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50분, 세상이 깨어나기에는 약간 이른 시간 집을 나선다. 왜 태백에 가려고 했는지 뚜렷한 이유는 없었다. 비우고 싶다는 생각이 우선이었고 차가운 바람을 좀 맞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달까. 


시외버스를 타고 태백시외버스터미널에 내려 유일사행 버스로 갈아탄다. 예전에 올랐던 코스와 반대로 걷는다. 1년 전에 이곳을 지나며 남겼던 발자국과 기억들을 홀로 걸으며 하나 둘 떠올려 보고 또 그렇게 지워나간다. 조금은 가라앉은 기분으로 산행을 하게 된 것이 조금 아쉽긴 했지만 언젠가는 거쳐야할 일이라고 생각을 하고 천천히 발길을 옮겨본다. 유일사 입구는 어느 산악회인지 단체로 와서 줄을 서서 올라가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바위 위에 나무가 자란다. 생명력이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살아있다는 것에 새삼 감사하게 된다. 비록 유한한 삶이지만 그 살아가는 동안에 적어도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가족이 있다면 그 가족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스스로의 삶을 온전하게 지켜가는 일이다. 자신을 우선 지키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유일사에서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제법 가파른 오르막의 연속이고 사방이 막혀있어서 경치를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어느 정도 올라가면 서서히 주변이 밝아지며 산의 웅장함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순간이 온다. 그래서 한 걸음 한 걸음이 소중하다. 앞으로 걷지 않으면 아무 것도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주목 군락지에 다다랐지만 아쉽게도 눈꽃은 피지 않았다. 내심 지난 날에 눈이 내려 눈꽃을 기대했지만 고고하게 서 있는 나무들은 가지 위에 눈이 쌓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슬슬 칼바람이 불어 온다. 머릿속이 하얗게 될 정도로 차고 강한 바람. 그 바람에 그냥 기대본다. 발 아래로는 어디가 끝인지 모를 긴 산자락이 펼쳐져 있다. 


역시 태백산은 설경이 제맛이다. 눈이 이렇게 아름답다는 것에 그저 감탄할 따름이다. 새벽같이 일어나 집을 나온 피로도 이곳에 이르면 느껴지지 않는다. 올라오는 동안 숨을 헐떡이며 내뱉었던 땀방울들도 찬바람에 날아가 버리고 이곳 민족의 영산이라 불리는 태백산 정상에서는 그저 바람 소리만 거세게 들려올뿐이었다. 


좁고 급경사인 길을 올라오니 이런 넓은 공간이 있다는 게 참 신기할 정도. 여기서부터는 거의 평지로 이동하게 된다. 날이 제법 맑아서 눈에 반사되는 햇살이 강하다. 손을 내밀어 만져본 눈은 도시의 그것보다 훨씬 차갑고 투명한 느낌이 든다. 분명 같은 눈인데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이렇게 다르다. 이곳의 눈은 그냥 집어 입에 넣어도 괜찮을 것같다.


아마 눈이 없었다면 나무들이 을씨년스러운 느낌을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견딘다는 주목. 내가 보고 있는 이 나무들은 어느 천년의 흔적들일까 한참 바라본다. 천 년이라는 세월동안 나무들은 얼마나 많은 바람을 맞고 또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았을까. 그 세월동안 나무들은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모두 견뎌온 것이다. 인고의 세월. 태백의 주목이 살아온 시간은 그런 것은 아닐까.


그래서인지 나무들이 내밀고 있는 가지의 방향이며 모양은 우리의 상상을 넘어선다. 애초에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의 단위를 넘어선 것이고 나무들에게 내가 지금 바라보는 이 순간은 정말 찰라도 아닌 짧은 순간일테니 지금 내 눈으로 보는 나무의 모습은 그저 오묘하고 신기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저 나무들은 이곳에 서서 세월의 바람을 견디어 나갈테지..


여기쯤 오면 사람들의 흔적이 제법 줄어든다. 올라갈 때 그렇게 북적이던 사람들이 얼마 남지 않은 천제단으로 서둘러 이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풍경을 놓치고 빨리 정상에 오른다한들 아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 산행을 하다보면 무조건 빨리빨리 정상에만 이르는 것에 집중하는 이들을 보게 되는데 그 사람의 취향이니 뭐라 할 것은 아니지만 빨리 오르면 빨리 내려가야 하는 법이다. 힘들여 멀리까지 와서 눈만 돌리면 볼 수 있는 장관을 그냥 지나쳐버리는 것은 조금 안타깝다.


그리고 도착한 천제단 중의 하나인 장군단이다. 이 제단은 보존 상태가 조금 열악하고 규모도 작아 사람들이 몰리는 곳은 아닌데 내게는 태백산의 기억의 정점에 이른 곳이기도 하다. 한참을 이곳에 머문다. 


이 표지석은 기존에는 없던 것인데 작년 9월에 이곳에 새로 세워진 것이다. 1년만에 다시 찾은 태백의 정상에서 마주치게 된 유일하게 달라진 풍경은 이 표지석이었다. 백두대간의 중추이며 민족의 영산이라 불리는 태백산은 우리나라의 12개의 명산 중의 하나로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는 의미가 큰 산이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 태백의 정기를 받는다는 표현을 많이들 쓰는데 오늘 산행에서 정기를 받았을지 아니면 정기를 산에 나누어 주었을지는 감이 오지 않았다.


멀리 보이는 천왕단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태백산 사진에 자주 등장하는 모습인데 정상에 눈꽃이 피지 않아 극적인 느낌은 적었지만 나름 사람들이 걸어가는 모습이 멋드러져 보인다. 산이란 하루에도 수십 번 날씨가 변화하는지라 어느 방향에서 하늘을 바라보면 푸른물이 떨어질 정도로 새파랗지만 어느 방향에서 바라보면 당장이라도 뭔가 내릴 것처럼 어둡기도 하다. 내심 눈이라도 내리길 바랐지만...


어지간해서 이 표지석을 제대로 찍기란 불가능하다. 평일인데도 사람들이 제법 많았고 이 표지석 앞에는 늘 사진을 남기려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기 때문에 이리저리 카메라를 돌려 최대한 사람이 안 보이는 시점에 찍어야 하는게 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은 편이 아닌가 싶은데...표지석 위에는 사람들이 뭔가를 남기고 간 흔적이 조금은 흉물스럽게 남아있다. 자기들이야 떠나면 그뿐이지만 앞으로 수 천년의 세월을 이곳을 지켜야할 돌 입장에서는 반가운 일은 아니지 싶다.


여기서 한 번 고민을 한다. 문수봉까지 갈 것이냐 말 것이냐인데 오늘의 이동이 상당히 치밀한 동선을 따라 움직이는 지라 아직 가 보지 않은 문수봉을 거칠 경우 차 시간이 어찌될지 몰라 일단 오늘은 생각을 접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내려가보니 차 시간까지 20여 분 정도 여유가 있었는데 다음에 올라온다면 문수봉을 거치는 코스로 이동해볼 생각이다. 아마도 내년 겨울이 되어야겠지만...


당골로 하산하는 코스에서 단종비각을 마주칠 수 있다. 역사의 지난 끈들. 당사자들은 이미 없고 기억의 흔적조차 사라진 지금이지만 세월 속에 당시의 장면들은 이렇게 남아 오가는 이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우리네 삶 역시 언젠가 그 끝에 이르러 우리와 우리를 기억하는 이들조차 사라지겠지만 우리가 남겨 놓은 흔적들은 조각조각일지라도 여전히 남아 누군가 우리를 기억하게 해 줄 끈으로 남아있을 것을 생각하면 뭔가 마음이 애잔해지는 느낌도 든다.


용정의 물은 예나 지금이나 마셔볼 기회가 없다. 이곳을 찾을 때면 언제나 얼어있기 때문인데 용정의 물을 한 모금 마시기 위해서라도 눈이 내리지 않는 계절에 이곳을 다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라도 이유를 하나 만들어두면 된다. 그 이유가 비록 나에게만 해당되는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것만으로도 내몸을 움직여 다시 태백을 찾기에 충분할 테니 말이다.


그리고 휴게소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 먹는 사발면 한 그릇. 늘 그렇듯이 나는 산행을 할 때 무엇을 먹지 않는 나쁜 버릇이 있다. 물 한 통이나 이온 음료 한 통이 전부인데 습관치고는 몸을 꾸준히 움직여야 하는 산행에서는 좋지 않은 것이다. 아마도 예전에 운전을 할 때의 습관이 산행에 그대로 옮겨온 모양이다. 하지만 오늘은 어느 층계참에 앉아 멀리 산을 보며 라면을 먹는다. 다 내주었으니 이제 채우고 가야 한다는 생각이었을까. 뭔가 짠한 마음이 들어 라면을 먹는지 다른 무엇을 먹는지 모르고 먹는다. 하얀 수증기가 안경을 온통 뿌옇게 만든다.


