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뉘엿뉘엿 넘어가는 11월의 첫날 둘레길을 다시 찾았다. 오랜만이라고 반갑게 맞아주지는 않는 것 같지만 산은 언제나 그렇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고보면 산처럼 한결같은 것도 많지는 않다. 자연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빠르게 변화하기에 이렇게 무뚝뚝하지만 늘 제자리에 버티고 서서 나를 반기는 산은 어쩌면 내게 하나의 큰 버팀목 같은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오늘 코스는 서울을 벗어나게 된다. 서울의 북서쪽 외곽을 지나 경기도 남부에 이르는 길인데 마무리되는 지점은 대충 송추, 장흥 부근이다. 송추라면 기억하시는 분들은 전투방위가 생각나실테고 장흥은 커피 한 잔 -행간을 읽으시는 분들은 다른 것을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정도가 생각나실까? 가을도 아니고 그렇다고 겨울도 아닌 11월의 첫째날은 아침에 집을 나설 때는 제법 차가운 바람이 걱정됐지만 막상 길을 걸을 때에는 비교적 두껍게 입지 않아도 걸을 만하다 싶을 정도였다.


북한산국립공원에서 안내하는 12구간 충의길의 거리는 3.7km로 대략 1시간 45분이 소요되며 난이도는 중급 수준이고 실제로 걷게 되면 4.2km정도에 시간은 1시간 20분 정도 소요된다. 이번 구간은 시작점이 지하철 구파발역에서 버스로 제법 멀리 와야 한다. 이번 구간과 다음 구간이 서울에서 출발하는 경로로는 마지막인데 구파발역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출발점으로 이동한 다음 북한산 등반로로 향하다보면 중간에 갈림길을 만나게 된다.


사람은 습관의 동물이라던가. 몇몇 구간을 혼자 걷지 않다가 불쑥 혼자 걷게 되니 뭔가 허전한 마음이 걷는 내내 가시질 않았다. 딱히 뭐라 설명하기는 애매한 그런 느낌이랄까. 입구로 가는 중간에 은행잎 위로 서리가 내린 것인지 밤사이 내린 비가 얼은 것인지 모를 얼음 알갱이들이 제법 보였다. 아직 그 색이 바래지 않은 은행잎과 물방울과 얼음조각들이 이번 걷기의 시작을 알려주는듯 했다.


오늘은 LX5만 들고 나갔는데 집에 두고 온 카메라가 자기 생각을 해달라는 것인지 색감이 니콘 비스무리하게 나왔다. 이번 구간은 말그대로 사방이 온통 낙엽으로 가득 차 있었다. 변화를 위해서는 무언가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연의 단순한 진리를 어렵거나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이 그저 눈으로 보고 발로 밟아 느끼면 그만일 정도였다. 북한산에는 이미 단풍은 남아있지 않았다. 가장 화려한 시간이 지난 후에는 이렇게 회색빛의 세상이 오는데 단풍의 시기에 이곳을 왔다면 한 가지만 보고 다른 한 가지는 놓칠 수도 있었으니 차라리 오늘이 적당한 때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12구간 충의길은 다른 구간의 이름짓기법과는 조금 다른데 사실 이 구간에는 무언가 특징적인 것이 없다. 그래서였는지 국립공원측도 고민 끝에 '주변에 군부대가 많으니 충의길이라고 하자'라고 결심한 것처럼 보인다. 구간 자체는 중급 난이도라 하지만 실제로 걸어보면 하급 정도가 아닐까 싶은데 정말 걷기 편하고 인적도 아주 드문 편이니 데이트 하기에 꽤 어울리는(사람 나름이겠으나) 구간이다. 


길은 대부분 흙길이라 걷기에 편하고 낙엽들이 푹신푹신한 느낌도 더해주기 때문에 천천히 걸으며 저물어가는 가을을 배웅하기에 적당한 길이 아닌가 생각됐다. 지난 밤에 내린 비의 흔적들이 여전히 남아 있음에도 미끄럽지 않아 큰 어려움은 없었다. 구간을 마칠 때까지 딱 두 명과 마추쳤다. 북한산국립공원도 이 구간의 특징으로 인적이 드물다고 하고 있는데 꽤나 좋은 구간임에도 왜 사람들이 적은지는 알 길이 없다. 서울에서 이동하기에 멀다는 점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출렁다리'라고 불리는 다리인데 이런 다리가 2개인가 3개가 있다. 다리 위를 걸으면 위아래로 출렁거리는 느낌이 제법 강한데 평지로 나온 다음에도 몇걸음은 출렁거리는 느낌이 유지되는 점이 재밌다 다리 자체는 아주 튼실하게 만들어져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구간에 들어서기 전에 깜빡하고 음료수를 준비하지 않았다. 늘 들고 다니는 묘한 빗깔의 파워에이드가 오늘따라 그리웠다. 결국 종착점에 가서야 그 녀석을 만날 수 있었다.


그냥 편하게 걸으면 족했다. 이제까지 걸어온 어느 길보다 걷기가 편했다. 길도 널찍하고 크게 오르내리는 구간도 없기 때문에 주변의 바람소리와 신발 밑으로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걸으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낙엽은 영어로는 'dead leaves'라고도 하는데 그 표현에 비하면 물론 한자기는 하지만 우리말이 더 운치가 있어서 좋다. 그래도 길을 걷는 내내 뭔가 허전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든 사람은 몰라도 난 사람은 안다던가... 


이것은 버섯일까? 쓰러진 나무 위로 피어 오르는 또 다른 생명들이 묘한 부조화를 이루며 있었다. 하나의 생명이 사그라짐으로 인해 또 다른 생명이 살게 된다는 것은 한편 생각해보면 잔인해보이기도 하지만 조금 큰 틀에서 생각해보면 결국 그렇게 생명이라는 것이 이어지는 것인 셈이고 그것이 자연스러운 순리일테니 오히려 새로운 생명을 반길 일이다. 산길을 나서 일반도로로 접어들었을 때 길가에 반듯하게 누운 채 식어있는 강아지 한 마리를 보았는데 이때의 감정이 그때까지 이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온통 낙엽이다. 내년 봄을 맞이하기 위해 산은 가을부터 준비를 한다. 계절에 맞게 그저 흐르는 순리대로 받아들인다. 나무들이라 해서 싱싱한 나뭇잎을 떨구는게 내키겠냐만 그것이 주어진 순리라면 그저 묵묵히 받아들임을 늦가을의 이 산길은 내게 보여주고 있었다. 아마도 그 큰 흐름에 맞서는 것은 우리네 인간밖에 없지 않을까.


햇빛은 산의 구석구석을 비춘다. 자기가 선 자리에 볕이 들지 않는다 해도 나무들은 그저 기다릴 뿐 달리 말이 없다. 그리고 언젠가 싸늘한 바람을 뚫고 한 조각의 빛이 내려오면 그 빛에 온몸을 기대고 선다. 빛이 자기 자리에 들 때까지는 묵묵하게 스스로의 길을 갈 뿐이다. 그것이 자연이고 그것이 순리다. 그저 수동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능동적인 기다림이다.


흔히 미래에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꿈을 갖는다. 그리고 그꿈을 이루기 위해 여러가지로 노력을 한다. 미래란 현재의 다른 모습이다. 현재가 이제까지 내가 걸어온 결과이듯 말이다. 현재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과거의 내가 그런 생각과 결정을 했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와 제자리에 선다. 모든 것의 시작이자 과정이자 결과는 나로 인한다는 것. 미래에 어떤 모습의 나를 만나고 싶다면 현재의 나를 보면 된다. 구태여 점을 볼 것도 막연함에 두려워할 것도 없도 없다. 지금의 모습이 미래의 모습이니 말이다.


