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문학동네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이 선보였습니다. 하루키에 대해서는 할 말이 참 많은데 제 나름의 기준으로는 '해변의 카프카' 이후 변절했다고 단정을 지어버리고 있던 터라 이전만큼의 호감은 가지고 있지 못하죠. 게다가 1Q84에서 아주 결정타를 날려서 이제는 하루키의 책은 읽지 않겠다고 까지 선언을 해 버렸지요.

그럼에도 그의 신작에는 끌릴 수밖에 없는데 욕을 할 때는 하더라도 일단 읽기는 해야 한다는 묘한 압박에 시달렸습니다. 이번에 나온 에세이 걸작선은 총 5편입니다. 제게는 아주 다행스럽게도(!) 과거의 글을 모아놓은 것이지요. 즉 '변절 전의 하루키'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충분히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스스로 합리화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집어든 책은 바로 이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입니다.

50편의 짧은 단편들이 모여 있는데 그가 주간 아사히에 연재한 글들이라는군요. 실려 있는 단편들은 굉장히 사적인 내용을 많이 담고 있는데 이제까지 접하지 못 했던 하루키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어 꽤 흥미 있었습니다. 물론 50편 모두가 흥미진진한 것은 아니고 어떤 작품은 지루하기도 하더군요. 그런데 페이지를 넘겨 가던 중에 압권인 단편을 발견했는데 책의 제목과도 같은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편입니다. 이 단편이야말로 하루키답다는 말이 절로 나오더군요.

"F심 연필은 세일러복을 입은 여학생 같지 않습니까?"

술자리에서 나온 이 문장이 어떻게 느껴지시나요? 정말 하루키다운 문장입니다. 물론 그가 직접 한 말은 아니지만 이후 그의 행동을 보면 웃음이 절로 날 정도죠. 그리고 그 묘사가 참 하루키답기에 이책에서는 이 단편을 추천해봅니다.

아무튼 사물에 대한 인식의 부여..랄까요. 그런 것을 참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연치 않게 듣게 된 자기가 쓰는 연필이 여고생 같다는 말이 그 자리를 떠나서도 머릿속에서 영 떠나지 않고 연필을 볼 때마다 그런 묘한 생각이 드는 현상에 빠져 꽤나 고생을 하는 그의 모습이 아주 적나라합니다. 그것도 하필이면 성적인 의미 부여여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난감해 하는 모습이 재밌습니다. 

꽤 재밌는 상황이지요? 아마 일상 생활 중에 저런 식으로 의미 부여가 되는 경우를 제법 많이 겪어 보시지 않았을까 생각이 됩니다. 아침에 가장 먼저 보는 버스가 1번 버스면 하루종일 재수가 좋을 거라고 집을 나섰는데 1번이 연달아 온다던가 하면 하루종일 싱글벙글 하게 되죠. 실제로는 아무 일도 없었더라도 하루를 마무리 할 시간이 되면 어쩐지 흐뭇합니다. 

그런데 그 의미부여가 하루키의 경우처럼 성적인 거라면 꽤나 난처한 상황도 많겠지요. 그것도 잠시라도 떼어놓을 수 없는 어떤 물건에 그런 의미가 새겨지면 말이죠. 그런 경험들이 혹시 있으신가 모르겠네요. 있으셔도 여기에 답글을 다실 정도로 대담한 분은 안 계시겠지만요..^^

아무튼 오랜만에 만나는 하루키는 오래 전 하루키에게서 받았던 강한 인상을 조금이나마 되돌려주었습니다. 앞에 하루키의 변절이라고 적었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제가 느끼기에 그렇다는 것이니 크게 신경 쓰실 바는 아닙니다. 뭐랄까 '상실의 시대'로 알려져 있는 '노르웨이의 숲'에서 보였던 인간 자체에 대한 탐구와 감정의 묘사가 이후에는 점점 상업적으로 확대된데서 온 저만의 아쉬움이니까요. 

언젠가 1Q84에 대한 이야기를 써 볼 기회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는 더 이상 내가 아는 하루키가 아니다'는 문장으로 요약할 정도랄까요..


