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가지 않고 미뤄두었던 둘레길을 걸었다. 걸은 코스는 두 코스 13구간과 14구간이지만 우선 13구간에 대한 이야기를 적고 14구간의 이야기는 며칠 후로 남겨둔다. 둘레길 걷기가 중반을 넘어서 종반에 이를 수록 뭔가 마음속에 아쉬움이 밀려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물론 나중에라도 다시 걸을 수 있겠지만 지금처럼 전 구간은 하나씩 차례로 걷지는 않을테니 이번 걸음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서인지도 모르겠다.


13구간 송추마을길은 북한산국립공원의 안내에 따르면 난이도는 '하'이고 전체 거리는 5.3km, 소요시간은 약 2시간 40분이 걸리는 것으로 소개되어 있다.위의 기록을 보면 실제보다 거리가 약간 줄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길의 중간지점에 대규모 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내가 걸은 길이 지정된 경로가 아닌 조금 구간을 단축하는 길이 몇 군데 있었지 않았나 싶다. 전체적으로 고도도 낮은 편이고 평지가 더 많은 구간이라 걷기 수월한 구간이다.


송추마을길은 이전 글에서도 적었지만 충의길에서 그대로 이어진다. -아니 이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난 번에 걷다가 중지한 지점에서 다시 걷기를 시작했다. 아침에 짐을 꾸리며 아이젠을 넣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다가 일단 넣기로 했는데 나중에 14구간을 걸을 때 제법 도움을 받았다. 겨울산에는 아이젠, 스틱은 필수라고 생각한다. 거기에 장갑 두 벌 정도와 바람막이 하나, 귀마개, 게이터, 바라클라바, 양말, 약간의 음식과 패딩 정도는 가져 가야 하니 배낭이 클 수밖에 없다. 겨울을 제외한 계절에는 여간해서는 배낭을 들고 다니지 않는데 겨울에는 어쩔 수가 없다. 그래도 크기는 딸랑 22리터다. 본격 산행이 아닌 둘레길 걷기인 까닭도 있다. 물론 오늘 저런 것들을 다 들고 간 것은 아니다.


역시나 시작은 밋밋한 도로인지라 이 도로길을 얼마나 더 걸어야 하나 생각도 들었지만 그리 오래 가지 않아 산쪽으로 방향을 잡게 된다. 13구간을 걷는 분들은 구파발 역에서 내린 다음 34번이나 704번을 타고 석굴암 입구에서 하차하면 된다. 전체적으로 바람은 불지 않는 날씨여서 가벼운 복장이었지만 그리 춥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겨울 산행은 땀과의 싸움이고 옷갈아입기의 부지런함 정도에 따라 버티느냐 아니냐가 정해지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손이 많이 가는 편이다.


어느 정도 걷다 보면 위의 이정표를 만나게 되는데 이제 도로를 따라 걷는 일은 별로 없다. 의정부 방향이라고 적혀 있는 표지판을 보니 내가 멀리 오기는 꽤 멀리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둘레길 안내 이정표의 맨 아래에 오봉탐방지원센터가 보인다. 오늘의 하이라이트이기도 한 그곳의 이야기는 한참 아래에 나온다. -하지만 뭔가 기대를 할만한 것은 아니다.-


전형적인 시골의 어느 마을길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겨울에 접어 들면서 둘레길 사진이 전체적으로 우중충해보이는데 역시 계절이 계절이다보니 눈이라도 없다면 어딜 가나 뭔가 화사한 모습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그나마 볼 수 있다면 등산객들의 옷이 색깔 정도일까. 하지만 겨울은 다른 계절이 줄 수 없는 나름의 매력이 있다. 


송추마을길에는 제법 많은 군부대들이 있는데.. 생각보다 주변에 묘지가 많아 군부대에 나름 여러 괴담(?)들이 있지 않을까 싶다. 내가 근무했던 부대에도 별별 괴담이 다 있는데 지금 생각나는 건 빨간 부츠 신은 여자아이 이야기 정도다. 아무튼 이 주변의 묘역들은 제법 관리가 잘 되고 있었다. 어느 묘소 근처에는 바로 위에 초소가 있던데 그 초소에 근무하는 병사들에게는 뭔가 이야기들이 제법 많으리라.

이제야 볼 수 있는 것이 송추마을길 진입문이다. 이제까지 송추마을길이라고 알고 걸어왔던 것은 충의길도 송추마을길도 아닌 애매한 구간이었던 셈이다. 이런 부분은 좀 아쉽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데 워낙 광범위한 지역을 둘레길이라는 하나의 틀로 묶으려다보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긴 하지만 중간중간의 안내가 좀 더 치밀하다면 어떨까 싶은 생각도 든다. 


본격적인 송추마을길의 시작이다. 제법 산다운 느낌이 들지만 이 구간은 전체적으로 무난한 구간이다. 딱히 힘들다거나 곤란한 지점도 없고 산책하듯이 천천히 걸어나가면 된다. 오늘은 날씨마저 워낙 흐린 탓에 우중충한 겨울의 분위기가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된 느낌이다. 게다가 오고 가는 사람도 하나 없어 오후에라도 왔었다면 조금은 음산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제대하신 분들은 이것이 무엇인지 아시지 싶은데 이 구간 내내 이런 표지들이나 진지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주변이 거의 다 군부대기 때문이다. 크레모아는 저렇게 글만 보면 사실 별게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격발이 되면 참 잔인하기 이를데 없는 무기다. 신교대 교관 시절 저 녀석을 한 번 터뜨려본 적이 있는데 참.. 전쟁이 정말 일어나면 안 되겠다는 생각만 들었었다.


길은 이런 오솔길과 몇 군데의 계단으로 이어져 있다. 여름이나 가을날이었으면 제법 화려한 색상들과 마주치며 정겨운 느낌을 듬뿍 받을 수 있는 그런 길이 아닐까 싶지만 역시 겨울에 만나는 산길이란 지난 시절의 흔적들이 바닥에 짙게 깔린 무언가 다른 시간을 준비하는 잊혀져 가는 시간의 느낌을 간직하고 있어서 쓸쓸한 느낌을 걷는 내내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겨울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감정이다.

 

왜 나무는 하늘을 보고 자라는 것일까? 라는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다. 하지만 어디서도 그 답을 얻을 수는 없었는데 굳이 답을 찾으려 하기보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면 차라리 편하지 않았을까?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에도 그런 풀리지 않는 질문들을 수 없이 마주 하는데 그 모든 것들에 대해 다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지나친 과욕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때로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필요도 있다.


이 사진을 보시면 분노(?)할 예비역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아니 진지공사를 어떻게 했길래?"라며 말이다. 군인들에게 봄가을 진지공사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닌데 그래도 저 정도면 꽤나 열심히 잘 만든거다. 쓸 데도 사실 없는 것을 왜 힘들여 작업을 하느냐고 할 수도 있지만 이런 것들은 소위 FM 즉 Field Manual이다. 원칙이 있어야 그 원칙에 따른 융통성이 생기는 법이다. 당장은 무익한 듯 해보이지만 결정적일 때 필요한 것이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만나게 되는 곳이 오봉탐방지원센터다. 내가 오늘 이곳을 벼르고 온 것은 다름 아닌 둘레길 열쇠고리를 받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남은 구간을 올해 안에 완주하기는 일단 어려운데다가 탐방센터들이 어쩐 일인지 내가 가는 날마다 문을 닫고 있어서 이곳은 열었을까?라는 호기심도 한몫 했다. 다행히 이곳은 오늘 영업(?)을 하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 서니 인상 좋아 보이는 아저씨 한 분과 묘령의 미모의 처자가 한 분 계셨다. 

나: "스탬프 투어 확인 받으러 왔는데요"

처자: "네~ 다 도셨나요?"

