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허당 스님은 트위터에서 먼저 알게 되었다. 虛虛堂이라는 법명에는 비운다는 의미가 크다. 언젠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스님은 "내가 찾는다고 해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비워버리면 스스로 찾아온다"라는 것을 깨달았다 했다. 그래서 허허당이다. 비움으로써 아픔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이 스님만의 특기(?)인지도 모르겠다.

(스님에게 예의는 아니지만) 스님의 외모를 보면 부드러움과는 거리가 멀어보인다. 스님이 아니라면 제법 무서운 인상일 수도 있겠다 싶다. 실제로 스님의 글들은 매섭다. 그리고 강하다. 나약해지고 약해지는 마음에 꾸중을 하는 듯 하다. 처음 스님이 올리는 글들을 읽을 때는 아팠다. 남의 속도 모르고 저렇게 강하게 이야기를 할까 싶었다. 하지만 스님이 옳았다. 무조건 감싸주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머물지 마라.. 상처에 머물지 마라고 스님은 이야기한다. 그러고보면 살아가는동안 얼마나 오래 지난 상처에 머물기만 했는가 돌아보게 된다. 머물고 있음으로 인해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떠나 있어야 상처가 자연적으로 치유가 될 텐데 그 상처에 자리를 잡고 머물고 있으니 상처가 아물 틈이 없다. 조금 아물라 치면 또 상처를 들여다보고 '아직도 낫지 않았네..'라고 푸념을 해 왔다. 상처는 내가 더 키워갔던 셈이다. 머물지 마라. 그 아픈 상처에...

책 속에 담긴 글들은 어쩌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들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역시 글을 쓰는 이의 마음이 다르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같은 글도 누가 어떤 마음에서 우러나 쓰느냐에 따라 읽는 이에게는 천지차이로 다가온다. 내가 느낀 스님의 마음은 '안타까움'이다. 늘 주저주저하며 놓지 못 하고 하루하루 버티듯 살아가는 우리네 삶에 대한 안타까움...

변함이란 삶을 지탱해가도록 도와주는 지렛대같은 역할을 한다.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면 살아가는 의미를 찾을 수는 없다. 무엇이든 달라지기에 오늘을 살며 내일을 꿈꿀 수 있다. 비록 다가오는 내일이 오늘보다 나은 하루가 아니더라도 나에게는 늘 새로운 삶이기에 살아볼만한 것이 아닐까.

책에는 빈 공간이 많다. 짧막한 글에 커다란 그림 그리고 넓은 공간이 함께 하고 있다. 그 빈 공간은 읽는 이가 채워넣어야 한다. 그것이 스님이 던지는 또 하나의 메시지인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보인다. 스님이 던진 이야기와 그림을 읽고 보고.. 내가 그 이야기와 그림에 대한 답을 적어 나가면 이책은 나만의 책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스님은 그림을 배운 적이 없단다. 그래도 스님은 그림을 잘 그린다. 잘 그린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보다 나은 표현을 찾기는 힘들다. 스님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위안이 된다는 말이 적당하지 싶다. 그림의 대부분은 상반신을 담고 있고 그중에서도 얼굴이다. 얼굴에는 사람의 모든 것이 드러난다. 오욕칠정의 감정이 모두 담겨 있는 것이 얼굴이다. 스님의 그림은 이곳에 가면 더 많이 볼 수 있다.

문득 나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나로 인해 다른 이들이 행복할 수 있는 얼굴일까? 아니면 나로 인해 다른 이들이 불행해지는 얼굴일까? 얼굴은 하루에도 수 만 번 변한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감정들이 고스란히 얼굴에 담겨 밖으로 퍼져 나간다. 표정은 마치 냄새와 같아서 기쁜 얼굴에 담긴 행복이건 슬픈 얼굴에 담긴 불행이건 바로 다른 이들에게 옮겨가 버린다. 얼굴은 그렇게 삶의 향기를 내뿜는 법이다. 오랜만에 마음이 차분해지는 책을 읽었다. 며칠 어느 산사에 들어가 생활을 하다 나온 느낌이다. 

책은 그리 두껍지 않다. 종이 냄새가 물씬 난다. 아마 글 내용이나 그림이 그런 느낌을 더해 주는지도 모르겠다. 굳이 앞부분부터 읽을 필요도 없다. 마음 가는대로 아무 곳이나 펼쳐 읽으면 된다. 이 또한 이책이 가진 매력이다.