이제까지 둘레길을 걷다가 이런 표지판은 처음 만났는데 생태계 보호를 위해 사람들이 오고가는 것을 막아둔 것이다. 실제로 나무로 울타리가 쳐져 있어 더 이상 이길을 따라 위로 가지 못 하게 하고 있다. 우리는 쉽게 나뭇가지 하나를 꺾을 수 있지만 나무가 그렇게 자라는데 걸리는 시간은 십 수년에 이를 수도 있다. 무언가를 파괴하는 것은 순간이지만 창조하는 것은 기다림이 필요하다. 사람도 모양이 갖추어져 나오는데 10달이나 걸리지 않는가.


이 구간은 대체로 좌우가 막혀 있는 편인데 가끔 이렇게 뻥 뚫린 여백을 만나게 되면 절로 마음이 시원해진다. 길을 걷다보면 간간히 총성이 들려오는데 근처 군부대에서 훈련을 하는 경우다. 총소리를 듣기도 참 오랜만이다. 소대장 시절 연말에 그동안 쓰지 않은 총알을 모두 소모해야 한다며 분대장 몇 데리고 나가 연발로 원없이 총을 쏴야했던 날이 문득 떠올랐다. 사실 총소리는 굉장히 큰편이다.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감당하기 쉬운 수준은 아니다. 전쟁 중에 총소리, 포소리 때문에 공황이 생긴다는 말이 이해가 갈 정도로 크다.


조금 더 내려가면 일반 도로(39번 도로)와 만나게 되는데 어지간해서는 여기까지 걷고 이 구간은 종료하는 편이 낫다. 여기서부터 포장된 길을 정말 하염없이 걸어야 한다. 혹 산길에서 낭만적인 데이트라도 했다면 바로 차를 타기를 권한다. 이제까지 만들어둔 낭만적인 분위기가 완전히 깨질 수 있으니 말이다. 특히나 계절이 극단적인 여름이나 겨울에는 몸에 무리가 갈 수도 있으니 주의를 요한다.


좌우로 보이는 것은 멀리 보이는 산들과 군부대가 전부인 길이다. 차들도 그리 많이 다니지는 않아서 조금 휑하다 싶을 정도의 길인데 이제까지 나무들이 가려준 덕분에 맞지 않았던 늦가을 바람이 제법 얼굴을 때리고 지나갔다. 이 포장도로에 진입하면 경기도에 들어선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처음 시작한 지점이 서울에서도 제법 동쪽이었는데 북한산 자락이 참 넓게 그리고 멀리 뻗어있구나 싶다. 


조금 더 걸으면 예약제로 운영되는 둘레길의 마지막 구간인 우이령길로 갈 수 있는 갈림길을 만날 수 있다. 우이령길을 가는 것은 역시나 내년이나 되어야 가능하지 싶다. 이제 12구간을 마쳤으니 올해가 두달 남은 지금으로서는 굳이 무리할 이유도 없으니 말이다. 산자락에는 늘 뭔가 수상해보이는 모텔들이 있는데 소문으로 들리는 그런 이야기가 실제로 있긴 한가 보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꼭 산이라 해서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상황이기에 두드러질 뿐이다. 


이 하염없이 길기만한 길은 1km가 넘게 이어진다. 사실 이때만 해도 어느 정도 걸으면 다음 구간 안내가 나오겠지 싶어 거기까지만 가자는 생각이었다. 다음 구간은 거리가 5km가 넘기 때문에 오늘 이어서 가기는 어차피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생각은 잠시 후에 바뀌게 된다. 아무튼 발바닥이 조금 피곤해지는 길이기는 하지만 천천히 걷는다 생각하면 직선으로 난 길이기 때문에 죽 걸어갈 수는 있다. 사방에 바람막이가 없으니 옷깃은 단단히 여밀 필요가 있다.


이번 구간을 마쳐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이 표지판을 만나고나서다. 가는 방향과 수평으로 있기 때문에 어쩌면 못 보고 지나칠 수도 있는데 그런 점을 생각했는지 제법 크다. 표지판의 의미는 12구간과 13구간은 달리 분기점이 없다는 말이다. 이 지점을 시작으로 13구간이라는 말인데 앞을 보니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같은 모양의 직선 도로가 죽 이어져 있다. 더 이상 걷기는 무리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여기서 조금 더 가면 건널목이 나오고 길을 건너 34번이나 704번을 타면 구파발로 돌아갈 수 있다.

전체적으로 12구간 충의길은 뚜렷한 특징은 없는 그러나 편하게 산책하듯이 걸을 수 있는 그런 길이었다. 낙엽이 푹신한 길을 걸으며 이런저런 생각도 해 보고 제법 차가워진 바람을 느끼며 또 하나의 계절이 오고가는구나라는 상념에 젖어볼 수고 있었다. 서울에서 경기도로 이어지는 점도 이제까지 제법 많이 걸어왔구나 라는 생각을 들게 했는데 21개 중에 이제 12개가 마무리되었으니 많으면 9번의 걸음만 하면 하나의 추억의 책이 완성된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조금 멀리 남겨둘까라는 생각도 해 보는데 크게 시간이나 구간에 구애받지 않을 생각이니 내년 초쯤에는 마무리가 되지 싶다.

사전에 일정이 있던 것도 아니고 갑작스레 걷게됐는데 한 가지 생각을 결정을 짓고자 함이었다. 길이 마무리될 때까지 대충 결심을 했는데 걷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생각을 바꾸었다. 무엇인가 스스로 단정을 짓고 그것을 옳다고 자기최면을 거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 없다.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하고 무엇보다 조율을 해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일방적으로 내린 결정은 당시에는 그것이 옳다고 느낄지는 몰라도 멀리 보면 정말 소중한 것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산의 어느 이름모를 꽃처럼 주어진 자리에 충실하며 순리를 기다려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니 말이다.


Panasonic LX-5


1905년 11월 17일 정확하게는 11월 18일 새벽 1시경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이 들어 있을 무렵 광무황제(이하 고종황제)의 처절한 외침을 뒤로 하고 일본의 주한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대한제국 외부대신 박제순이 한 장의 종이에 서명을 하고 도장을 찍는다. 우리가 을사조약, 을사보호조약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을사늑약은 이렇게 황제의 승인도 없는 가운데 을사오적이라 불리는 친일파들의 손에 의해 처리되고 이 늑약을 시작으로 500년을 이어온 조선 그리고 대한제국은 종말로 치닫게 된다. 이 조약 이후 대한제국은 모든 외교권을 상실하게 되고 일본의 식민지로 빠르게 편입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이 치욕적인 역사가 만들어진 장소가 바로 이곳 덕수궁 중명전이다. 중명전은 한자로 重明殿이라 적는데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 전각'이라는 뜻이다. 중명전이 세워진 것은 1897년으로 바로 대한제국이 성립된 해기도 하다. 러시아인 사바찐에 의해 설계된 서양식 건물로 당시에는 황실도서관의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중명전이 우리 근대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제법 크다. 을사늑약이 강제되었고 고종황제에 의해 헤이그 특사가 파견된 장소이며 영친왕이 황태자로 책봉된 장소기 때문이다.

