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클래식 리뷰단에서 이번에 보내온 책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입니다. 한 번 정도는 들어보셨을 듯한 제목이지요. 아마 줄거리도 막연하게나마 알고 계신 분들이 계시리라 생각이 됩니다. 제 서평에 줄거리는 적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막연하게나마 알고들 계신 줄거리는 한 남자가 유부녀를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을 이루지 못 하게 됨을 아쉬워하며 자살한다는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그게 이 소설의 줄거리만 끌어내자면 전부입니다. 어쩌면 큰 이슈가 될만한 것도 아닌 이책이 거의 30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여전히 읽히고 있다는 것은 단순히 줄거리만 보고 읽을 책은 아니라는 의미도 됩니다.

이책의 내용은 괴테의 경험에서 끌어낸 것입니다. 흔히 고백 문학의 시초로 이책을 꼽는 것도 그런 이유지요. 여주인공 로테(혹은 롯데)는 괴테가 실제로 사랑한 로테의 이름에서 그대로 가져온 것입니다. 소설에서처럼 괴테가 자살을 하지는 않은 것이 차이라면 차이일까요. 자, 이제 한번 생각을 해보도록 하지요. '사랑을 위해 죽다.' 그것이 가능하리라 생각하시나요? 여러 상황이 있겠지만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한 사람만을 살려야할 때 사랑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는 일은 최근에도 적지 않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루지 못한 사랑때문에 생명을 끊는다는 것은 요즘의 사고방식에서 본다면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릅니다. 

"세상에 남자가 혹은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훌훌 털고 다른 사람을 만나면 돼" 아마도 요즘 사람들이 내리는 결론은 대부분 이렇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베르테르처럼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을 어리석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오히려 사랑하는 이의 마음에 상처를 준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비난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멀리서 사랑하는 이의 행복을 빌어줄 수 있을까요? 다른 이와 결혼한 사람의 미래가 행복하기를 바라며 축복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쉬운 질문은 아니라 생각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각자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책의 대부분은 편지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주인공 베르테르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서 모든 이야기들이 펼쳐 집니다. 초반부만 해도 베르테르의 냉철함과 확고한 철학이 빛납니다.  

"인생이 꿈이라는 사실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 바이지만, 나 역시 어딜 가나 그런 느낌을 받는다네. 인간이 지닌 활동적인 탐구력 역시 한계에 갇혀 있음을 볼 때, 그리고 인간의 모든 노력이 궁극적으로는 욕망을 채우는 쪽에 머물며 이 욕망이라는 것도 사실은 우리의 불쌍한 생을 연장하는 데 봉사할 뿐..."

이라는 문장을 읽게 되면 베르테르가 감정적이라기보다는 이성적인 인물이고 나름의 확고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적어도 로테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죠. 베르테르는 욕망에 의해 흔들리는 인간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 역시 한편에서는 욕망의 일종인데 다른 편지에서는 남자가 여자에게 끊임없는 헌신을 바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까지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던 그가 로테를 만나고 기존의 생각이 무너지게 됩니다.

"사랑이 없는 세상이 우리의 가슴에 무엇일까! 빛이 없는 마법의 등잔이 다 무슨 소용인가!"

사람이 변해도 이렇게 변하나 싶습니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을 해 본 분들이라면 공감이 되실텐데 저는 그런 사랑은 해 본 적이 없어서 누군가를 한번 만나고 이렇게까지 변하게 되는 것이 잘 이해는 가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기는 하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는 꼭 겪어보고 싶은 감정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베르테르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이루어진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사랑의 완성은 무엇일까요? 결혼일까요? 적어도 베르테르에게 있어서는 그런 것처럼 보입니다. 어떠신가요? 사랑을 한다면 최종적으로는 결혼을 해야 그 사랑이 온전해 지는 것인가요? 저는 이 질문에 선뜻 대답하기는 어렵습니다.

베르테르는 말합니다. "꼭 이래야만 하는가? 인간의 행복의 원천이 그의 불행의 근원이 되다니" 라고 부르짖습니다. 사랑으로 인해 행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괴로워해야 하는 것이 그에게는 커다란 무게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로테의 남편에게서 총을 빌려 그 총으로 자살을 합니다. 물론 로테에게 장문의 편지를 남기고 말이죠. 어쩌면 굉장히 치졸하고 비겁한 행동처럼 보입니다. 이 모든 것을 겪는 로테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감정에만 도취된 모습을 보입니다. 

"나는 이 옷을 입은 채로 묻히고 싶습니다. 로테, 당신이 만져서 성스러워진 이 옷을 입은 채로 말입니다. 당신의 아버지에게 그것도 부탁해 놓았습니다."

여기까지 읽으면 마음이 답답해 집니다. 황순원의 소나기의 마지막 부분과도 비슷한 느낌이 드는데 정녕 로테를 사랑한다면 이렇게까지 잔인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편지의 마지막은 클라이맥스를 보여줍니다.

"권총은 장전되었습니다. 시계가 12시를 치네요! 자 이제! 로테! 로테, 잘 있어요! 잘 있어요!"

