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이방인

알베르 까뮈 저/김화영 역
책세상 | 1999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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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은 페스트에 이어 읽은 책이다. 이책은 페스트와는 문체나 분위기가 많이 달라지는데 이런 면에서 페스트를 먼저 읽고 이방인을 읽게 되면 페스트를 통해 알게 된 까뮈의 이미지가 조금은 달라지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방인은 페스트에 비해 훨씬 통속적이고 어쩌면 일반적인 주제를 담고 있다. 물론 총을 쏘게 되는 장면은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지만 총 대신에 주먹을 날렸다고 생각하면 보다 현실적이고 있음직한 스토리 전개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뫼르소는 전형적인 도시인이다. 그렇고 그런 직장 생활과 그렇고 그런 하루하루, 연애와 주변 인물들..거의 모든 장면들과 사람들이 오늘의 우리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것은 한편 그만큼 우리도 뫼르소와 같은 무기력에 빠질 수도 있고 그와 같은 돌발 행동을 할 수도 있음을 방증하는 것은 아닐까..

마지막 장면의 조금은 극단적인 진행이 거슬리는 듯한 느낌도 있지만 까뮈는 이런 극적인 구성을 통해 인생은 또한 그렇고 그런 것이다..라는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마치 세상 전체를 적으로 돌린 듯한 그래서 세상 전체를 냉소적이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받아들여 버린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본의와는 다를 지라도(미필적인 고의는 분명히 있지만) 세상이 그를 그렇게 단정짓고 바라보고 다루는 것에도 별 다른 저항을 하지 않는다. 아니 저항을 해야겠다는 의욕조차 그에게는 없는지도 모르겠다.

이 또한 우리의 모습이다. 일상에 익숙해져 일상에 찌들어 스스로의 존재감이나 의미를 찾기보다 그저 주어진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 아닌 살아지는 것...우리네의 모습이다. 이방인이라는 제목.. 마치 뫼르소가 세상의 이방인인 것처럼 여길 지도 모르겠지만 결국은 우리 모두가 이방인인 셈이다. 그러나 과연 누구로부터 이방인인 것일까..

우리는 누구 하나 세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세상과 어울리지 못 하는 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이방인은 아닐까.. 세상과 세상이 서로를 낯선 이방인처럼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문제는 우리가 그런 사실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어 스스로가 그런 이방인인채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조차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책을 읽는 내내 불편한 마음을 다스릴 수가 없었다. 뫼르소가 나와는 다른 이방인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 아니라 이방인으로 취급받고 있는 그가 바로 나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이고 우리 모두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나 스스로도 나 자신에게 이방인처럼 비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도서]뇌과학 여행자

김종성 저
사이언스북스 | 2011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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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더 말랑했더라면 아주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저 사람은 머릿속이 어떻게 생겼길래?" 라는 이야기를 우리는 일상에서도 쉽게 한다. 누군가 기발한 생각을 하거나 혹은 아주 황당한 생각을 할 때 주로 이런 말을 하는데 무언가 우리와 다른 "천재"들을 보면 그네들의 머릿속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아인슈타인의 뇌가 현재 보존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아마도 역사상 수 많은 천재 혹은 악당(?)들의 뇌가 지금도 세계 어딘가에서 보존되어 연구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책은 그런 면에서 일단 기발하다. 신경과 전문의라는 직업을 가진 그러니까 '뇌'를 다루는 것이 직업인 저자가 천재들의 뇌를 분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가 그들의 실제 '뇌'를 해부하는 것은 아니다.
 
뇌의 질환을 가지고 있던 천재들을 다루고 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여러 명의 천재들의 뇌질환을 살펴보면서 어떤 증상이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추적하고 있다. 평소에는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내용임에 틀림이 없다.
 
특히 내 관심을 끈 것은 도스토예프스키의 간질 부분이었다. 그의 간질은 꽤나 특이한 증상을 보였는데 일종의 '환희'증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는 고통이 더 많았지만 가끔 찾아오는 그 '환희'가 그에게 있어서는 일상의 우울과 고통을 이겨내는 한 자극제로도 활용된 모양이다. 이외에도 편두통에 시달린 아폴리네르, 수면장애에 빠진 세르반테스라던가 파킨슨 병이 있었던 히틀러도 흥미 있는 부분이었다.
 
책 한 권에 담고 싶은 이야기는 많고 지면은 한정되다 보니 어떤 인물의 경우는 '그래서 어떤 것이 결론인가?'라는 의문은 여전히 남았는데 차라리 몇 명의 인물만 집중적으로 다루었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지만 상업성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출판의 특성 상 그 점은 다음 저서를 기대해본다.
 
역사상 유명한 인물들의 질환 특히 뇌 관련 질환들을 그 인물들의 작품들과 연관 지어 다루고 있다는 점은 책 속에 쉽게 빠지게 하는 유쾌한 자극이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저자 나름대로 최대한 전문적인 용어를 줄이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이지만 가끔 그런 의식을 잊었는지 비전문가가 읽기에는 어려운 단어와 설명들이 군데군데 드러났고 조금은 현학적인 표현들이 등장하는 점도 아쉬웠다.
 
