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새 올 한 해도 달력 마지막 장만 남기고 있다. 시간이 흐르는 물과 같다는 이야기를 굳이 꺼내지 않아도 세월이라는 단어의 한자를 곱씹어보지 않아도 우리네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인지 아마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또 절실하게 느끼고 있지 않을까? 돌아보면 매 해마다 겪는 일들이 새롭다. 전에는 겪을 수 없었던 아니 관심조차 갖지 않았던 일들이 내게 직접 일어난다. 하지만 한편 생각해보면 이 새로움들이라는 것이 다른 어떤 이들에게는 이미 겪은 일일 수도 있는 것. 결국 우리네 삶이란 대개 비슷한 경험들을 공유하며 서로 엮이는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겨울을 좋아하고 겨울에 어디건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나지만 올해는 예전처럼 그렇게 자주 밖으로 돌아다니지는 못한다. 아직 혼자 잠드는 것이 걱정스러운 어머니때문이다. 올해는 내게 '가족'이라는 단어를 가슴 시리게 새겨주었다. 그리고 '삶', '생명'이라는 단어를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고 고민하게 해 주었다. 또 하나 얻은 것이 있다면 이 짧은 삶 속에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라는 것. 부귀영화를 좇으며 살아갈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들은 정말 봄날 눈녹듯 사라져버리는 허상 자체다. 인간으로서 세상에 태어나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이제는 더 고민하게 되었다.


자연 앞에 서면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작고 하찮기 그지 없다. 여행을 통해 배울 수 있는 큰 교훈 중의 하나인데 요즘은 돌아다니지를 않으니 예전 사진첩을 꺼내어 들춰보는 것으로 대리만족을 하고 있다. 예전에 찍은 사진들을 지금 다시 보면 그 때 찍었던 느낌과 생각과는 또 다른 느낌 그리고 또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어서 좋다. 물론 사진에 반영되는 이미지는 셔터버튼을 누르는 순간의 감정과 당시의 마음상태가 고스란히 찍혀 나오지만 과거의 그 감상을 현재에 극복할 수 있다면 같은 사진으로 두 장의 서로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사진과 여행, 이 두 가지가 정말 축복된 것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아무튼 정신없이 분주하던 한 해의 큰 일들을 마무리하고 이제는 나의 일을 찾기 위해 조금씩 나아가는 요즘이다. 사람과 사람의 인연도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듯히 사람과 일의 인연도 전혀 생각지도 않게 마주치는 인연이 있으리라 생각해본다. 그리고 새로운 인연과 만나게 되는 날. 다시 카메라를 들고 겨울을 걸어보고 싶다. 



북한산둘레길을 걸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첫발을 내딛은 것이 작년 5월 8일이었다. 그리고 오늘 1구간을 처음 걷기 위해 설렘과 기대와 불안을 갖고 출발했었던 우이동 시작점으로 다시 돌아왔다. 아직 채 1년은 되지 않았지만 벌써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났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1년 사이 참 많은 일들.. 사람이 삶을 살아가면서 겪을 수 있는 가장 감정에 민감한 일들을 많이 겪었다. 그래서일까 오늘의 걸음은 예전 둘레길을 걸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지하철 1호선 도봉역 1번 출구로 나간 다음 길을 건너 한참을 걸어야 한다. 둘레길을 걸으면서 자연스레 서울의 여러 지역들을 접하게 되는데 이 지역의 느낌은 약간은 허전하달까? 아마도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곳들이 많아서겠지만 한번 더 생각해보면 오히려 이런 공간적인 여유가 남아있는 것이 다행일런지도 모르겠다.

오늘의 사진들은 라이트룸에서 후지 아스티아 필름의 설정을 전부 적용해봤다. 아스티아는 필름 카메라를 쓰던 시절 내가 무척이나 좋아하던 약간은 비주류 필름인데 청색기운이 약간 강한 편이고(물론 벨비아만은 못하지만 후지에서 나오는 필름은 박스 포장의 색처럼 녹색과 청색이 강조되는 편이다) 상당히 입자가 곱고 동양인의 피부색을 꽤나 잘 구현하는 필름이어서 주로 포트레이트용으로 사용하던 필름인데 풍경에 적용할 경우는 독특한 색감이 나는 게 특징이다. 디지털 변환이 온전히 아스티아의 느낌을 살린다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왠지 오늘은 그냥 그 필름의 느낌이 그리웠다. 아마 색이 왜 이래? 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시리라...