하산길은 조금은 지루한 내리막의 연속이다. 이 사진에는 나도 나와있다. 이렇게 어느 겨울 날의 태백산에 내 그림자를 찍어 두었다. 해가 뜨면 이 길가에 내 그림자는 깨어나고 해가 지면 깊은 잠에 빠져들며 앞으로 남아 있는 시간들을 기억하겠지. 그리고 돌아서서 내려오는 길에 내 마음의 한 조각을 떼어 그림자의 주머니에 넣어 준다. 잘 간직하고 있으라고 말하면서...


"아직 만나지 못한 내 그리움을 찾으러" 나뭇가지에 묶여 있는 작은 천조각에 쓰인 글을 보고 또 본다. 오늘 내가 태백에 온 것은 이것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산행에서는 그 산행을 나 스스로에게 납득시킬 수 있는 이유가 불현듯 찾아지기도 한다. 기억을 지우려..라는 조금 엇갈린 이유로 집을 나섰지만 결국 내가 이곳을 찾은 것은 아직 만나지 못한 내 그리움때문이었다. 그 그리움의 대상이 무엇인지 혹은 누구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지만 그저 저 글귀를 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것이면 됐다.


그리고 다시 도시로 내려왔다. 짧고도 또 짧은 하루였다. 이른 새벽에 집을 나서 자정이 가까울 무렵 다시 집에 들어갔음에도 오늘 하루는 내게 너무나 짧았다. 


오늘 글은 산행기라 하기보다는 하루의 일기같은 느낌이다. 

하루의 일기라 하기보다는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는 해묵은 일기장같은 느낌이다.

해묵은 일기장이라 하기보다는 아직 만나지 못한 그리움을 찾아 떠나야 할 도착하지 않은 기차 시간표 같은 느낌이다.


Nikon D700, AF Nikkor 35mm f2D, Panasonic LX5



인왕산은 조선의 한양을 기준으로 볼 때 우백호 즉 오른쪽의 흰호랑이라 불리는 영산이다. 인왕산은 조선 개국 초기에 서산(西山)이라 지칭하다가 세종때부터 인왕산(仁王山)이라 불리게 되었다. 본래 인왕이란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신(金剛神)의 이름인데 조선왕조를 수호하려는 뜻에서 산의 이름을 개칭하였다고 한다. (출처: 다음) 강감찬 장군이 호랑이를 호통으로 몰아냈다는 전설도 들려오는 등 여러 기이한 이야기들이 많아 한양에 사는 이들에게는 아주 친숙한 산이 이곳 인왕산이다.


오늘 코스는 여러 코스 중에 독립문역에서 출발하여 인왕산 정상을 거쳐 창의문을 들러 경복궁역으로 내려오는 코스로 정했다. 고도가 313미터로 나오는데 정확한 인왕산의 높이는 338미터라고 한다. 인왕산은 청와대에 가까운 까닭에 특정 구간은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고 오르내리는 동안 내내 경찰들을 마주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여유가 된다면 경복궁까지 가보는 것도 괜찮다.


어제 눈이 내려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었다. 내심 눈 덮인 산을 기대했지만 뽀드득 소리를 내며 눈을 밟을 일은 거의 없어서 조금 아쉽기는 했다. 평생을 서울에 살면서 인왕산을 이제야 올라가봤다는 것에 의미를 좀 더 두기로 하자. 독립문역 2번 출구로 나와 왼쪽 샛길을 따라 아파트를 곁에 두고 조금 오르다보면 인왕산에 오를 수 있는 등산로가 나온다.


인왕산의 특징 중의 하나는 바위가 많다는 것과 서울성곽길 중의 일부가 이곳에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서울성곽길 엄밀하게는 한양도성(길)로 사적 10호로 지정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사적 10호는 한양도성 전체를 포괄하고 있어 내가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 전체를 다 소개하기는 어렵지만 될 수 있는 한 여러 곳을 다녀볼 생각이다.


서울성곽에 대한 안내 표지판을 볼 수 있다. 서울 전역에 이런 안내판들이 대개 반사재질을 택하고 있는데 항상 깨끗하게 하지 않으면 글자를 제대로 알아보기 어렵다는 점은 단점이랄까...2중으로 되어 있어 글자가 겹쳐 보이기도 하는데 미적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실용성면에서는 그다지 좋은 평가를 하기는 어렵겠다.


인왕산 등산로는 거의 계단으로 이루어져있다. 어찌 보면 편한 것같지만 상대적으로 무릎에 무리가 많이 가는 형식이다. 사진에서 보다시피 계단에는 눈의 흔적은 거의 없고 그나마 하얀 것들은 염화칼슘인데 주변에 경찰들이 경비를 서고 있어 눈이 쌓일 틈이 없다. 문득 전방 군생활 기억이 떠올랐던 순간인데 눈이 내림과 동시에 쓸어야했던 그런 시절이 지금도 여전한가보다.


애초에 등산 시작점의 고도가 높아서인지 얼마 가지 않아 정상이 보인다. 성곽을 옆에 끼고 걸으면 제설작업이 되어 있지 않아 눈 밟는 느낌이 좀 나긴 하는데 성곽만 따라가다가는 중간에 길이 끊어지기도 하니 주의가 필요하다. 그리고 길이 거의 능선 형태로 되어 있어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막을 대책이 없으니 겨울에는 준비를 철저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겸재 정선이 그린 인왕제색도가 정확히 어느 방향인지는 모르겠지만 얼핏 비슷한 것같기도 하다. 그림에 나오는 집은 지금은 무엇이 되어 있을까? 휴일이라 사람들이 제법 있을 줄 알았는데 열 명도 채 만나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근무서는 경찰들을 더 많이 만났다. 인왕산에 이렇게 경계가 삼엄한 것은 과거 1.21사태로 알려져 있는 그 사건의 여파가 아닐까 싶다.

성곽을 따라 눈이 쌓여있고 그 눈을 따라 길이 보인다. 그리고 그길을 조용히 걸어가본다. 바람은 제법 찼지만 찬바람이 오히려 머릿속을 싹 비워주는 그런 느낌이 들어 꽤나 괜찮았던 산행이었다. 하늘이 흐린 곳과 맑은 곳이 나뉘어 있어 어느 방향에서 바라보면 파랗고 어느 방향에서 보면 회색빛이었던 것도 재미있었던 점이랄까.


오르고 내리는 길이 거의 계단이다. 흙길을 걸을 때에 비해 발이나 무릎에 가해지는 충격은 훨씬 크다. 그런 충격을 줄이는 방법은 천천히 가는 것. 정상에 오르는 것을 목표로 앞만 보고 씩씩거리며 산에 오르면 산은 오만한 인간에게 피로감을 선사한다. 주변 경관도 즐기며 차분히 산과 이야기하며 걸으면 힘도 들지 않고 어느새 정상에 다다르게 된다. 산에 오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겸손이다.


눈이 좀 더 내렸다면 하는 아쉬움도 남지만 그래도 어제 눈이 내린 것이 참 다행이다 싶었다. 눈 쌓인 산은 참 볼 때마다 멋지다. 그리고 그 속을 걸어나간다는 것은 꽤나 즐거운 일이기도 하다. 인왕산은 전체적으로 등산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기 때문에 어느 코스를 선택하더라도 오전에 출발한다면 점심 전에 내려올 수 있다. 


멀게만 느껴지던 정상이 바로 눈앞까지 다가온다. 좌우로 넓게 펼쳐진 서울 시내가 죽 둘러서 보이는데 제법 시원스럽고 볼만하다. 오른쪽 멀리 청와대도 보이는데 사진 금지라고 써 놓은 표지판이 하도 많아 그쪽은 그냥 눈으로만 보고 말았다. 굳이 사진으로 남길만한 것도 아닌 것 같고...


제일 헷갈리기 쉬운 구간인데 성곽길 따라서 올라가면 길이 없다. 좀 더 오른쪽에 길이 나 있으니 그곳으로 가야 한다. 나도 처음엔 이곳이 길인가 해서 올라가다가 중간에 보이는 작은 계단으로 얼른 방향을 바꿨다. 성곽들이 복원된 것은 좋은데 너무 깨끗해서 주변과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 느낌도 든다. 가능하면 오래된 돌을 구해다가 만들었으면 어떨까 싶기도 한데 쉬운 일은 아니겠지 싶다.

이길을 올라가면 정상이다. 역시나 눈은 거의 없어 미끄러지는 위험없이 편하게 오를 수 있었다. 다른 계절에는 인왕산에 사람들이 제법 많다는데 겨울이라 사람이 없는 것인지 크리스마스라 없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사람이 적은 것이 산에 오르기에는 좋은지라 오히려 오늘 인왕산을 찾은 것이 괜찮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다.


