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 전형필 서거 50주년을 맞이한 올해 간송미술관의 주제는 '진경시대회화대전'이다. 진경(眞景)이라는 말 그대로 '진짜 경치'를 다룬 그림들을 볼 수 있는 전시회가 되겠다. 원래 새벽같이 나갈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아침에 몇 가지 처리할 일들이 밀려 조금 늦게 길을 나섰다. 제법 오랜 시간 줄서기를 해야겠구나..라고 생각하면서..

간송미술관은 1년에 두 번, 5월과 10월에 15일씩만 여는 독특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 기간동안에는 성북동 일대에 긴 줄이 만들어지는 독특한 풍경을 볼 수 있는데 평일이건 주말이건 할 것없이 어지간해서는 1시간, 조금 밀리면 2시간 정도는 밖에서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차라리 속이 편하다.

이번 전시는 다음 주 월요일에 마치게 되니 아마 이번 주말이 가장 사람들이 몰리지 않을까 싶다. 간송미술관은 전형필 선생의 개인 미술관이기 때문에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처럼 잘 꾸며져 있고 정돈된 분위기를 생각하면 실망하게 된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입구를 들어서면 좌우로 정원이 펼쳐져 있지만 사람이 손을 많이 대 관리한 모양새는 아니다. 그냥 일반 단독주택의 정원 같구나 생각하고 둘러보다보면 어디선가 나팔 부는 소리가 들리는데 미술관에서 기르는 하얀 공작이 우는 소리다. 입구에서 왼쪽으로 난 길의 좌측에 보면 공작이 살고 있는 우리를 만날 수 있는데 특이하게도 하얀 공작이다. 

미술관은 건물이 이리저리 닳고 닳은 모습의 외양을 하고 있다. 아무래도 재정적인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지 싶은데 이 느낌은 미술관 안으로 들어가서 더 확실해진다. 5월의 하늘은 무척이나 높고 햇살도 뜨거운 오후여서 줄을 선 많은 이들이 쉽게 지치기도 하는 모습이었다.

이 작게 난 길을 따라가면 입구가 보인다. 왼쪽에는 공작 우리가 있는데 다가서기는 애매한 위치에 있다. 덩치 큰 공작들이 졸고 있는 틈에 동네 참새들이 우리에 들어가 먹이를 먹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어찌 보면 관리가 잘 되지 않은 정원이 오히려 그 나름의 매력이 있는 것도 같다. 아무렇게나 제멋대로 자라고 있는 각종 나무와 풀들을 보면서 만약 이 정원이 계획적으로 정돈이 되었다면 매력이 적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미술관은 1층과 2층으로 나뉘어 전시를 하는데 1층은 비교적 좁고 2층은 넓은 공간이다. 입구 즈음에는 어디선가 보내 온 각종 화환들이 즐비하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이들의 화환들도 눈에 보이는데 그네들은 직접 이곳에 들러 전시를 보고 갔을까?

제멋대로 자라는 나무들과 풀들 사이로 봄의 화창한 기운이 느껴진다. 12시쯤 시작한 줄서기가 거의 마무리된 시간은 1시 30분 쯤. 대략 1시간 30분 정도 기다린 셈인데 내 뒤로 줄을 선 아주머니들의 끊이지 않는 수다 덕분에 지루하지 않았다.

입구에는 이번 전시의 주제를 적은 종이가 아무렇게나 붙어있다. 오히려 정겨운 느낌이다. 입구를 들어서 왼쪽의 전시실 위에는 오세창 선생이 원래 이 미술관에 지어 준 이름인 보화각(寶華閣)이라는 현판을 볼 수 있다. 여기서부터는 촬영을 금지한다는 안내가 붙어 있어 카메라를 가방에 넣어 둔다. 중간중간 휴대폰으로 몰래 사진들을 찍기도 하지만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싶다. 

진경을 주제로 삼은 이번 전시는 단연 겸재 정선의 독무대처럼 보였다. 강희언과 최북, 이인문의 그림도 종종 보였지만 가장 많은 작품은 역시 정선의 그림들이었고 눈에 익히 익은 그림들과 처음 보는 그림들이 어우러져 있었다. 1층은 비교적 둘러보기가 쉬웠지만 2층으로 가는 길은 또 다시 줄이 길게 이어졌다. 2층에도 역시 정선을 만날 수 있었고 단원과 혜원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다. 허나 김홍도나 신윤복의 너무 잘 알려진 그림들은 선보이지 않았는데 미술관의 배려가 아닐까 싶었다. 진경시대회화대전에서 미인도를 만났을 때의 당황스러움은 어찌할 수 없을테니 말이다.