도봉초등학교의 모습인데 학교의 색을 알록달록하게 칠해놓은 것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가까이 가서 찍어보고도 싶었지만 요즘 초등학교 근처에서 배회하다가는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어 90mm로 죽 당겨봤지만 이 정도가 최선이다. 맑은 날이어서 멀리 산의 모습도 제법 또렷이 볼 수 있었는데 아이들에게는 좋은 교육환경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길을 따라 좀 더 올라가면 주말농장을 꾸려둔 곳들이 많이 있다. 온전히 서울 촌놈인 나는 이런 것만 봐도 참 신기한데 한때 주말농장에 꽤 인기를 끌었던 시절도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요즘은 인기가 시들한 모양이다. 저렇게 번호를 붙여 놓으니 농장이라는 느낌보다 묫자리같은 느낌이 들어 왠지 꺼림칙하긴 했지만 내 개인적인 선입견이니 염두에 둘 필요는 없으리라.


이제 19구간의 시작점을 만날 수 있다. 방학동(放鶴洞)이라는 명칭은 한자 을 보면 학이 평화롭게 앉아 놀고, 알을 품고 있는 것 같다는 데서 유래됐다는 설,  방아터가 있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방아골로 부르던 것을 한자명으로 쓴 데서 유래됐다는 설 등이 있지만 한자를 볼때 앞의 의견이 맞는 것이 아닐까 추측을 해본다.


4월이라는 계절은 애매하다. 차라리 3월이면 심리적으로도 봄이라고 생각을 하겠지만 4월은 따뜻한 것도 아니고 추운 것도 아니다. 굳이 어느 시인의 '잔인한 달'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내게는 충분히 잔인했던 달이어서 그런지 그 애매함에 잔인함까지 덧붙여져 썩 마음에 들지 않는 계절이 되어 버렸다. 산길에 들어서서도 그 느낌은 이어졌다. 그러고보니 주변에도 봄을 특히 4월을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도저도 아닌 애매함 때문이 아닐까.


산길의 곳곳에는 이미 활짝 꽃망울을 터뜨린 녀석들도 있는가하면 이제 조금씩 꽃잎을 열어볼까 하는 녀석들도 있고 이미 제철을 다 보내고 바닥에 화려한 흔적들을 남기고 저물어 버린 녀석들도 있다. 삶의 시작과 진행과 마감까지 동시에 이루어지는 공간이 봄의 산길이다. 꽃은 그것이 활짝 펴서 절정을 이룰 때는 아름답지만 삶을 마치고 길바닥에 무참히 꽃잎들의 조각을 흩뿌릴 때가 되면 추한 모습이 된다. 마치 눈과 같다고나 할까.. 하지만 화려함뿐 아니라 그 화려함 뒤의 초라함까지 받아들일 때 온전히 한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길만 봐서는 겨울에 접어들 무렵이 아닐까 생각될 수도 있다. 이렇게 4월이라는 계절이 주는 느낌은 애매하다. 아마 당분간은 봄이라는 계절과 4월이라는 달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래도 이 계절과 달을 지나야 본격적인 화창함과 만날 수 있으니 그저 인고의 느낌으로 기다려야 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근처 초등학교의 체육 시간인지 아이들이 제법 많이 나를 지나쳐갔다. 특이했던 것은 시간제한이라도 있는 모양인데 거의 모든 아이들이 달려가고 있다는 점이었는데 그저 앞만 보고 달리는 동안 마주칠 수 있는 수 많은 '느낌'들을 아이들은 인식하기도 전에 지나쳐버린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든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도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 들여다보기에 시간이 모자랄 지경인데...