그래도 경찰들이 여기의 눈은 안 치워주는 배려를 해서 처음으로 눈을 쓸어주고 한 바퀴 빙 돌며 서울 시내를 바라본다. 셀카라도 찍어보고 싶었지만 바로 앞에 초소가 있고 경찰들이 왔다 갔다 하고 있어서 영 민망해서 그만 두기로 했다. 혼자 산에 다니면 아쉬운 점 중의 하나가 내가 담긴 사진이 없다는 것인데 여태 사진을 취미로 했으면서도 나를 찍은 사진은 거의 없는지라 그냥 그려려니 하기로 했다.


이쪽 방향으로는 사진을 찍어도 딱히 뭐라 하지 않길래 한장 담아봤다.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일찍 정상에 올라와서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고 다른 산과는 다르게 초소와 근무하는 이들이 왔다갔다 하고 있어 정상에 올랐다는 느낌이 그리 들지 않는 것도 인왕산의 특징이라면 특징이겠다. 나는 배낭에 등산 의류 끼어 입고 올라가고 있는데 휙휙 날아다니는 젊은 경찰들을 보면 좀 민망한 느낌도 있고...


하산길 역시 깔끔하게 제설작업이 되어 있다. 이쪽 방향은 창의문으로 가는 방향이다. 멀리 보이는 풍경이 참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아마도 눈이 쌓인 덕분이 아닐까 싶은데 눈이 쌓이지 않은 겨울산은 뭐랄까 조금은 쓸쓸한 느낌이 강한데 눈이 이렇게 덮혀 있으면 쓸쓸한 느낌은 여간해서는 들지 않는다.


희한하게 생긴 큰바위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뭔가 전설이라도 담겨 있음직한데 주변에 뭐라 적혀있지는 않았다. 분명 무슨 사연이 담겨 있는 것이 분명한데 집에 돌아와 검색을 해봐도 알 길이 없다. 오늘 산행에서 본 것 중에 제일 특이한 것은 이 바위 두 개였다.


조금 걷다가 이정표를 만나게 되는데 사진에 보이는 기차바위로 향하는 길과 창의문으로 향하는 길이 갈리게 된다. 기차바위는 수락산이 유명하다고 하는데 인왕산 기차바위도 꽤 괜찮다고 한다. 사실 인왕산에서 바위 구경하는 것도 흥미진진한 일인데 독립문역에서 올라오는 코스에서는 유명한 바위들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 아니면 내가 모르고 지나쳤는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오늘 목표는 창의문 방향이니 기차바위는 다음으로 미뤄둔다.


성곽을 따라 죽 내려가는 계단이 이어져 있다. 계단만 보고 걷는 것도 좋지만 가끔 멈춰서 주변을 둘러보면 경치가 꽤나 볼만하다. 멀리서 바라보는 도시는 그래도 운치가 있다. 그안으로 들어가 삶 자체와 마주치면 여러 감정들이 몰아치겠지만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 보면 그저 하나의 풍경처럼 다가온다. 가끔은 삶 자체도 멀리서 볼 필요가 그래서 있는 것이 아닐까.


멀리 보이는 북한산 자락. 이렇게 보니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웅장해보인다. 산은 멀리서 보는 것도 좋고 가까이 보는 것도 좋다. 인왕산도 저 북한산 자락에서 이어진 것처럼 보인다. 중간중간 잘리긴 했지만 산줄기가 뻗어있는 모양을 보면 능선따라 죽 걸어가면 북한산에 이를 것만도 같다.


그리고 이제 본격적인 하산길이다. 이길을 따라 죽 걸어내려오면 오래지 않아 도로와 만나게 된다. 그 도로를 가로질러 조금 더 걸어가면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만날 수 있고 조금 더 걸어가면 창의문이다. 창의문에 대해서는 다른 글로 올리기로 하겠다. 그곳에 대해 적을 내용도 제법 되고 서울성곽길 전반에 대한 글도 있어야 할 것같다는 생각에서다.


이정표를 보다가 뭔가 희한한 게 보인다. "인왕산에서 굴러온 바위" 저것은 대체 무엇인가.. 인왕산이 바위로 유명하다고 하긴 하지만 바위가 굴러 내려온 것이 있나 싶어 호기심이 발동한다. 창의문으로 바로 이동하려다가 잠깐 들라보기로 했는데...


바위 하나가 굴러 내려온 것이 아니라 여러 바위(?)들을 묶어 놓은 것이다. 나름 바위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가 되는 녀석도 있지만 대개 작은 돌들이다. 인왕산 자체가 바위산이다보니 이런저런 이유로 바위들이 굴러내려오는 모양인데 굴러내려온 바위들을 저런 식으로 모아둔 것도 재밌다.


그리고 만나게 되는 장소가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다. 이곳이 윤동주의 이름을 따게 된 것은 그가 실제로 이 근처에 살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이지만 큰 바위 하나에 시인의 시를 앞뒤로 적어두고 있어 제법 분위기가 괜찮다. 여기서 창의문 쪽으로 좀 더 이동하면 윤동주 기념관도 있다는 데 어쩐 일인지 내가 가는 방향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시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쉽지 않다고 생각된다. 자기 내면을 깊게 그리고 투명하게 들여다봐야 만날 수 있을까말까한 자신의 본질. 그 본질을 온전히 밖으로 끄집어 내어야 하는 고통을 감수한 후에야 비로소 시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너무나 익숙한 시지만 한참 그 앞에 서서 싯구를 반복해서 읽어본다. 나는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가...부끄럽다면 떳떳해지자고 생각을 하면서...


Panasonic LX-5





지난 글이 길어져서 새로 글 창을 하나 열어 14구간 산너미길을 이어 적어 본다. 산너미길은 북한산둘레길의 난이도 '상'구간 중의 하나로 둘레길에서 난이도가 '상'인 구간은 모두 3개(5구간 명상길, 14구간 산너미길, 16구간 보루길)인데 그중의 하나인 길이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구간은 산을 넘어 가는 길이다. 그리고 그 산은 다름 아닌 사패산이다. 그리고 전체 난이도 '상'인 구간 중에 이곳 14구간이 가장 힘든 곳으로 알려져 있다.

국립공원의 안내상으로 이 구간은 2.3Km, 소요시간은 1시간 10분 정도가 걸린다고 한다. 실제로 걸은 거리와 측정상의 거리가 다를 경우는 오르막과 내리막 특히 계단이 많은 곳으로 생각하면 된다. 이 구간은 전체적으로 고도가 제법 올라가고 계단이 높고 길게 이어져 있는 편이다. 그리고 겨울인데다가 눈까지 쌓여있는 지역들이 있음을 감안하면 실제 이동 속도는 더 오래 걸릴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다.


산너미길을 알리는 입구다. 입구에 다다르기 전에 화장실이 있으니 미리 이용하도록 하자. 그리고 오늘 이후로 이곳을 찾는 분들이라면 가능하다면 아이젠을 준비하기를 권한다. 눈이 내린 날이라면 아이젠은 필수인데 이 구간은 꽤 오래 오르막이 있고 능선 구간도 있는데다가 내리막 계단이 제법 길어서 안전사고의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난 고무신 신고도 대청봉에 오른다'고 하실 분도 있겠지만 막을 수 있는 위험이 있다면 미리 준비하는 것이 좋다.


약간 뒤에서 찍은 사진인데 이정표에 사패산이 보인다. 역시 등산의 유혹에 빠지게 되는 지점이다. 오늘은 겨울산행 준비도 다 했겠다. 무엇보다 먹을 것도 있다. 1.9km... 가볼만하다는 생각이 여전히 괴롭혔지만 둘레길 완주 후로 미뤄두기로 한다. 망설이는 나를 흘깃 쳐다보고 아저씨 한 분이 스틱을 한 개만 들고 유유히 걸어 올라간다. 배낭도 없이 오리털 파카를 입고... 괜찮았을까 모르겠다. 아무튼 이번 구간만 해도 사패산의 6부 능선까지는 오를 수 있으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기로 한다.


들어서자마자 계단이다. 이전 구간의 평온함과 약간의 지루함은 이 구간에서 모두 날려버릴 수 있다. 특히 겨울이라면 제법 긴장감마저 느낄 수 있는 구간이다. 역시 이 구간도 제법 한산했는데 정상에서 한 부부를 만난 것을 빼고는 사람의 흔적을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좌우로 겨울색 옷을 입은 나무들이 벗이 되어 천천히 길을 걸어본다.


왼편으로 계곡이 보이고 오른편으로는 길이 보인다. 난 이런 길을 제법 좋아하는데 얼지 않은 물 흐르는 소리가 적막함을 깨고 들려오는 느낌이 참 좋다. 겨울이 모든 것이 숨죽이고 있지 않음을 흐르는 물은 이렇게 보여준다. 여기까지 사진을 보신 분들 중에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셨다면 눈치가 빠른 분이다. 스틱을 들고 카메라를 꺼냈다 뺐다를 반복하다가 이미지 비율 버튼이 4:3으로 바뀐 것을 알아채지 못했던 것. 이하 사진들은 전부 4:3 비율이다..