이 역사적인 건물은 대한제국이 성립된 이래 두 번이나 화재로 건물이 모두 타버리는가 하면 외국인들의 사교클럽으로 혹은 주차장 등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후 서울시가 1983년 유형문화재 제53호로 지정하고 2003년에 정동극장이 인수한 것을 2006년에 문화청이 넘겨 받아 2007년에 사적 제 124호로 덕수궁에 편입되는 과정을 겪는다. 그리고 2010년에서야 문화재청에 의해 복원이 완료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1897년 건축된 이래 100년이 지난 후에 비로소 제모습을 찾게 되었다는 말이니 한편에서는 씁쓸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일반에 개방된 것은 지난 2010년부터다.


현재의 중명전은 덕수궁 바로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원래 1910년 당시의 덕수궁은 현재보다 넓은 면적이었는데 1919년 고종황제 승하 후 여기저기 전각이 해체되면서 원래 면적의 거의 절반 크기로 줄어 들었다. 중명전 역시 당시에는 덕수궁 안에 있었지만 지금은 덕수궁과 이어지지 않고 정동극장 뒤켠의 길을 따라 들어가야 만날 수 있기 때문에 그 중요성에 비해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장소기도 하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덕수궁과 이곳을 어떻게든 이어 덕수궁을 찾는 이들이 이곳을 반드시 들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중명전은 2층 건물인데 2층은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어 올라갈 수가 없다. 아쉬운 점이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가 병력으로 고종황제를 억압하며 대신들에게 조약에 찬성하는지 여부를 물을 때 대성통곡을 하며 끝까지 반대를 하다 2층 어느 방으로 끌려간 한규설 참정대신의 흔적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8대신 중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을  제외한 이들 즉 우리가 기억하는 을사오적의 손에 을사늑약이 맺어진다. 늑약이란 한자로 勒約이라 적는데 '굴레 륵'자에 '조약 약'자를 적어 강제로 맺어진 것이라는 의미다. 최근 들어 정부 어느 부처인가에서 출판사에 중등 교과서에 적힌 을사늑약을 전부 을사조약으로 바꾸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는데 시대를 역행하는 느낌이다.


좌우로 3개의 방을 만날 수 있는데 왼쪽에 한 개 오른쪽에 두 개의 방이 있다. 왼편의 방으로 들어가면 을사늑약 체결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도록 설명을 해 둔 자료들을 만날 수 있다. 1905년 11월 17일로 알고 있던 날짜가 사실은 18일이었음을 오늘 이곳을 방문하고야 알게 되었다. 관심 부족이 무엇보다 큰 이유겠지 싶다. 그까짓 1일 정도가 무슨 상관이냐고도 할 수 있지만 을사늑약이 18일 새벽 1시가 넘어서야 체결되었다는 것은 이미 무언가 정상은 아니라는 말이다. 어느 국가간의 조약이 새벽 1시에 체결된다는 말인가


을사늑약의 복제본을 만날 수 있다. 제2조를 보면 "한국정부는 이 조약 이후 일본국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 국제적 성질을 가진 조약을 절대로 맺을 수 없다."는 문구가 적혀 있는데 이로써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일본에 온전히 넘겨주게 된다. 즉 한 국가로서의 존재 가치를 잃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중요하고도 처절한 문서가 작성된 곳이 이곳 중명전이다.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의 하야시 곤스케의 도장이 보인다. 박제순은 당시 고민하였다는 이야기도 들리지만 이후 승승장구하며 일본에 충성을 바쳐 대한제국의 마지막 영의정까지 거치면서 자손대대로 풍족하게 지냈다고 한다. 을사오적으로 이완용이 대표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에 못지 않은 인물이 또한 박제순으로 친일파 목록에서 빠지지 않고 상위권을 차지하는 인물이다.


오른쪽으로 가면 작은 방이 하나 있다. 중명전의 모형과 당시의 사진들 몇 점을 볼 수가 있는데 우리나라의 국보, 보물, 사적 등의 관리가 대체로 불만족스러운 것은 많은 분들이 공감하는 것일텐데 중명전 역시 좀 더 효과적으로 관리를 할 수는 없을까라는 아쉬움이 문을 나설 때까지 이어졌다. 개인이 관리하는 곳도 아니고 국가가 국민의 세금으로 관리하는 곳인데 말이다. 문화재청을 '부'로 승격해도 모자랄 일이다.


오른쪽의 두 번째 방은 작은 방 하나와 큰 방 하나가 이어져 있다. 가장 먼저 만나는 방에서는 을사늑약 당시의 해외 보도 자료를 만날 수 있다. 사진 오른쪽 구석에 벽난로가 보이는데 벽돌로 꼭 막아두고 있어 조금은 인위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중명전 자체를 이렇게 전시공간으로만 활용할 것이 아니라 당시의 분위기대로 복원을 하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건물 자체가 을사늑약이 체결된 곳이라는 점을 빼면 사실 무언가 당시를 돌아볼만한 "꺼리"들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을미의병(명성황후 살해사건) 이후 잠시 활동이 뜸했던 의병이 다시 일어나게 되고 애국계몽운동이 본격화된다. 사진 맨 오른쪽에는 늑약 체결 3일 후에 황성신문에 장지연이 쓴 '시일야방성대곡'이 보인다. 장지연에 대해서는 애국자냐 친일파냐 워낙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어 자세히 적을 바는 아니지만 적어도 당시만큼은 그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이어진 문으로 들어가면 늑약체결 이후 고종황제가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보내어 늑약이 무효임을 주장하고자 한 노력들을 만날 수 있다. 우리가 '헤이그 특사'라고 부르는 세 분 즉 이준, 이상설, 이위종이 그들이다. 강대국들의 형식적인 만남일 뿐이었던 당시 회의에 결국 특사들은 발조차 들여놓지 못하게 되고 이준은 헤이그에 더 머물다가 갑자기 사망하는데 그의 사망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뚜렷한 원인를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헤이그 특사가 우리 근대사에서 또 중요한 이유는 일제가 이를 빌미 삼아 고종황제를 퇴위시켰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황제를 온갖 협박으로 물러나게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지만 이것을 도운 것 역시 우리나라 사람인 이완용과 송병준이라는 점이 무엇보다 씁쓸한 일이다. 당시 송병준은 "동경에 가서 사과하던지 자결하라"고 황제를 협박했다고 한다.


헤이그 특사 세 분의 사진을 볼 수 있다. 의연하고 떳떳한 모습이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이후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 그리고 순종황제의 즉위와 소위 한일신협약이라 불리는 정미7조약 등이 일사천리로 이어지게 된다. 결국 대한제국은 이때 군대마저 해산되게 되는데 외교권에 이어 나라를 지킬 군사력마저 모두 빼앗겨 버리게 된다. 그리고 이로부터 3년 후 대한제국은 완전히 일본제국에 병합되고 만다.


참고자료: 문화재청 홈페이지, 문화유산콘텐츠지도, 덕수궁 홈페이지, 위키피디아

참고서적: 한영우, 다시 찾는 우리 역사, 경세원, 2004. 이영철, 한국사총론, 메티스, 2012.


덕수궁 중명전(重明殿)

1897년 건축 사적 제124호

주소: 서울 중구 정동길 41-4 중명전

평일 오전은 제한없이 관람할 수 있지만 오후와 주말은 선착순 예약을 해야 입장할 수 있다.

덕수궁 및 중명전 홈페이지 


중명전에 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다. 지하철 1.2호선 시청역에 내려 덕수궁 방향으로 나가 대한문을 바라보고 왼쪽길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아는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걸으면 된다. 이곳이 바로 정동인데 정동에는 우리 근대사의 흔적들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는 장소다.