나: "아뇨, 13구간까지만요. 올해 안에 다 못 돌 것 같아서 열쇠고리라도 받으려고요"

아저씨: "에이 하루에 3구간씩 돌면 금방 다 돌텐데 아깝네" 라며 인상 좋은 아저씨는 밖으로 나가셨고 처자와 둘만 남은 상황..

처자: "네~ 사진 보여주세요. 어머! 알아보기 쉽게 정리를 잘 해두셨네요"

나: '제가 정리 하나는 잘 하는지라'라고 생각만...

여기까지는 화기애애하고 괜찮았는데 처자분이 스탬프를 찍다가 잉크가 터져 왼손이 푸른색으로 온통 변색이 된 다음에는 좁디 좁은 그 사무실 안에는 적만만 감돌았다. 

나: "저런, 제가 괜히 많이 가져와서 이런 일이"

처자: ...................

이후 괜히 농담도 꺼냈봤지만 대답 없던 처자분... 잉크라 좀 오래 가겠지만 언젠간 지워지니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그리고 받아온 열쇠고리다. 별로 대단한 것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어느 날 갑자기 북한산둘레길을 걸어야겠다고 생각을 했었고 온전히 내 걸음으로 얻은 것이기에 그 소중함은 남다르지 싶다. 한 구간만 더 걸으면 탁상시계와도 바꿔준다지만 내게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앞으로 남은 구간은 완주할 생각이고 그럴 거라면 완주 기념품이 낫지 않겠냐고 할 수도 있지만 애초에 시작을 그렇게 내 스스로에게 부담을 줄 생각도 없었고 그렇게 되면 주객이 전도되는 셈이어서 열쇠고리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다행이었다. 배낭에 걸어두면 그럭저럭 어울리지 싶은데 아직 앞 부분의 칠이 마르지 않아 끈적끈적하다. 며칠 숙성시켜두면 나아지겠지.


오봉탐방지원센터 주변으로는 뭔가 큰 공사가 진행 중이다. 주변이 온통 어수선한 느낌인데 무슨 이주단지라 하던데 이곳에 새로 아파트나 그런 것이 들어서는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산 주변으로 자꾸 사람들이 모여 드는 것은 그리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갈 수록 산이 산으로 조용히 서 있기도 힘들어진다.


다시 만나게 되는 도로. 여기는 국립공원 주차장이 있는 곳인데 이곳에서 등산로가 시작되기 때문에 제법 큼지막하게 만들어 두었다. 역시 평일이어서 한산한 모습이다. 겨울 산행은 확실히 손이 많이 간다. 양손에 든 스틱에 카메라에 장갑까지... 카톡이라도 오면 멈춰서 장갑 벗고 확인하고 해야 하니 부산스럽다. 게다가 옷도 땀이 나면 벗고 추워지면 입고를 꾸준히 반복해야 하니 가장 부지런히 움직여야하는 산행이 겨울산행이 아닐까.


군부대 앞에 저렇게 둘레길이라고 표시를 해 둔 것이 왠지 귀여운 느낌도 든다. 이 지점까지 오면 선택을 해야 한다. 더 진행을 해서 다음 14구간에 진입할 것인지 아니면 왼쪽으로 가 버스를 탈 것인지 말이다. 14구간은 난이도가 '상'이다. 북한산둘레길에서 난이도가 '상'인 구간은 단 세 곳뿐이다. 그곳 중의 한 곳이 바로 다음 구간이니 생각을 잘 해야 한다. 특히 겨울산에 과욕은 금물이다. 


멀리 사패산을 바라보면서 걷다 보면 13구간도 어느새 막바지에 접어 든다. 교통표지판에 의정부, 구리가 보이는 것을 보니 서울의 오른쪽으로 제법 많이 이동한 모양이다. 처음 서울의 동쪽 끄트머리에서 시작한 둘레길 걷기가 다시 원점으로 서서히 돌아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문득 마지막 구간인 우이령길은 어디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을까 생각도 해 본다.


계절은 겨울이지만 날이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은 맑고 투명하기만 하다. 여기까지 오면 전체적인 기온이 조금 내려가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점점 산의 품으로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오르막을 따라 조금 걸으면 14구간 산너미길의 시작이다. 두 구간을 모두 걸었지만 이번 포스팅은 13구간만으로 마무리한다.

오늘 걷기는 전반적으로 겨울 산행을 위한 예행연습 같은 느낌으로 준비도 했고 그렇게 움직여보는데 의미를 두었다. 평소 들지 않던 스틱도 들고 교과서대로 사용도 해보고(덕분에 손목이..;) 아이젠도 수시로 채웠다 풀었다 해 주고 배낭도 동계용으로 꾸려서 다녀봤는데 역시 다른 계절에 비해 정말 손이 많이 간다. 가장 문제는 몸에서 흐르는 땀과 바깥의 기온과의 차이인데 이 부분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동계 산행에서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무리하지 말 것이다.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으니 오늘 오르지 못 하면 내일 오르면 그만이다. 죽기 살기로 매달리다가 정말 죽을 수도 있는 것이 겨울산이다.


Panasonic LX5


사실 오늘 길을 나선 것은 북한산둘레길 기념품을 받으러 수유쪽에 있는 둘레길지원센터에 가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보니 지난 19일부터 내부 정비에 들어가면서 쉬고 있더군요. (제가 늘 이럽니다) 이달 말까지는 계속 정비라하는데 미리 전화라도 해볼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처럼 시간내서 멀리 갔는데 그냥 돌아가기는 또 애매해 북한산에 올라가볼까라는 생각이 들었죠. 준비를 뭔가 해간 것이 아니고 몸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아  그나마 쉬운 코스는 어디일까 북한산 홈페이지를 보니 바로 제가 있는 지점에서 대동문까지 가는 코스가 있더군요. 난이도는 '하'라니 가볼만하다 싶었습니다. 


위의 사진에서 S로 되어 있는 곳이 백련공원지킴터로 전체 이동 코스는 '백련공원지킴터 - 백련사 - 진달래능선 - 대동문'에 이르는 편도 2.7Km구간입니다. 정식 코스로는 6번째 코스로 이름이 붙여져 있는데 편도 1시간 10분이 걸린다 하니 왕복 2시간 정도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위의 지도를 보시면 올라간 길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다른 길로 내려온 것을 보실 수 있으실텐데 그 사정은 아래에 나옵니다. 아무튼 출발지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지하철 4호선 수유역에 내린 다음 1번 출구로 나가 마을버스 1번을 타고 백련사까지 가시면 됩니다.


오늘은 날이 무척 흐려서 전체적으로 사진이 어둡게 나오더군요. 이 코스의 시작은 이렇게 완만한 도로에서부터입니다. 둘레길을 여러 번 다녔지만 마음 먹고 북한산을 올라가기는 제법 오랜만이라 조금 긴장도 되더군요. 장비는 특별한 것은 없고 집티 한 장입고 혹시나 해서 목장갑 비슷한 거 하나 가져갔는데 이 장갑이 오늘 제대로 역할을 했습니다.


대동문까지는 2.7Km라고 알려줍니다. 아직 초입이어서 운동기구도 있고 산에 오른다는 느낌보다는 이전의 둘레길 같은 느낌이 더 나더군요. 날이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것 같이 흐렸지만 하산할 때까지 눈은 내리지 않아 조금 아쉽기도 했습니다. 북한산둘레길하고 어느 정도 구간을 공유하는 부분도 있기 때문에 이정표에도 둘레길 정보가 함께 나와 있네요.