물이 얼음이 되지만 그 얼음을 녹이는 것이 또 물이다. 사실 물과 얼음은 같은 것인데 눈에 보이는 것은 이렇게 다르다. 살아가면서 실상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을 우리들은 얼마나 다르다고 생각하고 살고 있는지 생각해보게 해 준다. 결국은 물이고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이 물이다. 上善若水[상선약수]란 말을 또 한번 되새기게 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렇게 혼자 걸으면 생각이 많아진다. 그리고 이게 혼자 걷는 길의 장점이기도 하다.


아직까지는 길가에 눈도 없고 드문드문 햇살이 들어 그리 어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 길이 이어진다. 황량함이 느껴지지만 그 속에서 생명의 끈을 이어가는 나무들이 꿋꿋이 서 있다. 이전 구간에 비해 확실히 숨이 차 오르는 지역들이 많아지는데 걷는 페이스를 적당하게 잘 조절해야 한다. 이 구간부터 시작했다면 그래도 괜찮지만 이전 구간에서 이어서 오는 경우라면 체력이 많이 소모된 상태기 때문이다.


'울띄교'라고 적힌 것이 맞나 한참 들여다본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 주변을 둘러보지만 설명이 없어 아쉬웠다. 스틱을 들고 다닐 때는 이런 나무 다리 구간에서는 가능하면 바닥을 찍지 않도록 하자. 나무가 패일 수도 있고 스틱의 촉부분이 나무 틈 사이에 끼는 경우도 있기 때문인데 살짝 들고 이동하면 된다. 고무다리를 씌운 분이라면 상관없겠지만 수시로 고무다리를 씌웠다 뺐다하는 것도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다. -사실은 내가 게으른 것이다-


가지런히 놓인 돌로 만든 계단이 정겹다. 한발한발 올라가면서 산이 이렇게 부르는구나 생각을 한다. 그러고보니 왜 갑자기 산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나 스스로도 궁금해진다. 군대에서 그렇게 지겹도록 다니던 산이라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생각까지 했던 곳인데...아마 차가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도 해봤지만 다시 차를 들여도 오히려 산에 가려고 더 많이 이용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이번에 만나게 되는 다리는 갓바위교. 이것은 바위 이름에서 빌려왔겠구나 추측을 해본다. 산너미길이라는 이름에 참 어울리게 이 구간은 산 넘고 다리 건너는 일이 많다. 길이란 결국은 혼자서 걸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가까운 가족도 결국은 곁을 떠나게 되고 자신의 마지막 순간 역시 고독하게 홀로 가는 것이니.. 가끔은 홀로 걷는 일에 익숙해질 필요도 있지 않을까..물론 누군가 곁에서 토닥여주는 것이 그래도 더 좋긴 하다.


바로 만나게 되는 사패교. 사패산 안으로 들어와 있으니 이런 이름의 다리도 하나 있어야지 싶다. 사패산은 어느 소개에 따르면 북한산 귀신들도 잘 모르는 숨겨진 산이고 가장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라 한다. 양주와 의정부에 걸쳐 있는 산이고 무엇보다 이곳이 천연의 생태를 유지하게 된 계기는 얼마 전까지 군사보호구역으로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었기 때문이다. 대략 등반 시간은 4시간 정도 소요된다는데 꼭 들러볼 곳으로 기억해둔다.


사람의 손이 많이 닿지는 않았지만 길은 그래도 곧게 나 있다. 길이라는 단어는 참 내게 정겨운 단어다. 사진을 시작하고서부터 길 사진이 제법 많은 편인데 길 자체에 대한 생각이 그만큼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왠지 길이라는 것이 내가 살아가는 모양새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좋아하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앞으로도 길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 이어질 것이고...


고개를 살짝 넘을 무렵 슬슬 지난 폭설의 자취가 나를 마주 한다. 꽤 오랜 내리막인데 그나마 사람들도 거의 다니지 않아 그대로 얼어 있다. 여기서부터는 아이젠을 끼고 가는 것이 좋다. 세상 좋다는 등산화도 아이젠만 못하기 때문인데 여기서부터 이 구간의 정상 전망대까지는 아이젠을 그대로 장착하고 걷기를 권한다. 처음 몇 발을 괜찮으려니 생각하고 가다가 스틱으로 간신히 버텼기 때문이다.


한참을 걷다보면 능선길이다. 이제 좌우로 전망이 시원하게 뚫리고 바람이 본격적으로 불어오기 시작한다. 확실히 겨울 산행이 신경쓸 것이 많은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옷도 부지런히 갈아입고 장갑도 갈아 끼워주고 귀마개도 해 보고 하다보니 배낭을 몇 번을 들었다놨다를 반복해야 한다. 그것이 귀찮다고 그냥 버티다가는 산의 무서움을 온몸으로 깨닫게 된다. 겨울 산행을 가는 이들의 배낭이 그렇게 커 보이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전망대에 오르면 멀리 의정부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의정부까지 왔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기도 하다. 북한산이라는 산자락이 얼마나 넓게 뻗어 있는지 새삼 느끼게 되는데 주변을 죽 둘러봐도 능선들이 죽죽 이어져 있어 어디가 끝인지 모를 정도다. 주변에...특히 서울을 끼고 이렇게 광활한 녹지대가 살아 있구나라는 것을 이제사 알게 되었으니 앞으로 갈 곳이 정말 많다고 새삼 생각이 든다.

여기 전망대에서 처음으로 한 부부를 만났다. 등산장비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지역 주민이 아니셨나 싶은데 먼저 반갑게 인사를 건네 주신다. 부부가 같이 산에 다닐 수 있다는 것은 꽤나 행복한 일이다. 다시 말하면 한평생을 같이 살아가는 두 사람이 비슷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전혀 다른 삶의 길을 살아오다 어느 갈림길에서 만나 이어지는 길을 함께 걷는 것. 그 앞에 어떤 고비가 있건 행복이 있건 온전히 두 사람이 함께 마주하는 것. 그것이 가능한 것이 부부이고 가능해야 부부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내리막 계단은 경사가 급하고 제법 길게 이어져 있다. 다행히 아직 이곳의 눈은 모두 녹아 아이젠을 사용하지 않고도 걸을 수 있지만 내리막 구간은 무엇보다 무릎에 가는 충격이 상당하기 때문에 스틱을 잘 활용해야 한다. 가뜩이나 부실한 체력인지라 스틱 쓰랴 사진 찍으랴 정신이 없지만 시원하게 펼쳐져 있는 풍광을 보는 것만으로도 오늘 이곳에 오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이곳의 진지는 제법 모양새를 잘 갖추고 있다. 보아하니 60mm 박격포 진지가 아닐까 싶은데..사실 나는 일반 보병 부대에 근무한 적이 없어서 60mm박격포 운용을 본 적이 없어서 추측만 해볼 뿐이다. 처음엔 60미터인가 생각을 했지만 길을 지나나보면 이런 진지가 몇 개 더 보이는데 60M-1, 60M-2 이런 식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니 포 진지가 맞는 것도 같다. 그러고보니 내가 조작해본 박격포는 81mm가 전부였구나.


몇 번의 오르막과 내리막을 걸으며 이 생각 저 생각하다보면 이 구간도 슬슬 종착점에 다다라간다는 것이 느껴진다. 오랜만의 외출치고는 제법 오래 걸은 셈이고 동계 등산 장비들을 처음 테스트 하는 산행인지라 이런저런 시행착오도 많았지만 덕분에 본격적인 겨울 산행 준비를 좀 더 잘 할 수 있게 된 것 같아 나름 괜찮은 산행이었다. 아마 이 다음의 걸음은 북한산둘레길이 아니라 인왕산이 될 것 같다. 서울의 우백호라 불리는 산이다.


조금 더 이동하면 이 문과 마주 하게 되는데 안골길의 시작은 아니고 산너미길의 끝지점이다. 안골길은 아래로 조금 더 내려가면 진입로가 보인다. 여기서부터는 꽤 오랜 시간을 걸어야 한다. 대충 20분이 넘는 시간을 걸어야 버스 정류장에 이를 수 있으니 이곳에서 정비를 하고 이동하면 되겠다. 길은 그대로 아스팔트길로 이어지고 좌우로 많이 식당들이 있으니 쉬어 가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고 아니면 의정부쪽으로 이동해도 좋겠다.


문을 뒤에서 본 모습. 이 다리는 안골교란다. 조금 이름을 대충 지은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지역을 대표하는 이름이니 이해하고 넘어갈 일이다. 13구간에 이어 14구간까지 마치고 나니 3시간 20분 정도 소요되었다. 확실히 겨울이라 장비 갈아 입는 시간이 많이 걸렸고 눈길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더 걸린 까닭이다. 하지만 산행에 있어 시간처럼 버려두어야 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일상의 시간을 잊기 위해 찾는 곳이 산인데 그곳에서 또 시간에 연연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 글 위에 지도를 붙여 두는 것은 이후 이길을 가게 될 분들을 위한 작은 안내자 역할을 하기 위함이지 무슨 기록을 세우기 위함은 아니다.