가을의 정취가 한껏 느껴지는 덕수궁 돌담길이다. 연인과 함께 걸으면 헤어진다는 전설이 서린 곳이라는데 왜 그런 이야기가 나오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이 길을 따라 걸으면 좌우로 근대사의 조각들이 조금씩 흩어져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문화재청에서 배포하는 '다같이 돌자 정동한바퀴'라는 안내 소책자가 있는데 지도와 해설을 잘 담아놓고 있으니 덕수궁이나 중명전에서 한 부 얻도록 하자.


오른쪽에 정동극장이 보인다. 정동 자체가 워낙 이런 시설들이 넘쳐 나는 공간이다보니 글 하나에 모두 소개하기란 벅찬 일이다. 정동의 우리 유산들은 천천히 한곳씩 소개해 나갈 생각이다. 이 글에서는 이런 곳이 있구나 정도로만 그치기로 한다.


정동극장을 지나 바로 오른쪽으로 난 작은 샛길에 중명전으로 가는 안내 푯말을 볼 수 있다. 평소에는 한 번도 눈에 띄지 않은 것인데 막상 찾아간다고 생각하고 가니 엄청나게 크게 보였다. 이길을 지나시는 분들은 눈 여겨 보셨다가 한 번 들러보시기 바란다.


길을 따라 약간만 올라가면 중명전 입구를 만날 수 있다. 생각보다 외진 데 있고 생각보다 초라하다는 생각은 지울 길이 없지만 그래도 남아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된다. 

이곳이 바로 "대한제국의 운명이 갈린 곳 - 덕수궁 중명전"이다.


Nikon D700, AF Nikkor 35mm f2D & Panasonic LX5



둘레길도 어느덧 중반이다. 처음 1구간을 걸을 때 막연하게 '완주를 해보아야겠다'고 생각만 했었는데 어느새 11구간이다. 시작이 절반이라는데 절반을 왔으니 끝까지 걷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으리라. 오늘은 어느 여름날처럼 제법 한낮의 햇살이 따가왔다. 처음 걷기로 한 구간은 9,10구간이었지만 한 구간 더 나아가 11구간까지 걷기로 했다.

9구간은 이전 8구간의 종료지점에서 바로 시작하기 때문에 8구간에서부터 이어서 걸은 경우가 아니라면 어느 정도 거리 손실이 있게 된다. 오늘은 9구간의 시작지점을 북한산국립공원의 안내에 따라 잡았기 때문에 생각보다 구간의 종료가 빨랐는데 집에 돌아와서야 이런 사실을 알았으니 이점은 유의하시는 게 좋을 듯하다. 

9,10,11구간은 11구간만 약간 난이도가 있고 9,10구간은 무난한 난이도여서 전체 구간을 한번에 걷는 것도 크게 부담스럽지 않다. 위의 표를 보면 마지막 효자길에서 고도가 급격하게 높아지는데 생각만큼 힘들지는 않으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좀 더 자세한 이동경로는 이곳을 참조하시면 되겠다.

9,10,11구간을 전부 완주할 경우 전체 소요거리(버스정류장 이동거리 포함)는 7.91km고 성인 남녀 기준(조금 느긋한 걸음)으로 3시간 10분 가량 소요된다. 시작점은 3호선 연신내역에 내린 다음 3번 출구로 나가 그대로 직진을 해서 30여 미터쯤 걸어가면 버스정류장이 있다. 여기서 7211번을 타면 된다. 중앙 차로에는 이 버스가 없으니 주의하자.


전형적인 가을의 파란색이 두드러졌던 하루였다. 진관사(하나고) 입구 버스정류장에 내려 조금 걸어가면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길목에서 마실길 구간임을 알려 주는 이정표와 만날 수 있다. 멀리 북한산이 보인다. 마음은 산 정상에 있지만 몸은 둘레길이다. 9구간 정도 오게 되면 서울의 서쪽으로 제법 많이 이동한 셈이다. 북한산을 아래에서부터 왼쪽으로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는 코스라고 생각하면 된다.


북한산둘레길은 각 구간별로 주요 지점을 이정표에 기록하고 있는데 9구간은 효자동을 대표 이름으로 삼고 있다. 휴일이어서 그런지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 구간을 오고 가는 모습이었는데 이쪽에서 북한산 등반로가 이어져 있어 그렇다고 한다. 사실 오늘 연신내역에서 마주 친 등산객들의 숫자가 내가 평생 만나본 등산객 숫자보다 많은 것 같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다. 한편 생각해보면 내가 그만큼 산을 자주 찾지 않았다는 말이 되기도 하지만...


분명 9구간의 진입 통로는 8구간의 종료점에 표기 되어 있지만 이곳에서 한 번 더 만날 수 있다. 여기서부터 생각을 하면 실제로 걷는 9구간의 거리는 매우 짧은 편이다. 구간 이름인 마실길답게 정말 가벼운 동네 산책하는 수준의 길이 이어져 있는데 좌우 둘러보고 오고가는 사람들과 마주치다 보면 어느새 구간이 종료된다.


팔자 편하게 늘어져 있다는 표현이 어울리게 잘 자는 녀석이다. 누가 와서 업어가도 모를 지경이다.(물론 시도하려는 분은 없겠지만) 그늘이 진 것이 꼭 이불을 덥고 있는 것 같은 모양새인데 아직은 오전이라 햇살이 그렇게 따갑지는 않아 편히 잘 수 있나 보다 싶었다. 늘 드는 생각이지만 개발을 보면 꼭 잡아보고 싶다. 오래 전 기르던 강아지 생각도 나고... 동물을 기른다면 역시 개를 길러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 번 해 본다.


마실길은 정말 편하게 걸을 수 있다. 휴일이라 오고가는 사람들에 잠깐잠깐 지체되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오고가는 모습도 나름 볼거리가 되는 셈이다. 가끔 다른 분들의 사진을 찍어 드리기도 하고 사진에 찍히기도 하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걸으면 된다. 휴일에 둘레길을 걷기 위해 내가 나온 것처럼 다른 이들도 그런 생각으로 나온 것인데 '왜 사람이 이리 많아?'라고 생각하고 불평을 할 일은 아닌 것이다. 다른 이들도 나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할테니 말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조금 걷다보니 이미 9구간은 종료되어 있었다. 10구간 내시묘역길 구간이다. 이 지점을 경계로 9-10구간이 갈리는데 조금 더 진행하면 10구간 입구를 알리는 문을 만나게 되지만 사실상 이곳이 분기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근처에 수방사 교육대가 있어 지도에 상세하게 표시되지는 않는 지점이기도 하다. 


내시묘역길 구간을 담은 블로그에 한결같이 소개되는 비석이다. 경천군이라는 이에게 나라에서 하사한 토지니 소나무를 베기 위해 들어가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문이라고 보면 된다. 세월이 흐르면 사람은 간 곳이 없고 그 흔적만 남아 그 사람을 기억하게 된다. 100년도 못 살면서 1,000년의 근심으로 사는 것이 사람이라 한다. 나는 지금 100년의 근심을 하고 있을까 1,000년의 근심을 하고 있을까.. 근심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나은 일이지 싶다. 그저 주어진 순간에 최선을 다할 뿐... 