[도서]부활 1

레프 톨스토이 저/박형규 역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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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문학의 절정

이 책을 읽기 전 부활의 여주인공은 아나스타샤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아나스타샤라는 말이 부활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에 가지고 있었던 착각이긴 했지만 왠지 어울리지 않을까 싶었다. 민음사의 부활은 두 권으로 나뉘어 있다. 두 권 모두 제법 두꺼운데 읽는 데 오래 걸리지 않을까 싶었지만 생각보다 몰입이 잘 된 편이다.

네흘류도프와 카츄샤라는 두 주인공이 있고 둘 사이의 연결고리는 제법 단단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어쩌면 두 개의 서로 다른 줄거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고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그 생각은 확실해졌다. 아마 각자의 이야기만 가지고 별도의 소설을 써도 전혀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남자와 여자. 사랑이야기가 나오지만 사랑이라는 주제보다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친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각각의 주제들에 대한 톨스토이의 성찰력은 놀라워서 가끔 던져지는 문장들을 곱씹어 생각해야할 때가 많았다.

네흘류도프 쪽에서 보자면 철모르는 귀족 집안의 남자가 한 여자를 통해 그리고 그 여자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성숙하게 변모해가는 과정이 이어진다. 세상 부러울 것 없이 지내다가 평민들의 삶을 직접 들여다보고서야 사회의 부조리와 차별을 깨닫고 그 과정 속에서 성숙해져가지만 때로는 이전의 화려한 생활의 편안함을 갈구하기도 하는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카츄사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끌려가게 되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불신, 사랑에 대한 불신을 간직한 채 그저 흘러가는 대로 체념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 안에는 순수함에 대한 동경, 사랑에 대한 믿음을 동시에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끝내 내리는 마지막 선택은 의외의 반전인 듯 하면서도 그녀의 지고지순함을 보여준다.

그야말로 모든 인간군상들의 모습을 톨스토이는 이 책에 담고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수 많은 인물들 속에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네들의 모습이 모두 다 들어있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다. 이 책의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 지위가 높건 그렇지 않건 평민이나 죄수, 혹은 간수와 정치가, 빈농들과 지주들...

요즘의 어느 나라의 풍경에 빗대어봐도 인물을 대입해보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결국 세월이 흘러도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겉에 걸친 옷이 달라지고 마차 대신 차를 탈지언정 그 근본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인간들의 심리와 본성을 적나라하고 진지하게 담아 내는 톨스토이의 통찰력에 새삼 놀랄 뿐이다.

아마도 이 책은 읽는 이의 상황(사회적인 신분, 처지 등)에 따라 제각기 달리 해석될 지도 모르겠는데 이 점 또한 이 책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다. 만약 노동운동을 하는 이가 읽는다면 아마도 계급투쟁을 위한 지침서가 될 수도 있겠고 순수한 사랑을 동경하는 이가 읽는다면 아가페적인 사랑의 표본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제 극장에서 내려갈 때가 다 되어서 그런지 극장 안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간간히 연인들이 보이고 홀로 온 몇몇의 사람들이 전부였다. 프로메테우스의 열풍이 한 번 세차게 휩쓸고 지나갔지만 내가 이 영화에 대해 알고 있던 점은 리들리 스콧과 에일리언 뿐이었다. 영화를 보러가기 전에 영화에 대한 정보와 토론들을 미리 읽지 않은 것은 감독 이름과 에일리언이라는 두 단어만으로도 제법 많은 편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역시 고정관념을 떨칠 수는 없었고 리들리 스콧이라는 이름으로 인해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장면장면이 대체 무슨 의미인가 심각하게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저 장면은 왜 등장했을까?' 이런 생각이 영화를 보는 것을 상당히 방해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전체적인 흐름은 놓치지 않으려 애를 썼다.

리들리 스콧의 영화는 제목에 주제가 함축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인류에게 불을 선사한 대가를 치러야 했던(혹은 아직도 치르고 있을) 프로메테우스라는 제목은 왜 지어진 것일까. 그리고 위에 보이는 영화 포스터 중간에 써 있는 다분히 중의적으로 해석이 가능한 저 문장이 이 영화의 주제일까?