꽃이 왜 피는지는 알지만 꽃이 왜 지는지를 아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뽐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길가에 아무렇게나 뒹구는 모습이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본 이들은 얼마나 될까? 만약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산에 간다면 그 이유를 설명해주고 싶다. 그리고 이렇게 내버려진듯 흩어져버린 꽃잎들도 모두 다 같은 꽃이라고...


언젠가 연리지(連理枝)라는 단어를 좋아한다고 적은 적이 있는데 사실 연리지를 직접 마주친 적은 드물다. 이 사진에 보이는 나무도 그런 이름으로 부르기에는 부족할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내가 이 사진을 찍은 것은 이 나무들 곁을 지나고 있을 때 불어오는 바람에 두 나무가 부대끼며 끼익끼익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생이 다른 두 삶이 만나 내는 소리. 같은 나무였다면 결코 만들어낼 수 없었던 그 소리를 이 두 나무는 그렇게 내고 있었다. 인간의 귀로 듣기에는 불편하 소리일 수도 있겠지만 이 두 나무에게는 어쩌면 또 다른 삶을 이루어가는 소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 생각 저 생각하는 중에 19구간 방학동길이 끝났다. 그리고 일반적인 경우라면(21구간은 예약을 해야 하니) 걸을 수 있는 북한산둘레길의 마지막 구간인 20구간 왕실묘역길이 내 앞으로 펼쳐졌다. 19구간이나 20구간이나 모두 걷기에 큰 무리는 없다. 다만 날이 슬슬 덥다는 느낌을 줄 정도가 되고 있으니 옷이라든가 물이라든가 하는 준비물들을 이전과는 조금씩 다르게 챙겨야 한다.


왕실묘역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처음 만나는 곳은 정의공주묘다. 사실 처음 정의공주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발해의 공주였던 정혜, 정효공주가 떠올라 이분도 발해의 공주인가 생각을 했는데 설명이 적힌 표지판을 읽어보니 세종의 따님이셨다. 사진에서도 볼 수 있듯 이곳은 공개를 하지 않아 이것저것 자세히 살펴볼 여지는 없었다. 명당이라는 것이 과연 있는 것인가 싶지만 따스한 봄날의 햇살을 듬뿍 받기에는 제법 어울리는 장소였다.

이곳을 지나 바로 만나게 되는 장소가 연산군묘와 800념이 넘은 은행나무인데 연산군묘는 사진의 구도가 영 나오지 않았고 천년된 은행나무는 앞에 왠 광고 플래카드를 크게 걸어놓아 탐탁지 않아 이곳에 올리지는 않을 생각이다. 아무튼 왕실묘역이라는 이름은 정의공주묘와 연산군묘의 위치를 빌어 지은 이름 같은데 그 이름이 주는 무게에 비해 여러모로 아쉬운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왕실묘역길은 이렇게 일반 동네의 뒷길 같은 길을 조금 걷다가 산길을 조금 걷다가 금방 마무리 된다. 워낙 거리가 짧은 구간이고 별 다른 특징도 없는데 차라리 이전의 구간에 이어 붙였으면 아쉬움이 덜 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물론 애초에 북한산둘레길의 구간이라는 것 자체가 인위적인 것이니 특정 구간의 거리와 풍경에 연연해 할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아마도 (어설픈) 아스티아의 색감 덕분에 봄의 산길인데도 마치 겨울의 그것처럼 조금은 쓸쓸한 느낌이 더 드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계절은 분명 봄이고 며칠 후면 절기상 여름인 입하에 접어든다. 어쩌면 나는 아직도 겨울의 느낌을 겨울의 풍경을 그리워하고 있는가보다. 적어도 지난 겨울에는 아니 지난 겨울까지는 그래도 마음을 크게 다치지 않고 지낼 수 있었으니까...


다시 도로로 나서면 이제 막바지다. 멀리 북한산 아니 삼각산의 세 봉우리가 보인다. 북한산을 가로로 관통하는 우이령길을 빼고 보면 온전하게 북한산 자락을 모두 걸은 셈이다. 누군가에게는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닐 수도 있는 이 걸음을 걷는데 1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래도 내가 이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는 말 덕분이 아니었을까.


