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 세 자루 모두를 카트리지로만 사용하기 때문에 소위 주사기 신공으로 잉크를 충전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보통 한 카트리지에 충전을 하면 일 주일 안에 재충전을 하게 되는데 그때에는 같은 회사의 같은 잉크를 쓰더라도 카트리지와 펜촉 모두를 세척하고 다른 카트리지로 교체해 사용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귀차니즘이 발동했는지 그냥 중간에 잉크를 보충해버렸습니다. 얼마 후 잉크 잔량을 확인하기 위해 들여다봤는데 거의 안 보이더군요..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잉크를 모두 뽑아냈습니다.


보통 사용하는 빈 카트리지는 위 사진처럼 잉크를 뽑아내고 나면 투명한 상태가 유지됩니다. 잉크를 재충전할 때도 깨끗하게 닦은 다음 말려주기 때문에 늘 새것같은 상태를 유지합니다.

그런데


어제 나온 녀석이 맨 아래에 있는 카트리지입니다. 2차 대전때 미군이 사용하던 탄피도 아니고 아주 색기 가관입니다. 잉크가 플라스틱에 그대로 착색이 되어 버린 모양새입니다. 나름대로 만년필과 카트리지를 오래 써 왔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네요.

사용한 잉크는 세일러 젠틀 블랙인데 세일러 잉크가 착색에 대한 말이 좀 있기는 하지만 블랙의 경우는 그래도 괜찮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악명 높은 극흑 잉크의 경우도 저 정도 착색은 생기지 않았는데 조금 당황스럽네요. 앞으로 세일러 잉크(무려 3병이나 있는데...)는 딥펜용으로만 써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착색과 관련해서 비교적 말이 많은 잉크가 세일러 컬라 잉크와 누들러 잉크라고 합니다. 직접 겪어보니 이거 무시할 정도가 아니네요..물론 사용자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저와 세일러 잉크는 확실히 여러 면에서 안 맞는 것 같네요.



공부를 다시 하기로 마음 먹은 다음 가장 먼저 장만한 것이 필기구였습니다. 특히 만년필은 초등학교 때부터 손에 익숙해져 있어서 이번에는 남은 평생을 쓸 3자루의 펜을 장만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렇게 처음 장만했던 것이 이전에 잠시 소개한 비스콘티였는데 이 펜은 동생의 생일선물로 보내주었죠. 그동안 동생에게 뭐 하나 제대로 해준 적이 없는 데다가 사회에서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녀석이니 고급펜 하나는 있어야 겠다 싶어서 보내주었죠.

제가 구상하고 있는 3자루의 펜은 검정 잉크를 담은 주 필기용 펜과 청색 잉크를 담은 펜 그리고 아주 얇은 글씨를 쓸 수 있는 정리용 세필펜 이렇게 3자루입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잉크는 청색 계열인데 이렇게 보면 사실 두 자루 모두가 주력펜이 되는 셈이죠. 아무튼 전에도 한 번 적었던 것 같은데 어떤 물건(이건 조금 더 넓게 해석하면 사람에게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을 구입할 때는 그 방면에서 가장 잘 알려진 제품을 장만하는 것이 소위 수업료를 가장 덜 낼 수 있는 방법입니다. 한참 사진에 빠져 있을 때 뼈저리게 겪은 부분이기도 하죠.   




제가 가지고 있는 필통(?)인 펜파우치입니다. 비교적 흔한 몽블랑의 시에나 3구 파우치인데 딱 3자루의 펜을 넣을 수 있습니다. 이 녀석을 어떤 펜들로 채울까 고민을 제법 오래했죠. 만년필은 제조사의 특색에 따라 닙이라고 불리는 펜끝이 강성이나 연성이냐로 일단 구분을 해 볼 수 있습니다. 강성이란 닙이 잘 휘지 않는 강직한 느낌을 주는 것이고 연성이란 마치 붓처럼 사용자가 자유롭게 압력을 주어 글의 굵기를 조절할 수 있는 유연한 펜입니다. 물론 강성펜도 굵기 조절은 가능합니다. ^^ 저는 강성펜이 제  필기 스타일에 가장 맞는데 그런 면에서는 워터맨과 오로라 제품이 가장 적절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파우치를 열어 보면 2자루의 펜이 들어 있습니다. 왼쪽에 보이는 것은 몽블랑 P145입니다. 연성촉인 몽블랑이지만 이 녀석은 EF촉이고 그 중에서도 상당히 까칠한 펜인지라 지금도 길들이는데 꽤나 애를 먹는 녀석입니다. 검정이나 블루블랙을 주로 사용하고 있죠. 오른쪽에 보이는 펜은 저렇게 봐서는 뭔지 짐작도 안 가는 펜입니다.