10구간은 전반적으로 길이 평탄하고 걷기에 큰 부담이 없는 그러면서도 한적하고 고요한 느낌이 강한 구간이다. 물론 나들이 인파들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 속에서도 '묘역'이라는 이름에서 오는 왠지 모를 적막함이랄까..그런 것이 느껴졌다. 실제 내시들의 묘역은 사유지 안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이 구간을 걸으면서 만나기는 어려웠다.


하늘이 정말 '가을이구나'싶은 날이었다. 혼자서 길을 걷는 것도 좋지만 같은 목적지를 공유하는 누군가와 걷는 것은 또 다른 느낌과 의미가 있다. 그 시간이 짧건 혹은 길건 한 방향을 바라보고 걸어간다는 것이 참 소중하다. 그 길을 끝까지 함께 걷건 혹은 중간에 다른 길로 멀어져 각자의 길을 가게 되건 적어도 함께 한 시간만큼은 좋은 기억으로 남게 되는 것이니 살아가는 동안 그런 기억들을 모아둔다는 것 아니 모을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기억을 새긴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삶의 전부일지도 모르겠다. 만나는 사람들, 하는 일들, 나를 둘러 싼 모든 것들이 하루하루 매시간시간 하나둘 쌓여가고 그것이 나의 역사가 되고 결국은 그것이 나의 삶이 된다. 과거를 돌아볼 필요도 없고 미래를 바라볼 필요도 없다. 그저 지금이 최선이다. 현재에 만든 기억이 과거가 되고 또한 미래가 된다. 지나치게 과거에 얽매이고 지나치게 미래를 갈구했던 시간들 속에서 정작 현재를 잃고 살지는 않았는지 반성하게 된다. 현실적이라는 건 현재에 충실하라는 말이다.


살아가는 이야기, 살아온 이야기 속에 어느덧 10구간도 종료. 전체적으로 9구간과 10구간은 난이도가 거의 없고 평지를 걷는 수준이어서 손쉽게 걸을 수 있다. 그만큼 속도도 빠르다. 11구간 효자길도 하급 난이도의 구간인데 거리는 내시묘역길보다 짧지만 체감상으로는 중하 정도의 난이도랄까. 이전 구간보다는 약간 높낮이도 있고 산길도 있어 조금 시간이 걸리는 구간이다.


처음 이 구간에 접어들면서 마주치는 황당함인데 도로 옆으로 난 길이 끝없이 이어져 있다. 이쪽편의 북한산 자락이 험한 편이어서 산으로 길을 내지 못 하고 할 수 없이 돌려돌려 길을 낸 것이라는 말을 듣고 이해는 갔지만 이건 좀..이라는 생각이 든다. 둘레길도 초반부는 제법 각종 시설이 원칙대로 잘 구비되어 있지만 이 정도쯤 오게 되면 여기저기 부실한 부분들이 눈에 띄는데 '어쩔 수 없나..'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앞으로는 개선이 되겠지라고 기대를 해 본다. 한여름이었다면 이곳을 걷기는 제법 힘들었겠지 싶다.


어느 정도 걸어가면 이 이정표를 만날 수 있는데 사실 여기서부터 제대로 된 구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제법 산길이고 밤골을 지나게 되면서 정말 많은 밤들을(물론 거의 대부분 알맹이는 없는) 볼 수 있다. 가끔 머리 위로 밤송이가 떨어지기도 하니 모자 정도는 챙기도록 하면 좋겠다. 이쪽으로 올라가면 북한산의 등반 코스 중의 하나인 백운대 코스를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전 구간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효자의 길은 멀고도 험한 법인가 제법 산길이다. 일반 도로를 걷다 흙길을 걸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발 밑으로 구르는 돌부스러기나 흙들의 느낌이 포근하다. 맨발로도 걸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흙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 속에 풀들이 나무들이 돌들이 그렇게 뒤로뒤로 스쳐지나간다.


오랜만에 등장하는 계단길이다. 사실 계단은 산행에서 그리 반가운 존재는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하나의 이정표가 될 수 있다. 사람의 손길이 닿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니 많이 지쳤다면 이 계단을 보고 힘을 얻을 수도 있다. 인공물이 하나 없는 산길은 가끔은 막연한 피로를 불러올 때도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똑딱이 카메라는 색감을 잡기가 쉽지가 않다. 내 SLR의 경우는 철저하게 내 세팅으로 되어 있어 잘 나오건 안 나오건 그려려니 하는데 이 녀석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이런저런 코치를 받아가며 색감을 바꾸어 봐도 영 마음에 들지는 않는데.. 그렇다고 기계를 탓할 노릇은 또 아니니...


계곡을 감싸고 도는 다리의 느낌이 또한 포근하다. 날은 덥고 땀은 흐르지만 이런 풍경은 잔잔한 감동을 준다. 사계절의 풍경이 제각기 주는 느낌은 다르겠지만 역시 가을과 겨울의 풍경이 내게는 마음에 와 닿는다. 머지않아 겨울이고 백색으로 물든 계절이 오면 이곳은 또 어떤 느낌과 생각을 던져줄까 미리 생각을 해 본다. 그래도 올해는 둘레길을 걸으며 여름과 초가을 사진이 많아져서 흐뭇하기도 하다. 사진에 늘 겨울만 나오면 그 또한 식상한 일이다.


오늘의 걷기가 거의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다. 조금 더 진행하면 밤골탐방지원센터를 만나게 되고 그곳에서 백운대와 다음 구간으로 그리고 하산 코스로 길이 나뉘게 된다. 갈림길이란 늘 사람에게 선택을 요구하는데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문제다. 온전히 자신의 결심만으로 하나의 길을 택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허나 내가 내린 결정이 능동적이건 수동적이건 결국 그 결정에 책임을 져야 하는 건 자신이다. 가끔 이 단순한 진리를 잊게 되는데 그럴 경우 꼭 문제가 생기곤 한다. 시작이 '나'라면 그 끝도 '내'가 내야 한다.


12구간 충의길을 알리는 문을 만날 수 있다. 충의길은 중급 난이도로 이제까지 걸어온 거리와 시간을 생각하면 이어서 가기는 쉽지 않다. 이 구간은 다음 주 정도에 혼자 와 볼 생각이다. 이곳을 뒤로 하고 내려 와 길을 건너 버스를 타면 연신내역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 내려가는 길은 제법 긴 편인데 휴일일 경우는 오고가는 차들이 많으니 주의하도록 하자. 연신내역으로 이동해 조금은 늦은 점심을 먹고 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시간이 정말 어찌가는 줄도 모르게 빨리 갔다. 

어떤 이는 잠깐 이야기를 나누어도 마치 몇 시간을 이야기를 한 것처럼 피로한가 하면 어떤 이는 몇 시간을 이야기해도 잠깐 이야기 한 것처럼 신선하다. 만나자마자 곧 헤어지고 싶어지는 이가 있는가하면 헤어짐이 아쉬워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는 이가 있다. 살아가는 동안 마주치는 수 많은 사람들 중에 후자와 같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어느 새 이만큼을 왔다. 거리상으로는 절반을 더 걸어온 셈이다. 막막함이 구체화되고 현실이 되니 이루어지는 셈이다. 거북이 걸음이고 황소걸음이지만 목표를 가지고 한 걸음씩 나아가다보면 아예 시작도 안 한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일단 시작하자. 일단 밖으로 나가 걸어보자. 한 걸음.. 그 시작이 절반이고 그 절반이 전부가 된다. 

