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주 심농의 메그레 시리즈가 2011년이 되서야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셜록 홈즈와 메그레를 비교할 수 있는지는 논외로 하고 해외에서 그의 인기는 결코 부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심농 본인의 나름대로 복잡한 개인사도 이슈거리였지만 메그레 반장이라는 인물 역시 꽤나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메그레 시리즈를 읽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시대적 배경이다. 셜록 홈즈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의 인물(!)이라면 메그레 반장은 1930년 경의 인물이다. 역사에 대해 박식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장소적 배경이나 인물의 성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필요한 작업이지 싶다.

이 시대적인 상황은 감안하지 않는다면 소설을 읽는 내내 뭔가 어색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1930년대는 전 세계적으로 격변의 시대였다.세계 공황, 세계 대전 등 우리 역사에서 가장 긴박한 장면들이 스쳐 지나간 순간이었고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한 메그레 시리즈 역시 그러한 시대적인 상황들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수상한 라트비아인은 메그레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다. 심농에게 있어서도 상당히 초기 작품이라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정확하게 짜여진 추리 구조라던가 뭔가 독자의 호기심을 확 풀어줄만한 "꺼리"가 잘 보이지 않는다. CSI류의 첨단 범죄수사물에 길들여진 우리네들에게는 더더욱 그렇게 느껴질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이책을 읽으면서 색다르게 느낀 점은 추리소설임에도 마치 심리소설과 같은 인상을 받았다는 점이다. 물론 많은 추리소설들이 주인공들의 세밀한 심리상태를 다루고 있지만 수상한 라트비아인의 인물들에게서는 개개인의 인생사, 삶의 역정 등과 그에서 비롯된 현재의 고단함 심리상태가 잘 드러나고 있다.

범인들 혹은 피의자들의 고단한 심리가 그대로 묻어나는만큼이나 그들을 대하는 메그레의 태도 역시 그 시대와 그 인간들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메그레를 성공적으로 만든 요소라고 생각한다.

"가지"..

"경찰서로 말입니까?"

"아니.."

위의 짧은 대사에서 우리는 메그레를 읽을 수 있다. 아니 그렇게 메그레를 읽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책을 다 읽고났을 때...멋진 추리로 시원시원하게 사건이 해결되었다는 느낌보다 각각의 등장인물들의 아픔이나 상처 그리고 그것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해결하려한 메그레의 노력이 더 기억에 남았다. 통쾌하다는 느낌보다 씁쓸한 느낌도 없지 않았는데 이 역시 독자로 하여금 자신이 창조한 세계에 몰입하도록 만든 심농의 기술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서인지 추리소설이라는 느낌이 상대적으로 적게 드는데 이런 점 때문에 독자마다의 호불호가 갈릴 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심농의 수상한 라트비아인은 심농을 그리고 메그레를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리게 된 계기가 된 책이다. 역사적인 면에서도 제법 가치가 있다.


열린책들에서 나온 책을 좋아하는 여러 이유 중의 하나는 장정에 상당한 신경을 쓰고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덕분에 같은 책임에도 양장본을 추가로 구입한 경우도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이번에 읽은 조르주 심농의 수상한 라트비아인은 '역시 열린책들'이라는 기존의 생각을 한층 더 해 주었다.

처음 책을 받았을 때 표지가 양장이 아니어서 겉표지가 없이 배송이 되었나 싶기도 했는데 이번 메그레 시리즈의 장정은 이렇게 나올 모양이다. 두꺼운 종이의 느낌을 그대로 살리고 있는 점이 특이한데 전체적으로 책이 가벼워 한손으로 읽기도 좋고 실로 꿰매는 사철 방식은 조금은 과격하게(?) 책을 읽어도 거뜬히 버텨준다.