길을 따라 조금 더 내려가면 이렇게 안골길의 입구를 만날 수 있다. 왼편에 보이는 보루길은 무엇일까 궁금한데 다음 걷기에서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아마 안골길 안에서 의정부에 있는 직동공원으로 이어지는 다른 길과 만날 수 있다는 의미인 것같다. 자전거 출입금지라고 씌어 있는 것으로 봐서는 길이 제법 평탄하지 않을까?


그런데 어쩐 일인지 입구 우측의 이정표가 무너져 있다. 국립공원측에서 모르고 있나 싶었지만 플래카드까지 걸어둔 것을 보니 알고 있는 것은 분명한데 수리를 미뤄둔 것이다. 보기에도 영 좋지가 않고 행여 위험할까 싶어 국립공원관리공단에 문의를 넣었더니 다음날 보수가 완료되었다고 사진까지 올려주었다. 

이후로 이곳을 가시는 분들은 똑바로 바로 서 있는 이정표를 보실 수 있겠다. 이런 부분은 정말 칭찬할만한 일인데 사실 나는 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도 다음날 바로 수리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생각해보면 국립공원을 이용하다가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공단에 알려 주는 것이 좋겠다. 확실히 저렇게 보니 좋아보이지 않는가..

이렇게 북한산둘레길을 14구간을 마무리했다. 21개 구간이 이제 7구간이 남아있다. 나머지 구간들은 서울의 북쪽에서 동쪽으로 돌아가는 길이고 마지막 구간인 우이령길은 북한산을 관통하는 길이다. 우이령길은 아마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관통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을까 생각을 하는데 사전 예약을 해야하지만 평일이라면 1,000명이 모일 것 같지는 않으니 선착순 입장도 가능하지 싶다.

사회에 나오면서 본격적으로 시작한 취미는 사진이었고 그 다음은 자동차였다. 그리고 이제는 등산이다. 아마 이 3가지만 평생 가지고 가기에도 어느 하나 제대로 소화해내기 어렵지 않을까 싶지만 그래도 참 좋은 취미를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물론 수 없이 맞는 시행착오로 인한 경제적인 지출은 상당하지만 돈으로 살 수 있는 경험이 이런 것이라면 기꺼이 지불할 용의가 있다.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만큼 많은 일들이 마무리되었던 한해다. 결국 인생은 제로섬게임이라지만 그래도 얻는 순간 잃는 순간에 각각 느끼는 감정의 깊이는 다르다고 생각된다. 내게 12월은 미련은 사라지고 희망은 남은 그런 달로 기억될 것같다. 이제 열흘도 채 안 남은 2012년... 올해의 마지막 산행 준비를 해 본다. 아마도 그리 멀리 가지는 않겠지 싶다. 그리고 올 겨울 안에 태백산에 다시 오를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Panasonic LX5


둘레길도 어느덧 중반이다. 처음 1구간을 걸을 때 막연하게 '완주를 해보아야겠다'고 생각만 했었는데 어느새 11구간이다. 시작이 절반이라는데 절반을 왔으니 끝까지 걷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으리라. 오늘은 어느 여름날처럼 제법 한낮의 햇살이 따가왔다. 처음 걷기로 한 구간은 9,10구간이었지만 한 구간 더 나아가 11구간까지 걷기로 했다.

9구간은 이전 8구간의 종료지점에서 바로 시작하기 때문에 8구간에서부터 이어서 걸은 경우가 아니라면 어느 정도 거리 손실이 있게 된다. 오늘은 9구간의 시작지점을 북한산국립공원의 안내에 따라 잡았기 때문에 생각보다 구간의 종료가 빨랐는데 집에 돌아와서야 이런 사실을 알았으니 이점은 유의하시는 게 좋을 듯하다. 

9,10,11구간은 11구간만 약간 난이도가 있고 9,10구간은 무난한 난이도여서 전체 구간을 한번에 걷는 것도 크게 부담스럽지 않다. 위의 표를 보면 마지막 효자길에서 고도가 급격하게 높아지는데 생각만큼 힘들지는 않으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좀 더 자세한 이동경로는 이곳을 참조하시면 되겠다.

9,10,11구간을 전부 완주할 경우 전체 소요거리(버스정류장 이동거리 포함)는 7.91km고 성인 남녀 기준(조금 느긋한 걸음)으로 3시간 10분 가량 소요된다. 시작점은 3호선 연신내역에 내린 다음 3번 출구로 나가 그대로 직진을 해서 30여 미터쯤 걸어가면 버스정류장이 있다. 여기서 7211번을 타면 된다. 중앙 차로에는 이 버스가 없으니 주의하자.


전형적인 가을의 파란색이 두드러졌던 하루였다. 진관사(하나고) 입구 버스정류장에 내려 조금 걸어가면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길목에서 마실길 구간임을 알려 주는 이정표와 만날 수 있다. 멀리 북한산이 보인다. 마음은 산 정상에 있지만 몸은 둘레길이다. 9구간 정도 오게 되면 서울의 서쪽으로 제법 많이 이동한 셈이다. 북한산을 아래에서부터 왼쪽으로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는 코스라고 생각하면 된다.


북한산둘레길은 각 구간별로 주요 지점을 이정표에 기록하고 있는데 9구간은 효자동을 대표 이름으로 삼고 있다. 휴일이어서 그런지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 구간을 오고 가는 모습이었는데 이쪽에서 북한산 등반로가 이어져 있어 그렇다고 한다. 사실 오늘 연신내역에서 마주 친 등산객들의 숫자가 내가 평생 만나본 등산객 숫자보다 많은 것 같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다. 한편 생각해보면 내가 그만큼 산을 자주 찾지 않았다는 말이 되기도 하지만...


분명 9구간의 진입 통로는 8구간의 종료점에 표기 되어 있지만 이곳에서 한 번 더 만날 수 있다. 여기서부터 생각을 하면 실제로 걷는 9구간의 거리는 매우 짧은 편이다. 구간 이름인 마실길답게 정말 가벼운 동네 산책하는 수준의 길이 이어져 있는데 좌우 둘러보고 오고가는 사람들과 마주치다 보면 어느새 구간이 종료된다.


팔자 편하게 늘어져 있다는 표현이 어울리게 잘 자는 녀석이다. 누가 와서 업어가도 모를 지경이다.(물론 시도하려는 분은 없겠지만) 그늘이 진 것이 꼭 이불을 덥고 있는 것 같은 모양새인데 아직은 오전이라 햇살이 그렇게 따갑지는 않아 편히 잘 수 있나 보다 싶었다. 늘 드는 생각이지만 개발을 보면 꼭 잡아보고 싶다. 오래 전 기르던 강아지 생각도 나고... 동물을 기른다면 역시 개를 길러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 번 해 본다.


마실길은 정말 편하게 걸을 수 있다. 휴일이라 오고가는 사람들에 잠깐잠깐 지체되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오고가는 모습도 나름 볼거리가 되는 셈이다. 가끔 다른 분들의 사진을 찍어 드리기도 하고 사진에 찍히기도 하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걸으면 된다. 휴일에 둘레길을 걷기 위해 내가 나온 것처럼 다른 이들도 그런 생각으로 나온 것인데 '왜 사람이 이리 많아?'라고 생각하고 불평을 할 일은 아닌 것이다. 다른 이들도 나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할테니 말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조금 걷다보니 이미 9구간은 종료되어 있었다. 10구간 내시묘역길 구간이다. 이 지점을 경계로 9-10구간이 갈리는데 조금 더 진행하면 10구간 입구를 알리는 문을 만나게 되지만 사실상 이곳이 분기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근처에 수방사 교육대가 있어 지도에 상세하게 표시되지는 않는 지점이기도 하다. 


내시묘역길 구간을 담은 블로그에 한결같이 소개되는 비석이다. 경천군이라는 이에게 나라에서 하사한 토지니 소나무를 베기 위해 들어가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문이라고 보면 된다. 세월이 흐르면 사람은 간 곳이 없고 그 흔적만 남아 그 사람을 기억하게 된다. 100년도 못 살면서 1,000년의 근심으로 사는 것이 사람이라 한다. 나는 지금 100년의 근심을 하고 있을까 1,000년의 근심을 하고 있을까.. 근심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나은 일이지 싶다. 그저 주어진 순간에 최선을 다할 뿐... 


