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R을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렌즈에 대한 고민을 늘 하게 된다. 99년으로 기억하는데 니콘의 F100으로 SLR에 입문한 나로서는 그동안 소위 '장비병'을 거쳤었다. 사진을 찍는 것도 좋아하지만 사진 장비 자체 또한 상당히 좋아하는지라 중형포맷을 제외하면 어지간한 장비들은 써 보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 끝에 내 나름대로 내린 장비 세팅은 의외로 간단했다.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렌즈들을 거치고 거쳐 끝내 정착한 렌즈는 아래의 두 개다. 물론 아쉬운 거라면 광각 영역이다. 20mm 하나만 더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지만 당분간은 조금 미뤄두어야 할 상황이다. 

첫번째 렌즈는 구형 35mm렌즈다. 정식 명칭은 AF NIkkor 35mm f2.0D인 이 녀석은 1995년에 초기 버전이 출시되었고 내가 가지고 있는 렌즈는 2006시리즈로 2006년 이후 발매된 버전이다. 구형 렌즈인데다가 포커싱 소리가 시끄럽기도 하고 뭔가 디자인이 고리타분해 보이기도 하지만 카메라를 들고 나갈 때면 소위 렌즈캡으로 사용하는 녀석이다. 35mm는 오래 전부터 워낙 내 눈에 익숙한 화각이어서 그런지 이 렌즈로 세상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참 편안한 느낌이 든다. 가장 현실감있는 렌즈가 아닐까 싶다.

니콘으로 정착하기 이전에도 콘탁스, 라이카 기종 모두 35mm를 사용했는데 심도만을 이용해 노파인더 촬영도 간단하고 어떻게 찍어도 가장 무난하게 나오는 화각대라는 생각이다. 물론 50mm를 표준으로 사용하는 분들에게는 다소 넓은 감도 있겠지만 렌즈의 화각이라는게 사실 어느 정도는 익숙함에서 오는 것이지 싶다. 28mm를 사용하는 분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화각대가 가장 편안하다고 하니 말이다.

두번째 렌즈는 55mm 마이크로다. 원래는 매크로라고 해야 하는데 니콘의 고집인지 굳이 마이크로라 쓴다. 흔히 말하는 접사렌즈인데 1979년에 처음 발매된 렌즈이니 역사도 제법 되는 렌즈다. 그렇다고 골동품은 아니고 시리얼 8번대는 2006년 이후 출시된 렌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녀석은 5번대 시리얼로 아마 2003년 정도에 나온 렌즈가 아닐까 싶다. 이 렌즈는 디지털로 넘어 오기 전에도 두번을 구입했다가 내보낸 녀석인데 D700으로 넘어오면서 다시 들인 녀석이다. 예전에는 구하기가 어려워 미국에서 공수를 해오기도 했었다.

니콘의 전형적인 Ai-S타입렌즈다. 이 렌즈는 접사렌즈임에도 풍경에서도 대단한 성능을 보이는 렌즈여서 전천후로 활용하기에 적당하다. 가격도 저렴해져서 중고장터를 뒤져보면 깨끗한 녀석을 10만 원대에 들일 수 있다. (물론 신품을 구할 수도 있다) 디지털 시대가 열리면서 니콘 수동렌즈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반가운 일이다. 

이런 분위기지만 칼 차이즈의 수동렌즈들은 여전히 대단한 가격대를 자랑한다. 특히나 25mm는 여전히 유혹의 대상이긴 하다. 예전같으면 어떻게 장만이라도 해볼까 전전긍긍했겠지만 요즘은 좋은 장비들을 봐도 크게 마음이 가지 않는다. 무엇보다 내 사진 실력이 장비가 달라진다고 해서 크게 나아지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고 결정적으로 사진을 찍으러 좀처럼 나가지 않기 때문이다.

단렌즈가 좋으냐 줌렌즈가 좋으냐. 밝은 렌즈가 좋으냐 어두운 렌즈도 괜찮냐. 끊임없이 사람들이 묻는 질문이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줌렌즈는 편리하지만 생각을 흐트러뜨린다.내가 단렌즈를 고집하는 이유 중의 하나다. 자동렌즈는 편리하지만 생각의 시간을 빼앗아간다. 내가 수동렌즈를 좋아하는 이유다. 그럼에도 편의성과 즉시성을 끝내 포기할 수 없어 LX5를 들였으니 말처럼 실천하기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새삼 생각을 해 본다. 

결국 결론은 자기가 편하면 된다. 사진 역시 자기가 보아 마음에 들면 그만이다. 그렇다고 고가의 장비를 들이는 것을 비난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 역시 자기만족이다. 히말라야에 오를만한 옷을 입고 동네 뒷산을 가건 고성능 스포츠카로 마트에 장보러 가건 어디까지나 그건 개인의 문제니 말이다. 사진 장비도 마찬가지다. 200만 원대의 조리개 2.8렌즈를 들고 다니건 번들렌즈를 들고 다니건 그 사람이 좋으면 그만이다. 등산장비가 취미일 수도 있고 자동차 자체가 취미일 수도 있고 카메라나 렌즈 자체가 취미일 수도 있는 것이니까. 


이 사진은 제법 오래 전 재개발로 동네 전체가 허물어지던 어느 동네를 찾았을 때 찍은 사진이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삶의 기반을 두고 있던 집이 헐린다는 느낌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우리네 삶 속에서 제법 적지 않게 일어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공간이 허물어지는 것.. 그것은 물리적인 공간일 수도 혹은 정신적인 공간일 수도 있다.