사실 전시된 작품들은 보기가 쉬운 편은 아니다. 아주 많은 수의 작품도 아니고 작품마다 해설이 붙어 있는 것도 아니다. 작가와 생몰년도, 작품명이 전부다. 나무로 만든 테이블은 불안해 보이고 유리는 선명함이 떨어진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피로와 싸워가며 이곳을 찾는 이유는 진품에 대한 열망때문은 아닐까 싶다. 

이곳의 작품들은 인터넷에서 아주 쉽게 볼 수 있고 여느 서적을 들춰봐도 실제로 이곳에 와서 보는 것보다 더 자세한 설명과 화질(?)로 감상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복제품일 뿐이다. 때로는 복제품이 진품보다 우수한 경우도 종종 있고 특히나 디지털 복제의 경우 어느 것이 진품인지조차 규정하기 어려운 요즘같은 시대에 정선과 김홍도, 신윤복이 직접 붓을 대 그린 그림을 만난다는 것은 그 의미가 제법 크지 않을까. 그렇게도 흔하디흔한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루브르를 찾는 이들의 심정도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간송미술관의 전시된 작품들을 보기 위해서는 여러 수고를 들여야 한다. 매일 같이 여는 것도 아니고 1년에 2번이다. 입장하기 위해 성북동 길가에서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 그 흔한 자판기도 하나 없다. 전시장은 복잡하고 불편하며 모처럼 열린 전시회를 찾아도 보고 싶던 그림을 한 번에 만나기도 어렵다. 줄을 서는 시간이 그림을 보는 시간보다 길고 그림 하나를 진득하게 볼라치면 뒷사람의 눈총도 따갑다.

그럼에도 이곳을 찾는 이유는 앞서 적은 것처럼 진품에 대한 향수때문이다. 복제되지 않은 최초의 순수함을 간직한 원본말이다. 복제가 당연시되는 시대에 살고 있고 있다. 굳이 들뢰즈의 시뮬라르크를 언급할 것도 없이 우리의 일상의 삶은 어느 것이 원본이고 어느 것이 복제인지 알 수가 없는 일상이다. 원본도 없는 복제가 원본 행세를 하기도 하는 데 겸재 정선이 직접 그린 그림이라니 대단한 것이 아닌가!

내가 사진을 찍으면서도 사진보다 그림에 더 가치를 두는 이유는 원본의 복제 방식의 차이때문이다. 그림은 사람의 아날로그적인 노력이 주를 이루는 반면 사진은 사람의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기계의 손을 거치기 때문이다.(디지털 카메라가 보급된 이후에는 더욱 더) 물론 사진에도 감성이 담겨 있지만 그림에 비할 바는 아니지 싶다.

아무튼 전형필 선생이 후세에 남긴 것은 복제되기 전의 원본 바로 그것이고 오늘도 그 원본을 보기 위해 수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는다. 원본에 대한 향수 나아가 인간 본연의 원초적인 자아에 대한 향수때문에...


후기...

미술관을 나서는 길에 나는 원본을 복제한 신윤복의 쌍검대무를 다시 복제한 그림을 하나 손에 집어 들었다. 진경시대회화대전에 와서 산수화보다는 인물화를 선택한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은 오늘 전시되지 않았다. 

여러가지로 모순적인 선택이긴 하다. 전시회의 주제와도 전시된 작품과도 엇갈린 복제의 복제품을 집어 들었으니..

하지만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입구에 들어설 때 가장 먼저 내 시선을 끌었다는 점이다. 

어쩌면 나는 오늘 이 작품을 얻기 위해 이곳을 찾은 것인지도 모른다. 

진경시대회화대전을 보러 와서 전시되지 않은 다른 주제의 작품을 사 들고 온 것. 어쩌면 우리 삶의 모습은 아닐까?



참 오랜만에 제대로 된 미술관 안내서적을 읽었다는 느낌이 든다. 책을 처음 받았을 때 495페이지에 달하는 두께에 놀랐고 사진의 질을 높이기 위한 종이를 사용하다보니 무게도 만만치 않아 또 놀랐다. 들고 다니면서 읽기에는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역시나 출퇴근 길에 읽기에는 적지 않은 부담이 됐다. 