덕분에 복잡한 오전 출근 시간에 내려야할 역을 무려 두 정거장이나 그냥 지나치고 말았으니 적어도 '나'라는 개인에 한정해 보면 심농에게 펀치를 한 방 맞은 셈이고 메그레 반장에게 푹 빠진 셈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마키아벨리에 대해 갖고 있는 선입견은 "피도 눈물도 없는 냉정한 인간" 정도가 아닐까.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비도덕적인 일도 서슴지 않는 냉혈한이라는 시각도 있다. 나 역시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군주론을 직접 읽기 전에는 사실 이책을 굳이 읽을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판단이라는 것은 자신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남들의 이야기만 듣고 지레 손사래를 쳐 버린다면 그것처럼 위험천만한 생각도 없지 않을까 싶다. 마치 인터넷에서 영화평을 보고 나서 "아, 난 이 영화는 안 봐야겠어" 라거나 "이렇게 재미있는 영화가 있나!"라는 반응을 보이는 것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남들의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남들의 이야기다. 즉 하나의 의견으로 생각해야지 타인의 의견이 무조건 맞는 것처럼(비록 그가 저명한 사람일지라도) 생각하고 자신의 경험을 사전에 차단해버리는 것은 스스로 쌓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내치는 꼴이 된다.

서론이 길었는데 아무튼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16세기라는 시대적 관점에서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건 모든 고전 -굳이 고전이 아니더라도 소설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에 있어 공통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군주론이 집필된 시점은 16세기 이탈리아다. 르네상스라고도 하는 낭만적인 이름으로도 불리는 시기였지만 정치적으로는 마치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혼란기였다.

중국의 전국시대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통일한 것이 한비자의 법가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당시 이탈리아 도시 국가의 어지러운 시기에 등장한 군주론을 현대적 시각에서 무조건적으로 폄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된다. 역자도 적고 있듯이 "정치가 더러운 것임은 모두가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 현재의 우리도 누군가 정치를 한다면 어느 정도 뇌물도 받겠거니 생각하고 비리도 있겠거니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어느 정도는 수긍하고 들어간다. 모순이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역자는 "단기적 전망에서 비윤리적인 것일뿐 장기적 전망으로 보면 결국 윤리적인 것보다 더 윤리적이라는 마키아벨리의 주장은 우리가 속으로는 그럴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는 것을 있는 것을 너무도 적나라하게 드러냈기에 불편하다"고 이야기한다. 바로 이점이 군주론의 핵심이 아닐까 싶다. 

국가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서는 어떤 수단이나 방법도 허용된다는 국가지상주의의 정치 이념인 마키아벨리즘. 단기적으로 보기에는 비도덕적이고 잔인해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국가의 안정과 평화를 이끌어낸다는 그의 사상이 비단 당시의 이탈리아에서만 타당한 이론이라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이미 현대의 우리도 이와 같은 정치 논리를 수 없이 보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무조건적으로 그의 주장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마키아벨리즘 역시 하나의 주장이고 하나의 사상일 뿐이다. 그의 사상에 동의하고 실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주장이나 사상에 대해 비판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책을 읽고 그를 비난하건 추종하건 그 역시 독자의 자유다. 

펭귄클래식에서 출간된 이책은 상당히 가벼워 들고 다니면서 읽기에 적당하다. 물론 주제 자체야 지하철의 흔들리는 차내에서 고민하기에는 부적합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번역도 자연스러워(군데군데 오타가 있기는 하다) 마키아벨리의 주장을 이해하기에 쉽게 되어 있다. 

 

[도서]수레바퀴 아래서

헤르만 헤세 저/김이섭 역
민음사 | 2001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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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의 소설은 뭐랄까..지나치게 내게 많은 불편함을 준다. 물론 다른 이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겠지만 어린 시절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헤세를 접할 때마다 '아, 어떻게 이렇게 글을 쓸 수 있을까..이건 바로 나의 이야기고 나는 이것을 극복하지 못했어'라는 생각이 점점 더 짙어져 갔기 때문이다. 물론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은 데미안이었고 데미안을 이은 싯다르타를 통해 나는 내 삶의 구원점을 찾을 수 있었다.