 

-오늘 글은 조금 깁니다. ^^-

사실 예정에 없던 둘레길이다. 아침에 일어나 문득 오늘은 좀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집을 나섰다. 평소와 같은 시간에 일어나 평소와 같은 준비를 하고 평소와 같은 버스를 탔지만 목적지는 달랐다. 같은 준비를 해도 다다를 수 있는 곳은 이렇게나 다른 법이다.


둘레길 8구간은 아주 예쁜 이름인 "구름정원길"이다. 하지만 오늘의 둘레길 걷기는 내가 아침에 하고 싶었던 천천히 걸으며 이런저런 생각들을 정리해보자..라는 계획을 좌절시킬 정도였으니.. 읽어보시면 아시리라.. 8구간은 총 5.2Km로 중급 코스다. 소요시간은 2시간 30분 정도로 국립공원은 안내를 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버스 이동을 하지 않는다면 이동거리와 시간은 더 늘어난다.

중간에 앱이 저절로 멈춰버리는 바람에 측정이 애매하게 됐다. 평소 멀쩡하던 앱이 정신이 나가다니..아무튼 불광역 2번 출구로 나가 왼쪽으로 돌아 죽 직진하면 이전에 마무리했던 7구간의 종점을 볼 수 있고 그 건너편이 바로 8구간이다. 그런데 이 8구간 시작점을 생각보다 찾기가 어렵다. 표지판도 애매하거나 없어서 시작부터 조금 헤맸는데.. 정말 시작에 불과했다.

앱이 멈춘 지점부터 다시 기록을 했다. 총 이동거리는 8Km이고 소요시간은 3시간 58분이다. 차이가 나도 좀 심하게 나는데 위 2개의 그림을 조금 살펴보면 뭔가 이상한 것을 찾으실 수 있을테고 그게 오늘의 하이라이트였다.

아무튼 오늘은 2대의 카메라를 들고 나갔다. 두 카메라의 차이를 제대로 확인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고(물론 비교하기는 애매하지만) 광각과 매크로를 보조할 수 있는 카메라가 한 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아래 사진에서 두 카메라의 차이를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지 싶다.

구름정원길로 접어들기 직전에는 이렇게 안내도가 붙어있다. 주변에 먹을거리들이 제법 많은 소위 먹자골목이라는데 워낙 먹는 것과는 담을 쌓고 지내는지라 그냥 그려려니 하고 안내도가 잘 되어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는데 이후의 걷기는 거짓말 조금 보태어 GPS를 가동한 지도가 없었으면 쉽지 않았을 구간이었다. (사실은 내가 정신줄을 놓은 게 제일 문제긴 했다)


할아버지 한 분, 할머니 한 분이 지키시는 안내소를 지나 공원길로 올라가면 된다. 가는 동안 '여기가 둘레길이다', '아니다 저기가 둘레길이다' 라고 외치는 표지판들이 여기저기서 부르는 소리가 들릴텐데 꿋꿋하게 외면하고 왼쪽으로 진행하도록 하자. 


민가를 몇 채 지나 익숙한 계단을 넘으면 8구간의 시작점에 다다르게 된다. 오늘은 생각할 거리를 한 뭉치 들고왔으니 평소와는 달리 아주 천천히 걸을 생각이다. 생각이 많은 것은 좋은 것만은 아니지만 그래도 오늘만큼은 차근차근 내 안에 엉킨 것들이 있으면 풀어버리고 아주 단순해져서 돌아올 생각이다. (아니 생각이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문이다. 앞서 전체 안내표지판도 그렇고 이번 구간은 꽤나 친절한 안내가 되어 있을 것 같아 기대가 됐다. 물론 여기까지 잘 왔다면 이 마음은 더 컸으리라 싶지만 잠시 앉아 심호흡을 한 다음 천천히 걷기로 했다. 평일이라 역시 사람은 거의 없다. 등산로도 아닌데 사람이 많을리가 없다. 사람이 없어야 맞았다.


아무렇게나 방치된 낡은 집을 한참 바라본다. 저곳에도 예전에는 사람이 살고 그 안에서 오욕칠정이 오고갔을텐데 이제는 을씨년스러울 정도다. 사람이 떠난다는 것은 집으로부터 혼을 빼앗아가는 것과 같다. 조금 이른 아침이라 그래도 괜찮았지만 늦은 저녁에 보면 제법 공포분위기도 나지 싶다.


뭔가 사진 색감이 확 달라졌다고 느꼈다면 제대로 본 것이다. 니콘의 전형적인 느낌인데 어쩐지 이 느낌을 평생 버리기는 힘들 것 같다. 이전의 사진은 모두 LX5로 찍은 사진이다. 약간 캐논의 느낌도 들지만 파나소닉의 화사함은 캐논과는 또 다른 맛이 난다. 캐논은 나와는 워낙 상극인 메이커였는데 파나소닉은 제법 괜찮다.


길을 걷다 마주하는 모든 것들을 한 번 더 바라보고 한 번 더 생각해보면 평소 가지고 있던 선입견이 무너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너무나 당연스레 생각하는 것들을 한번쯤 바꿔본다면 이제까지의 생활과는 또 다른 생활을 해볼 수 있다. 혹은 기존의 것에 익숙함이라는 일종의 고집을 버려야 하는데 그게 참 쉽지만은 않다.


예전에는 '논쟁'을 즐겨 했었다. 어떻게든 내가 옳음을 증명하려고 했었다. 내가 100% 옳아 상대가 수긍을 해야 만족을 했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과연 상대가 완전히 내 생각에 동의를 했을까? 아니지 싶다. 앞에서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여도 자신의 의견이 무너진 것에 대한 '반감'은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남기 마련이다. 내가 그렇게까지 해서 상대에게 이긴다한들 그것은 사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차라리 아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만 못 하게 된다.


물론 이야기를 하다보면 마음속에서 울컥하며 반론을 제기하고 싶은 생각이 끊임없이 올라오고 분명히 내가 맞다는 생각에 시달리게 된다. 하지만 그것을 상대에게 전하는 방법이 꼭 논쟁이나 마치 수업시간에 선생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식으로 상대방보다 내가 우월한양 행동해서는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나의 지난 날들을 보면 실제로 그래왔었다. 오히려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 좀 더 신경을 써야했는데 나는 그러지를 못했다. 틀림과 다름이라는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두 단어를 깨닫지 못한 탓이다.


같은 장소에서 찍은 사진 두 장이다. 한장은 내가 바닥에 붙다시피 하고 찍었고 한장은 평소와 다름 없는 내가 선 높이에서 찍었다. 풍경은 전혀 변하지 않았지만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제법 많은 것들이 다르다. 같은 것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이렇게 큰 차이가 있다. 마찬가지로 대화를 한다면 상대의 눈높이로 내가 맞춰야 한다. 다가서지 않고서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고 해봐야 손해는 결국 내게 돌아온다. 땅바닥까지 내려가 상대를 바라보는 것이 부끄러운가? 그렇다면 이미 대화를 할 마음이 없는 것과 같다.

8구간은 전반적으로 화려하면서도 대단히 멋진 풍광을 지닌 구간이다. 코스 자체가 구불구불하거나 계단이 많은 편도 아니어서 한가로이 생각을 하거나 대화를 하면서 편하게 걸을 수 있는 구간이다. 구름정원이라는 이름이 제법 잘 어울리는 곳이지 싶다. 가을임에도 마치 한여름처럼 무척이나 더웠던 날씨가 잠깐잠깐 길을 멈추게 했지만 그 멈춤에도 여유가 있어 평화로웠달까


이길의 이름은 "스카이워크"란다. 조금 뜬금이 없다. 둘레길이라는 우리말로 예쁜 이름을 지어 놓고 갑자기 이길의 이름은 무려 스카이워크라니(사실 데크라는 말도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외국인도 함께 걷자는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차라리 우리말로 무언가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영어로 표기하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둘레길을 걷다가 갑자기 스타워즈를 생각하게 되다니... 아무튼 이곳에 포토포인트가 있으니 도장 모으는 분들은 셀카 한 방 찍으시고..