물론 다방면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점이나 신경과 전문의로서 나름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굳이 독자들에게 자랑 아닌 자랑을 하는 듯한 모습은 책 전체의 흐름을 깨는 요소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이책은 재미있다. 주제도 재미있고 저자가 글을 풀어가는 방식도 재미있다. 우리가 이제까지 단편적으로 접했던(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던) 인물들의 또 다른 면을 알 수있게 된 점은 상당히 큰 수확이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위인들이 뇌질환을 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니 오해는 하지 말기를..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마키아벨리에 대해 갖고 있는 선입견은 "피도 눈물도 없는 냉정한 인간" 정도가 아닐까.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비도덕적인 일도 서슴지 않는 냉혈한이라는 시각도 있다. 나 역시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군주론을 직접 읽기 전에는 사실 이책을 굳이 읽을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판단이라는 것은 자신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남들의 이야기만 듣고 지레 손사래를 쳐 버린다면 그것처럼 위험천만한 생각도 없지 않을까 싶다. 마치 인터넷에서 영화평을 보고 나서 "아, 난 이 영화는 안 봐야겠어" 라거나 "이렇게 재미있는 영화가 있나!"라는 반응을 보이는 것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남들의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남들의 이야기다. 즉 하나의 의견으로 생각해야지 타인의 의견이 무조건 맞는 것처럼(비록 그가 저명한 사람일지라도) 생각하고 자신의 경험을 사전에 차단해버리는 것은 스스로 쌓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내치는 꼴이 된다.

서론이 길었는데 아무튼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16세기라는 시대적 관점에서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건 모든 고전 -굳이 고전이 아니더라도 소설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에 있어 공통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군주론이 집필된 시점은 16세기 이탈리아다. 르네상스라고도 하는 낭만적인 이름으로도 불리는 시기였지만 정치적으로는 마치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혼란기였다.

중국의 전국시대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통일한 것이 한비자의 법가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당시 이탈리아 도시 국가의 어지러운 시기에 등장한 군주론을 현대적 시각에서 무조건적으로 폄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된다. 역자도 적고 있듯이 "정치가 더러운 것임은 모두가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 현재의 우리도 누군가 정치를 한다면 어느 정도 뇌물도 받겠거니 생각하고 비리도 있겠거니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어느 정도는 수긍하고 들어간다. 모순이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역자는 "단기적 전망에서 비윤리적인 것일뿐 장기적 전망으로 보면 결국 윤리적인 것보다 더 윤리적이라는 마키아벨리의 주장은 우리가 속으로는 그럴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는 것을 있는 것을 너무도 적나라하게 드러냈기에 불편하다"고 이야기한다. 바로 이점이 군주론의 핵심이 아닐까 싶다. 

국가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서는 어떤 수단이나 방법도 허용된다는 국가지상주의의 정치 이념인 마키아벨리즘. 단기적으로 보기에는 비도덕적이고 잔인해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국가의 안정과 평화를 이끌어낸다는 그의 사상이 비단 당시의 이탈리아에서만 타당한 이론이라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이미 현대의 우리도 이와 같은 정치 논리를 수 없이 보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무조건적으로 그의 주장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마키아벨리즘 역시 하나의 주장이고 하나의 사상일 뿐이다. 그의 사상에 동의하고 실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주장이나 사상에 대해 비판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책을 읽고 그를 비난하건 추종하건 그 역시 독자의 자유다. 

펭귄클래식에서 출간된 이책은 상당히 가벼워 들고 다니면서 읽기에 적당하다. 물론 주제 자체야 지하철의 흔들리는 차내에서 고민하기에는 부적합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번역도 자연스러워(군데군데 오타가 있기는 하다) 마키아벨리의 주장을 이해하기에 쉽게 되어 있다. 

 

[도서]수레바퀴 아래서

헤르만 헤세 저/김이섭 역
민음사 | 2001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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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의 소설은 뭐랄까..지나치게 내게 많은 불편함을 준다. 물론 다른 이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겠지만 어린 시절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헤세를 접할 때마다 '아, 어떻게 이렇게 글을 쓸 수 있을까..이건 바로 나의 이야기고 나는 이것을 극복하지 못했어'라는 생각이 점점 더 짙어져 갔기 때문이다. 물론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은 데미안이었고 데미안을 이은 싯다르타를 통해 나는 내 삶의 구원점을 찾을 수 있었다.

반면 수레바퀴 아래서, 크눌프,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삶을 마주 하는데 있어 핵심적인 부분은 아니지만(그럼에도 여전히 중요한) 한 번쯤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들을 너무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사실 그런 이유로 이 작품들을 읽기가 수월치 않다. 데미안과 싯다르타가 주는 무릎을 탁 치게 하는 그런 느낌이 아닌 내 안에 숨겨진 고통 혹은 욕망 그런 것들과 피할 수 없는 만남을 가져야하기 때문이다. 

