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10호는 '한양도성'이다. 내가 아는 한도에서 가장 큰 사적이 아닐까 싶은데 서울을 원의 형태로 빙 둘러서 하나의 성을 쌓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이 한양도성은 서울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존재인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일단 오랜 전쟁과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성곽이 대부분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한양도성을 둘러싼 8개의 문은 4대문과 4소문으로 나뉘는데 동쪽의 흥인지문(동대문), 서쪽의 돈의문(서대문), 남쪽의 숭례문(남대문), 북쪽의 숙정문(북대문)이 4대문이다. 이 중에 제대로 남아있는 것은 동대문과 숙정문이다. 서대문은 일제 강점기 때 철거되어 아직 복원이 되지 않았고 한양의 관문인 숭례문은 이전의 화재로 아직 복원이 완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4대문 중 흥인지문은 보물 1호, 숭례문은 국보 1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이 4대문을 중심으로 북동쪽에 혜화문(동소문), 북서쪽에 창의문(자하문), 남동쪽에 광희문(수구문), 남서쪽에 소의문(서소문)이 있는데 혜화문은 일제가 철거한 후 복원이 되지 않았고 서소문 역시 일제 때 철거되었기 때문에 현재 남아 있는 것은 광희문과 창의문이다. 혜화문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뉘지만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다. 아무튼 이 8개의 문을 빙 둘러서 쳐진 성곽이 사적 10호인 한양도성으로 오늘 찾은 곳은 한양의 북서 관문인 창의문(자하문)이다.


멀리 창의문이 보인다. 창의문은 한양의 북서쪽에 있는 문이지만 한양의 실제 북문인 숙정문이 거의 열린 적이 없어 창의문이 북문의 역할을 대신했다고 한다. 숙정문은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 문이 열리면 한양의 풍기가 문란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늘 닫아 두었다고 한다. 현재 숙정문은 활짝 열려 있는 상태인데 서울의 문란함이 증가되었는지는 알길이 없다.


창의문(彰義門)은 자하문(紫霞門)이라는 애칭으로 더 많이 불렸다고 하는데 보라색 노을을 의미하는 자하가 이 문을 중심으로 많이 보여 그렇게 불렸다고 한다. 창의문은 4소문 중에 가장 보존도가 높은 문으로 1396년 태조 당시 축조된 상태가 거의 그대로 보존되고 있으며 1958년 완전하게 보수를 마쳐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위의 그림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인왕산에서 북악산에 이르기 위해서는 창의문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조선 시대에는 이 문의 이용이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창의문의 특징 중의 하나가 목계 즉 나무로 만든 닭인데 추녀에 닭을 매달아두었다는 이야기, 망루에 닭을 올려두었다는 이야기 등 이런 저런 말이 많은데 직접 가서 보니 저게 닭인가 싶어 한참을 바라봐야했다. 창의문은 다른 문들과 달리 항상 열려 있어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 있는 문이다. 다른 문들이 닫혀 있거나 접근이 어려운데 반해 이문만큼은 가장 잘 보존이 되고 있음에도 늘 사람들에게 길을 열어주고 있었다.


창의문을 시점으로 서울성곽길 코스가 하나 있는데 사진에서 오른쪽에 입구가 있다. 북악산 서울성곽길로 여기는 신분증을 내고 서류를 작성해야 입장을 할 수 있는데 오늘은 그 코스를 따라가지는 않았다. 서울성곽길도 전체적으로 한번 둘러볼만한데 북한산둘레길의 완주가 끝나면 성곽길을 주제로 글을 써볼까 싶기도 하다. 


문의 보존이 아주 잘 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문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몇백 년의 세월이 지난 것을 생각해보면 이문을 통해 얼마나 많은 우리네 조상들의 삶의 희로애락이 교차되었을까 싶어 새삼 느낌이 새롭다. 겨울 햇살에 살짝 몸을 녹이고 있는 작은 문을 바라본다. 겨울이 아닌 다른 계절에 이곳을 찾았다면 좀 더 생동감 있는 모습이지 않을까 싶지만 역시 겨울에 제 빛을 낼 수 있어야 다른 계절에도 그 빛이 강해지는 법. 


