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수레바퀴 아래서

헤르만 헤세 저/김이섭 역
민음사 | 2001년 08월

내용     편집/구성     



헤세의 소설은 뭐랄까..지나치게 내게 많은 불편함을 준다. 물론 다른 이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겠지만 어린 시절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헤세를 접할 때마다 '아, 어떻게 이렇게 글을 쓸 수 있을까..이건 바로 나의 이야기고 나는 이것을 극복하지 못했어'라는 생각이 점점 더 짙어져 갔기 때문이다. 물론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은 데미안이었고 데미안을 이은 싯다르타를 통해 나는 내 삶의 구원점을 찾을 수 있었다.

반면 수레바퀴 아래서, 크눌프,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삶을 마주 하는데 있어 핵심적인 부분은 아니지만(그럼에도 여전히 중요한) 한 번쯤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들을 너무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사실 그런 이유로 이 작품들을 읽기가 수월치 않다. 데미안과 싯다르타가 주는 무릎을 탁 치게 하는 그런 느낌이 아닌 내 안에 숨겨진 고통 혹은 욕망 그런 것들과 피할 수 없는 만남을 가져야하기 때문이다. 

데미안과 싯다르타를 통해 방향성을 찾을 수 있었다면 수레바퀴 아래서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와 같은 작품에서는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나..'라는 또 하나의 부담을 내 어깨에 지워야했기 때문이다. 즉 단지 그것들과 마주친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바로 현재의 내 삶 안에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해결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 아닌 의무감이 든다는데 있다. 

수레바퀴 아래서...헤세의 자전적 소설이라 하지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의 자전적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주변의 기대와 그것에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껴보지 않은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어린 시절 이책의 결말은 내게 그렇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결국 한스 기벤라트는 도피를 한 것인가..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이책을 다시 접할 때 내 생각은 달랐다. 한스는 자살을 한 것이 아니라 타살을 당한 것이라고... 소설 속의 한스는 물리적인 죽음을 맞았지만 읽기에 따라서는 사회적인 죽음을 당한 것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미 그가 세상의 주류(?)로부터 떨어져나와 시골의 어느 구석엔가로 자신의 육체가 옮겨졌을 때 그는 이미 죽음을 겪었는지도 모른다. 익숙하고 당연시되야할 것들로부터의 괴리 그리고 격리는 그가 '그'로서 살아갈 수 있는 이유를 없애버린 것이라 생각이 든다. 마음은 이전의 장소에 그대로 남아있는데 현실의 육체는 그곳으로부터 떨어져 있다. 고교시절 어느 수업 시간엔가 배운 소속집단과 준거집단의 차이가 아닐가..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정신과 육체가 분열되어 버린 그런 모습이 아니었을까...이런 생각이 이책을 성장소설로 단정하기에 어려운 부분이다. 아마도 이점은 '호밀밭의 파수꾼'에도 별로 다르지 않게 적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책을 읽음에 있어서 지나치게 외부의 서평이나 리뷰에 의존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도 이런 이유에서다.

막연히 한스가 자살을 했다. 외부의 압박을 이기지 못해 결국 그런 선택을 했다..라고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의지가 부족한 그가 결국은 도피처로 자살을 택했다고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는 자살이 아닌 타살을 당했다고 관점을 바꾸어 보면 이책의 또 다른 면과 만나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해석과 실천은 읽는 이의 몫이다.

 

내 인생에서 데미안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었다. 사춘기 시절 데미안을 접하고 두 개의 세계와 아프락사스에 대한 생각에 온통 사로 잡혀 지냈으니 말이다. 스스로의 판단력이 부족했던 그 시절..어쩌면 대중적으로 너무 알려져 있는 두 개의 세계, 그리고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로 시작하는 문구는 한창 갈등과 사춘기적 방황에 시달리던 내게 마치 밤하늘을 가득 메운 불빛과 같았다.

결국 당시 나는 나의 감정을 데미안에 투영했는데 문제는 데미안 전반에 펼쳐진 긍정적인 그리고 개혁적인 시각보다 부정적이고 현실도피적인 시각에 집중함으로써 어린 시절의 나의 치기를 합리화해버렸다는데 있었다. 내가 이 부정적인 데미안에서 빠져 나오기까지는 무려 십 수년의 시간이 걸렸는데 데미안의 후속이라고 해도 좋을 싯다르타를 통해서였다.

학창 시절 이후 나는 다시 이책을 읽지 않았다. 아마도 두려움이 컸기 때문인데 방황과 고독..얼룩진 감성을 합리화하고 나 스스로를 위로했던 길고도 길었던 시절들이 사실은 내 일방적인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도 다시 이책을 읽기는 쉽지가 않다. 싯다르타를 통해 결국 데미안이 내게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알아차렸음에도 선뜻 용기가 나지 않는다.

물론 과거의 데미안에 빠져 있던 나를 현실의 데미안을 찾는 나로 돌리기 위해서는 읽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한편에서는 무언가 그 상태 그대로 잠시만 놔두고 싶은 마음도 있달까...삶에 있어 어느 정도는 실수와 잘못을 남겨 두고자 하는 또 하나의 어리석음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써는 당분간 그대로 감정을 놓아두는 편이 낫겠다 싶다. 이 또한 나의 치기라면 달리 변명의 여지는 없다.

이책을 읽는 이들에게 혹은 읽고자 하는 이들에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세상에 떠도는 말로 지레 짐작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인격이 존재하듯 사람은 그 나름대로 느끼는 감정과 감성이 다르다. 그런데도 자기 스스로는 어딘가로 던져 두고 남들이 말하는(혹은 광고문구에) 단어나 문장에 혹해 자신의 판단을 보류한다면 그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지 싶다. 무엇보다 책을 책 자체로 받아들일 수 없고 결과적으로 책을 읽고 나서도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다고 생각된다.

수많은 책들이 모두 마찬가지다. 다만 굳이 내가 이 데미안을 예로 들어 이야기하는 것은 온전히 내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가능하다면 책에 대한 아무런 선입견없이 들어가자. 비단 책을 읽는 것에만 한정되는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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