처음 보는 표지판인데 누군가 자꾸 이 나무가지에 머리를 부딪혔던 모양이다. 가지가 조금 낮게 굽어 있어 이야기라도 하다가 잠시 한눈을 팔면 여지없이 부딪힐만한 위치에 있다. '뭐야 이게 여기에 머리를 왜 부딪혀?'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 한편 나무입장에서는 제법 억울한 일인데 자기는 그저 가만히 팔을 뻗고 있을 뿐인데 이놈의 인간들이 자꾸 머리로 들이받으니 난처할 노릇이다. 그래놓고 만물의 영장이라니..


느긋하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정말 이제까지 돌아본 둘레길 중에 가장 편안한 몸과 마음으로 걷고 있을 무렵 나타난 이정표. '족두리봉이라..이름 참 특이하네..' 지난 구간을 돌 때 들은 이야기가 문득 생각이 났다. 여기를 지칭한 것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북한산에 올라야겠다는 충동이 생긴다는 것이다.  800미터라..얼마 안 되는데.. 지금은 별로 힘들지도 않고.. 흠... ......


진입을 하고나면 길을 그리 험하지 않다. 이제까지 온 길보다 갑자기 경사가 급해져서 조금 당황되기도 하지만 등산장비를 갖추고 있다면 큰 무리는 없을 정도다. 북한산은 몇 년 전에는 칼바위능선 쪽으로 거의 일주일마다 올랐던 터라 큰 부담은 없었다. 문제라면 가져온 것이 전혀 없다는 것 정도인데 오늘도 늘 둘레길에 올 때처럼 파워에이드 한 병이 전부였다. 시간은 11시가 조금 넘었고 그냥 둘레길을 걷는다면 점심 먹을 때쯤은 끝날텐데 북한산을 아예 올라간다면 상황은 조금 다를텐데..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800미터 정도야...'라고 착각을 해버렸다.


가면 갈 수록 길이 이 모양이다. 카메라 두 대가 일단 걸리적거리기 시작한다.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한 대는 입고시킬 각오를 해야 한다. 튼튼한 하체만 믿기에는 완전히 낫지 않는 발도 슬슬 신경이 쓰인다. 무엇보다 먹을 게 없는데...'대청봉도 김밥 한 줄하고 파워에이드 한 통으로 갔었는데...' 괜찮겠지?


역시 올라오니 좋다. 경치 보이는게 일단 다르다. 날이 워낙 맑아서 제법 멀리 볼 수 있다. 바람이 불지 않고 햇살이 제법 따갑지만 그래도 이런 시원시원한 맛이 산에 오르는 즐거움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제법 많은 분들이 코스를 오르고 있었다. 

내 실수 중의 하나는 만약 등산을 계획했다면 미리 코스를 숙지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이건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나중에서야 족두리봉이 암벽코스도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사실 이 코스는 능선 쪽이 아니라면 꽤나 위험한 코스다. 실제 인명사고도 종종 나는 곳이다. 둘레길 정도는 모를까 충동적으로 등산을 결심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아야한다.


어지간히 헉헉거리고 올라가니 갑자기 사방이 탁 트인다. 사방은 온통 바위투성이다. 파워에이드는 이미 반을 비워가고 있었고 지구력이라면 제법 버티는 나로서도 생각지도 않던 등산은 당연히 힘겨운 일이었다. 처음엔 이 바위가 족두리 모양인가 생각을 했지만 이리보고 저리봐도 이건 족두리가 아니라...흠.. 아무튼.. 사방을 좀 더 둘러보고 GPS맵을 켜서 위치를 파악하기로 했다.


족두리봉 능선코스는 이쪽이었다. 까마득하다. 산길에서 800미터면 그냥 800미터가 아니다.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 과욕을 부리기에는 우유 한 잔 먹은 아침식사로는 분명히 곤란에 빠지지 싶었다. 못 가는게 아니라 안 가는거다..라고 나름 합리화를 하고 하산하기로 했다. 아쉽긴 했지만 준비가 너무 부족했다.


평지로 내려오니 살 것 같았다. 산이 있다 해서 그냥 올라갈 수 있는 건 아니다. 하다못해 둘레길을 걷는데도 어느 정도 준비를 해야 하는데 정상에 오를 생각이 있다면 가벼운 마음으로는 되지 않는다. 아무튼 괜한 객기를 부리는 바람에 체력소모도 컸고 음료수 소모도 컸다. 사실 앞으로 갈 길이 제법 남았는데 조금 걱정이다.


길가에 아무렇게나 피어있는 꽃인데 사실 손톱보다도 작은 꽃이다. 접사로 찍고 보니 이렇게 다른 모습이다. 무엇을 바라보는 시각은 정말 큰 차이를 가져온다. 고정관념이라는 것처럼 사람에게 무서운 것은 없는데 이것을 떨치려면 또 다른 습관을 들이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다. 이제껏 해오던 방법 혹은 시선과는 반대의 방법에 익숙해지거나 시점에 익숙해지면 차츰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편견이나 선입견은 사라진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시도하지 않았기에 바꾸지 못할 뿐.


길은 언제나 그 자리에 그렇게 놓여 있다. 그길을 갈 것이냐 말 것이냐는 사람이 정할 따름이다. 당장 가지 못했다고 아쉬워할 것도 없고 다시는 그길을 가지 못할 거라 체념할 필요도 없다. 길은 언제나 그렇게 그 자리에서 사람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가지 않은 길'이란 '다시 갈 수 있는 길'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어느 길이 바른 길이냐 하는 것도 상대적이다. 절대적으로 옳은 길은 없고 절대적으로 그른 길도 없다. 중요한 것은 그길을 걷는 사람이 어떠한 마음과 자세로 걷느냐에 달려 있다. 칼도 주방에서 쓰면 요리용 도구지만 전쟁에서 쓰면 살인무기가 된다.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 스스로 굳어지는 것보다 위험한 것은 없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지석(?)이 예사롭지 않다. 쓰인 글을 보니 중세국어인데 어떤 이유로 이곳에 무엇을 위해 이렇게 놓여 있는 것일까 한참 바라본다. 사실 뜻은 별 것이 없다. 8구간을 돌다보면 이렇게 무언가 적힌 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묘지를 지키는 돌인형이 누워있는 것도 볼 수 있고 무덤도 제법 많다. 과거의 기록들이 꽤 많이 보존된 구간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탐방객 수를 조사하는 개찰구(?)를 또 지난다. 아까 지나왔는데 왜 또 있을까..희한하다 싶었다. 사실 그때 주위를 둘러보고 상황파악을 했었어야 하는데 문득 "저기 왔다갔다 하면서 숫자 늘려봐요"라는 말이 생각이 나면서 혼자 웃으며 그냥 지나쳤다. 아...나는 대체 왜 정신줄을 놓은 것일까...