반면 수레바퀴 아래서, 크눌프,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삶을 마주 하는데 있어 핵심적인 부분은 아니지만(그럼에도 여전히 중요한) 한 번쯤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들을 너무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사실 그런 이유로 이 작품들을 읽기가 수월치 않다. 데미안과 싯다르타가 주는 무릎을 탁 치게 하는 그런 느낌이 아닌 내 안에 숨겨진 고통 혹은 욕망 그런 것들과 피할 수 없는 만남을 가져야하기 때문이다. 

데미안과 싯다르타를 통해 방향성을 찾을 수 있었다면 수레바퀴 아래서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와 같은 작품에서는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나..'라는 또 하나의 부담을 내 어깨에 지워야했기 때문이다. 즉 단지 그것들과 마주친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바로 현재의 내 삶 안에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해결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 아닌 의무감이 든다는데 있다. 

수레바퀴 아래서...헤세의 자전적 소설이라 하지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의 자전적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주변의 기대와 그것에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껴보지 않은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어린 시절 이책의 결말은 내게 그렇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결국 한스 기벤라트는 도피를 한 것인가..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이책을 다시 접할 때 내 생각은 달랐다. 한스는 자살을 한 것이 아니라 타살을 당한 것이라고... 소설 속의 한스는 물리적인 죽음을 맞았지만 읽기에 따라서는 사회적인 죽음을 당한 것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미 그가 세상의 주류(?)로부터 떨어져나와 시골의 어느 구석엔가로 자신의 육체가 옮겨졌을 때 그는 이미 죽음을 겪었는지도 모른다. 익숙하고 당연시되야할 것들로부터의 괴리 그리고 격리는 그가 '그'로서 살아갈 수 있는 이유를 없애버린 것이라 생각이 든다. 마음은 이전의 장소에 그대로 남아있는데 현실의 육체는 그곳으로부터 떨어져 있다. 고교시절 어느 수업 시간엔가 배운 소속집단과 준거집단의 차이가 아닐가..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정신과 육체가 분열되어 버린 그런 모습이 아니었을까...이런 생각이 이책을 성장소설로 단정하기에 어려운 부분이다. 아마도 이점은 '호밀밭의 파수꾼'에도 별로 다르지 않게 적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책을 읽음에 있어서 지나치게 외부의 서평이나 리뷰에 의존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도 이런 이유에서다.

막연히 한스가 자살을 했다. 외부의 압박을 이기지 못해 결국 그런 선택을 했다..라고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의지가 부족한 그가 결국은 도피처로 자살을 택했다고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는 자살이 아닌 타살을 당했다고 관점을 바꾸어 보면 이책의 또 다른 면과 만나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해석과 실천은 읽는 이의 몫이다.

 

[도서]꽃들에게 희망을

트리나 폴러스 저/김석희 역
시공사 | 2006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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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마음의 해탈..그것을 위한 여정..




판도라의 상자..맨 밑바닥에 희망이 남아있기에 사람들은 평생을 희망을 위해 힘든 세상을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견도 있다. 차라리 희망이 없다면 굳이 이 어려운 세상을 살아갈 이유가 없을텐데 그 이루어지지 않을지도 모르는 막연한 희망때문에 막말로 죽지 못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모순...

오래 전의 나는 이러한 논리에 제법 공감을 해 세상은 무언가에 의해 마지못해 살아가도록 조작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 그 조작자들은 자본가들이며 권력을 가진 이들이며 내 손에 닿을 수 없고 내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어느날인가 이책이 내 손에 쥐어졌다. 책의 제목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그 내용은 너무나 많이 알려져 있어 굳이 이책을 읽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그런 내용을 담고 있는 책..그책이 바로 "꽃들에게 희망을"이다. 줄거리는 새삼스레 적을 필요도 없으리라..

