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북한산 둘레길을 완주한 이후 걷기가 잠시 주춤했다. 이런저런 이유가 있었겠지만 새해 들어서도 다시 걷기를 시작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런데 흔히 말하는 '강제력'이 작용한 것인지 산림청에서 주관하는 블로그 기자단에 선발이 되면서 원고 작성을 위해 한 달에 적어도 한 번은 걸어야 하는 의무(?)가 생겼다. 

어디를 돌아볼까 생각을 하다가 이전에 후배와 성균관대 후문 쪽으로 걸었던 성곽길이 생각이 나 이 코스를 네 번에 걸쳐 돌아보기로 했다. 우선 이 길은 한양도성길로도 불리고 한양성곽길, 서울도성길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공식적으로는 문화재청이 '서울 한양도성길'로 이름짓고 있고 이곳에서는 한양도성길로 부르기로 하겠다. 이번 글은 사진이 많아 두 개의 글로 나누어 올릴 생각이다. 그리고 글자 폰트도 조금 키워보았다.

한양도성길의 시작점으로 택한 것은 북악산길이다. 북악산길도 3곳은 진입로가 있는데 내가 간 곳은 지하철 5호선 한성대입구역에서 출발하는 길이다. 지하철 출구에서 한 10여 분 정도 직진을 하면 되는데 언덕으로 올라설 즈음 건널목 건너로 진입로가 보인다. 올라 오는 도중에 간송미술관으로 가는 길과 나뉘기도 한다.


안내표지판을 뒤로 하고 걷기 시작하면 평탄하게 잘 포장된 길이 이어진다. 초입부터 시작된 성곽이 이제 이 길을 마무리하는 지점까지 죽 이어지게 된다. 성곽을 쌓은 돌의 재질이 위치마다 어떻게 달라지는지 그리고 왜 그런지 생각해보면서 걷는 것도 좋겠다.


입춘이 지났지만 아직 봄은 오지 않았다. 성벽에 기댄 채 말라 붙은 가지가 아직 오지 않은 봄을 탓하듯이 그리고 지난 겨울의 흔적을 기억하듯이 이제는 따스해진 겨울 햇살을 온몸으로 쬐고 있었다. 


제법 넓어지는 구간이 나온다. 와룡공원과 이어지는 곳인데 지역 주민들의 휴게 공간 역할을 하고 있어서 의자나 운동 기구들 같은 것이 여기저기 배치되어 있다. 미리 말하지만 본격적인 성곽길 걷기를 시작하면 마땅히 쉴 곳이 없으니 미리 충분한 휴식과 에너지 보충을 하는 것이 좋다.


그러고보니 우리 역사 유적 찾기도 하겠다고 야심찬 선언을 한 지도 제법 오래됐다. 한동안 그 작업도 거의 못 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이곳이 사적 10호다. 보통 여행을 다닐 때 안내문 읽기를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은데 잠깐 멈춰서서 안내문을 보면 자신이 어디에 그리고 왜 왔는지 다시 확인할 수 있고 무엇에 중점을 두고 여행의 방향을 잡아야할지 분명해지기 때문에 안내문은 꼭 읽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좋다.


이렇게 보면 마치 조선의 어느 시대에 와 있는듯한 느낌이 든다. 세월이 흐르고 사람들의 모습은 다 사라졌지만 성벽은 남아 그 시절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 자리에도 어느 인물의 인생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을텐데 낯선 이는 그 사연을 알 수 없고 그저 차가운 벽돌에 기댄 햇살만 바라볼 뿐이다.


북악산길의 시작점인 말바위안내소로 가는 길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제법 멀다. 말바위 안내소에서 시작하는 북악산길의 길이보다 그 전에 걸어야 할 거리가 훨씬 길기 때문에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주변 경관을 감상하면서 걷기를 권한다. 날이 따뜻해졌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겨울인지라 오가는 이들이 그리 많지 않아 조용히 산책하기에 더없이 좋았다.


생각해보면 여러 국가의 수도 역할을 했던 서울에 당연히 유적이 많아야 함에도 우리 주변에서 과거의 유적을 찾아보기란 쉽지가 않다. 일제강점기와 전란을 거치면서 많이 소실된 부분도 있겠지만 개발이라는 이름 하에 사라진 유적들도 꽤 많지 않을까? 과거를 기억한다는 것은 발전을 거부하고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바탕으로 현재를 그리고 미래를 키워나가는 주춧돌이 되는 것인데.. 아쉬운 부분이다.


한양도성길 중 북악산길은 입장 제한이 있다. 지역 자체가 청와대에 인접해 있고 1.21사태라는 분단 시대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장소기 때문이다. 이곳을 걷기 위해서는 신분증이 필요하다. 안내판에 써 있는대로 준비만 하면 입장하는데 전혀 무리는 없으니 참고하도록 하자. 다만 입장 시간이 짧은 편이기 때문에 가급적 오전에 집을 나서는 것이 좋다.