베르나르 베르베르. 천재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을 남자다. 그리고 작가다. 사실 나는 이 사람의 책에 대한 선입견이 제법 컸는데 뭐랄까 인기에 영합하는 그렇고 그런 류의 작가 중의 한 사람은 아닌가 오해하고 있었다. 마치 최근의 하루키와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의 책은 전혀 읽지 않았었는데 반전이 이루어진 것은 '타나토노트'였다.

이후로 그의 책을 마치 스펀지에 물을 빨아들이듯이 읽었는데 흔히 알려진 3부작이 준 정신적 충격은 대단했다. 물론 '신'의 마지막 결론 이후 꽤 오랜동안의 사색이 필요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나무'는 단편집이다. 그의 다른 책처럼 독자의 부담이 비교적 적은 책이다. 물론 페이지가 적을 뿐이지 담겨 있는 내용들을 고민하자면 또 끝도 없다. 그럼에도 군더더기없이 짧게 끊어지는 맛이 일품이다. 초창기의 하루키 작품을 읽는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인데 읽어나가는동안 하루키의 단편과 제법 공감이 되지 않는가? 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책에 실린 단편들 그리고 그 단편에서 이어져나오는 장편들을 굳이 연결지을 필요는 없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그 책의 내용 그러니까 내 눈 앞에 보이는 활자에 푹 빠지는 것으로 충분하다. 아니 오히려 눈 앞에 펼쳐진 내용들을 모두 소화하기에도 벅차기 때문에 굳이 생각의 영역을 지나치게 확장할 필요는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책은 특히나 연관성이 대단히 넓은 책이기에 무엇보다 '단절'작업이 크게 요구된다. 그래야 내용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워낙에 신출귀몰한 이야기와 구성 그리고 영역을 가지고 있는 베르베르이기에 이 방법이 이책을 읽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나 나름대로 정해버린 것이다. 물론 수많은 연관성들을 모두 아울러 가며 읽는 것도 나쁠 것은 없다. 하지만 오직 이책에만 빠져보고 싶다면 그다지 권하고 싶지는 않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18편이나 되는 단편들이 담겨 있다. 각각의 내용에 대한 이야기는 모음집에서는 별로 의미가 없을 듯 하여 적지 않겠지만 아무 작품이나 눈이 가는 것을 골라 읽어도 충분하다. 가능하다면 베르베르의 장편들을 읽은 다음에 쉬어 가는 시간에 읽어보면 어떨까 싶다. 그의 장편이 주는 피로감을 풀기에 이 단편들은 제법 치밀한 구성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어느 작품의 어느 부분만을 네모난 모양으로 잘라서 찍어보았다. 이것으로도 의미의 전달은 충분하다. 굳이 모든 문장을 한데 엮어 순서대로 맞추어 놓지 않더라도 말이다. 나는 이 문장이 꽤나 마음에 든 모양이다.



한국사검정능력시험이라는 시험이 있다. 아는 분들은 알고 모르는 분들은 또 모를 그럴 시험인데 적어도 수험생들에게는 익숙한 시험이다. 한국 사람이 한국 역사에 대해 잘 알고 한글에 대해 잘 알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데 실제로 그러질 못 하니 시험으로까지 나온 것이 아닐까 싶다.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관리하는 곳은 국사편찬위원회다. 다만 시험을 치르기 위해서는 전용 홈페이지로 가야 한다.

자, 민족을 안고 세계로 가려면 국사를 잘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 시험이 만만한 시험이 아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국사를 열심히 배우지만 막상 시험이라면 꺼려진다. 토익처럼 말 그대로 국민시험도 아니다보니 선뜻 응시하기가 어렵다.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은 아래 표와 같이 급수가 나뉘는데 소위 어디 명함 좀 내밀려면 고급은 통과해야 한다.

50문제인데다가 5지 선다형이다. 제한시간은 80분. 문제를 읽고 뭔가 생각할 여유는 없다. 대부분의 시험이 그렇듯이 지문을 보고 바로 답을 찾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 시험은 어떻게 준비를 해야할까? 