슬슬 진달래능선에 진입합니다. 이름이 꽤 귀여운 맛이 있습니다. 실제로 이쪽 코스는 그렇게 어려운 지점도 없어서 천천히 걸으면 산책하는 느낌으로 올라갈 수 있는 그런 구간이 대부분입니다. 바람도 불지 않아 제법 땀이 많이 났는데 집티 한 장만 입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오르내리는 분들의 복장을 유심히 봤는데 고어텍스 자켓을 입은 분들은 덥지 않을까 싶더군요. 실제로 저랑 비슷하게 같이 가던 젊은 분 한 분은 정말 땀을 육수처럼 흘리더군요. '겉옷 벗으세요'라는 말이 나올 뻔 했지만 왠지 오지랖 같아서 입안에 담아 두었습니다. 


대충 오르막길은 이런 모양새를 하고 있습니다. 북한산의 많은 코스들이 나름대로 특색이 있겠지만 이 코스는 잔돌과 약간 큰돌들이 섞여있는 형태랄까요. 간간히 큰 바위들도 나오지만 바위보다는 잔돌들이 더 많은 편입니다. 만약 이 코스로 올라가 그대로 내려온다면 보통 신는 일반적인 등산화로도 큰 무리는 없어 보입니다. 문제는 제가 내려온 구간이죠.


초겨울이지만 산의 푸름은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스산한 계절인 겨울을 잔뜩 입고 있는 그런 느낌이 더 들었는데 그 스산함 위로 눈이 쌓이면 그래도 조금은 밝은 느낌이 들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이쯤오면 몸에 열이 펄펄 납니다. 몸에는 열이 나고 얼굴이나 손은 찬 묘한 상태가 되는데 이럴 때 체온 관리를 잘 해야 합니다. 여름에는 잘 느끼지 못했던 기능성 의류의 성능을 체험하는 순간이기도 하지요.


멀리 만경대와 백운대 그리고 인수봉이 보입니다. 이 세 봉우리를 합해서 삼각산이라는 이름이 나온 것이지요. 북한산이라는 이름 대신 원래의 이름을 되찾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저기까지 오르는 분들도 제법 많을텐데 욕심은 나지만 오늘의 목표는 대동문이니 얌전하게 거기까지만 가기로 합니다. 사실 저렇게 보니 저기까지 오른다는게 만만한 일은 아니구나 싶더군요. 예전에는 어떻게 잘도 다녔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상상이 안 갈 일입니다. 


좌우로 문처럼 되어 있는 바위가 재미있습니다. 저곳을 지난 이들의 숫자가 얼마나 될까요. 문득 산에 다시 가게된 것이 참 다행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산에 갈 수 있다는 것은 몸이 건강하다는 이야기이고 그래도 비교적 큰 돈 들이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취미니까요. 그렇긴해도 막상 정상을 향해 오르다보면 '내가 지금 무슨 고생을 사서 하나'라는 생각도 들곤 합니다. 그 푸념을 날려버리는 것은 정상에 올랐을 때의 성취감이겠죠.


거의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이 되면 인내력 테스트가 시작됩니다. 난이도가 '하'라더니 이게 뭐냐 싶습니다. 둘레길 열쇠고리 받으러 왔기 때문에 가방 안에 들어있는 것은 게토레이 한 병, 점심도 안 먹고 허기진 배를 붙잡고 올라가려니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드는 장소입니다. 그래도 꾸역꾸역 올라가면 됩니다. 벌써부터 내려가면 뭐 먹을까 생각을 하게 됩니다. 


대동문에 다다르기 전의 좁은 골목 같은 오르막인데 며칠 전 내린 비인지는 몰라도 계단이 얼음계단이 되어 있습니다.  엇. 아이젠도 없는데 어쩌나 싶었지만 그래도 얼지 않은 곳 유심히 찾아서 또 올라갑니다. 이제는 북한산에 올 때는 가방 빈 자리에 아이젠을 꼭 넣어서 와야할 시기인 것 같습니다. 다른 계절에는 잘 느끼지 못했는데 겨울에는 카메라도 제법 신경이 쓰입니다. 사진보다는 걷기 자체에 집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계절이지요.


대동문은 북한산성의 남쪽 성문입니다. 북한산성은 조선 숙종 37년 그러니까 1711년에 지어진 것으로 왜란과 호란 이후 한양 외곽을 방어하는 수단으로 쌓은 것이라 합니다. 그러고보면 당시 사람들은 참 체력도 좋았다 싶습니다. 이 꼭대기에 이런 성을 쌓고 또 성벽을 이어 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텐데요. 북한산성은 아울러 사적 162호기도 합니다. 유물 답사편에 나중에 정리를 해야할텐데 조금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왜 이리 높은 곳에...

이곳을 들러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성벽 둘레로 죽 돗자리가 깔려 있고 사람들이 옹기종기 앉아 밥을 먹고 있습니다. 꽤 재밌는 풍경이기도 한데 평일인 오늘도 어김없이 많은 분들이 진을 치고 앉아 있어 성벽을 사진에 담지는 못했네요.


안내 표지판을 보니 갈만한 곳들이 정말 많습니다. 이곳에 오면 욕심이 저절로 생기는 모양입니다. 적혀 있는 소요시간을 보면서 갈까말까 망설입니다. 하지만 무리하면 탈이 나는 법이고 사전에 정보를 알고 오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가 얼마나 크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 까닭에 이만 하산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온 길을 그대로 돌아가면 이미 한 번 온 길이니 어렵지 않게 내려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제법 걸리는 길이지요. 그런데 아래쪽에 뭔가 다른 길이 보입니다. 길이도 훨씬 짧습니다. '저 길로 가면 금방 내려가는 거 아닐까?' 싶은데 희한하게 소요시간이 적혀있지 않습니다. 아주 단순하게 온 길 생각만 하고 30분이면 가겠는데 라고 어림짐작을 합니다. 문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오늘의 가장 큰 교훈은 '모르는 길은 가지 마라'입니다. 


처음 진입을 하니 계단만 죽 있습니다. 다만 경사가 좀 가파른 편인데 이런 모양새라면 갈만하지 않을까 싶어 계속 내려가봅니다. 올라올 때와 가장 큰 차이점은 진달래능선을 탈 때는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꽤 많았지만 이곳은 딱 두 명 만났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난이도가 제법 되는 길이기 때문이지요.


올라올 때 보기 힘들었던 로프가 보입니다. 이 코스는 거의가 암벽 구간입니다. 내리막으로 택한다면 발에 가해지는 충격이 일단 제법 큰데 내리막에서는 아무래도 속도가 빠르다보니 충격이 좀 더 큰 편이니 주의가 필요합니다. 경사도도 제법 가파르고 전체적으로 편하게 갈 수 있는 구간은 아닙니다.


대략 이런 길이 줄줄이 이어지는데 비가 온 뒤나 눈이 내린 날에는 꽤 조심하지 않으면 다치기 쉬운 길이 아닐까 생각이 드네요. 별 생각없이 챙겨넣었던 장갑이 제 역할을 한 곳이기도 합니다. 전체적인 거리는 짧지만 이런 구간이 계속되기 때문에 소요시간은 진달래능선 쪽과 별 차이가 없으니 바위산길에 대해 특별한 애정이 없다면 이길을 굳이 고를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빨리 내려가서 늦은 점심을 먹어볼까 생각하며 꼼수를 부린다고 한 것이 화를 불렀달까요. 오르막 후에 쉬지 않고 내려온 탓에 다리 힘이 별로 많지 않아서 한발한발을 신경써야 하는 이런 구간들은 꽤 조심스럽더군요. 이쪽 코스를 생각하신다면 충분히 휴식을 취한 후에 내려오시기 바랍니다. 하산 길은 이런 길들을 계속 내려오느라 사진이 거의 없습니다. 카메라도 가방에 넣어두고 걷는 데만 신경을 쓰는 것이 낫습니다. 중간쯤에 이르면 계곡 물길을 가로 질러 가는 구간이 있는데 물구경한다고 이리저리 다니다가 오른발이 빠져서 또 고생을 했네요. 고어텍스가 제 기능을 발휘한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여기까지 오면 힘든 내리막은 없습니다. 대신 돌멩이로 만들어진 길이 종작첨까지 이어지는데 이게 생각보다 발에 부담이 많이 갑니다. 가능하면 돌을 밟지 말고 흙을 밟으며 이동하는 것이 피로를 줄이는 방법입니다. 종착점에는 마을버스 1번이 거의 상시 대기하고 있으니 그것을 타고 다시 수유역으로 이동하면 됩니다.