결국 우리네 이야기고 우리네 삶의 이야기다. 성공하기 위해 살아가는 우리네 모습. 과연 성공이란 무엇일까..처음 가볍게 이책을 읽으면 날아오른다는 것이 마치 성공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는 생각을 갖지 쉽다. 그래서 조금 냉소적인 시각에서는 결국 남을 밟고 올라 성공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좋은 것이냐는 생각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책을 덮고 현재를 살아가는 내 모습을 돌아보고 어느날인가 이책을 다시 읽을 때 실상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 내용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다른 애벌레들의 머리 위로 발을 올려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그저 약육강식의 사회라고 보지말고 하루하루의 스스로의 삶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라는 생각..

날아오른다는 것. 애벌레의 추한 몰골을 벗고 화려한 나비가 되어 하늘로 날아오른다는 것이 개천에서 용이 나는 모습이 아닌 나 스스로의 추한 생각들과 이기심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너그럽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보았다. 귀에 걸면 귀걸이식의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해석은 자기하기 나름이 아닌가..

그리고 그 해석이 자신에게 있어 긍정적인 방향으로 간다면 원래의 저자의 의도가 어쨌건 조금은 달라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세상을 살아가는 오답이 없듯 세상을 살아가는 정답 또한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다시 이책을 읽고 느낀 것은 외적인 변화가 아닌 내면의 변화였다. 내면의 변화라는 것은 눈에 확 보이는 것이 아니기에 저자는 화려한 색상의 나비를 빗대어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무튼..서지부분에서 밝히고 있는 것과는 달리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도 이책은 적당한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된다. 아니 오히려 절망에 빠져 있기에..(많은 부분의 절망이라는 것은 내면적인 원인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기에...) 이책이 그 절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해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 본다..


 

[도서]SF 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는 방법

찰스 유 저/조호근 역
시공사 | 2011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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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친 여행 후에 남은 무언가 아쉬운 감정..



우리는 흔히 상상을 한다. 

"만약 타임머신이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서 내 삶을 바꿀 수 있을 텐데"

그러나 타임머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도 미래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타임머신이 존재하고 내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 해도 과거의 나를 만난다거나 과거의 상황을 어떻게 해 볼 수 있을 지는 몰라도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의 삶을 대신할 수는 없지 않을까 생각을 해 본다.

아무튼 이책은 독특하다. 시간여행이라는 진부한 주제를 잡아채서 독자들의 관심을 끌만한 글을 쓰는 것이 쉽지 않음에도 찰스 유는 그런 시도를 했다. 

그러나 어떨까... 사실 이책을 둘러싼 다른 서평들이나 감상문, 출판사의 서평에서 읽을 수 있었던 기발하고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느낌을 나는 얻지 못 했다. 물론 서평이나 감상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것이기에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이 다를 수밖에 없지만 많은 곳에서 이책에 대한 찬사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 좀 이해가 가지 않는달까...

시제가 등장하고 몇몇 과학이론들이 등장하지만 구색맞추기..정도라는 느낌이고 무언가 독자를 매료시킬만한 "그것"을 나는 이책에서는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적지 않은 책을 읽어 어느 정도 독서에 대한 나 나름의 방법이 생겼다고 느끼고 있음에도 뭐랄까..갈피를 잡기 어려운 그런 미로 속에서 방황하다가 마침내 찾은 미로의 출구가 사실은 내 발 아래에 있었다는 느낌이랄까...특히나 마지막에는 왠지 베르베르의 어떤 소설을 보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럼에도 이책의 매력은 존재한다. 기존의 타임머신이 만들어내는 '환상'으로부터 냉정함을 찾을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이다. 특히나 무한루프에 빠질 것을 알면서도 끝내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없는 아니 바꾸지 못하는 자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순간의 묘사는 일품이다. 

찰스 유는 이책 전체를 통해 결국 과거 혹은 미래에 대한 환상을 가지지 말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책의 시작에서 끝에 이르기까지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 살아있고 생각하는 자신이었으니 말이다..


글의 첫머리에 내가 내린 결론은 수정해야할지도 모르겠다. 타임머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미래로부터 온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순간 역시 특정한 루프가 반복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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