이미 시중에 이 시험을 대비하기 위한 많은 교재들이 있다. 게다가 공무원 시험 과목이기도 하니 자료는 그야말로 바닥에 깔려 있는 셈이다. 하지만 책을 잘못 고르면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크게 낭비다. 수험생들에게 입소문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책 한 권을 소개해볼까 한다.

책 제목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조금 난감하다. 시험 이름이 그대로 책 제목이다. "한국사 능력 검정시험 문제 고급 1·2급"이다. 풀판사는 운전면허시험을 치러본 사람들이라면 친숙한 크라운출판사다. 저자인 최영욱 강사는 이 바닥(?)에서는 제법 유명하다. 특히나 동영상 강의가 인기인데 홈페이지에 가 보면 시범강의를 볼 수 있으니 들러보도록 하자.

본문은 컬러풀하다. 각종 유물들과 지도 등을 컬러 사진으로 싣고 있어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역사 공부에 흥미를 붙일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책의 구성방식은 개조식 서술에 가깝다. 이건 읽는 이마다 장단점이 있겠지만 빠르게 흐름을 잡으려는 이들에게는 적당한 방법이다. 단원마다 실제 기출문제를 싣고 있어 어느 부분을 강조해서 공부해야할지 파악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종이질은 약간 광택이 나는 재질인데 컬러 인쇄를 배려한 방식이지만 책을 읽는 입장에서는 조금 불편한 부분이기도 하다.

전체적인 구성은 시대의 흐름을 따르는 방식을 채용하고 있는데 역사라는 과목의 특성상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기에 적합한 방식이다. 물론 어느 정도 학습이 이루어진 다음에는 테마별로 정리를 해야 함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이책은 그런 면에서 초심자가 빠르게  역사의 흐름을 잡을 수 있도록 돕고 있고 어느 정도 학습이 이루어진 수험생이 막판 반복학습을 할 때 적당할 정도의 분량을 장점으로 내세우고 있다.

역사 시험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사료들을 책 날개 부분에 따로 뽑아 두고 있다. 이 부분은 그 자체로서 문항으로 바로 반영되기 쉬운 부분이다보니 철저한 준비가 필요한데 별도로 지면에서 독립시켜 두고 있어 사료 자료만의 독립적인 학습도 가능하도록 배려하고 있다. "청상과부의 개가를 허용하라!"

중간중간에 형광펜으로 칠한 듯한 부분은 저자가 특히 강조하고 있는 부분으로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부분이니 세밀한 학습이 요구된다. 이 표시들만 죽 훑어봐도 전체적인 내용의 강약조절을 할 수 있다. 아무리 압축된 내용의 교재라도 결국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 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강사가 강조한 부분과 자신이 판단한 부분을 잘 조화시켜야 함은 물론이다.

글만 써 있다면 이해도 안 되고 암기도 안 되는데 이런 식으로 시각적인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376페이지라는 분량으로 고급을 통과하기에 부족한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압축된 내용을 담고 있다. 책의 분량이야 늘리고 싶으면 언제든지 무한정으로 늘릴 수 있지만 수험생의 입장에서는 결코 좋은 것이 아니다. 시험장에서 결국 필요한 것이 서브노트와 같은 얇은 분량의 책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걱정할 필요는 없다.

마지막 하이라이트는 연표다. 책 뒷면에 고이 접혀 있는 연표를 펼치면 전체적인 흐름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꽤 넓고 큰 데다가 빈 공간이 많은 편이니 벽에 붙여 두고 그때그때 보면서 추가적으로 중요한 내용들을 첨부해 나가면 자신만의 좋은 압축 학습 교재가 될 것이다.

이책을 구입하면 동영상 CD와 인강 30% 할인쿠폰을 동시에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이책은 인강과 동시에 공부할 때 효과가 배가되는 특징을 갖고 있다. 강사 본인의 강의의 핵심내용들이 담겨 있다고 보면 된다. 자 그럼 실제로 강의와 책을 어떻게 조화시키면 좋을지 최영욱 강사의 샘플 강의를 들어보자. 


구석기시대 from Realhistory on Vimeo.