처음 북한산둘레길을 걷기 위해 그러니까 1구간 소나무길을 걷기 위해 저 멀리 보이는 버스종점에 내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산에 오르는 것도 아니고 고작 둘레길을 걷는 것이었을 뿐인데 그날은 왜 그리 설레고 떨렸을까? 그리고 이제 바라보는 그때의 그길은 지난 해의 그길보다는 조금 더 여유있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약간이라도 익숙함이란 이런 편안함을 주는 가보다.


이곳 블로그에는 없지만 아직도 내 휴대폰에 남아있는 이 장소를 다시 찍어본다. 전체적으로 사진들이 물빠진 듯한 필름의 느낌을 주는 것이 그래도 마음에 든다. 필름카메라에 대한 추억을 이렇게나마 되돌려볼 수 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제 한 번의 걸음을 더 걸으면 북한산둘레길의 모든 구간을 마무리하게 된다. 아마도 1년을 모두 채우기 전이 되겠지만 내게는 마치 평생과도 같았던 1년이었다.


길을 시작했던 그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길을 그대로인데 그길을 걷는 사람만 달라졌다.

사람의 외모도 사람의 마음도 1년 전의 그것과는 참 많이도 달라졌다.


Panasonic LX-7, Adobe Lightroom Fuji Astia Preset


겨울은 내게 매년 어김없이 커다란 기억의 선물 보따리를 안겨 주곤 했다. 올 겨울은 아직 뭔가 크게 기억이 될만한 일은 없지만 1월과 2월이 남아 있으니 무슨 일이 일어날지 한편에서는 기대도 되고 한편에서는 불안한 마음도 없지는 않다. 겨울은 무채색의 계절이고 무채색과 어울리는 사진은 역시 흑백이다. 흑백사진은 언뜻 보면 색이 없는 것같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컬러사진보다 더 많은 빛의 흐름을 발견할 수 있다. 디지털로 넘어오면서 흑백현상이라는 단어가 사라져버리고나서는 좀처럼 흑백 사진을 찍지 않게 되지만 그래도 역시 사진은 흑백..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분명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컬러인데 왜 흑백이 주는 느낌이 더 강할까 생각을 해본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흑백 사진을 찍을 때 좀 더 신경을 쓰는 것도 한 원인이 아닐까 한다. 흑백사진을 찍을 때는 소위 존 시스템을 머릿속에서 부지런히 계산해야 한다. 여기는 얼마고 저기는 얼마니 전체적으로 얼마나 나오겠다..이런 계산을 하고 구도를 잡고 조리개와 셔터 속도를 조절하고 하는 그 모든 과정이 순식간에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사실 흑백 사진을 찍는 일은 꽤나 고된 작업이기도 하다. 


요즘이야 그냥 RAW모드로 차라락 찍어 버리고 집에 와서 컴퓨터로 수정을 하면 되니 예전의 그런 고됨이 없어 편리할지는 몰라도 왠지 사진에 영혼이 없는 느낌이 든다. 막말로 쨍하고 화려한 사진은 많지만 마음에 와 닿는 사진은 갈 수록 적어진다는 말이다. 사진을 마우스로 이리저리 클릭해서 만들어낸다는 게 여전히 어색하지만 이것도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면 받아들여야 할텐데 그게 쉽지가 않다. 