결론적으로 어떠한 해답도 영화를 보는 동안 찾아낼 수는 없었다. 리들리 스콧이 어떤 의도를 했건 해석은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이 영화에 대한 나만의 해석을 하기 위해서는 일단 장면들을 다시 한 번 머릿속에서 되돌려 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깔려 있는 복선들이나 상징이 워낙 많아서 좀처럼 '이것은 이래서 이렇다'라는 판단을 내리기는 쉽지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렇게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존의 리들리 스콧의 작품들과의 단절이 필요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적당한 킬링 타임용 SF물로 변신할 수도 있다. 하지만 SF물로 보기에는 액션성(액션을 할만한 주인공도 없었다)이 우수한 것도 아니고 흔한 러브라인(일부러 끊어버리는 의도가 눈에 보일 정도)도 없다. 그래픽 기술이 좋긴 하지만 최대한 끌어올린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재미도 별로 없고 뚜렷한 주제도 없는 맹탕같은 영화였을까...

화면에 비춘 장면들만을 놓고 보면 첫장면과 마지막 장면이 이 영화의 전부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어느 존재인가가 인류를 만들어냈고 인류는 그 존재를 찾아나서게 된다는 것. 이것이면 충분했다. 우리 인간은 인류가 생긴 이래 이 질문을 해 왔고 미래에도 여전히 유효할 질문. 철학과 과학에도 등장하고 신학이나 문학에도 등장하고 누구라도 한 번쯤 생각해봤을 '나는 누구이고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라는 질문이 이 영화의 주제라는 생각이다. 그러니 당연히 답이 나오지 않는다.

결국 누구나 다 아는 그리고 아무도 풀지 못 하는 질문을 하기 위해 리들리 스콧은 이 영화를 만든 셈이다. 그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는 블레이드 러너 역시 내 해석은 동일하다. 그렇기에 영화를 보고 나와도 뭔가 찜찜함을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풀리지 않을 의문을 다시 확인한 셈이었으니 말이다. 


[도서]오셀로

윌리엄 셰익스피어 저/최종철 역
민음사 | 2001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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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질투, 미움과 배신 그리고 죽음이란..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사랑을 전제로 한다. 지난 번 서평을 쓴 멕베스가 권력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했다면 오셀로는 전형적인 남녀간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 남녀간의 사랑이야 워낙에 오래된 주제다보니 오래 전에 쓰인 글이라 해도 지금 읽어도 별로 이질적이지가 않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질투에 휩싸인 남자가 아내를 죽이고 그것이 오해와 음모에서 벌어진 것을 깨닫고 자살을 하게 되는...어쩌면 요즘도 흔히 일어나는 비극이다. 가만 생각해보면 예나 지금이나 사랑을 깨는 큰 원인 중의 하나가 질투와 오해라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지 그리고 그 본성이 세월이 지나도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흥미를 끈다.

오셀로의 비극은 단지 오셀로가 데스데모나를 오해하고 살해했다는데 있지 않다. 오셀로가 데스데모나라는 지고하고 순수한 여성을 오해하고 살해하도록 만든 제3자가 있다. 오셀로와 데스데모나 두 사람과 직접적인 연관도 없는 이아고의 등장과 그의 모함이 이 비극을 이끌어간다. 어쩌면 이 작품의 주인공은 이아고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오셀로의 행동이 이 비극을 만들어가도록 부추겼을지는 몰라도 막상 음모를 계획하고 추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본인의 선택이기 때문에 이아고라는 인간 내면의 사악함이 없었다면 이 비극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한 인간의 증오심과 복수심이 전혀 다른 양상에서 비극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이점이 셰익스피어의 다른 비극들과의 차이점이 아닐까 싶다.

약간 시점을 바꿔 보자. 데스데모나는 이 비극에서 어떤 위치일까? 단지 이아고가 오셀로에게 복수하기 위해 선택한 대상일뿐일까? 그렇다면 데스데모나의 위치는 너무도 하찮게 된다. 정절과 고귀함의 상징인 데스데모나를 그녀와는 상관도 없는 제3자가 파멸시키도록 만든 작가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아직 이 부분까지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인종과 계급과 나이를 넘어서 오셀로라는 인간을 사랑하게 되고 그때문에 죽게 된다. 작품에서는 그게 전부다. 셰익스피어는 남녀차별주의자였던 것일까? 다른 작품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점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이 작품에서의 데스데모나는 너무나 무기력하게 무너져 버린다. 작가의 의도는 무엇일까...이 점을 알기 위해서는 한 번의 독서로는 부족하리라...