아무튼 열쇠고리 받으러 나선 길이 등산이 되었고 괜한 호기심에 고생을 좀 한 산행이 되었는데 역시나 모르는 길은 선뜻 가지 않는 것이 제일이고 조금 무겁더라도 가방 안에 이것저것 챙겨서 다니는 것이 좋다는 교훈을 얻었네요. 겨울 산행은 다른 계절과 달리 땀과의 싸움, 추위와 바람과의 싸움이 이어지기 때문에 체온의 유지가 무엇보다 중요하고 그에 어울리는 복장이 필요합니다. 

산은 늘 그 자리에 있네요. 저만 움직이면 언제고 만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습니다. 어찌보면 일방적인 관계일 수도 있지만 산은 그래도 싫다는 내색 한 번 안 합니다. 그저 그렇게 묵묵히 제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릴 뿐이죠. 그래서 산에 가면 고개를 숙입니다. 고맙기 때문입니다.




가을이 뉘엿뉘엿 넘어가는 11월의 첫날 둘레길을 다시 찾았다. 오랜만이라고 반갑게 맞아주지는 않는 것 같지만 산은 언제나 그렇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고보면 산처럼 한결같은 것도 많지는 않다. 자연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빠르게 변화하기에 이렇게 무뚝뚝하지만 늘 제자리에 버티고 서서 나를 반기는 산은 어쩌면 내게 하나의 큰 버팀목 같은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오늘 코스는 서울을 벗어나게 된다. 서울의 북서쪽 외곽을 지나 경기도 남부에 이르는 길인데 마무리되는 지점은 대충 송추, 장흥 부근이다. 송추라면 기억하시는 분들은 전투방위가 생각나실테고 장흥은 커피 한 잔 -행간을 읽으시는 분들은 다른 것을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정도가 생각나실까? 가을도 아니고 그렇다고 겨울도 아닌 11월의 첫째날은 아침에 집을 나설 때는 제법 차가운 바람이 걱정됐지만 막상 길을 걸을 때에는 비교적 두껍게 입지 않아도 걸을 만하다 싶을 정도였다.


북한산국립공원에서 안내하는 12구간 충의길의 거리는 3.7km로 대략 1시간 45분이 소요되며 난이도는 중급 수준이고 실제로 걷게 되면 4.2km정도에 시간은 1시간 20분 정도 소요된다. 이번 구간은 시작점이 지하철 구파발역에서 버스로 제법 멀리 와야 한다. 이번 구간과 다음 구간이 서울에서 출발하는 경로로는 마지막인데 구파발역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출발점으로 이동한 다음 북한산 등반로로 향하다보면 중간에 갈림길을 만나게 된다.


사람은 습관의 동물이라던가. 몇몇 구간을 혼자 걷지 않다가 불쑥 혼자 걷게 되니 뭔가 허전한 마음이 걷는 내내 가시질 않았다. 딱히 뭐라 설명하기는 애매한 그런 느낌이랄까. 입구로 가는 중간에 은행잎 위로 서리가 내린 것인지 밤사이 내린 비가 얼은 것인지 모를 얼음 알갱이들이 제법 보였다. 아직 그 색이 바래지 않은 은행잎과 물방울과 얼음조각들이 이번 걷기의 시작을 알려주는듯 했다.


오늘은 LX5만 들고 나갔는데 집에 두고 온 카메라가 자기 생각을 해달라는 것인지 색감이 니콘 비스무리하게 나왔다. 이번 구간은 말그대로 사방이 온통 낙엽으로 가득 차 있었다. 변화를 위해서는 무언가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연의 단순한 진리를 어렵거나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이 그저 눈으로 보고 발로 밟아 느끼면 그만일 정도였다. 북한산에는 이미 단풍은 남아있지 않았다. 가장 화려한 시간이 지난 후에는 이렇게 회색빛의 세상이 오는데 단풍의 시기에 이곳을 왔다면 한 가지만 보고 다른 한 가지는 놓칠 수도 있었으니 차라리 오늘이 적당한 때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12구간 충의길은 다른 구간의 이름짓기법과는 조금 다른데 사실 이 구간에는 무언가 특징적인 것이 없다. 그래서였는지 국립공원측도 고민 끝에 '주변에 군부대가 많으니 충의길이라고 하자'라고 결심한 것처럼 보인다. 구간 자체는 중급 난이도라 하지만 실제로 걸어보면 하급 정도가 아닐까 싶은데 정말 걷기 편하고 인적도 아주 드문 편이니 데이트 하기에 꽤 어울리는(사람 나름이겠으나) 구간이다. 


길은 대부분 흙길이라 걷기에 편하고 낙엽들이 푹신푹신한 느낌도 더해주기 때문에 천천히 걸으며 저물어가는 가을을 배웅하기에 적당한 길이 아닌가 생각됐다. 지난 밤에 내린 비의 흔적들이 여전히 남아 있음에도 미끄럽지 않아 큰 어려움은 없었다. 구간을 마칠 때까지 딱 두 명과 마추쳤다. 북한산국립공원도 이 구간의 특징으로 인적이 드물다고 하고 있는데 꽤나 좋은 구간임에도 왜 사람들이 적은지는 알 길이 없다. 서울에서 이동하기에 멀다는 점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출렁다리'라고 불리는 다리인데 이런 다리가 2개인가 3개가 있다. 다리 위를 걸으면 위아래로 출렁거리는 느낌이 제법 강한데 평지로 나온 다음에도 몇걸음은 출렁거리는 느낌이 유지되는 점이 재밌다 다리 자체는 아주 튼실하게 만들어져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구간에 들어서기 전에 깜빡하고 음료수를 준비하지 않았다. 늘 들고 다니는 묘한 빗깔의 파워에이드가 오늘따라 그리웠다. 결국 종착점에 가서야 그 녀석을 만날 수 있었다.


그냥 편하게 걸으면 족했다. 이제까지 걸어온 어느 길보다 걷기가 편했다. 길도 널찍하고 크게 오르내리는 구간도 없기 때문에 주변의 바람소리와 신발 밑으로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걸으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낙엽은 영어로는 'dead leaves'라고도 하는데 그 표현에 비하면 물론 한자기는 하지만 우리말이 더 운치가 있어서 좋다. 그래도 길을 걷는 내내 뭔가 허전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든 사람은 몰라도 난 사람은 안다던가... 


이것은 버섯일까? 쓰러진 나무 위로 피어 오르는 또 다른 생명들이 묘한 부조화를 이루며 있었다. 하나의 생명이 사그라짐으로 인해 또 다른 생명이 살게 된다는 것은 한편 생각해보면 잔인해보이기도 하지만 조금 큰 틀에서 생각해보면 결국 그렇게 생명이라는 것이 이어지는 것인 셈이고 그것이 자연스러운 순리일테니 오히려 새로운 생명을 반길 일이다. 산길을 나서 일반도로로 접어들었을 때 길가에 반듯하게 누운 채 식어있는 강아지 한 마리를 보았는데 이때의 감정이 그때까지 이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온통 낙엽이다. 내년 봄을 맞이하기 위해 산은 가을부터 준비를 한다. 계절에 맞게 그저 흐르는 순리대로 받아들인다. 나무들이라 해서 싱싱한 나뭇잎을 떨구는게 내키겠냐만 그것이 주어진 순리라면 그저 묵묵히 받아들임을 늦가을의 이 산길은 내게 보여주고 있었다. 아마도 그 큰 흐름에 맞서는 것은 우리네 인간밖에 없지 않을까.