데미안과 싯다르타를 통해 방향성을 찾을 수 있었다면 수레바퀴 아래서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와 같은 작품에서는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나..'라는 또 하나의 부담을 내 어깨에 지워야했기 때문이다. 즉 단지 그것들과 마주친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바로 현재의 내 삶 안에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해결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 아닌 의무감이 든다는데 있다. 

수레바퀴 아래서...헤세의 자전적 소설이라 하지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의 자전적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주변의 기대와 그것에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껴보지 않은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어린 시절 이책의 결말은 내게 그렇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결국 한스 기벤라트는 도피를 한 것인가..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이책을 다시 접할 때 내 생각은 달랐다. 한스는 자살을 한 것이 아니라 타살을 당한 것이라고... 소설 속의 한스는 물리적인 죽음을 맞았지만 읽기에 따라서는 사회적인 죽음을 당한 것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미 그가 세상의 주류(?)로부터 떨어져나와 시골의 어느 구석엔가로 자신의 육체가 옮겨졌을 때 그는 이미 죽음을 겪었는지도 모른다. 익숙하고 당연시되야할 것들로부터의 괴리 그리고 격리는 그가 '그'로서 살아갈 수 있는 이유를 없애버린 것이라 생각이 든다. 마음은 이전의 장소에 그대로 남아있는데 현실의 육체는 그곳으로부터 떨어져 있다. 고교시절 어느 수업 시간엔가 배운 소속집단과 준거집단의 차이가 아닐가..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정신과 육체가 분열되어 버린 그런 모습이 아니었을까...이런 생각이 이책을 성장소설로 단정하기에 어려운 부분이다. 아마도 이점은 '호밀밭의 파수꾼'에도 별로 다르지 않게 적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책을 읽음에 있어서 지나치게 외부의 서평이나 리뷰에 의존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도 이런 이유에서다.

막연히 한스가 자살을 했다. 외부의 압박을 이기지 못해 결국 그런 선택을 했다..라고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의지가 부족한 그가 결국은 도피처로 자살을 택했다고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는 자살이 아닌 타살을 당했다고 관점을 바꾸어 보면 이책의 또 다른 면과 만나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해석과 실천은 읽는 이의 몫이다.

 

[도서]꽃들에게 희망을

트리나 폴러스 저/김석희 역
시공사 | 2006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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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마음의 해탈..그것을 위한 여정..




판도라의 상자..맨 밑바닥에 희망이 남아있기에 사람들은 평생을 희망을 위해 힘든 세상을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견도 있다. 차라리 희망이 없다면 굳이 이 어려운 세상을 살아갈 이유가 없을텐데 그 이루어지지 않을지도 모르는 막연한 희망때문에 막말로 죽지 못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모순...

오래 전의 나는 이러한 논리에 제법 공감을 해 세상은 무언가에 의해 마지못해 살아가도록 조작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 그 조작자들은 자본가들이며 권력을 가진 이들이며 내 손에 닿을 수 없고 내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어느날인가 이책이 내 손에 쥐어졌다. 책의 제목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그 내용은 너무나 많이 알려져 있어 굳이 이책을 읽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그런 내용을 담고 있는 책..그책이 바로 "꽃들에게 희망을"이다. 줄거리는 새삼스레 적을 필요도 없으리라..

결국 우리네 이야기고 우리네 삶의 이야기다. 성공하기 위해 살아가는 우리네 모습. 과연 성공이란 무엇일까..처음 가볍게 이책을 읽으면 날아오른다는 것이 마치 성공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는 생각을 갖지 쉽다. 그래서 조금 냉소적인 시각에서는 결국 남을 밟고 올라 성공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좋은 것이냐는 생각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책을 덮고 현재를 살아가는 내 모습을 돌아보고 어느날인가 이책을 다시 읽을 때 실상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 내용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다른 애벌레들의 머리 위로 발을 올려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그저 약육강식의 사회라고 보지말고 하루하루의 스스로의 삶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라는 생각..

날아오른다는 것. 애벌레의 추한 몰골을 벗고 화려한 나비가 되어 하늘로 날아오른다는 것이 개천에서 용이 나는 모습이 아닌 나 스스로의 추한 생각들과 이기심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너그럽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보았다. 귀에 걸면 귀걸이식의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해석은 자기하기 나름이 아닌가..

그리고 그 해석이 자신에게 있어 긍정적인 방향으로 간다면 원래의 저자의 의도가 어쨌건 조금은 달라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세상을 살아가는 오답이 없듯 세상을 살아가는 정답 또한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다시 이책을 읽고 느낀 것은 외적인 변화가 아닌 내면의 변화였다. 내면의 변화라는 것은 눈에 확 보이는 것이 아니기에 저자는 화려한 색상의 나비를 빗대어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무튼..서지부분에서 밝히고 있는 것과는 달리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도 이책은 적당한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된다. 아니 오히려 절망에 빠져 있기에..(많은 부분의 절망이라는 것은 내면적인 원인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기에...) 이책이 그 절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해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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