사실 이런 류의 책은 여간해서는 읽지 않는다. '뻔한 이야기'를 적어 놓는 경우가 워낙에 많아서다. 특히나 대선을 앞두고 출마자 중의 한 명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의 책이라면 읽지 않아도 대충 내용이 보일 것 같았다. 그럼에도 나는 이책을 구입했다.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던 안철수라는 사람에 대한 호감이 막연한 호감인지 아니면 뚜렷한 이유가 있는 것인지 확인해볼 요량이었다. 제목은 의외로 간결하다. '안철수의 생각'이다. 사실 그게 지금은 가장 필요한 시점이고 정확한 제목이다.

판매량이 많은 까닭인지 방금 찍어낸듯한 종이향이 코를 찌를 정도다. 하얀 표지와 간단한 사진 한 장 그리고 진한 종이향이 스며든 책을 손에 들고 페이지를 넘겨본다. 책은 총3편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실제로 읽어보면 4편이다. 맺는 글인 '미래의 주인공들에게' 역시 그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1장과 마지막 장은 개인적인 이야기가 많지만 2장과 3장은 사회 전반에 대한 심층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엮은이도 이야기했지만 안철수 교수가 이렇게 다방면에 깊은 성찰을 하고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2장과 3장은 마치 국정운영의 지표로 삼을 청사진과 같은 느낌이 드는데 만약 안 교수가 출마를 하게된다면 그리고 어떤 모습으로건 정치를 하게된다면 이책은 그의 나아갈 방향 그리고 그를 평가할 지표가 되기에 충분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정치인이 아닌 사람이 자신이 정치를 하게 되면 어떻게 하겠다라는 점을 이렇게 뚜렷하게 보여준다는 점이 한편에서는 과욕은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들지만 그만큼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분명히 알고 있다는 증거도 되는 셈이니 앞으로 그의 행보를 지켜보는 것도 꽤나 흥미있는 일이 되겠지 싶다.

대담 형식으로 쓰여 있어 읽어나가는데 큰 부담이 없고 방송에서 본 그의 말투며 표정이 책을 읽어나가는동안 그대로 재연되는듯한 느낌을 주어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부분에서 '자기자랑'이 등장한다는 점. 그러나 나는 이것을 자랑이 아닌 자신감의 표현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이루어낸 것을 당당하게 말하는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자신감이다. 그리고 그 이룸을 어떻게 만들어냈다고 스스로 납득하고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 안철수를 놓고 볼 때 꽤나 부러운 점이었다.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엘리트의 패배를 모르는 삶을 산 것이 아닌 점은 의외였다. 그는 모든 것을 노력으로 이뤄낸 스타일이다. 그리고 그 이룸의 기본이 된 것은 경험이었다. 생각보다 안 교수는 많은 경험을 했는데 대외적으로 알려진 성공스토리 이상의 실패와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그리고 그 실패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바꾸어 나가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이점이 아마 안철수 교수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싶다.

그는 정확하게 자신에 대한 지지의 실체를 알고 있다. 기성 정치에 지친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의 지지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모든 이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일일히 설명할 수 없기에 책으로 이야기를 건넸다. 물론 책 역시 모든 이에게 접근성이 있는 것은 아니니 이후의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다. 만약 이책이 대선을 위한 출사표라면 전 국민을 대상으로한 공약집인 셈이다. 활자로 이렇게 뚜렷하게 찍힌 내용들을 안철수라는 인간이라면 어떤 식으로 책임을 지고 구현해낼 것인가.

대선에 나오는 일이 없더라도 이책은 정치를 하려는 이들, 현재 정치를 하는 이들을 떠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 고민해야 할 내용들을 담고 있다. 무엇보다 그저 당연하게 생각되는 상식들이 외면받고 있는 현시점에서 너무나 당연한 상식들을 다시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희망을 꿈꿀 수 있는 것은 희망을 가져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안철수는 희망을 가져본 사람이고 그 희망을 실현해낸 사람이다. 개인적인 희망을 넘어 국가적인 희망을 그는 실현해낼 수 있을 것인가?


허허당 스님은 트위터에서 먼저 알게 되었다. 虛虛堂이라는 법명에는 비운다는 의미가 크다. 언젠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스님은 "내가 찾는다고 해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비워버리면 스스로 찾아온다"라는 것을 깨달았다 했다. 그래서 허허당이다. 비움으로써 아픔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이 스님만의 특기(?)인지도 모르겠다.