햇빛은 산의 구석구석을 비춘다. 자기가 선 자리에 볕이 들지 않는다 해도 나무들은 그저 기다릴 뿐 달리 말이 없다. 그리고 언젠가 싸늘한 바람을 뚫고 한 조각의 빛이 내려오면 그 빛에 온몸을 기대고 선다. 빛이 자기 자리에 들 때까지는 묵묵하게 스스로의 길을 갈 뿐이다. 그것이 자연이고 그것이 순리다. 그저 수동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능동적인 기다림이다.


흔히 미래에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꿈을 갖는다. 그리고 그꿈을 이루기 위해 여러가지로 노력을 한다. 미래란 현재의 다른 모습이다. 현재가 이제까지 내가 걸어온 결과이듯 말이다. 현재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과거의 내가 그런 생각과 결정을 했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와 제자리에 선다. 모든 것의 시작이자 과정이자 결과는 나로 인한다는 것. 미래에 어떤 모습의 나를 만나고 싶다면 현재의 나를 보면 된다. 구태여 점을 볼 것도 막연함에 두려워할 것도 없도 없다. 지금의 모습이 미래의 모습이니 말이다.


이제까지 둘레길을 걷다가 이런 표지판은 처음 만났는데 생태계 보호를 위해 사람들이 오고가는 것을 막아둔 것이다. 실제로 나무로 울타리가 쳐져 있어 더 이상 이길을 따라 위로 가지 못 하게 하고 있다. 우리는 쉽게 나뭇가지 하나를 꺾을 수 있지만 나무가 그렇게 자라는데 걸리는 시간은 십 수년에 이를 수도 있다. 무언가를 파괴하는 것은 순간이지만 창조하는 것은 기다림이 필요하다. 사람도 모양이 갖추어져 나오는데 10달이나 걸리지 않는가.


이 구간은 대체로 좌우가 막혀 있는 편인데 가끔 이렇게 뻥 뚫린 여백을 만나게 되면 절로 마음이 시원해진다. 길을 걷다보면 간간히 총성이 들려오는데 근처 군부대에서 훈련을 하는 경우다. 총소리를 듣기도 참 오랜만이다. 소대장 시절 연말에 그동안 쓰지 않은 총알을 모두 소모해야 한다며 분대장 몇 데리고 나가 연발로 원없이 총을 쏴야했던 날이 문득 떠올랐다. 사실 총소리는 굉장히 큰편이다.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감당하기 쉬운 수준은 아니다. 전쟁 중에 총소리, 포소리 때문에 공황이 생긴다는 말이 이해가 갈 정도로 크다.


조금 더 내려가면 일반 도로(39번 도로)와 만나게 되는데 어지간해서는 여기까지 걷고 이 구간은 종료하는 편이 낫다. 여기서부터 포장된 길을 정말 하염없이 걸어야 한다. 혹 산길에서 낭만적인 데이트라도 했다면 바로 차를 타기를 권한다. 이제까지 만들어둔 낭만적인 분위기가 완전히 깨질 수 있으니 말이다. 특히나 계절이 극단적인 여름이나 겨울에는 몸에 무리가 갈 수도 있으니 주의를 요한다.


좌우로 보이는 것은 멀리 보이는 산들과 군부대가 전부인 길이다. 차들도 그리 많이 다니지는 않아서 조금 휑하다 싶을 정도의 길인데 이제까지 나무들이 가려준 덕분에 맞지 않았던 늦가을 바람이 제법 얼굴을 때리고 지나갔다. 이 포장도로에 진입하면 경기도에 들어선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처음 시작한 지점이 서울에서도 제법 동쪽이었는데 북한산 자락이 참 넓게 그리고 멀리 뻗어있구나 싶다. 


조금 더 걸으면 예약제로 운영되는 둘레길의 마지막 구간인 우이령길로 갈 수 있는 갈림길을 만날 수 있다. 우이령길을 가는 것은 역시나 내년이나 되어야 가능하지 싶다. 이제 12구간을 마쳤으니 올해가 두달 남은 지금으로서는 굳이 무리할 이유도 없으니 말이다. 산자락에는 늘 뭔가 수상해보이는 모텔들이 있는데 소문으로 들리는 그런 이야기가 실제로 있긴 한가 보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꼭 산이라 해서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상황이기에 두드러질 뿐이다. 


이 하염없이 길기만한 길은 1km가 넘게 이어진다. 사실 이때만 해도 어느 정도 걸으면 다음 구간 안내가 나오겠지 싶어 거기까지만 가자는 생각이었다. 다음 구간은 거리가 5km가 넘기 때문에 오늘 이어서 가기는 어차피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생각은 잠시 후에 바뀌게 된다. 아무튼 발바닥이 조금 피곤해지는 길이기는 하지만 천천히 걷는다 생각하면 직선으로 난 길이기 때문에 죽 걸어갈 수는 있다. 사방에 바람막이가 없으니 옷깃은 단단히 여밀 필요가 있다.


이번 구간을 마쳐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이 표지판을 만나고나서다. 가는 방향과 수평으로 있기 때문에 어쩌면 못 보고 지나칠 수도 있는데 그런 점을 생각했는지 제법 크다. 표지판의 의미는 12구간과 13구간은 달리 분기점이 없다는 말이다. 이 지점을 시작으로 13구간이라는 말인데 앞을 보니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같은 모양의 직선 도로가 죽 이어져 있다. 더 이상 걷기는 무리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여기서 조금 더 가면 건널목이 나오고 길을 건너 34번이나 704번을 타면 구파발로 돌아갈 수 있다.

전체적으로 12구간 충의길은 뚜렷한 특징은 없는 그러나 편하게 산책하듯이 걸을 수 있는 그런 길이었다. 낙엽이 푹신한 길을 걸으며 이런저런 생각도 해 보고 제법 차가워진 바람을 느끼며 또 하나의 계절이 오고가는구나라는 상념에 젖어볼 수고 있었다. 서울에서 경기도로 이어지는 점도 이제까지 제법 많이 걸어왔구나 라는 생각을 들게 했는데 21개 중에 이제 12개가 마무리되었으니 많으면 9번의 걸음만 하면 하나의 추억의 책이 완성된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조금 멀리 남겨둘까라는 생각도 해 보는데 크게 시간이나 구간에 구애받지 않을 생각이니 내년 초쯤에는 마무리가 되지 싶다.

사전에 일정이 있던 것도 아니고 갑작스레 걷게됐는데 한 가지 생각을 결정을 짓고자 함이었다. 길이 마무리될 때까지 대충 결심을 했는데 걷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생각을 바꾸었다. 무엇인가 스스로 단정을 짓고 그것을 옳다고 자기최면을 거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 없다.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하고 무엇보다 조율을 해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일방적으로 내린 결정은 당시에는 그것이 옳다고 느낄지는 몰라도 멀리 보면 정말 소중한 것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산의 어느 이름모를 꽃처럼 주어진 자리에 충실하며 순리를 기다려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니 말이다.


