기를?' 이라고 비판하는 이도 있겠지만 인간 역시 자연이라는 커다란 역사 안에서는 그저 작은 한 부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을 받아들이고 살아간다는 마음으로 남자와 여자, 여자와 남자가 서로를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사랑은 받음이기 전에 베풂이란 것을 내세우고 싶습니다. 내가 받는 것보다는 상대방에게 주는 것에 더 마음을 써야 할 것입니다. 상대를 위하는 것이 바로 내 보람이고 기쁨이라야 할 것입니다. 이 점은 어떤 시대에도 바뀌지 않을 불변의 사랑의 철학일 것입니다." 김 교수의 사랑에 대한 일침이다.

이번에 읽게된 책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입니다. 4대 비극의 하나로 꼽히지만 사실 작품의 이름만 들어왔거나 TV나 영화로 대략적인 내용만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이 보통이지요.  그나마 대중적인 것은 로미오와 줄리엣이고 햄릿의 경우는 제목은 잘 알려져 있지만 정작 내용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번에 다행스럽게도 완역판이 출간되어 셰익스피어 본래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햄릿은 아시다시피 희곡입니다. 따라서 책 전체는 대화로 이어져 있죠. 개인적으로는 소설이나 수필을 쓰는 것보다 대화로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면에서 셰익스피어(실존 논란은 다루지 않겠지만)의 문학적인 재능은 대단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

셰익스피어가 살던 시대의 남녀관은 오늘날과는 많이 다르지만 아무튼 많이들 들어본 대사 중의 하나입니다. 자신의 어머니를 비난하는 장면에 사용된 이 대사는 요즘은 본래 의미와 다르게 패러디용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기는 합니다만..이 말이 나오게 된 배경과 이후의 햄릿의 행동과 대사들을 생각하면 쉽게 패러디에 사용할 표현은 아닌 듯 합니다.

햄릿은 마지막까지 여자들에게 극단적인 실망을 하게 됩니다. 모친에 대한 실망을 전체 여자라는 범주로 확대를 한 것이랄까요. 결국 오필리아도 그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 하고 죽음을 맞게 되죠.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햄릿과 오델로는 여자에 대해 그다지 좋은 감정을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마치 니체의 여성관과도 비슷한 경멸조의 대사들이 종종 비치죠. 사람에 따라서는 너무 극단적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부분만이 아닌 큰틀로 파악하면 될 것 같습니다. 물론 니체의 경우는 좀 다르지만요.


햄릿은 우유부단의 극치였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바는 햄릿은 우유부단하고 결단력이 없는 인물입니다. 'To be or not to be'로 시작되는 연극 상연 전 장문의 독백은 그의 우유부단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지만 전체 대사를 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내면의 고민을 적극적인 행동으로 승화시킨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 어떤 일이건 결의를 하기 전에는 그만한 고뇌와 번민의 시간은 있는 것이고 그만한 고뇌없이 행해진 일이라면 차라리 즉흥적인 것이 아닐까요.

처음 부왕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마지막 장면에 이르기까지 햄릿은 부왕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고 그것을 완수합니다. 중간중간에 나오는 고민과 방황은 오히려 본래의 마음을 숨기기 위한 가장이 아니었나 생각이 들 정도로 햄릿의 복수극은 철저하게 이어집니다. 우유부단이라는 말은 차라리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적당한 것이 아닌가 저는 생각이 됩니다. 




햄릿의 고민은 상당히 깊습니다. 그가 던지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단지 그만의 고민이 아닌 인간으로 살아가는 우리 역시 똑같이 고민해봐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셰익스피어는 햄릿의 독백을 통해 상당히 심오한 인간 본성과 그 방향에 대해 나름의 의견을 제시하고 있고 동시에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바른 것이라는 그만의 가치관까지 제시하고 있다는 점을 여러 번 문장을 새기면서 알 수 있었습니다. 물론 작가의 의도가 진리인 것은 아니지만 생각할 '꺼리'가 주어진다는 것이 우리가 문학작품을 읽음으로써 얻는 또 하나의 보물이 아닐까 합니다.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라는 대표적인 인용구 다음의 문장들입니다. 무려 한 장이 넘게 햄릿의 독백은 이어지는데 햄릿 전체를 관통하는 고뇌와 번민이 모두 담겨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너무도 짦군요. 여자의 사랑같이

제목으로 제가 삼았던 이 문장은 사실 한 문장이 아닌 햄릿과 오필리아의 대화입니다. 첫 번째 대사는 오필리아의 두 번째 대사는 햄릿의 대사입니다. 여자에 대해 어쩌면 극도록 경멸적이 되어 버린 햄릿의 자조적인 대사이기도 하죠. 이 대사에 대해 오필리아는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사실 햄릿과 오필리아의 많은 대화들을 보면 햄릿은 내뱉듯이 이야기를 하고 오필리어는 적극적인 반격(?)을 하지 않습니다. 순결하고 정숙한 아름다움을 모두 가지고 있는 이상적인 여성이라고 할 수 있는 오필리아가 왜 뒤틀린 햄릿의 생각들에 구원의 메시지를 주지 않았는지는 조금 더 고민을 해봐야할 것 같습니다. 차라리 그런 면에서는 리어왕이 좀 더 구체적으로 구현이 되었다는 생각입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매력적인 작품

햄릿은 상당히 양이 적은 편입니다. 집중해서 읽으면 반 나절이면 충분히 읽을 수 있고 내용 역시 어렵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안에 담겨 있는 고민거리는 상당히 많아서 책을 읽고난 후에도 한참의 여운이 남습니다. 저는 보통 이런 책은 한 번 가볍게 읽고 묻어 두었다가 기억이 사라질 즈음해서 다시 읽습니다. 이전의 독서의 편견을 비우고 새로운 해석을 하기 위함인데 햄릿 역시 그럴만한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햄릿이 쓰여진 시기를 생각하면 내용이 진부하고 따분할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웬만한 소설들보다 오히려 매력적인 책입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 희곡의 특성을 감안해서 조금 두께가 늘어나더라도 장별로 확실하게 구분이 지어진 편집이 되었으면 좋았겠다는 점 그리고 글자 크기가 면마다 일정하지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데 편집 상 그런 배려를 한 것이라면 이유를 명시해주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합니다. 또 하나 욕심이라면 햄릿과 같은 책은 평생 소장판으로 가치가 있는데 소장용 양장본이 나와 주면 어떨가 싶기도 합니다. 

한 동안 외부 리뷰를 많이 했는데 시간에 쫓기듯이 책을 읽어야 하는 점이 많이 아쉽네요. 한 권 더 신청을 해 둔 것이 있기는 한데 아무튼 그동안 리뷰를 위해 묵혀만 두고 있던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다시 꺼내 들어야겠습니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 코헬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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