당시 나는 이 사진을 찍을 때 그리고 그 동네를 걸으며 그 사람들이 혹은 그 동네가 안쓰럽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뒤돌아 생각해보니 얼마나 나의 오만스러움과 착각이 당시의 나를 감싸고 있었는지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려 온다. 흔히 재개발 지역, 혹은 공사장의 인부들의 모습, 시장의 상인 등을 프레임에 담으며 삶의 모습을 느끼고 싶다곤 하지만 그것은 사진을 찍는 이의 교만스러움 외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네들의 삶 속에 직접 들어가 오욕칠정의 모든 감정을 함께 겪지 않고서 어느 날 카메라 하나 달랑 매고 그 동네를 한 번 휙 둘러보고 그 사람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사진가는 겸손해야 하고 피사체와 공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어린 시절의 내 사진..그리고 지금의 내 사진 역시 피사체와 너무나 동떨어진 그런 먼 거리의 사진들이 대부분이다. 파인더 안을 들여다봤을 때 그런 감정이 느껴진다면 카메라를 내려놓고 한 발 더 다가설 필요가 있다.


Contax Aria, Distagon 35mm f/2.8, LS-40 필름 스캔



10년도 더 지난 시절의 이야기인데 딱 이맘때 쯤이다. 폴더를 보니 4월 27일이다. 사진에 한창 빠져 정신이 없을 시절. 노출이니 구도니 하는 사진의 기본 이론(사실 당시까지 내가 아는 사진 이론은 초등학교 사진반에서 배운 것이 전부였지만 당연히 기억날리가 없다)은 하나도 모르고 여기저기 몰려 다니며 일단 찍고 보자는 생각뿐이었던 것같다. 

당시 필름값을 생각하면 만만치는 않았지만 그저 사진을 찍는 게 재미있었던 시절이다. 같이 일하던 동료가 친구를 모셔와(?) 남자 셋 여자 하나 그렇게 어수선하게 보냈던 어느날..지금 돌아보니 참 재미있었던 기억이다.

아무튼...어렵게 어렵게 출사(당시로 보면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를 나가 뭔가 찍어 보려고 말 그대로 발버둥을 쳤던 것 같은데 지금 와 돌아보면 쓴웃음이 나오는 사진들이 참 많기도 많다. 아마 그런 이유에서였는지 사진을 제법 많이 지웠는데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도 많다. 

사진 이론을 좀 더 많이 알았으면..(그러니까 배경은 어떻게 하고 심도는 어떻게 주고.. 아웃포커싱이 어떻고..공간감이 살면 어쩌고저쩌고...) 사진이 좀 더 좋았을까?

그렇지는 않다. 당시의 어설픔이 오히려 추억이 되고 그래서 그 사진을 보면 그때 그 순간에 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떠올림은 어설프고 실수가 많을 수록 재밌는 것이고 그 재미가 세월이 지난 후에 사진을 돌아보는 이유 중의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고보니 내 경우도 사진 자체에 대한 만족도보다는 그 사진을 찍기까지의 과정과 막상 사진을 찍는 순간들에 대한 만족 혹은 재미가 더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디지털로 넘어오면서 이 재미가 많이 떨어졌다. 사진을 너무 쉽게 찍고 지울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저명한 사진작가들의 사진을 볼 때 그런 생각을 한다. 노출이니 공간감이니 선예도니..다이내믹레인지니..특히나 스냅 작가들에게서는 그런 이론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럼에도 그들의 사진에는 마음을 울리는 무언가가 있다.. 기술과 장비는 갈 수록 진보하는데 좋은 사진은 시간이 갈 수록 적어지는 것은 쉬운 사진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사진을 찍기까지의 과정과 시간을 생각하기 보다 일단 셔터버튼을 누르고 LCD창으로 이미지 자체를 보는 것에 집착하다보니 사진을 찍는 것이 재미가 없어지고 찍은 사진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오래 전에 찍은 도무지 이론적으로는 영 아니올시다인 사진들이 내게는 더 만족감을 주는 것도 그런 이유다. 사진찍기의 목적을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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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던 눈이 멈추고 제법 강하게 불던 바람도 멈추고나니 제법 하늘이 쨍하니 좋은 느낌이다.

3월말로 시간이 흘러가고 있지만 3월이라는 계절이 늘 그렇듯이 겨울도 아니고 봄도 아닌 어정쩡한 시절이다.

주변을 걷다보면 참 일상의 사소함이라는 말이 저절로 떠오른다.

어딜 가나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들과 차들과 전봇대에 아무렇게나 붙어 있는 광고 전단지들...

사람사는 곳이 어딘들 다르겠냐 싶다. 이렇게들 모여 살고 그안에 희로애락이 춤춘다.

아무 곳에서나 발길을 멈추고 사각의 공간에 이미지를 담아도 그냥 우리네 삶이 된다.

Nikon D700, Ai Micro Nikkor 55mm F2.8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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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을 기억하는 분들도 제법 되리라.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흔적이 되어 버렸지만...

나처럼 아날로그적인 인간은 늘 이런 장면에 더 많은 신경을 쓰게 되고 마음이 끌릴 수밖에 없는가보다.

신촌의 어느 길을 걸어도 지금처럼 화려한 네온사인이 많지 않았던 시절..

그 동네도 참 아날로그적이지 않았나 싶은데... 나로서는 가끔 들렀던 곳이니 자세한 속사정은 알 길이 없다.

아무튼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현실의 과거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때로는 묘한 기분에 빠지게 한다.

Contax Aria, Distagon 35mm f/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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