Panasonic LX-5


1905년 11월 17일 정확하게는 11월 18일 새벽 1시경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이 들어 있을 무렵 광무황제(이하 고종황제)의 처절한 외침을 뒤로 하고 일본의 주한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대한제국 외부대신 박제순이 한 장의 종이에 서명을 하고 도장을 찍는다. 우리가 을사조약, 을사보호조약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을사늑약은 이렇게 황제의 승인도 없는 가운데 을사오적이라 불리는 친일파들의 손에 의해 처리되고 이 늑약을 시작으로 500년을 이어온 조선 그리고 대한제국은 종말로 치닫게 된다. 이 조약 이후 대한제국은 모든 외교권을 상실하게 되고 일본의 식민지로 빠르게 편입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이 치욕적인 역사가 만들어진 장소가 바로 이곳 덕수궁 중명전이다. 중명전은 한자로 重明殿이라 적는데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 전각'이라는 뜻이다. 중명전이 세워진 것은 1897년으로 바로 대한제국이 성립된 해기도 하다. 러시아인 사바찐에 의해 설계된 서양식 건물로 당시에는 황실도서관의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중명전이 우리 근대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제법 크다. 을사늑약이 강제되었고 고종황제에 의해 헤이그 특사가 파견된 장소이며 영친왕이 황태자로 책봉된 장소기 때문이다.

이 역사적인 건물은 대한제국이 성립된 이래 두 번이나 화재로 건물이 모두 타버리는가 하면 외국인들의 사교클럽으로 혹은 주차장 등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후 서울시가 1983년 유형문화재 제53호로 지정하고 2003년에 정동극장이 인수한 것을 2006년에 문화청이 넘겨 받아 2007년에 사적 제 124호로 덕수궁에 편입되는 과정을 겪는다. 그리고 2010년에서야 문화재청에 의해 복원이 완료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1897년 건축된 이래 100년이 지난 후에 비로소 제모습을 찾게 되었다는 말이니 한편에서는 씁쓸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일반에 개방된 것은 지난 2010년부터다.


현재의 중명전은 덕수궁 바로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원래 1910년 당시의 덕수궁은 현재보다 넓은 면적이었는데 1919년 고종황제 승하 후 여기저기 전각이 해체되면서 원래 면적의 거의 절반 크기로 줄어 들었다. 중명전 역시 당시에는 덕수궁 안에 있었지만 지금은 덕수궁과 이어지지 않고 정동극장 뒤켠의 길을 따라 들어가야 만날 수 있기 때문에 그 중요성에 비해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장소기도 하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덕수궁과 이곳을 어떻게든 이어 덕수궁을 찾는 이들이 이곳을 반드시 들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중명전은 2층 건물인데 2층은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어 올라갈 수가 없다. 아쉬운 점이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가 병력으로 고종황제를 억압하며 대신들에게 조약에 찬성하는지 여부를 물을 때 대성통곡을 하며 끝까지 반대를 하다 2층 어느 방으로 끌려간 한규설 참정대신의 흔적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8대신 중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을  제외한 이들 즉 우리가 기억하는 을사오적의 손에 을사늑약이 맺어진다. 늑약이란 한자로 勒約이라 적는데 '굴레 륵'자에 '조약 약'자를 적어 강제로 맺어진 것이라는 의미다. 최근 들어 정부 어느 부처인가에서 출판사에 중등 교과서에 적힌 을사늑약을 전부 을사조약으로 바꾸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는데 시대를 역행하는 느낌이다.


좌우로 3개의 방을 만날 수 있는데 왼쪽에 한 개 오른쪽에 두 개의 방이 있다. 왼편의 방으로 들어가면 을사늑약 체결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도록 설명을 해 둔 자료들을 만날 수 있다. 1905년 11월 17일로 알고 있던 날짜가 사실은 18일이었음을 오늘 이곳을 방문하고야 알게 되었다. 관심 부족이 무엇보다 큰 이유겠지 싶다. 그까짓 1일 정도가 무슨 상관이냐고도 할 수 있지만 을사늑약이 18일 새벽 1시가 넘어서야 체결되었다는 것은 이미 무언가 정상은 아니라는 말이다. 어느 국가간의 조약이 새벽 1시에 체결된다는 말인가


을사늑약의 복제본을 만날 수 있다. 제2조를 보면 "한국정부는 이 조약 이후 일본국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 국제적 성질을 가진 조약을 절대로 맺을 수 없다."는 문구가 적혀 있는데 이로써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일본에 온전히 넘겨주게 된다. 즉 한 국가로서의 존재 가치를 잃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중요하고도 처절한 문서가 작성된 곳이 이곳 중명전이다.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의 하야시 곤스케의 도장이 보인다. 박제순은 당시 고민하였다는 이야기도 들리지만 이후 승승장구하며 일본에 충성을 바쳐 대한제국의 마지막 영의정까지 거치면서 자손대대로 풍족하게 지냈다고 한다. 을사오적으로 이완용이 대표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에 못지 않은 인물이 또한 박제순으로 친일파 목록에서 빠지지 않고 상위권을 차지하는 인물이다.


오른쪽으로 가면 작은 방이 하나 있다. 중명전의 모형과 당시의 사진들 몇 점을 볼 수가 있는데 우리나라의 국보, 보물, 사적 등의 관리가 대체로 불만족스러운 것은 많은 분들이 공감하는 것일텐데 중명전 역시 좀 더 효과적으로 관리를 할 수는 없을까라는 아쉬움이 문을 나설 때까지 이어졌다. 개인이 관리하는 곳도 아니고 국가가 국민의 세금으로 관리하는 곳인데 말이다. 문화재청을 '부'로 승격해도 모자랄 일이다.


오른쪽의 두 번째 방은 작은 방 하나와 큰 방 하나가 이어져 있다. 가장 먼저 만나는 방에서는 을사늑약 당시의 해외 보도 자료를 만날 수 있다. 사진 오른쪽 구석에 벽난로가 보이는데 벽돌로 꼭 막아두고 있어 조금은 인위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중명전 자체를 이렇게 전시공간으로만 활용할 것이 아니라 당시의 분위기대로 복원을 하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건물 자체가 을사늑약이 체결된 곳이라는 점을 빼면 사실 무언가 당시를 돌아볼만한 "꺼리"들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을미의병(명성황후 살해사건) 이후 잠시 활동이 뜸했던 의병이 다시 일어나게 되고 애국계몽운동이 본격화된다. 사진 맨 오른쪽에는 늑약 체결 3일 후에 황성신문에 장지연이 쓴 '시일야방성대곡'이 보인다. 장지연에 대해서는 애국자냐 친일파냐 워낙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어 자세히 적을 바는 아니지만 적어도 당시만큼은 그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이어진 문으로 들어가면 늑약체결 이후 고종황제가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보내어 늑약이 무효임을 주장하고자 한 노력들을 만날 수 있다. 우리가 '헤이그 특사'라고 부르는 세 분 즉 이준, 이상설, 이위종이 그들이다. 강대국들의 형식적인 만남일 뿐이었던 당시 회의에 결국 특사들은 발조차 들여놓지 못하게 되고 이준은 헤이그에 더 머물다가 갑자기 사망하는데 그의 사망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뚜렷한 원인를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헤이그 특사가 우리 근대사에서 또 중요한 이유는 일제가 이를 빌미 삼아 고종황제를 퇴위시켰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황제를 온갖 협박으로 물러나게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지만 이것을 도운 것 역시 우리나라 사람인 이완용과 송병준이라는 점이 무엇보다 씁쓸한 일이다. 당시 송병준은 "동경에 가서 사과하던지 자결하라"고 황제를 협박했다고 한다.


헤이그 특사 세 분의 사진을 볼 수 있다. 의연하고 떳떳한 모습이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이후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 그리고 순종황제의 즉위와 소위 한일신협약이라 불리는 정미7조약 등이 일사천리로 이어지게 된다. 결국 대한제국은 이때 군대마저 해산되게 되는데 외교권에 이어 나라를 지킬 군사력마저 모두 빼앗겨 버리게 된다. 그리고 이로부터 3년 후 대한제국은 완전히 일본제국에 병합되고 만다.