이렇게 꺼내 놓으면 조금 구별이 되려나요? 흔히 소개글로 자주 보이는 리틀 에드슨이나 요트 모양의 우아한 자태..는 사실 그다지 느낌이 오지 않는 펜으로 워터맨의 까렌입니다. 까렌의 특징은 나중에 다시 포스팅을 하겠지만 촉이 잘 마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비행기로 이동을 할 때 잉크를 담아 움직일 수 있는 몇 안 되는 펜이기도 하고 공부를 하다보면 펜을 멈추는 시간이 제법 많은데 다른 펜들이 그 사이에 펜촉의 잉크가 말라버리는 것에 반해 까렌은 제 테스트로는 20분은 가볍게 버텨줍니다. 심각한 과목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제격이 아닐까 생각이 되네요. 가격만으로 보면 까렌이 145보다 높습니다. 하지만 인지도는 아무래도 145가 높죠. 대신 까렌은 까렌으로 145는 몽블랑으로 인식되는게 보통입니다.




이렇게 2자루를 구비하는데도 제법 많은 시간과 비용과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가 남았는데 위에도 적었듯이 세필이 가능한 아주 얇은 펜이 마지막으로 들여놓을 펜이죠. 위의 두 펜 모두 촉은 EF 즉 Extra Fine으로 얇은 편이지만 제가 원하는 얇은 정도는 정말 얇은 하이테크 포인트 정도의 펜이어야 합니다. 그 대상은 그러다보니 자연히 일본산 만년필로 정해졌고 아마 세일러의 펜이 되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다만 고민은 세일러의 라인업 중에서 무엇을 선택하느냐 정도가 남아 있는 셈이죠.

세일러 펜 역시 상위 라인으로 올라가면 가격대가 만만치 않고 이미 2개의 펜(동생 선물로 준 것까지 합하면 3자루)을 장만하느라 허리가 휠 대로 휜 상태라 아마 다음 달 월급날이 지나야 마지막 녀석을 들여놓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어쨌건 만년필을 장만할 때도 애초에 한방(?)을 크게 저질러 버리니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것은 확실히 줄었습니다.

물론 145가 몽블랑 라인업에서 가장 하위에 있는 기종이고 몽블랑의 진가는 149다라던가 리틀 에드슨이 아니라 진짜 에드슨을 써봐야 하는 것이 아니냐 혹은 워터맨의 정점에 있는 세레니떼의 필기감을 느껴보라는 등의 주변의 충동질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수집가가 아닌 실사용가로서 제가 가진 두 자루만 해도 과분할 지경이니 그런 유혹들은 그저 달나라의 토끼 방아소리만큼이나 유혹은 되지 않습니다. (다만 확신은 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나약함입니다)


이탈리아의 만년필 제조사 중에 비스콘티라는 곳이 있습니다. 상당히 고가의 만년필을 만드는 곳 중의 하나인데 비스콘티의 특징은 예술성을 강조하는 데 있는 듯한 느낌이 강합니다. 일전에도 한번 소개를 했는데 제가 가지고 있는 만년필은 비스콘티의 반 고흐 시리즈입니다. 시리즈라고 하기는 조금 어색한데 색상만 다르기 때문이죠. 물론 데몬스트레이션 버전인 크리스탈이 있긴 하지만 기본틀은 반 고흐입니다.