시내에서 좀처럼 구경하기 힘든 표지석이다. 이 돌을 기준으로 성북구와 종로구가 나뉘는데 기술이 발달하기 전에는 이런 표지석들이 곳곳에 있어 사람들이 왕래하면서 현재 위치를 묻곤 하지 않았을까 싶다. 요즘이야 스마트폰만 켜면 아주 자세한 위치가 나오지만 말이다. 때로는 너무 자세한 정보는 정신에 부담이 가기도 하는데 오히려 이런 표지석이 정감있고 아날로그적이다.


이제 성곽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끼인지 풀인지 모를 식물들이 세월을 간직한채 성벽에 옹기종기 붙어 있다. 지난 겨울을 버틴 힘으로 이제 봄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 역시 다르지 않아 슬픔과 기쁨은 늘 그 자리를 바꿔가며 우리에게 삶이란 이런 것이라고 교훈을 준다. 힘들다고 좌절하지 말고 기쁘다고 교만하지 말 일이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제법 높이가 만만치 않다. 전란 시대에는 이 성벽을 지키느냐 오르느냐에 한 국가의 운명이 정해졌을텐데 오르는 자나 지키는 자나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맞부딪힌 장소가 바로 이곳은 아니었을까? 자세히보면 아랫부분의 돌과 윗부분의 돌의 재질이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처음 성곽이 만들어질 때의 상태를 보존하고 있느냐 아니면 이후 보수공사가 이루어졌느냐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고 한다.


한참을 걸었지만 아직 안내소는 보이지 않고 안내문만 나타난다. 위에도 적었지만 실제로 안내소를 지나 걷는 거리는 얼마 되지 않는다. 창의문 쪽에서 오르는 길을 선택했다면 바로 북악산 길부터 길이 시작되지만 말바위 안내소로 오는 길을 택했다면 이렇게 먼저 걸어야할 길이 있으니 경로 선택을 할 때 참고하면 되겠다.


이제 얼마 뒤면 이곳은 개나리가 펼치는 노란색의 물결로 뒤덮이겠지만 아직은 숨을 죽이고 있는 모습이다. 이미 남부지방에는 봄을 알리는 징조들이 속속 선을 보이고 있지만 서울은 여전히 겨울이다. 하지만 자연의 순리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것인지라 경칩이 지날 무렵이 오면 지난 겨울의 흔적은 거의 사라지리라.


오래된 돌과 다음 세대의 돌 그리고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바위들과 그 사이의 나무들이 어루어진 풍경에 한참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장소. 시간과 세월, 흔적과 기억 그런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맴돌면서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시간여행이라도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길을 걷기 시작했을 때의 잘 닦인 길은 이제 거의 보기 힘들어졌고 좁은 길과 성벽 그리고 나무들을 벗삼아 걷는 구간이다. 성곽길이라고 표현이 되어 있어서 자칫 산책로 정도로 생각하기 쉽지만 북악산길은 그 이름 그대로 북악산 정상을 통과하는 길이다. 물론 등산 장비를 착용하고 걸을 필요까지는 없지만 대략 5km정도의 거리를 걸어야하기 때문에 등산화 정도는 신고 가는 것이 몸에 무리가 가지 않을 것 같다. (2편에서 계속)




방안에 오래 된 여행용 트렁크가 하나 있다. 그 트렁크를 열면 후보생 시절 쓰던 가방이 하나 있고 그 가방을 열면 오래된 기억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온다. 어지간해서는 열지 않는... 이제는 기억에서조차 희미해져 가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 가방. 오랜만에 청소를 하다 그 가방을 열게 되었다.

군 시절은 내게는 꽤나 특이했던 시간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학사장교로 군생활을 시작했다는 것부터가 남들과는 조금 달랐고 3년 3개월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이라는 점도 달랐을테다. 경북 영천과 광주를 거쳐 최전방으로 배치되기 전까지 교육생 시절의 크고 작은 이야기들도 돌아보면 제법 재미있었던 기억이다.

초임 근무지가 수색대였는데 생전 운동과는 거리가 멀었던 내가 특공무술 시범을 보일 정도였으니 군대란 참 대단한 곳이지 싶다. 소대장 시절에는 유서를 쓰고 실탄 박스를 싣고 나가보기도 했는데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다들 잘 지내고 있을까.. 외모로만 보면 거칠어보이기만 했던 우리 소대원들..하지만 누구보다 마음이 따뜻한 녀석들이었는데...

중위 진급을 하면서 잠시 일반 대대에서 참모를 하다가 전역할 때까지는 신병교육대에서 교관 생활을 했는데 신병들의 모습을 보면 사람이 참 속한 집단 그리고 복장이 얼마나 그 사람의 정신세계까지 지배할 수 있는가를 직접 체험해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래도 군에서 만난 친구, 선배들이 아직도 친한 벗으로 남아 있다. 어설펐던 여군 장교와의 에피소드는 가끔 떠올려보면 쓴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수류탄 교장에서 수류탄을 그대로 떨어뜨렸던 훈련병 이야기는 아직도 아찔하다. 반면 그때 만난 동기 하나는 얼마 전 지병으로 세상을 등졌으니 인연이란 늘 그렇게 맺고 끊어지고의 반복이 아닌가 싶다.