하지만 세상이 변화하고 있는데 계속 제자리에 앉아서 '디지털 세상은 반갑지 않아. 아날로그가 제일이야'라고 외쳐보아야 그저 과거에 집착하는 것일뿐이다. 디지털 시대에 어울리는 아날로그를 찾아야 그것이 제대로 아날로그를 즐기는 법이다. 나는 여태 이런 생각은 하지 않고 변화된 세상이 낭만이 없네 하며 팔짱만 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래서는 그저 과거에 매여 사는 꼴밖에 되지 않는데도 말이다. 마찬가지로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에 영혼이 있네 없네 하는 것도 같은 속좁음이다. 그래도 옛것이 좋아라고 하기보다 좋은 옛것을 요즘의 것과 어울리게 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흑백 사진은 인화물을 받아 들고 그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에 뭔가 쿵하고 내려 앉는 것들이 있다. 물론 이 모든 느낌들이 나 혼자만 느끼는 그런 것이라 해도 나는 그런 느낌이 좋다. 현상된 슬라이드를 라이트박스에 비추어 보는 일보다 흑백 사진이 인화된 인화지가 더 반가운 것이 내 사진 생활의 특징이라면 특징이었다. 지금도 방 한 구석에 가지런히 쌓여 있는 필름 보관함과 인화된 사진 앨범을 열어보면 그렇게 오래된 내 추억들이 하나 둘 현실처럼 느껴지곤 한다. 분명 2차원의 종이인데도 말이다.

디지털로 넘어온 지금도 흑백에 대한 미련은 여전하다. 하지만 아직 디지털 카메라로 적극적으로 흑백 사진을 만들어본 적은 없다. 다음에 카메라를 들고 나가면 온전히 흑백만으로 찍어볼 생각이다. '디지털이니 현상도 안 되고 아날로그의 느낌이 없어!' 라고 계속 이야기하는 것보다 그래도 이 녀석들을 가지고 이전의 느낌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를 연구해보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RAW모드에도 흑백 모드가 있다. 단순히 컬러 사진을 흑백으로 변환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흑백으로 이미지를 잡아내는 것인데 아직 이 모드는 사용해본 적이 없다.

디지털로도 이전의 필름 카메라가 만들어낸 느낌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도구가 아니라 그 도구를 이용하는 사람이다. 만약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필름 카메라로 만들어냈던 그 느낌을 만들어낼 수 없다면 기계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내가 변한 것일 것이다. 과거가 아름답고 추억이 아름답다고 느끼면서 현재에는 그런 기억을 만들려 하지 않는 것 역시 내가 변한 것일뿐이다. 바라봐야 하는 것은 더 이상 지난 기억이 아니라 지금 눈을 뜨고 바라보는 오늘의 하늘이다.


Leica M6, Summicron 35mm f/2.0 asph, Ilford PanF, LS-40



한때는 연탄은 우리네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필수품이었다. 연탄이 없으면 추운 겨울날을 보낼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오래 전 기억 속에서 떠올려보는 그런 존재가 되었다.

문득 나를 둘러 싼 주변에서 사라진 것들은 무엇이고 새롭게 얻은 것은 무엇일까 생각을 해 본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것이 있는가 하면 시간이 흘러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아 억지로 사라지게 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얻는 것이 있는가 하면 시간이 흘러도 좀처럼 얻을 수 없어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어떤 것을 잃고 어떤 것을 얻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을 하지만 "자연스럽게" 잃고 얻는 것들에 대한 생각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

'욕망'이 '자연'에 앞서는 것이 우리네 사람의 본성이지 싶다. 

하지만 때로는 그저 시간의 흐름에 몸과 마음을 던져보는 것도 좋으리라 싶다.

'무엇'을 얻고 잃는 것에 몸과 마음을 집중하지 말고 그저 흘러가는대로 놓아두면 어떨까..

굳이 노자의  '上善若水"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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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을 담은 필름은 RDPIII이라는 녀석입니다. 시중에는 '프로비아'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후지의 슬라이드 필름이죠.

후지의 슬라이드는 프로비아와 벨비아(RVP)가 유명한데 벨비아는 ISO가 50인 특이한 필름이죠 

이 두 필름은 아마 올해말에 모두 단종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오래 전 많은 추억과 이야기들을 만들어 준 필름도 시간이 흐르면서 제 의지와 관계없이 사라져버리네요..

시간되면 슬라이드 필름 이야기를 한 번 써볼까 싶기도 하네요..

사진 윗부분은 슬라이드 스캔의 흔적인데 자를까 하다가 그냥 두었습니다.