반 고흐 시리즈는 상당히 많은 색상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지금 보이는 것은 바닐라 색상입니다. 사실은 오션을 원했지만 재고가 없다고 해서 들여놓은 펜인데 막상 잡아보면 그리 촌스럽다는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 이 시리즈에 반 고흐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반 고호의 강렬한 색상에 영감을 얻어 제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무게 중심이 상당히 아래쪽에 있어서 필기하기가 제법 수월하고 금촉 특유의 미끄러짐이 상당히 부드러운 필기감을 보여 줍니다. 비스콘티 만년필은 셀룰로이드라는 식물성 소재로 제작되고 모두 수작업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같은 제품이라도 실제로 같은 것은 하나도 없는 자신만의 펜이라는 점이 장점이지요.




14k의 촉을 가지고 있는데 다른 촉에 비해 상당히 큰 편입니다. 중간에 하트홀도 큼직큼직 해서 잉크의 흐름이 좋은 편에 속합니다. 몽블랑과 굳이 비교하자면 절제된 흐름이랄까요. 닙 사이즈는 F 로 반 고흐 시리즈에는 EF촉은 없는 것 같습니다.




상당히 깔끔한 뒷모습입니다. 전체적으로 만년필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키려는 이탈리아 장인들의 손길이 느껴지는 제품이 비스콘티입니다. 개인적인 바람이라면 평생 글만 쓰고 싶은 것인데 아마 중세 수도원의 필사본을 만드는 수도사가 전생이 아니었을까 생각을 해 봅니다. 아마 지금 인생을 다시 결정할 수 있는 선택의 순간이 부여된다면 그 길을 선택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반 고흐에 추천할만한 잉크는 역시 제가 제일 좋아하는 블루인 제이허빈의 사파이어 블루입니다. 이 사파이어 블루는 잉크의 흐름이 아주 좋은 만년필에서 본연의 색을 보여주는데 제가 가지고 있는 몽블랑의 145의 경우 아무래도 EF촉이다보니 반 고흐에 비해서는 제대로 색을 뽑아주지 못하더군요. 만년필을 단지 글을 쓰는 이상으로 느껴보고 싶은 분이라면 비스콘티 제품을 추천해 봅니다.




다만 펜으로 글을 쓸 때의 단점은 오탈자를 쉽게 수정하지 못 한다는 점이다.
무릅쓰다가 맞는 표현인데 어쩌다가 무릎이 나왔는지..



만년필 마니아들에게 '몽블랑'이라는 이름은 '어느 한 단계'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보통 몽블랑 만년필을 궁극의 목표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일단 몽블랑에 진입하게 되면 또 다른 세상이 보인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오메가나 롤렉스가 제일 좋은 시계라고 알고 있다가 플랭크 뮬러나 IWC를 접하는 것과 같은 것이죠. 아무튼 시계 이야기는 나중에 더 하도록 하고.. 과연 몽블랑 만년필은 세기의 명품일까요? 손가락만 가져다 대도 갑자기 천하명필로 만들어 주는 요술 만년필일까요?



흔히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145모델의 경우 50만 원대 팔리고 있는데 145모델이 1만 원대의 만년필보다 50배나 우수하냐면 쉽게 긍정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소위 명품이라는 것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함정이 아닐까 하는데요. 몸에 잘 안 맞아도 명품이니까 참고 옷을 입거나 신발을 신는 경우를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몽블랑의 경우 명품의 대열에 오르게된 것은 어느 정도는 마케팅의 힘이 아닌가 생각도 듭니다만 그렇게 많은 이들이 열광할 정도의 대단한 만년필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일단 써 보세요"라고 저는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몽블랑을 들었다고 해서 갑자기 IQ가 올라가 천하의 작품을 써내려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계산서에 서명을 한다고 해서 금액이 내려가는 것도 아닙니다. 특히나 저처럼 EF촉을 선택한 분이라면 아마 처음 잉크를 넣고 나서 "어? 만 원짜리보다 안 써지네?"라고 의문 부호가 머리 위에 몇 개나 떠오르실 테니까요.