장교들은 전역을 해도 소위 개구리마크를 달고 나오지 않기 때문에 전역 시절의 계급장이 그대로 박혀 있는 전투복과 전투모도 여전히 남아있고 수료식에서 눈물을 펑펑 쏟던 훈련병들이 자대에서 보내온 편지도 여전히 내 가방에 담겨 오래 전 기억을 되돌이켜 준다. 

덧) 적고 보니 이글이 1,000번째 글이네요. 그동안 지운 글도 있었지만 글 숫자를 정확하게 본 것은 처음이네요 :)


오랜만에 앨범을 뒤적였다. 그러고보니 제대한 지도 참 오래되었다. 내가 군에 갈 당시에는 복무기간이 제법 길었던 시절이라 학사장교의 경우 소위 임관 전 교육 3개월에 실제 복무 36개월을 붙여 실제적으로는 39개월이라는 기간을 군에 있었어야 했다. 같은 학번인 ROTC장교들이 전역한 후에도 1년을 더 있었던 셈.

보통 남자들에게 다시 군에 가라하면 가겠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다시는 안 간다고들 말하지만 내 경우는 시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다시 갈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든다. 물론 사병과 장교가 여러가지면에서 차이가 많기 때문에 편한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전방 수색대에서 보내던 시절에는 육체적으로는 상당히 힘들었던 시기였던 것은 분명하다.


군 시절 사진들이 상당히 많은 편인데 부대 특성인지 제 성격인지는 몰라도 사람들하고 어울리면서 그 기억들을 남기는 것을 무척 좋아했던 것 같다. 이 사진은 언젠가의 훈련같은데 우리 소대원들 데리고 나가서 찍은 사진이다. 저 녀석들 지금은 어떻게들 지내고 있는지...

수색대라는 특성 상 제법 훈련이 많았고 소대 단위로 철저하게 독립이 되어 있는 부대다보니 아무래도 한 소대 내에서의 단결이나 인화가 무척이나 중요했었다. 지금은 체력이 제법 부실하지만 당시는 아침마다 몸에 타이어를 달고 연병장을 돌았었던 때라 무척이나 튼실했었는데..

아무튼 첨단 무기들이 난무하는 시대에 수색대라는 조직은 참 뭐랄까..몸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는 조금은 전근대적인 조직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던 것이 사실인데 그래도 직접 사람이 임무를 수행하는 것과 기계가 하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겠지 싶다..그러고보면 이 시절에 제법 추억들이 많았던 것 같다.

흔히 남자들이 군대 이야기를 하는 것을 싫어한다는데...뭐랄까..그래도 남자들이 모여서 군대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된다. 아무 것도 없이 바닥에서 시작하는 곳이고 사회에서 무얼 하고 왔건 계급이 전부이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든 점을 함께 나누고 등등... 뭐라고 딱 짚어 이야기하기는 힘들지만 아마 전역자들이라면 대개 공감을 하지 않을까 싶다..

Band of Brothers를 보다가 뜬금없이 앨범을 뒤적이며..

오늘 동기회장에게 결국 친구 녀석이 운명했다는 문자를 받았습니다. 사람이 가는 것이 이렇게 빠를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병원에 입원한게 이번 달 초였으니 한 달만에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습니다..

현역 제대하신 분들 중에 아직도 동기들 모임을 갖는 분들이 많으시겠지만 장교들의 경우 기수 구분이 되어 있고 그 기수는 평생 자기를 따라다니는 보이지 않는 인식표가 되어 남아 있게 됩니다. 제 경우는 학사장교로 군에 갔는데 김일성이 사망하던 날 입대해서 유난히 훈련이 혹독했던 기수기도 합니다..

그 친구는 통신 병과였고 저는 보병 병과였기 때문에 교육을 받는 중에는 얼굴을 잘 몰랐지만 최전방 사단으로 배치를 받고 우연치 않게 그 친구와 제가 신병교육대에 배정을 받았었습니다. 물론 행정 착오였는지 저는 그날 밤 다시 전방으로 올라가 수색대에 근무하게 되었고 그 친구와는 근 2년 넘게 연락이 되지 않았었습니다.

중위를 달고 몇 개월 후에 저는 다시 신교대로 돌아왔고 오래 전 친구를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신교대에는 학사장교 출신들이 4명이나 있어 제법 부대 내에서도 재미있게 지낼 수가 있었는데 전역을 하고 각자의 길을 가면서 연락을 뜸해졌죠. 물론 제가 게으른 탓에 먼저 나서서 이리저리 찾아다니지 못해서였지만 그 친구는 전역 후에도 저를 제법 오래 찾았었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10년의 세월이 지나고 이전에 글을 적었듯이 간경화 말기라는 소식을 대학 후배를 통해 듣고 다음 날 대구로 내려가 그 녀석 얼굴을 본 것이 결국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보내기 전에 이야기라도 할 수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을까요..

죽음이라는 것도 사실 알고 보면 삶의 연장선 상에 위치한 그래서 결국은 누구나 다다르게 되는 하나의 지점이지만 막상 당장 지금 이 시간부터 누군가를 볼 수 없고 이야기를 할 수 없고 체온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은 남아있는 이들에게는 참 고통스러운 일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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