10구간은 전반적으로 길이 평탄하고 걷기에 큰 부담이 없는 그러면서도 한적하고 고요한 느낌이 강한 구간이다. 물론 나들이 인파들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 속에서도 '묘역'이라는 이름에서 오는 왠지 모를 적막함이랄까..그런 것이 느껴졌다. 실제 내시들의 묘역은 사유지 안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이 구간을 걸으면서 만나기는 어려웠다.


하늘이 정말 '가을이구나'싶은 날이었다. 혼자서 길을 걷는 것도 좋지만 같은 목적지를 공유하는 누군가와 걷는 것은 또 다른 느낌과 의미가 있다. 그 시간이 짧건 혹은 길건 한 방향을 바라보고 걸어간다는 것이 참 소중하다. 그 길을 끝까지 함께 걷건 혹은 중간에 다른 길로 멀어져 각자의 길을 가게 되건 적어도 함께 한 시간만큼은 좋은 기억으로 남게 되는 것이니 살아가는 동안 그런 기억들을 모아둔다는 것 아니 모을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기억을 새긴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삶의 전부일지도 모르겠다. 만나는 사람들, 하는 일들, 나를 둘러 싼 모든 것들이 하루하루 매시간시간 하나둘 쌓여가고 그것이 나의 역사가 되고 결국은 그것이 나의 삶이 된다. 과거를 돌아볼 필요도 없고 미래를 바라볼 필요도 없다. 그저 지금이 최선이다. 현재에 만든 기억이 과거가 되고 또한 미래가 된다. 지나치게 과거에 얽매이고 지나치게 미래를 갈구했던 시간들 속에서 정작 현재를 잃고 살지는 않았는지 반성하게 된다. 현실적이라는 건 현재에 충실하라는 말이다.


살아가는 이야기, 살아온 이야기 속에 어느덧 10구간도 종료. 전체적으로 9구간과 10구간은 난이도가 거의 없고 평지를 걷는 수준이어서 손쉽게 걸을 수 있다. 그만큼 속도도 빠르다. 11구간 효자길도 하급 난이도의 구간인데 거리는 내시묘역길보다 짧지만 체감상으로는 중하 정도의 난이도랄까. 이전 구간보다는 약간 높낮이도 있고 산길도 있어 조금 시간이 걸리는 구간이다.


처음 이 구간에 접어들면서 마주치는 황당함인데 도로 옆으로 난 길이 끝없이 이어져 있다. 이쪽편의 북한산 자락이 험한 편이어서 산으로 길을 내지 못 하고 할 수 없이 돌려돌려 길을 낸 것이라는 말을 듣고 이해는 갔지만 이건 좀..이라는 생각이 든다. 둘레길도 초반부는 제법 각종 시설이 원칙대로 잘 구비되어 있지만 이 정도쯤 오게 되면 여기저기 부실한 부분들이 눈에 띄는데 '어쩔 수 없나..'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앞으로는 개선이 되겠지라고 기대를 해 본다. 한여름이었다면 이곳을 걷기는 제법 힘들었겠지 싶다.


어느 정도 걸어가면 이 이정표를 만날 수 있는데 사실 여기서부터 제대로 된 구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제법 산길이고 밤골을 지나게 되면서 정말 많은 밤들을(물론 거의 대부분 알맹이는 없는) 볼 수 있다. 가끔 머리 위로 밤송이가 떨어지기도 하니 모자 정도는 챙기도록 하면 좋겠다. 이쪽으로 올라가면 북한산의 등반 코스 중의 하나인 백운대 코스를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전 구간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효자의 길은 멀고도 험한 법인가 제법 산길이다. 일반 도로를 걷다 흙길을 걸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발 밑으로 구르는 돌부스러기나 흙들의 느낌이 포근하다. 맨발로도 걸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흙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 속에 풀들이 나무들이 돌들이 그렇게 뒤로뒤로 스쳐지나간다.


오랜만에 등장하는 계단길이다. 사실 계단은 산행에서 그리 반가운 존재는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하나의 이정표가 될 수 있다. 사람의 손길이 닿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니 많이 지쳤다면 이 계단을 보고 힘을 얻을 수도 있다. 인공물이 하나 없는 산길은 가끔은 막연한 피로를 불러올 때도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똑딱이 카메라는 색감을 잡기가 쉽지가 않다. 내 SLR의 경우는 철저하게 내 세팅으로 되어 있어 잘 나오건 안 나오건 그려려니 하는데 이 녀석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이런저런 코치를 받아가며 색감을 바꾸어 봐도 영 마음에 들지는 않는데.. 그렇다고 기계를 탓할 노릇은 또 아니니...


계곡을 감싸고 도는 다리의 느낌이 또한 포근하다. 날은 덥고 땀은 흐르지만 이런 풍경은 잔잔한 감동을 준다. 사계절의 풍경이 제각기 주는 느낌은 다르겠지만 역시 가을과 겨울의 풍경이 내게는 마음에 와 닿는다. 머지않아 겨울이고 백색으로 물든 계절이 오면 이곳은 또 어떤 느낌과 생각을 던져줄까 미리 생각을 해 본다. 그래도 올해는 둘레길을 걸으며 여름과 초가을 사진이 많아져서 흐뭇하기도 하다. 사진에 늘 겨울만 나오면 그 또한 식상한 일이다.


오늘의 걷기가 거의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다. 조금 더 진행하면 밤골탐방지원센터를 만나게 되고 그곳에서 백운대와 다음 구간으로 그리고 하산 코스로 길이 나뉘게 된다. 갈림길이란 늘 사람에게 선택을 요구하는데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문제다. 온전히 자신의 결심만으로 하나의 길을 택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허나 내가 내린 결정이 능동적이건 수동적이건 결국 그 결정에 책임을 져야 하는 건 자신이다. 가끔 이 단순한 진리를 잊게 되는데 그럴 경우 꼭 문제가 생기곤 한다. 시작이 '나'라면 그 끝도 '내'가 내야 한다.


12구간 충의길을 알리는 문을 만날 수 있다. 충의길은 중급 난이도로 이제까지 걸어온 거리와 시간을 생각하면 이어서 가기는 쉽지 않다. 이 구간은 다음 주 정도에 혼자 와 볼 생각이다. 이곳을 뒤로 하고 내려 와 길을 건너 버스를 타면 연신내역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 내려가는 길은 제법 긴 편인데 휴일일 경우는 오고가는 차들이 많으니 주의하도록 하자. 연신내역으로 이동해 조금은 늦은 점심을 먹고 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시간이 정말 어찌가는 줄도 모르게 빨리 갔다. 

어떤 이는 잠깐 이야기를 나누어도 마치 몇 시간을 이야기를 한 것처럼 피로한가 하면 어떤 이는 몇 시간을 이야기해도 잠깐 이야기 한 것처럼 신선하다. 만나자마자 곧 헤어지고 싶어지는 이가 있는가하면 헤어짐이 아쉬워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는 이가 있다. 살아가는 동안 마주치는 수 많은 사람들 중에 후자와 같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어느 새 이만큼을 왔다. 거리상으로는 절반을 더 걸어온 셈이다. 막막함이 구체화되고 현실이 되니 이루어지는 셈이다. 거북이 걸음이고 황소걸음이지만 목표를 가지고 한 걸음씩 나아가다보면 아예 시작도 안 한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일단 시작하자. 일단 밖으로 나가 걸어보자. 한 걸음.. 그 시작이 절반이고 그 절반이 전부가 된다. 

 

-오늘 글은 조금 깁니다. ^^-

사실 예정에 없던 둘레길이다. 아침에 일어나 문득 오늘은 좀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집을 나섰다. 평소와 같은 시간에 일어나 평소와 같은 준비를 하고 평소와 같은 버스를 탔지만 목적지는 달랐다. 같은 준비를 해도 다다를 수 있는 곳은 이렇게나 다른 법이다.


둘레길 8구간은 아주 예쁜 이름인 "구름정원길"이다. 하지만 오늘의 둘레길 걷기는 내가 아침에 하고 싶었던 천천히 걸으며 이런저런 생각들을 정리해보자..라는 계획을 좌절시킬 정도였으니.. 읽어보시면 아시리라.. 8구간은 총 5.2Km로 중급 코스다. 소요시간은 2시간 30분 정도로 국립공원은 안내를 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버스 이동을 하지 않는다면 이동거리와 시간은 더 늘어난다.

중간에 앱이 저절로 멈춰버리는 바람에 측정이 애매하게 됐다. 평소 멀쩡하던 앱이 정신이 나가다니..아무튼 불광역 2번 출구로 나가 왼쪽으로 돌아 죽 직진하면 이전에 마무리했던 7구간의 종점을 볼 수 있고 그 건너편이 바로 8구간이다. 그런데 이 8구간 시작점을 생각보다 찾기가 어렵다. 표지판도 애매하거나 없어서 시작부터 조금 헤맸는데.. 정말 시작에 불과했다.