그럼에도 이책은 재밌다. 미술관을 소개한 책이 무슨 '재미'가 있냐고 할 수도 있지만 이런 류의 책들을 여러 권 읽어 봤지만 이책만큼 몰입감을 준 책은 드물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우선 머리말이 길다. 뜬금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머리말이 긴 것은 단점이 될 수도 있겠지만 저자가 우리에게 하고픈 말이 오죽 많았기에 이렇게 구구절절 써 놓았을까 싶어 정독을 했다. 역시나 저자는 할말이 많았다.



무엇보다 저자 본인이 여행 카다록에 나와있는대로의 잘 짜여진 모범 코스로 유럽의 미술관을 돌아보고 느낀 아쉬움에서 이책을 쓸 생각을 했기 때문에, 책에 실린 미술관들이나 작품 그리고 작가들에 대한 소개가 제법 심도 깊고 정말 필요한 정보들로 채워 넣었음이 절실하게 느껴진다. 겉으로 드러난 외적인 부분만이 아닌 비하인드 스토리랄까..독자의 흥미를 끄는 요소를 많이 다루고 있는 점도 장점이다.

저자의 미술관 기행은 영국에서 출발한다. 조금 의외일 수도 있겠지만 현대 미술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사치 갤러리의 비중은 어느 미술관 못지 않게 크기 때문에 가장 먼저 집고 넘어 간다. 영국을 출발해 프랑스로 그리고 독일, 네덜란드, 스페인으로 이어진다. 뒤의 세 나라는 미술관이라는 시각에서만 보면 우리에겐 조금 낯설 수도 있는데 저자는 그런 점을 염두에 둔듯 제법 상세하게 그 나라들의 미술관을 소개하고 있다.



그런 소개 덕분에 소위 문화 선진국들에 국한된 지식의 폭을 꽤 넓힐 수 있었다. 애초에 잘 알려진 미술관이 없는 나라들에 대해 무관심했던 탓도 있겠지만 말이다. 총 16개의 미술관을 다루고 있지만 내가 알고 있는 미술관은 채 몇 개가 되지 않았다. 이 정도면 문화에 대한 편식도 제법 심한 편이 아닌가 싶었다.



이책의 하이라이트는 독일의 홈브로이히 박물관이다. 읽는 이마다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내가 이 미술관의 소개에 높은 점수를 준 것은 다름 아닌 '지식을 버리고 당신의 눈을 믿어라'는 문장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미술 작품을 볼 때 무엇을 보는가를 생각해보자. 모나리자를 본다고 할 때 우리는 우리가 학교 혹은 기타의 경로로 배운 '지식'을 먼저 생각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어떻고 그림의 배경이 어떻고 작품이 있는 미술관은 어디고 등등...

홈브로이히 박물관은 그런 우리의 모든 배경 지식을 무시해버린다. 아무런 표제도 없이 그저 작품만 있다. 판단은 보는 이가 하면 된다. 학창 시절 국어 시간에 시를 분석하는 것이 참 마음에 안 들었었다. 윤동주의 시는 무조건 저항시라던가 하는 식의... 시인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시어들을 시험에 적합한 문제로 만들어 외우던 시절... 그런 편견 속에서 우리는 시인의 마음을 읽지 못 하고 지나쳤었다.

미술 역시 마찬가지다. 낭만파니 인상파니..하는 이론들에 묻혀 정작 작가들이 표현하고자 했던 진심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이 사실이었다.이책을 읽어 내려 가면서 그런 선입견들이 얼마나 예술 작품을 오해하게 하는데 크게 작용하는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으니 이 정도면 이책을 제대로 읽어 내것으로 만든 것이 아닐까 싶다.

마음 같아서야 직접 소개된 미술관들을 찾아 내 마음의 눈에 비치는 대로의 감상을 하고 싶지만 그렇지 못한 여건이 아쉽다. 여느 안내서를 읽었다면 책을 읽고 나서 금세 잊었을 수도 있겠지만 이책을 읽어 가면서는 실제로 미술관을 찾아가보고 싶은 마음이 계속 들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진들을 담고 있음에도 아쉬움이 큰 것을 보면 작가의 의도가 책에 잘 반영이 된 모양이다. 

한 가지 욕심이 있다면 저자가 찍은 사진들만 별도로 부록 형식으로 모아봤으면 어떨까 싶다. 본책이 워낙 무게가 나가는 이유도 있지만 때로는 글 조차도 잊고 작품만을 보고 싶을 때가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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