(스님에게 예의는 아니지만) 스님의 외모를 보면 부드러움과는 거리가 멀어보인다. 스님이 아니라면 제법 무서운 인상일 수도 있겠다 싶다. 실제로 스님의 글들은 매섭다. 그리고 강하다. 나약해지고 약해지는 마음에 꾸중을 하는 듯 하다. 처음 스님이 올리는 글들을 읽을 때는 아팠다. 남의 속도 모르고 저렇게 강하게 이야기를 할까 싶었다. 하지만 스님이 옳았다. 무조건 감싸주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머물지 마라.. 상처에 머물지 마라고 스님은 이야기한다. 그러고보면 살아가는동안 얼마나 오래 지난 상처에 머물기만 했는가 돌아보게 된다. 머물고 있음으로 인해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떠나 있어야 상처가 자연적으로 치유가 될 텐데 그 상처에 자리를 잡고 머물고 있으니 상처가 아물 틈이 없다. 조금 아물라 치면 또 상처를 들여다보고 '아직도 낫지 않았네..'라고 푸념을 해 왔다. 상처는 내가 더 키워갔던 셈이다. 머물지 마라. 그 아픈 상처에...

책 속에 담긴 글들은 어쩌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들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역시 글을 쓰는 이의 마음이 다르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같은 글도 누가 어떤 마음에서 우러나 쓰느냐에 따라 읽는 이에게는 천지차이로 다가온다. 내가 느낀 스님의 마음은 '안타까움'이다. 늘 주저주저하며 놓지 못 하고 하루하루 버티듯 살아가는 우리네 삶에 대한 안타까움...

변함이란 삶을 지탱해가도록 도와주는 지렛대같은 역할을 한다.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면 살아가는 의미를 찾을 수는 없다. 무엇이든 달라지기에 오늘을 살며 내일을 꿈꿀 수 있다. 비록 다가오는 내일이 오늘보다 나은 하루가 아니더라도 나에게는 늘 새로운 삶이기에 살아볼만한 것이 아닐까.

책에는 빈 공간이 많다. 짧막한 글에 커다란 그림 그리고 넓은 공간이 함께 하고 있다. 그 빈 공간은 읽는 이가 채워넣어야 한다. 그것이 스님이 던지는 또 하나의 메시지인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보인다. 스님이 던진 이야기와 그림을 읽고 보고.. 내가 그 이야기와 그림에 대한 답을 적어 나가면 이책은 나만의 책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스님은 그림을 배운 적이 없단다. 그래도 스님은 그림을 잘 그린다. 잘 그린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보다 나은 표현을 찾기는 힘들다. 스님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위안이 된다는 말이 적당하지 싶다. 그림의 대부분은 상반신을 담고 있고 그중에서도 얼굴이다. 얼굴에는 사람의 모든 것이 드러난다. 오욕칠정의 감정이 모두 담겨 있는 것이 얼굴이다. 스님의 그림은 이곳에 가면 더 많이 볼 수 있다.

문득 나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나로 인해 다른 이들이 행복할 수 있는 얼굴일까? 아니면 나로 인해 다른 이들이 불행해지는 얼굴일까? 얼굴은 하루에도 수 만 번 변한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감정들이 고스란히 얼굴에 담겨 밖으로 퍼져 나간다. 표정은 마치 냄새와 같아서 기쁜 얼굴에 담긴 행복이건 슬픈 얼굴에 담긴 불행이건 바로 다른 이들에게 옮겨가 버린다. 얼굴은 그렇게 삶의 향기를 내뿜는 법이다. 오랜만에 마음이 차분해지는 책을 읽었다. 며칠 어느 산사에 들어가 생활을 하다 나온 느낌이다. 

책은 그리 두껍지 않다. 종이 냄새가 물씬 난다. 아마 글 내용이나 그림이 그런 느낌을 더해 주는지도 모르겠다. 굳이 앞부분부터 읽을 필요도 없다. 마음 가는대로 아무 곳이나 펼쳐 읽으면 된다. 이 또한 이책이 가진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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