앱이 멈춘 지점부터 다시 기록을 했다. 총 이동거리는 8Km이고 소요시간은 3시간 58분이다. 차이가 나도 좀 심하게 나는데 위 2개의 그림을 조금 살펴보면 뭔가 이상한 것을 찾으실 수 있을테고 그게 오늘의 하이라이트였다.

아무튼 오늘은 2대의 카메라를 들고 나갔다. 두 카메라의 차이를 제대로 확인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고(물론 비교하기는 애매하지만) 광각과 매크로를 보조할 수 있는 카메라가 한 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아래 사진에서 두 카메라의 차이를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지 싶다.

구름정원길로 접어들기 직전에는 이렇게 안내도가 붙어있다. 주변에 먹을거리들이 제법 많은 소위 먹자골목이라는데 워낙 먹는 것과는 담을 쌓고 지내는지라 그냥 그려려니 하고 안내도가 잘 되어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는데 이후의 걷기는 거짓말 조금 보태어 GPS를 가동한 지도가 없었으면 쉽지 않았을 구간이었다. (사실은 내가 정신줄을 놓은 게 제일 문제긴 했다)


할아버지 한 분, 할머니 한 분이 지키시는 안내소를 지나 공원길로 올라가면 된다. 가는 동안 '여기가 둘레길이다', '아니다 저기가 둘레길이다' 라고 외치는 표지판들이 여기저기서 부르는 소리가 들릴텐데 꿋꿋하게 외면하고 왼쪽으로 진행하도록 하자. 


민가를 몇 채 지나 익숙한 계단을 넘으면 8구간의 시작점에 다다르게 된다. 오늘은 생각할 거리를 한 뭉치 들고왔으니 평소와는 달리 아주 천천히 걸을 생각이다. 생각이 많은 것은 좋은 것만은 아니지만 그래도 오늘만큼은 차근차근 내 안에 엉킨 것들이 있으면 풀어버리고 아주 단순해져서 돌아올 생각이다. (아니 생각이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문이다. 앞서 전체 안내표지판도 그렇고 이번 구간은 꽤나 친절한 안내가 되어 있을 것 같아 기대가 됐다. 물론 여기까지 잘 왔다면 이 마음은 더 컸으리라 싶지만 잠시 앉아 심호흡을 한 다음 천천히 걷기로 했다. 평일이라 역시 사람은 거의 없다. 등산로도 아닌데 사람이 많을리가 없다. 사람이 없어야 맞았다.


아무렇게나 방치된 낡은 집을 한참 바라본다. 저곳에도 예전에는 사람이 살고 그 안에서 오욕칠정이 오고갔을텐데 이제는 을씨년스러울 정도다. 사람이 떠난다는 것은 집으로부터 혼을 빼앗아가는 것과 같다. 조금 이른 아침이라 그래도 괜찮았지만 늦은 저녁에 보면 제법 공포분위기도 나지 싶다.


뭔가 사진 색감이 확 달라졌다고 느꼈다면 제대로 본 것이다. 니콘의 전형적인 느낌인데 어쩐지 이 느낌을 평생 버리기는 힘들 것 같다. 이전의 사진은 모두 LX5로 찍은 사진이다. 약간 캐논의 느낌도 들지만 파나소닉의 화사함은 캐논과는 또 다른 맛이 난다. 캐논은 나와는 워낙 상극인 메이커였는데 파나소닉은 제법 괜찮다.


길을 걷다 마주하는 모든 것들을 한 번 더 바라보고 한 번 더 생각해보면 평소 가지고 있던 선입견이 무너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너무나 당연스레 생각하는 것들을 한번쯤 바꿔본다면 이제까지의 생활과는 또 다른 생활을 해볼 수 있다. 혹은 기존의 것에 익숙함이라는 일종의 고집을 버려야 하는데 그게 참 쉽지만은 않다.


예전에는 '논쟁'을 즐겨 했었다. 어떻게든 내가 옳음을 증명하려고 했었다. 내가 100% 옳아 상대가 수긍을 해야 만족을 했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과연 상대가 완전히 내 생각에 동의를 했을까? 아니지 싶다. 앞에서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여도 자신의 의견이 무너진 것에 대한 '반감'은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남기 마련이다. 내가 그렇게까지 해서 상대에게 이긴다한들 그것은 사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차라리 아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만 못 하게 된다.


물론 이야기를 하다보면 마음속에서 울컥하며 반론을 제기하고 싶은 생각이 끊임없이 올라오고 분명히 내가 맞다는 생각에 시달리게 된다. 하지만 그것을 상대에게 전하는 방법이 꼭 논쟁이나 마치 수업시간에 선생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식으로 상대방보다 내가 우월한양 행동해서는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나의 지난 날들을 보면 실제로 그래왔었다. 오히려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 좀 더 신경을 써야했는데 나는 그러지를 못했다. 틀림과 다름이라는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두 단어를 깨닫지 못한 탓이다.


같은 장소에서 찍은 사진 두 장이다. 한장은 내가 바닥에 붙다시피 하고 찍었고 한장은 평소와 다름 없는 내가 선 높이에서 찍었다. 풍경은 전혀 변하지 않았지만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제법 많은 것들이 다르다. 같은 것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이렇게 큰 차이가 있다. 마찬가지로 대화를 한다면 상대의 눈높이로 내가 맞춰야 한다. 다가서지 않고서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고 해봐야 손해는 결국 내게 돌아온다. 땅바닥까지 내려가 상대를 바라보는 것이 부끄러운가? 그렇다면 이미 대화를 할 마음이 없는 것과 같다.

8구간은 전반적으로 화려하면서도 대단히 멋진 풍광을 지닌 구간이다. 코스 자체가 구불구불하거나 계단이 많은 편도 아니어서 한가로이 생각을 하거나 대화를 하면서 편하게 걸을 수 있는 구간이다. 구름정원이라는 이름이 제법 잘 어울리는 곳이지 싶다. 가을임에도 마치 한여름처럼 무척이나 더웠던 날씨가 잠깐잠깐 길을 멈추게 했지만 그 멈춤에도 여유가 있어 평화로웠달까


이길의 이름은 "스카이워크"란다. 조금 뜬금이 없다. 둘레길이라는 우리말로 예쁜 이름을 지어 놓고 갑자기 이길의 이름은 무려 스카이워크라니(사실 데크라는 말도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외국인도 함께 걷자는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차라리 우리말로 무언가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영어로 표기하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둘레길을 걷다가 갑자기 스타워즈를 생각하게 되다니... 아무튼 이곳에 포토포인트가 있으니 도장 모으는 분들은 셀카 한 방 찍으시고..


처음 보는 표지판인데 누군가 자꾸 이 나무가지에 머리를 부딪혔던 모양이다. 가지가 조금 낮게 굽어 있어 이야기라도 하다가 잠시 한눈을 팔면 여지없이 부딪힐만한 위치에 있다. '뭐야 이게 여기에 머리를 왜 부딪혀?'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 한편 나무입장에서는 제법 억울한 일인데 자기는 그저 가만히 팔을 뻗고 있을 뿐인데 이놈의 인간들이 자꾸 머리로 들이받으니 난처할 노릇이다. 그래놓고 만물의 영장이라니..


느긋하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정말 이제까지 돌아본 둘레길 중에 가장 편안한 몸과 마음으로 걷고 있을 무렵 나타난 이정표. '족두리봉이라..이름 참 특이하네..' 지난 구간을 돌 때 들은 이야기가 문득 생각이 났다. 여기를 지칭한 것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북한산에 올라야겠다는 충동이 생긴다는 것이다.  800미터라..얼마 안 되는데.. 지금은 별로 힘들지도 않고.. 흠... ......


진입을 하고나면 길을 그리 험하지 않다. 이제까지 온 길보다 갑자기 경사가 급해져서 조금 당황되기도 하지만 등산장비를 갖추고 있다면 큰 무리는 없을 정도다. 북한산은 몇 년 전에는 칼바위능선 쪽으로 거의 일주일마다 올랐던 터라 큰 부담은 없었다. 문제라면 가져온 것이 전혀 없다는 것 정도인데 오늘도 늘 둘레길에 올 때처럼 파워에이드 한 병이 전부였다. 시간은 11시가 조금 넘었고 그냥 둘레길을 걷는다면 점심 먹을 때쯤은 끝날텐데 북한산을 아예 올라간다면 상황은 조금 다를텐데..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800미터 정도야...'라고 착각을 해버렸다.


가면 갈 수록 길이 이 모양이다. 카메라 두 대가 일단 걸리적거리기 시작한다.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한 대는 입고시킬 각오를 해야 한다. 튼튼한 하체만 믿기에는 완전히 낫지 않는 발도 슬슬 신경이 쓰인다. 무엇보다 먹을 게 없는데...'대청봉도 김밥 한 줄하고 파워에이드 한 통으로 갔었는데...' 괜찮겠지?