참고자료: 문화재청 홈페이지, 문화유산콘텐츠지도, 덕수궁 홈페이지, 위키피디아

참고서적: 한영우, 다시 찾는 우리 역사, 경세원, 2004. 이영철, 한국사총론, 메티스, 2012.


덕수궁 중명전(重明殿)

1897년 건축 사적 제124호

주소: 서울 중구 정동길 41-4 중명전

평일 오전은 제한없이 관람할 수 있지만 오후와 주말은 선착순 예약을 해야 입장할 수 있다.

덕수궁 및 중명전 홈페이지 


중명전에 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다. 지하철 1.2호선 시청역에 내려 덕수궁 방향으로 나가 대한문을 바라보고 왼쪽길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아는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걸으면 된다. 이곳이 바로 정동인데 정동에는 우리 근대사의 흔적들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는 장소다.


가을의 정취가 한껏 느껴지는 덕수궁 돌담길이다. 연인과 함께 걸으면 헤어진다는 전설이 서린 곳이라는데 왜 그런 이야기가 나오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이 길을 따라 걸으면 좌우로 근대사의 조각들이 조금씩 흩어져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문화재청에서 배포하는 '다같이 돌자 정동한바퀴'라는 안내 소책자가 있는데 지도와 해설을 잘 담아놓고 있으니 덕수궁이나 중명전에서 한 부 얻도록 하자.


오른쪽에 정동극장이 보인다. 정동 자체가 워낙 이런 시설들이 넘쳐 나는 공간이다보니 글 하나에 모두 소개하기란 벅찬 일이다. 정동의 우리 유산들은 천천히 한곳씩 소개해 나갈 생각이다. 이 글에서는 이런 곳이 있구나 정도로만 그치기로 한다.


정동극장을 지나 바로 오른쪽으로 난 작은 샛길에 중명전으로 가는 안내 푯말을 볼 수 있다. 평소에는 한 번도 눈에 띄지 않은 것인데 막상 찾아간다고 생각하고 가니 엄청나게 크게 보였다. 이길을 지나시는 분들은 눈 여겨 보셨다가 한 번 들러보시기 바란다.


길을 따라 약간만 올라가면 중명전 입구를 만날 수 있다. 생각보다 외진 데 있고 생각보다 초라하다는 생각은 지울 길이 없지만 그래도 남아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된다. 

이곳이 바로 "대한제국의 운명이 갈린 곳 - 덕수궁 중명전"이다.


Nikon D700, AF Nikkor 35mm f2D & Panasonic LX5



둘레길도 어느덧 중반이다. 처음 1구간을 걸을 때 막연하게 '완주를 해보아야겠다'고 생각만 했었는데 어느새 11구간이다. 시작이 절반이라는데 절반을 왔으니 끝까지 걷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으리라. 오늘은 어느 여름날처럼 제법 한낮의 햇살이 따가왔다. 처음 걷기로 한 구간은 9,10구간이었지만 한 구간 더 나아가 11구간까지 걷기로 했다.

9구간은 이전 8구간의 종료지점에서 바로 시작하기 때문에 8구간에서부터 이어서 걸은 경우가 아니라면 어느 정도 거리 손실이 있게 된다. 오늘은 9구간의 시작지점을 북한산국립공원의 안내에 따라 잡았기 때문에 생각보다 구간의 종료가 빨랐는데 집에 돌아와서야 이런 사실을 알았으니 이점은 유의하시는 게 좋을 듯하다. 

9,10,11구간은 11구간만 약간 난이도가 있고 9,10구간은 무난한 난이도여서 전체 구간을 한번에 걷는 것도 크게 부담스럽지 않다. 위의 표를 보면 마지막 효자길에서 고도가 급격하게 높아지는데 생각만큼 힘들지는 않으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좀 더 자세한 이동경로는 이곳을 참조하시면 되겠다.

9,10,11구간을 전부 완주할 경우 전체 소요거리(버스정류장 이동거리 포함)는 7.91km고 성인 남녀 기준(조금 느긋한 걸음)으로 3시간 10분 가량 소요된다. 시작점은 3호선 연신내역에 내린 다음 3번 출구로 나가 그대로 직진을 해서 30여 미터쯤 걸어가면 버스정류장이 있다. 여기서 7211번을 타면 된다. 중앙 차로에는 이 버스가 없으니 주의하자.


전형적인 가을의 파란색이 두드러졌던 하루였다. 진관사(하나고) 입구 버스정류장에 내려 조금 걸어가면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길목에서 마실길 구간임을 알려 주는 이정표와 만날 수 있다. 멀리 북한산이 보인다. 마음은 산 정상에 있지만 몸은 둘레길이다. 9구간 정도 오게 되면 서울의 서쪽으로 제법 많이 이동한 셈이다. 북한산을 아래에서부터 왼쪽으로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는 코스라고 생각하면 된다.


북한산둘레길은 각 구간별로 주요 지점을 이정표에 기록하고 있는데 9구간은 효자동을 대표 이름으로 삼고 있다. 휴일이어서 그런지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 구간을 오고 가는 모습이었는데 이쪽에서 북한산 등반로가 이어져 있어 그렇다고 한다. 사실 오늘 연신내역에서 마주 친 등산객들의 숫자가 내가 평생 만나본 등산객 숫자보다 많은 것 같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다. 한편 생각해보면 내가 그만큼 산을 자주 찾지 않았다는 말이 되기도 하지만...


분명 9구간의 진입 통로는 8구간의 종료점에 표기 되어 있지만 이곳에서 한 번 더 만날 수 있다. 여기서부터 생각을 하면 실제로 걷는 9구간의 거리는 매우 짧은 편이다. 구간 이름인 마실길답게 정말 가벼운 동네 산책하는 수준의 길이 이어져 있는데 좌우 둘러보고 오고가는 사람들과 마주치다 보면 어느새 구간이 종료된다.


팔자 편하게 늘어져 있다는 표현이 어울리게 잘 자는 녀석이다. 누가 와서 업어가도 모를 지경이다.(물론 시도하려는 분은 없겠지만) 그늘이 진 것이 꼭 이불을 덥고 있는 것 같은 모양새인데 아직은 오전이라 햇살이 그렇게 따갑지는 않아 편히 잘 수 있나 보다 싶었다. 늘 드는 생각이지만 개발을 보면 꼭 잡아보고 싶다. 오래 전 기르던 강아지 생각도 나고... 동물을 기른다면 역시 개를 길러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 번 해 본다.


마실길은 정말 편하게 걸을 수 있다. 휴일이라 오고가는 사람들에 잠깐잠깐 지체되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오고가는 모습도 나름 볼거리가 되는 셈이다. 가끔 다른 분들의 사진을 찍어 드리기도 하고 사진에 찍히기도 하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걸으면 된다. 휴일에 둘레길을 걷기 위해 내가 나온 것처럼 다른 이들도 그런 생각으로 나온 것인데 '왜 사람이 이리 많아?'라고 생각하고 불평을 할 일은 아닌 것이다. 다른 이들도 나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할테니 말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조금 걷다보니 이미 9구간은 종료되어 있었다. 10구간 내시묘역길 구간이다. 이 지점을 경계로 9-10구간이 갈리는데 조금 더 진행하면 10구간 입구를 알리는 문을 만나게 되지만 사실상 이곳이 분기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근처에 수방사 교육대가 있어 지도에 상세하게 표시되지는 않는 지점이기도 하다. 


내시묘역길 구간을 담은 블로그에 한결같이 소개되는 비석이다. 경천군이라는 이에게 나라에서 하사한 토지니 소나무를 베기 위해 들어가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문이라고 보면 된다. 세월이 흐르면 사람은 간 곳이 없고 그 흔적만 남아 그 사람을 기억하게 된다. 100년도 못 살면서 1,000년의 근심으로 사는 것이 사람이라 한다. 나는 지금 100년의 근심을 하고 있을까 1,000년의 근심을 하고 있을까.. 근심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나은 일이지 싶다. 그저 주어진 순간에 최선을 다할 뿐... 