그리고 결말에서의 오셀로의 자결..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그것을 죽음으로 속죄하는데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고들 하는데 나는 오히려 그가 무책임하다고 생각된다. 죽음이란 모든 것으로부터의 도피다. 아무 것도 듣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것 외에는 말이다. 결국 오셀로는 데스데모나로부터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친 것은 아니었을까..

햄릿, 멕베스에 이어 읽은 오셀로다. 세 권 모두 출판사와 번역자가 다른데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열린책들의 번역이 제일 낫지 않나 싶다. 민음사의 오셀로는 전반적으로 희곡이라는 느낌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마치 그냥 소설을 읽듯이 술술 넘어가는 방식인데 이런 편집을 좋아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내 경우는 열린책들처럼 연극의 대본처럼 된 방식이 읽기에 편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독자의 선택이니 가능하다면 직접 서점에 가서 읽어보기를 바란다.


[도서]보이지 않는 고릴라

크리스토퍼 차브리스,대니얼 사이먼스 공저/김명철 역
김영사 | 2011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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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것 같지만 불완전한 인간

농구공을 던지는 학생들이 있다. 학생들이 농구공을 서로 던지는 횟수를 헤아리라고 한다. 눈은 정신없이 학생들과 공을 따라다닌다. 횟수를 헤아리고 나면 질문자가 묻는다. 

중간에 등장한 고릴라를 보셨나요?

우리가 세상을 느끼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아무래도 가장 큰 것은 시각이다. 우리는 눈으로 세상을 보고 정보를 입수하고 그 정보를 판단한다. 눈으로 보는 것은 맛이나 촉각 혹은 청각보다 진실이라고 믿기 쉽다. '무언가가 보인다'는 것의 위력은 그렇게 큰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감각은 생각보다 허점이 많다. 그리고 그 허점이 드러나게 되는 가장 큰 원인은 당사자의 마음에 있다. 우리는 흔히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말을 많이 한다. 이책의 가장 큰 줄기가 된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은 그 맹점을 짚어 내고 있다.

학생들이 공을 던지는 것에 온 신경을 집중하다보니 화면 중간에 등장하는 고릴라를 보지 못 한다. 어떻게 저렇게 또렷한 존재를 못 볼 수 있나? 라고 실험 후에 사람들은 이야기하지만 눈으로 들어온 정보를 우리 마음이 혹은 뇌가 차단해버렸기 때문이다.

이책을 읽는 동안 참 인간이라는 존재가 세밀하고 정교한 것 같으면서도 생각보다 오류가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생각해보면 책을 읽는 데 집중하면 외부의 소리를 듣지 못 하는 경우가 종종 생기는 데 그런 현상 역시 고릴라를 발견하지 못 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집중이나 자기 최면을 통해 망각이나 오류가 생길 수도 있지만 다른 면에서는 제법 긍정적인 면으로도 활용이 가능한 셈이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랄까?

아무튼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정보는 동일하지만 그 정보를 인식하고 해석하는 것은 뇌가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그 정보를 왜곡하는 경우가 우리의 일상에서는 생각보다 많이 일어나는 셈이다. 

운전 중에 전화를 한다던가 DMB를 본다던가 혹은 화장을 하면서도 '나는 괜찮겠지'라고 착각을 하는 것도 외부의 환경을 본인 스스로 극복할 수 있다는 착각에서 비롯된다. 

문제는 우리가 그 왜곡 혹은 착각을 확신하는 데서 자주 발생하는데 이책을 통해 그런 착각이나 오류가 생기는 상황들을 살펴보고 미리 대비할 수 있다면 이책을 읽은 보람은 충분히 느낄 수 있다고 생각된다. 

물론 이 이론을 악용해 국정감사나 청문회에서 정치인들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거나 '분명히 전달했다'는 식의 발뺌을 하는데 써서는 안 되겠지만 말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주석 부분을 전혀 번역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50페이지가 넘는 주석 부분은 본문을 이해하는데 있어 상당히 도움이 되는데도 김영사의 의도인지 번역자의 의도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 정보를 습득하는 것을 막고 있다. 이럴 거면 애초에 주석을 달지 않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다. 과거의 서평들을 보니 이 부분은 여전히 개선의 여지는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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