단청의 색은 언제 봐도 참 알록달록한 것이 사람 마음을 즐겁게 한다. 이렇게 보니 닭머리(주: 사실 동물은 머리라고 쓰지 않지만 언어순화를 위해 머리로 적습니다)도 좀 더 잘 보인다. 윗부분은 바람 등의 영향을 적게 받아 색이 온전히 남아 있지만 아래 부분은 색이 조금씩 바래고 있는데 그래도 이 정도로 남아있다는 것이 다행이다 싶다. 


천장을 보면 참 잘 짜여진 구조로 지어졌구나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세월을 지탱하는 힘은 이 뼈대에 있다. 밖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안으로 튼튼하게 지어진 틀들이 모진 세파를 이겨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오밀조밀한 나무들과 그 틈 사이로 오래된 역사가 숨쉬는 느낌이 든다. 오른쪽에 뭔가 현판이 하나 보이는데 여기에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제법 넓어 보이지만 광각렌즈의 효과다. 중앙 부분은 보존 차원에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두고 있다. 가끔 보면 이런 걸 그냥 무시하고 들어가는 분들이 있는데 잠시의 자기 만족을 위해 역사를 후세에 물려주는 일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하지 말라고 하면 하고 싶어지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지만 그 본성때문에 사라진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인조반정 당시 반정군은 이 창의문을 뚫고 창덕궁으로 진격했다고 하니 이 문에 서린 피의 역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남아 주위를 맴돌고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새삼스러운 순간이다. 아무튼 영조는 그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창의문을 보수하고 저 현판을 매달아 두었다고 한다.


당시 반정공신들의 이름이라는데 가까이 갈 수가 없어 망원으로 당겨보았지만 120mm로는 아주 약간의 글자만 읽을 수 있을 뿐이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데 정말 저렇게 이름을 남겨 두고 있다. 문득 이름을 남긴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일까라는 생각이 든다. 이름이라는 것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말해줄 수 있을까. 하지만 한 사람 혹은 한 존재의 내면을 속속들이 알 수 없는 우리로서는 눈에 보이는 것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셈이니 역사에 적힌 이름이나 글자들이 진실을 반영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참고자료: 한국관광공사 홈페이지,  위키피디아, 다음 백과사전, 서울성곽 홈페이지 등


한양도성 창의문 (彰義門)

1396년 건축 사적 제10호

주소: 서울 종로구 부암동

북악산 서울 성곽 홈페이지 



창의문에 가는 길은 도보로는 약간 멀다. 경복궁 역에서 4번 출구로 나온 다음 경북궁 돌담길을 끼고 그대로 직진하면 되는데 대략 2km정도의 거리로 천천히 걸으면 30분 정도 소요되므로 경복궁 역에서 버스를 타고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서 내리는 교통편을 이용해도 좋다. 


창의문으로 가는 길에서 만날 수 있는 최규식 경무관의 동상이다. 121사태 당시 종로경찰서장으로 근무하다가 김신조 일당의 총격으로 사망한 분이다.


창의문 입구에서 만날 수있는 청계천 발원지를 알리는 표지다. 예전에 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에 가본 적도 있지만 정말 강의 시작은 미미하지만 그끝은 창대한 것같다. 발원지 표지만 보고 약수터를 직접 보지 못한 것은 아쉬운 점이었지만 다음 번 걸음으로 이 또한 미뤄둔다.

걷는다는 것은 사람에게 참 많은 것을 준다. 무엇보다 세상을 이제까지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르게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점이 큰 것이라 생각된다. 틀 안에 갇혀 있어서는 변화를 줄 수 없다. 물론 그 변화의 끝에 행운이 함께 할지 아닐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문밖으로 나가 세상과 마주하지 않으면 삶 자체가 경직될 가능성이 많다. 올해 들어 이곳저곳을 온전히 내 발 끝으로 걸어보면서 드는 생각들은 이런 것들이다.

올해의 마지막 산행을 준비해본다. 어디를 가야할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지만 그날이 되면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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