Canon EOS 1-Vhs, EF 28-70mm f/2.8L IS USM, RDPIII, LS-40



낡은 묘비 앞에 서 본다.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와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묘비에 묻는다면 죽은 이들은 무어라 대답을 할까.. 그것도 본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세상을 등져야 하는 운명을 묵묵히 받아들인 그네들이라면 무어라 대답을 할까.. 어느 바람이 차갑던 날의 묘비는 치열한 겨울의 얼음보다 더 차가운 체온을 내게 전해주고 있었다.

삶에 있어서... 끝끝내 안고 가야할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해준다. 결국 삶이란 어떤 이유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 되고 그것으로 한 사람은 충분히 살아갈 의미와 이유를 얻게 된다. 그런 이유마저 없다면 결코 내 의지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닌 이 삶이라는 것은 꽤나 번거로운 일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한 번의 삶에 있어 그런 의미를 찾아낸다는 것은 축복에 가까운 일...

하지만 어느 순간엔가 그것이 나로 인한 것이거나 혹은 다른 이유에서거나 그 의미가 되는 "존재"가 사라지게 되고 나면 마치 온몸의 살점이 다 사라지고 뼈만 앙상하게 남아 몰아치는 겨울밤의 찬바람을 그저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그 바람이 내 뼈마디마디를 스치도록 놓아둘 수밖에 없는 그런 "내"가 되고 만다. 너무나 차가운 바람에 마음의 조각조차 뼈마디에 붙어 있기를 힘겨워하며 비명을 내지르곤 한다. 하지만 바람은 그런 나를 더 세게 몰아칠 뿐이고... 마침내 바람소리에 내 비명마저 잠겨 들어 어느 샌가 "나"의 작은 소리조각조차 남지 않게 될 때 비로소 바람은 잦아든다.

차가운 얼음대지에 주저 앉아 텅빈 하늘을 바라보다가 문득 정신이 들어 주변을 돌아보면 어느 한 곳 내가 기댈 곳 없는 오직 광활한 - 사막보다도 넓은- 공간이 나를 사방에서 압박해옴을 깨닫게 되고 어떤 방향을 생각할 것도 없이 일단 일어서 한참을 달리다 숨이 턱에 걸려 쓰러지고나면 무엇때문에 지금까지 삶을 이어온 것인가 또 한 번 하늘을 우러르며 이젠 흐르지도 않을 눈물을 흘려본다. 

내가... 내가 이 짧은 생에서 원한 것은 그렇게 큰 것도 아니었는데.. 그저 누군가 내 어깨에 살포시 손을 얹어 따스한 체온을 전해주기만을 바랐을 뿐인데.. 그것이 그렇게 하늘이 "나"를 버릴 정도로 가져서는 안 되는 꿈이고 희망이었나. 차가운 묘비에 뜨거운 눈물 몇 방울을 떨어뜨려보아도 그저 묘비를 타고 흐르는 눈물이 다시 내 발치로 흘러흘러 나를 감쌀 뿐이었다. "잃는다"는 것은 결국 "사라진다"와 같은 말임을 비로소 깨닫지만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몸도 마음도 받아들일 수 없어 묘비 주위를 서성인다.

우리는 헤어졌지만 나는 너를 보낸 적이 없다. 뼈마디를 스치고 지나가던 그 날카롭던 겨울의 어느 바람에도 끝끝내 내가 놓지 못한 것은 너의 웃음과 너의 말투와 너의 체온... 비록 눈물이 차가운 얼음조각조차 되지 못한 채 영원히 묘비 주위를 맴돌뿐이지만..그래서 끝끝내 다시는 너를 마주하지 못 하더라도.. 그래도 나는 너를 놓은 적이 없다. 소월의 어느 싯구처럼 그렇게 부르다 내가 죽을 그런 이름이 되어 있을 뿐...

너와 나는... 그렇게... 내가 묘비가 되어 있거나 혹은 네가 묘비가 되어 있을 뿐... 

그리고 다시 손을 댄 묘비는 어느새 내 체온과 같은 온도가 되어 있었다...


Nikon F3hp, Ai Nikkor 35mm f/1.4S, Kodak T400CN, LS-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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