몽블랑 펜촉은 연성 촉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즉 무르다는 말이고 잉크의 흐름이 좋다는 말입니다. 이는 가만히 또 생각해보면 글이 굵게 써진다는 말도 됩니다. 물론 예외적인 펜들도 있지만 몽블랑의 통설은 '굵다'입니다. 그런 탓에 주로 서명용으로 많이 사용하지 실사용기로 몽블랑을 택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영어권 국가에서는 그래도 괜찮은데 한글과 같은 받침이 있는 언어나 한자를 섞어 쓰는 중국어, 일본어에는 몽블랑 만년필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습니다. 주변에서 몽블랑 만년필을 쓰는 데 F나 M촉을 쓰는 분이 있다면 대개는 장식용이거나 서명용인 경우일 것입니다. 만약 EF촉을 쓰는 분이 있다면 길이 제법 잘 든 만년필을 가지고 있다고 봐도 좋겠습니다.

몽블랑의 EF촉은 기존에 많은 분들이 칭찬하는 부드러운 필기감, 전형적인 몽블랑의 느낌은 전혀 없다고 봐도 좋습니다. 오히려 글이 제멋대로 써지고 까칠까칠하고 손가락이 아프기까지 합니다. 대개 만년필의 경우 3개월 정도를 사용하면 자신의 필체에 맞게 길이 드는데 몽블랑 EF를 쓰는 3개월은 아마 제법 길게들 느껴지실 것 같습니다. 일단 잉크를 넣고 기대감에 첫 글을 써보려고 종이에 펜촉을 대는 순간 "어? 네가 날 길들일 수 있겠어?"라고 말하는 듯 펜이 튕기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연성촉이니 금촉이나 하는 말들이나 필기감이 좋다는 주변의 말이 순간 사라져버리고 "내가 불량품을 받았나?"라는 의구심까지 생기게 됩니다.



EF촉을 사용하시는 분이라면 아마 몽블랑 잉크는 사용하지 않으실텐데 그럴 경우 빡빡함과 까칠함은 극에 달합니다. 제 경우는 오로라 잉크를 쓰는데 점성이 높은 잉크다보니 역시 저항이 센 편입니다. 조만간 세일러 극흑으로 바꿀 예정인데 그때는 저항이 더 심하겠죠. 굳이 그렇게까지 하면서 몽블랑이 쓰고 싶냐?고 물으실 수도 있겠는데 전 일단 경험을 해 보고 말하자는 주의인지라 과연 몽블랑이 명불허전의 만년필인지는 3개월 후에 다시 포스팅을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일단 제가 가지고 있는 P145에 대해 간단한 평가를 내리자면 상당히 가볍습니다. 이건 장점이자 단점이 되는데 비스콘티처럼 펜촉 부근에 무게 중심이 몰려있는 경우는 장시간 필기에도 손이 피로하지 않지만 이 제품처럼 가벼운 경우는 장시간 필기에 썩 좋지만은 않습니다(사람마다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요) 그리고 그립 부분은 땀에 약합니다. 손에 땀이 많은 분이라면 펜을 잡기도 쉽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디자인은 깔끔합니다. 워낙 잘 알려진 육각별 모양이 눈에 잘 띠긴 하지만 자주 사용하다보면 아예 캡은 저만치 두고 쓰기 때문에 별 감각은 없습니다. 잉크 주입은 컨버터와 카트리지 두 가지 방식을 모두 사용할 수 있습니다. 카트리지는 표준 카트리지라면 어느 회사 제품이나 모두 사용 가능합니다.



아무튼 글을 많이 쓰는 분이라면 몽블랑의 선택은 주의가 필요합니다. 까칠한 EF촉이 아닌 부드러운 F촉을 택할 경우는 원고지 정도는 되야 제대로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위에 적은 대로 EF촉은 손에 익히기까지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불평만 늘 수 있는 단점이 있습니다. 만약 편하게 술술 그리고 장시간 글을 쓰고 싶은 분이라면 비스콘티나 오로라 제품을 추천해드립니다. 그래도 몽블랑을 써 보고 싶다하신다면 EF촉을 장만하시길 권합니다. 고집 센 말괄량이 아가씨임은 분명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가장 가까운 벗이 되어줄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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