10구간은 전반적으로 길이 평탄하고 걷기에 큰 부담이 없는 그러면서도 한적하고 고요한 느낌이 강한 구간이다. 물론 나들이 인파들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 속에서도 '묘역'이라는 이름에서 오는 왠지 모를 적막함이랄까..그런 것이 느껴졌다. 실제 내시들의 묘역은 사유지 안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이 구간을 걸으면서 만나기는 어려웠다.


하늘이 정말 '가을이구나'싶은 날이었다. 혼자서 길을 걷는 것도 좋지만 같은 목적지를 공유하는 누군가와 걷는 것은 또 다른 느낌과 의미가 있다. 그 시간이 짧건 혹은 길건 한 방향을 바라보고 걸어간다는 것이 참 소중하다. 그 길을 끝까지 함께 걷건 혹은 중간에 다른 길로 멀어져 각자의 길을 가게 되건 적어도 함께 한 시간만큼은 좋은 기억으로 남게 되는 것이니 살아가는 동안 그런 기억들을 모아둔다는 것 아니 모을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기억을 새긴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삶의 전부일지도 모르겠다. 만나는 사람들, 하는 일들, 나를 둘러 싼 모든 것들이 하루하루 매시간시간 하나둘 쌓여가고 그것이 나의 역사가 되고 결국은 그것이 나의 삶이 된다. 과거를 돌아볼 필요도 없고 미래를 바라볼 필요도 없다. 그저 지금이 최선이다. 현재에 만든 기억이 과거가 되고 또한 미래가 된다. 지나치게 과거에 얽매이고 지나치게 미래를 갈구했던 시간들 속에서 정작 현재를 잃고 살지는 않았는지 반성하게 된다. 현실적이라는 건 현재에 충실하라는 말이다.


살아가는 이야기, 살아온 이야기 속에 어느덧 10구간도 종료. 전체적으로 9구간과 10구간은 난이도가 거의 없고 평지를 걷는 수준이어서 손쉽게 걸을 수 있다. 그만큼 속도도 빠르다. 11구간 효자길도 하급 난이도의 구간인데 거리는 내시묘역길보다 짧지만 체감상으로는 중하 정도의 난이도랄까. 이전 구간보다는 약간 높낮이도 있고 산길도 있어 조금 시간이 걸리는 구간이다.


처음 이 구간에 접어들면서 마주치는 황당함인데 도로 옆으로 난 길이 끝없이 이어져 있다. 이쪽편의 북한산 자락이 험한 편이어서 산으로 길을 내지 못 하고 할 수 없이 돌려돌려 길을 낸 것이라는 말을 듣고 이해는 갔지만 이건 좀..이라는 생각이 든다. 둘레길도 초반부는 제법 각종 시설이 원칙대로 잘 구비되어 있지만 이 정도쯤 오게 되면 여기저기 부실한 부분들이 눈에 띄는데 '어쩔 수 없나..'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앞으로는 개선이 되겠지라고 기대를 해 본다. 한여름이었다면 이곳을 걷기는 제법 힘들었겠지 싶다.


어느 정도 걸어가면 이 이정표를 만날 수 있는데 사실 여기서부터 제대로 된 구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제법 산길이고 밤골을 지나게 되면서 정말 많은 밤들을(물론 거의 대부분 알맹이는 없는) 볼 수 있다. 가끔 머리 위로 밤송이가 떨어지기도 하니 모자 정도는 챙기도록 하면 좋겠다. 이쪽으로 올라가면 북한산의 등반 코스 중의 하나인 백운대 코스를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전 구간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효자의 길은 멀고도 험한 법인가 제법 산길이다. 일반 도로를 걷다 흙길을 걸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발 밑으로 구르는 돌부스러기나 흙들의 느낌이 포근하다. 맨발로도 걸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흙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 속에 풀들이 나무들이 돌들이 그렇게 뒤로뒤로 스쳐지나간다.


오랜만에 등장하는 계단길이다. 사실 계단은 산행에서 그리 반가운 존재는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하나의 이정표가 될 수 있다. 사람의 손길이 닿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니 많이 지쳤다면 이 계단을 보고 힘을 얻을 수도 있다. 인공물이 하나 없는 산길은 가끔은 막연한 피로를 불러올 때도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똑딱이 카메라는 색감을 잡기가 쉽지가 않다. 내 SLR의 경우는 철저하게 내 세팅으로 되어 있어 잘 나오건 안 나오건 그려려니 하는데 이 녀석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이런저런 코치를 받아가며 색감을 바꾸어 봐도 영 마음에 들지는 않는데.. 그렇다고 기계를 탓할 노릇은 또 아니니...


계곡을 감싸고 도는 다리의 느낌이 또한 포근하다. 날은 덥고 땀은 흐르지만 이런 풍경은 잔잔한 감동을 준다. 사계절의 풍경이 제각기 주는 느낌은 다르겠지만 역시 가을과 겨울의 풍경이 내게는 마음에 와 닿는다. 머지않아 겨울이고 백색으로 물든 계절이 오면 이곳은 또 어떤 느낌과 생각을 던져줄까 미리 생각을 해 본다. 그래도 올해는 둘레길을 걸으며 여름과 초가을 사진이 많아져서 흐뭇하기도 하다. 사진에 늘 겨울만 나오면 그 또한 식상한 일이다.


오늘의 걷기가 거의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다. 조금 더 진행하면 밤골탐방지원센터를 만나게 되고 그곳에서 백운대와 다음 구간으로 그리고 하산 코스로 길이 나뉘게 된다. 갈림길이란 늘 사람에게 선택을 요구하는데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문제다. 온전히 자신의 결심만으로 하나의 길을 택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허나 내가 내린 결정이 능동적이건 수동적이건 결국 그 결정에 책임을 져야 하는 건 자신이다. 가끔 이 단순한 진리를 잊게 되는데 그럴 경우 꼭 문제가 생기곤 한다. 시작이 '나'라면 그 끝도 '내'가 내야 한다.


12구간 충의길을 알리는 문을 만날 수 있다. 충의길은 중급 난이도로 이제까지 걸어온 거리와 시간을 생각하면 이어서 가기는 쉽지 않다. 이 구간은 다음 주 정도에 혼자 와 볼 생각이다. 이곳을 뒤로 하고 내려 와 길을 건너 버스를 타면 연신내역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 내려가는 길은 제법 긴 편인데 휴일일 경우는 오고가는 차들이 많으니 주의하도록 하자. 연신내역으로 이동해 조금은 늦은 점심을 먹고 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시간이 정말 어찌가는 줄도 모르게 빨리 갔다. 

어떤 이는 잠깐 이야기를 나누어도 마치 몇 시간을 이야기를 한 것처럼 피로한가 하면 어떤 이는 몇 시간을 이야기해도 잠깐 이야기 한 것처럼 신선하다. 만나자마자 곧 헤어지고 싶어지는 이가 있는가하면 헤어짐이 아쉬워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는 이가 있다. 살아가는 동안 마주치는 수 많은 사람들 중에 후자와 같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어느 새 이만큼을 왔다. 거리상으로는 절반을 더 걸어온 셈이다. 막막함이 구체화되고 현실이 되니 이루어지는 셈이다. 거북이 걸음이고 황소걸음이지만 목표를 가지고 한 걸음씩 나아가다보면 아예 시작도 안 한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일단 시작하자. 일단 밖으로 나가 걸어보자. 한 걸음.. 그 시작이 절반이고 그 절반이 전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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