역시 올라오니 좋다. 경치 보이는게 일단 다르다. 날이 워낙 맑아서 제법 멀리 볼 수 있다. 바람이 불지 않고 햇살이 제법 따갑지만 그래도 이런 시원시원한 맛이 산에 오르는 즐거움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제법 많은 분들이 코스를 오르고 있었다. 

내 실수 중의 하나는 만약 등산을 계획했다면 미리 코스를 숙지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이건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나중에서야 족두리봉이 암벽코스도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사실 이 코스는 능선 쪽이 아니라면 꽤나 위험한 코스다. 실제 인명사고도 종종 나는 곳이다. 둘레길 정도는 모를까 충동적으로 등산을 결심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아야한다.


어지간히 헉헉거리고 올라가니 갑자기 사방이 탁 트인다. 사방은 온통 바위투성이다. 파워에이드는 이미 반을 비워가고 있었고 지구력이라면 제법 버티는 나로서도 생각지도 않던 등산은 당연히 힘겨운 일이었다. 처음엔 이 바위가 족두리 모양인가 생각을 했지만 이리보고 저리봐도 이건 족두리가 아니라...흠.. 아무튼.. 사방을 좀 더 둘러보고 GPS맵을 켜서 위치를 파악하기로 했다.


족두리봉 능선코스는 이쪽이었다. 까마득하다. 산길에서 800미터면 그냥 800미터가 아니다.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 과욕을 부리기에는 우유 한 잔 먹은 아침식사로는 분명히 곤란에 빠지지 싶었다. 못 가는게 아니라 안 가는거다..라고 나름 합리화를 하고 하산하기로 했다. 아쉽긴 했지만 준비가 너무 부족했다.


평지로 내려오니 살 것 같았다. 산이 있다 해서 그냥 올라갈 수 있는 건 아니다. 하다못해 둘레길을 걷는데도 어느 정도 준비를 해야 하는데 정상에 오를 생각이 있다면 가벼운 마음으로는 되지 않는다. 아무튼 괜한 객기를 부리는 바람에 체력소모도 컸고 음료수 소모도 컸다. 사실 앞으로 갈 길이 제법 남았는데 조금 걱정이다.


길가에 아무렇게나 피어있는 꽃인데 사실 손톱보다도 작은 꽃이다. 접사로 찍고 보니 이렇게 다른 모습이다. 무엇을 바라보는 시각은 정말 큰 차이를 가져온다. 고정관념이라는 것처럼 사람에게 무서운 것은 없는데 이것을 떨치려면 또 다른 습관을 들이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다. 이제껏 해오던 방법 혹은 시선과는 반대의 방법에 익숙해지거나 시점에 익숙해지면 차츰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편견이나 선입견은 사라진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시도하지 않았기에 바꾸지 못할 뿐.


길은 언제나 그 자리에 그렇게 놓여 있다. 그길을 갈 것이냐 말 것이냐는 사람이 정할 따름이다. 당장 가지 못했다고 아쉬워할 것도 없고 다시는 그길을 가지 못할 거라 체념할 필요도 없다. 길은 언제나 그렇게 그 자리에서 사람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가지 않은 길'이란 '다시 갈 수 있는 길'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어느 길이 바른 길이냐 하는 것도 상대적이다. 절대적으로 옳은 길은 없고 절대적으로 그른 길도 없다. 중요한 것은 그길을 걷는 사람이 어떠한 마음과 자세로 걷느냐에 달려 있다. 칼도 주방에서 쓰면 요리용 도구지만 전쟁에서 쓰면 살인무기가 된다.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 스스로 굳어지는 것보다 위험한 것은 없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지석(?)이 예사롭지 않다. 쓰인 글을 보니 중세국어인데 어떤 이유로 이곳에 무엇을 위해 이렇게 놓여 있는 것일까 한참 바라본다. 사실 뜻은 별 것이 없다. 8구간을 돌다보면 이렇게 무언가 적힌 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묘지를 지키는 돌인형이 누워있는 것도 볼 수 있고 무덤도 제법 많다. 과거의 기록들이 꽤 많이 보존된 구간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탐방객 수를 조사하는 개찰구(?)를 또 지난다. 아까 지나왔는데 왜 또 있을까..희한하다 싶었다. 사실 그때 주위를 둘러보고 상황파악을 했었어야 하는데 문득 "저기 왔다갔다 하면서 숫자 늘려봐요"라는 말이 생각이 나면서 혼자 웃으며 그냥 지나쳤다. 아...나는 대체 왜 정신줄을 놓은 것일까...

여기서부터 한동안 사진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위 사진에도 보이지만 뭔가 길이 이제까지 온 길과 달라서 넘어지지 않으려고 아등바등하느라 사진을 찍을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경고는 하나 더 있었다. 올라가다 보면 왼쪽에 안내도가 보이는데 전형적인 등반코스를 그려놓고 있는 안내도다. 정상까지 걸리는 시간이 똑바로 적혀있다. 나는 그 안내판 앞에 한참을 서서 '어라. 진흥왕순수비가 저기 있네. 저게 북한산비구나. 조금만 더 가면 볼 수있나?'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

내가 정신을 차린 것은 음료수가 10분의 1정도 남은 시점에 어느 넓다란 바위 위에 앉아서였다. 가도가도 "북한산둘레길"을 알리는 네모난 표지판이 보이지 않았고 갑자기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이 이상해서 대체 여기가 어딘가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지도를 켜고 현위치가 나타나는 순간 참 할 말이 없었다. 나는 향로봉에 오르고 있었다...

오늘은 산이 나를 부르나 싶었다. 한 번은 내 의지로 올랐고 한 번은 무의식으로 올랐다. 물론 두 번 다 정상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묘한 날이었다. 그래 언젠가는 끝까지 가주마..라고 다짐을 하고 다시 올라온 길을 되돌아 내려갔다. 피로도도 제법 올라가있고 배도 제법 고파왔다. 


이렇게 큼직한 이정표가 있는데 왜 이것을 못 보고 지나쳤을까..생각이 많으면 병이다 싶다. 그래도 이 정도로 정신을 놓지는 않았는데..여기서 향로봉은 1.8Km다. 올라가려고 한다면 작정을 해야 갈 수 있는 거리다. 하지만 한 번 족두리봉에서 실패를 한 다음인지라 또 시도를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럼에도 몸이 저절로 올라간 것은 대체 왜인지...


다시 둘레길로 돌아와 조금 더 걷다보면 개울이 나온다. 이제는 제법 차가운 물이다. ND필터가 아쉬웠지만 없으면 없는대로 임기응변으로 물줄기를 담아봤다. 이제 거의 코스도 마무리 단계에 접어 든다. 두 번의 삽질(?)이 없었으면 지금 쯤 집에 가 있을지도 모르는 시간에 나는 여전히 둘레길에 서 있었다. 하지만 힘은 많이 들었지만 마음은 편안했다.


나무 사이로 간간히 들어오는 햇살이 비추는 공간에 이름모를 꽃들이 또 그렇게 피어있었다. 해가 들어와 저렇게 저 부분만 밝게 비추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쳤을텐데 저렇게 빛이 들어오니 걸음을 멈추게 된다. 길은 그리고 산은 끊임없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내가 그 소리를 듣느냐 아니면 지나치느냐에 따라 내가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은 정말 많이 달라진다. 밖으로 나가 세상과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그런 이유다.


완연한 가을 느낌의 산이 보이고 길이 보이고 그 길 위에 내가 서 있고 또 걸어가고 있다. 이 순간에는 그것이 그냥 그 자체로 감격스러운 일이다. 여러 생각도 멈추고 그저 바라보고 느끼는 순간이다. 


어찌되었건 파란만장한 8구간은 마무리되었다. 남들은 편하게 즐기며 걷는다는 이 구간을 나는 꽤나 고생아닌 고생을 하며 걸었다. 예상보다 먼 거리를 그리고 오랜 시간을 걷게 되었는데 이번 가을에 다시 이 구간을 걸을 리는 없을테니 그래도 제법 괜찮은 기억으로 남을 걷기였다. 문을 나가 왼편 경사로에 짐을 풀고 남은 음료수를 모두 마시고 담배 한 대를 피고 나니 피로가 몰려왔다. 아마 배고픔이 가장 큰 원인이 아닐까 싶지만 잘 안 먹는 고집은 좀처럼 꺾이질 않으니 문제는 문제다.

이곳을 나가 왼편으로 죽 걸어나가면 큰 길이 나온다. 그곳에서 버스를 타고 연신내역으로 이동하면 된다. 걸어가도 되지만 20분 정도 예상해야 하니 버스를 타는 편이 낫다. 돌이켜보면 오늘 정신줄을 놓기 시작한 것은 합정역에서 6호선을 타면서부터가 아니었나 싶다. 불광역으로 향하는 열차라고 덥썩 타고 나서 한창 미드 '그림'을 보고 있었는데 '다음 역은 삼각지, 삼각지입니다..'라는 소리가 들려왔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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