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야 휴대폰이 필수품이 되어 언제 어디서고 손 안의 버튼만 누르면 전화를 할 수 있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전화 한 통 하기란 쉽지가 않았다. 어렵사리 전화를 거는 데 성공을 해도 상대방이 자리에 없거나 받지 않아 버리면 그로써 그 순간의 관계는 더 이상 연장되지 않고 끊어져 버렸다.

특히나 상대가 전화번호를 바꾸기라도 하면 그 관계는 어지간해서는 다시 복원되지 않는다. 몇 년 전의 우리네들의 만남과 헤어짐은 이렇게 애틋한 면이 있었다. 공중전화는 그 이어짐의 끈을 아슬아슬하게 잡아주는 도구였다. 그때가 더 나을까 아니면 너무나 연락이 손쉬워진 지금이 나을까..

연락을 할 수 없어 애태우는 마음이 안타깝고 서글프겠지만 그래도 예전의 그 아날로그적인 만남과 이별이 내게는 더 와닿는다. 인터넷도 없고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 말이다. 손으로 편지를 쓰거나 그의 집 앞에서 기약없는 기다림에 마음 아파하던 그 시절이 오히려 그리워진다.

요즘의 인연이란 맺기도 쉽지만 끊기도 쉽다. 디지털 부호의 휘발성이 그대로 관계에 담긴 까닭이다


Canon EOS-1Vhs, EF 28-70mm f/2.8L IS USM, RDP-III, LS-40, B&W Converted



연일 찌는듯한 날씨다. 원래 여름을 나기가 상당히 어려운 체질이라 여름만 오면 걱정이 앞선다. 예전에는 여름을 그리 타지 않았는데 체질이 바뀌었는지 여름만 되면 맥을 못 춘다. 하지만 사람이야 이래저래 여름을 피해가는 방법이 많지만 원래 추운 곳에 살던 녀석들에게는 이런 찌는 듯한 여름은 고문에 가깝다.


"야! 너는 날도 더운데 왜 돌아다니고 그래. 물 속에 들어와서 좀 가만히 있어. 나까지 더워지잖아!"

"말도 안 듣는구만.. 나는 모르겠다. 그냥 잠이나 잘란다.."

동물원의 녀석들에게 여름은 고문이다. 펭귄들도 마찬가지고 추운 동네에 살다가 남쪽 나라로 와서 이런 더위를 겪게 되니 참 동물 팔자도 알다가 모를 일이다. 문득 인간에게 다른 동물의 거주지를 마음대로 바꿀 권리가 있나 생각이 든다. 정상적이라면 이 녀석들은 북극의 어느 얼음 위엔가 살고 있을 녀석들인데...

동물원의 동물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가끔은 당연스레 생각되는 것들이 어느 날 문득 '이것은 좀 이상하지 않아?'라고 느껴질 때가 있다. 생각도 많으면 병이라는데 굳이 안 해도 될 생각들을 머리에서 끄집어 내는 걸 보면 나도 쉽게쉽게 살아갈 팔자는 아닌 듯도 하다.

아무튼 이 여름은 이제 시작이고 적어도 9월초까지는 지금과 비슷한 날들이 이어질텐데 매년 맞이하는 계절이지만 여전히 내게 여름은 쉽지 않은 계절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여름이 춥다면 이미 여름이 아닌 것일테니까..


Contax Aria, Carl Zeiss 50mm Planar f/1.4, LS40

덧) 보관 중인 사진 폴더에 필름의 이름을 모두 기록을 해 둔 줄 알았는데 카메라와 렌즈만 기록을 해 두고 필름 이름을 남겨 놓지 않은 것이 제법 된다. 슬라이드의 경우 마운트에 넣어 모두 보관 중이니까 들여다보면 어느 필름인지 알 텐데 책장 위에 가지런히 꽂혀 있는 보관함을 열어볼 마음이 아직은 들지 않는다. 스캔하지 않은 또 다른 많은 기억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낮의 도시가 밝을까 싶지만 사실은 밤의 도시가 더 밝다. 낮의 도시는 태양 아래 주어진 빛에 의해 보이는 풍광인 반면에 밤의 도시는 보여주는 빛에 의해 보이는 풍광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무엇인가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낸 빛.. 그 빛에 비친 세상은 낮의 그것과는 조금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순리대로라면 밤은 어둡고 캄캄해서 그 시간동안은 세상이 낮의 열기를 식히고 휴식을 해야 하지만 인간들의 욕망은 밤의 어둠을 멀리 걷어버리고 낮에는 보이지 않던 치부마저 선명하게 드러내버린다. 그래서 가장 편안해야할 밤의 시간은 욕망의 시간이 되어 버리곤 한다.


Contax Aria, Carl Zeiss 35mm Distagon f/2.8, Ilford XP2, LS40


글쎄..그걸 알려고 지금까지 살아왔지만 아직 뭔지 모르겠어..

그러는 자네는 뭐라고 생각하나?


Contax T3, Fuji Reala, LS-40



방안에 오래 된 여행용 트렁크가 하나 있다. 그 트렁크를 열면 후보생 시절 쓰던 가방이 하나 있고 그 가방을 열면 오래된 기억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온다. 어지간해서는 열지 않는... 이제는 기억에서조차 희미해져 가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 가방. 오랜만에 청소를 하다 그 가방을 열게 되었다.

군 시절은 내게는 꽤나 특이했던 시간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학사장교로 군생활을 시작했다는 것부터가 남들과는 조금 달랐고 3년 3개월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이라는 점도 달랐을테다. 경북 영천과 광주를 거쳐 최전방으로 배치되기 전까지 교육생 시절의 크고 작은 이야기들도 돌아보면 제법 재미있었던 기억이다.

초임 근무지가 수색대였는데 생전 운동과는 거리가 멀었던 내가 특공무술 시범을 보일 정도였으니 군대란 참 대단한 곳이지 싶다. 소대장 시절에는 유서를 쓰고 실탄 박스를 싣고 나가보기도 했는데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다들 잘 지내고 있을까.. 외모로만 보면 거칠어보이기만 했던 우리 소대원들..하지만 누구보다 마음이 따뜻한 녀석들이었는데...

중위 진급을 하면서 잠시 일반 대대에서 참모를 하다가 전역할 때까지는 신병교육대에서 교관 생활을 했는데 신병들의 모습을 보면 사람이 참 속한 집단 그리고 복장이 얼마나 그 사람의 정신세계까지 지배할 수 있는가를 직접 체험해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래도 군에서 만난 친구, 선배들이 아직도 친한 벗으로 남아 있다. 어설펐던 여군 장교와의 에피소드는 가끔 떠올려보면 쓴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수류탄 교장에서 수류탄을 그대로 떨어뜨렸던 훈련병 이야기는 아직도 아찔하다. 반면 그때 만난 동기 하나는 얼마 전 지병으로 세상을 등졌으니 인연이란 늘 그렇게 맺고 끊어지고의 반복이 아닌가 싶다.

장교들은 전역을 해도 소위 개구리마크를 달고 나오지 않기 때문에 전역 시절의 계급장이 그대로 박혀 있는 전투복과 전투모도 여전히 남아있고 수료식에서 눈물을 펑펑 쏟던 훈련병들이 자대에서 보내온 편지도 여전히 내 가방에 담겨 오래 전 기억을 되돌이켜 준다. 

덧) 적고 보니 이글이 1,000번째 글이네요. 그동안 지운 글도 있었지만 글 숫자를 정확하게 본 것은 처음이네요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