여기서부터 한동안 사진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위 사진에도 보이지만 뭔가 길이 이제까지 온 길과 달라서 넘어지지 않으려고 아등바등하느라 사진을 찍을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경고는 하나 더 있었다. 올라가다 보면 왼쪽에 안내도가 보이는데 전형적인 등반코스를 그려놓고 있는 안내도다. 정상까지 걸리는 시간이 똑바로 적혀있다. 나는 그 안내판 앞에 한참을 서서 '어라. 진흥왕순수비가 저기 있네. 저게 북한산비구나. 조금만 더 가면 볼 수있나?'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

내가 정신을 차린 것은 음료수가 10분의 1정도 남은 시점에 어느 넓다란 바위 위에 앉아서였다. 가도가도 "북한산둘레길"을 알리는 네모난 표지판이 보이지 않았고 갑자기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이 이상해서 대체 여기가 어딘가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지도를 켜고 현위치가 나타나는 순간 참 할 말이 없었다. 나는 향로봉에 오르고 있었다...

오늘은 산이 나를 부르나 싶었다. 한 번은 내 의지로 올랐고 한 번은 무의식으로 올랐다. 물론 두 번 다 정상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묘한 날이었다. 그래 언젠가는 끝까지 가주마..라고 다짐을 하고 다시 올라온 길을 되돌아 내려갔다. 피로도도 제법 올라가있고 배도 제법 고파왔다. 


이렇게 큼직한 이정표가 있는데 왜 이것을 못 보고 지나쳤을까..생각이 많으면 병이다 싶다. 그래도 이 정도로 정신을 놓지는 않았는데..여기서 향로봉은 1.8Km다. 올라가려고 한다면 작정을 해야 갈 수 있는 거리다. 하지만 한 번 족두리봉에서 실패를 한 다음인지라 또 시도를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럼에도 몸이 저절로 올라간 것은 대체 왜인지...


다시 둘레길로 돌아와 조금 더 걷다보면 개울이 나온다. 이제는 제법 차가운 물이다. ND필터가 아쉬웠지만 없으면 없는대로 임기응변으로 물줄기를 담아봤다. 이제 거의 코스도 마무리 단계에 접어 든다. 두 번의 삽질(?)이 없었으면 지금 쯤 집에 가 있을지도 모르는 시간에 나는 여전히 둘레길에 서 있었다. 하지만 힘은 많이 들었지만 마음은 편안했다.


나무 사이로 간간히 들어오는 햇살이 비추는 공간에 이름모를 꽃들이 또 그렇게 피어있었다. 해가 들어와 저렇게 저 부분만 밝게 비추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쳤을텐데 저렇게 빛이 들어오니 걸음을 멈추게 된다. 길은 그리고 산은 끊임없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내가 그 소리를 듣느냐 아니면 지나치느냐에 따라 내가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은 정말 많이 달라진다. 밖으로 나가 세상과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그런 이유다.


완연한 가을 느낌의 산이 보이고 길이 보이고 그 길 위에 내가 서 있고 또 걸어가고 있다. 이 순간에는 그것이 그냥 그 자체로 감격스러운 일이다. 여러 생각도 멈추고 그저 바라보고 느끼는 순간이다. 


어찌되었건 파란만장한 8구간은 마무리되었다. 남들은 편하게 즐기며 걷는다는 이 구간을 나는 꽤나 고생아닌 고생을 하며 걸었다. 예상보다 먼 거리를 그리고 오랜 시간을 걷게 되었는데 이번 가을에 다시 이 구간을 걸을 리는 없을테니 그래도 제법 괜찮은 기억으로 남을 걷기였다. 문을 나가 왼편 경사로에 짐을 풀고 남은 음료수를 모두 마시고 담배 한 대를 피고 나니 피로가 몰려왔다. 아마 배고픔이 가장 큰 원인이 아닐까 싶지만 잘 안 먹는 고집은 좀처럼 꺾이질 않으니 문제는 문제다.

이곳을 나가 왼편으로 죽 걸어나가면 큰 길이 나온다. 그곳에서 버스를 타고 연신내역으로 이동하면 된다. 걸어가도 되지만 20분 정도 예상해야 하니 버스를 타는 편이 낫다. 돌이켜보면 오늘 정신줄을 놓기 시작한 것은 합정역에서 6호선을 타면서부터가 아니었나 싶다. 불광역으로 향하는 열차라고 덥썩 타고 나서 한창 미드 '그림'을 보고 있었는데 '다음 역은 삼각지, 삼각지입니다..'라는 소리가 들려왔으니 말이다.




모처럼 신림동에 나갔다. 대학 시절 숱하게 드나들던 어쩌면 암흑기라 불러도 좋은 시기에 접했던 그 거리를 오늘은 반가운 인사와 이야기로 채워 넣을 수 있었다. 사실 신림동에서 약속이 잡히고 나서는 조금 주저했다. 그곳은 내게 그렇게 반길만한 곳은 아니기에 더 그런 느낌이 강했는지도 모르겠다. 그곳에 살고 있는 분들에게는 폐가 되겠지만 내가 기억하는 신림동은 책냄새와 치열한 수험의 열기와 패배의 눈물로 얼룩지고 젊은 날의 회한이 서려 있는 그런 곳이었다. 하지만 고통이나 상처는 다시 그것을 마주해 이겨내지 않으면 평생 마음 한 구석에 얼룩으로 남을 뿐... 그렇게 찾아간 신림동에서 오히려 '나'의 내일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무리 말로 혹은 글로 '나는 바뀌고 있다'거나 '나는 이제 예전의 내가 아니야'라고 말하고 써보았자 실제로 행동으로 바뀌지 않으면 오히려 말을 하지 않은 것만 못 하다. 그런 말을 할 때는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도 하고 각오도 한 상태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상의 행동 특히 반사적으로 드러나는 행동은 그런 사전의 준비를 하지 못 하기 때문에 본래의 자기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오늘은 그런 나의 모습을 내 스스로 확인할 수 있었다. 다행인 것은 그 순간 그것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는 것.. '아, 내가 또 이전의 실수를 반복하려 하고 있구나'라는 경고등이 순간 온몸을 흔들었다. 

 

예전에는 그런 실수를 하고 있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 하고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듣거나 해서 비로소 되돌이켜 깨닫곤 했었다. 그리고 그렇게 타인에게서 지적을 받은 실수는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저항감때문에 곧 사그라들기 마련이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실수를 하는 순간 그것을 스스로 깨닫게 되면 그 자리에서 바로 그 '오류'를 바로 잡을 수 있게 된다. 물론 그 순간에도 그저 '아, 잘못했네'라고 속으로만 깨닫고 오히려 부끄럽게 느끼거나 자존심에 상처를 받아 다시 내면으로 가라 앉아버리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래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즉 '실수를 깨닫는 것'과 그 '실수를 바로 잡는 것'이 동시에 적극적으로 그리고 긍정적으로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의 감정이란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기운이 긍정적인 기운보다 강하다. 부정은 누구라도 쉽게 할 수 있지만 긍정은 치열한 연습과 노력을 통해 습관이 되지 않으면 좀처럼 드러나지 않게 된다. 혼자 있는 시간에 끊임없이 자기 최면을 걸고 사람들 속에 섞일 때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 그렇다고 늘 긴장을 하고 있으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겸손하게 자신을 인정하라는 말이다. 이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자신있게 말할 수 있지 싶다.

아무튼... 한나절만에 제법 많은 것들을 되돌이켜 배울 수 있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통해 그것을 직접 깨우칠 수 있었다는 것이 더 반가운 일이다. 

부딪히지 않으면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부딪히더라도 깨닫지 못 하면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깨닫더라도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부딪히고 깨닫고 움직이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Panasonic LX-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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