이 정도면 상대방에 대한 만행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남아 있는 이에게 모든 짐을 떠안겨 버립니다. '너를 사랑하지만 맺어질 수 없으니 내가 죽겠다'는 것인데 죽으면 조용히 죽지 사방팔방 다 이야기를 하고 당사자에게 편지까지 남깁니다. 요새말로 찌질해도 이렇게 찌질한 인간상이 있을까 싶습니다. 물론 이책에 대한 해석은 독자마다 차이가 큰 편인데 적어도 제가 읽기에는 이렇습니다. 베르테르는 사랑을 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내던진 것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책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일꾼들이 유해를 운반했습니다. 성직자는 한 사람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결국 괴테는 베르테르의 모든 행동이 옳지 않음을 스스로 밝히고 있는 셈입니다. 가톨릭이 지배하던 사회 안에서 성직자의 축복도 받지 못한 장례식이란 말 그대로 버려진 죽음일 뿐입니다. 여기까지 읽고나서야 앞부분을 읽으면서 느꼈던 베르테르의 비겁함과 찌질함이 해소됩니다. 마치 술에 취한 듯 자신의 감정에 도취되어 타인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편한 대로 생각하고 행동한 베르테르라는 인간에 대해 괴테는 경고를 보내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의도와는 반대로 이책의 출간 이후 수많은 자살자들이 양산되었는데 아마도 마지막 문장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까닭이라 생각됩니다.



대작을 읽을 때는 굉장한 전율을 느낄 수밖에 없는데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읽게 되면 보통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번에 읽게 된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를 그 전율의 서책 목록에 덧붙인다.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인류 역사상 가장 중대한 격변기를 다루고 있는 이 소설은 겉으로 드러난 혁명의 충격만큼이나 인간의 내면을 철자하게 파고 들어 있어 사실 읽기가 쉽지만은 않은 책이다.

사실 우리에겐 조금 낯선 이책이  -물론 방대한 독서량을 자랑하는 분들에게는 실례가 되겠지만- 우리에게 친근한 느낌으로 다가선 것은 크리스토퍼 놀란이 다크나이트라이즈의 일부 장면을 이책의 내용을 모티브 삼아 만들었다고 밝힌데서 비롯된다.프랑스 혁명과 배트맨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관계지? 한발 더 나아가 책의 결말부분에 이르러서는 그리스도교의 예수의 모습마저 볼 수 있다. 아마 내가 잡아낸 부분보다 더 많은 관계들이 이책에는 들어있을 것이다. 한번의 독서로 모든 것을 느낄 수는 없다. 적어도 두세 번은 곱씹어 읽어볼 책이다.

아래 사진은 이책의 초판본인데 영문 제목을 들여다보자. 'Tales'라고 써도 되지만 디킨스는 'A Tale'을 택했다. 작가의 의도는 이 모든 이야기가 한편의 이야기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책은 하나의 이야기만 담고 있지는 않은데 여러 이야기들이 결국은 하나로 모이고 그것이 디킨스가 바랐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여전히 각각의(Each)라는 단어가 이책에 좀 더 적합하다고 생각된다. 도저히 하나의 이야기로만 읽고 넘기기에는 아까운 까닭이다. 그렇다면... 왜 차라리 'The'를 붙이지는 않았을까? 두고 생각해볼 일이다.

펭귄클래식에서 출간된 이책은 주석까지 합쳐 588면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어서 처음 책을 집어들고나면 '이책을 언제 다 읽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지만 책장을 넘기다보면 어느새 프랑스 혁명 당시의 런던의 어느 길거리를 걷고 파리의 어느 선술집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들고 그 분위기에 흠뻑 취해있다보면 마지막장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고전 특히 명작이 주는 감동이란 대개 그런 것이어서 현대 문학 작품들이 좀처럼 줄 수 없는 일종의 은총에 가까운 매력이다.

혁명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기본으로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인 명예, 사랑, 재물 등에 대한 끊임없는 욕망과 갈등이 휘몰아친다. 물론 책이 씌여진 시기를 생각하고 디킨스의 장황한 어투를 생각하면 쉽게 쉽게 문장이 읽어지지는 않지만 그 안에 펼쳐진 방대한 서사시를 읽어나가다보면 그런 부수적인 어려움이 오히려 반갑기까지 하다. 

이책의 주제는 사실 독자가 선택하기 나름이라고 생각된다. 목숨을 내줄만큼 숭고한 혹은 무의미할 수도 있는 '사랑'일까? 시대의 풍파 속에서 갈등하고 충돌하는 '계급'일까? 아니면 그 모든 것을 끌어안는 "욕망"일까? 어느 주제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줄거리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는 것이 이책만이 가지고 있는 큰 특징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그 주제들만 따로 끌어내어 연결을 시켜도 훌륭한 한권의 책이 만들어진다.

실제로 외국에서 논의되고 있는 이책의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Recalled to Life"

Water

Darkness and light

Social justice


책을 읽어가다보면 책의 문체가 희곡에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실제로 두 도시 이야기는 지컬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외국에서는 6편의 영화와 한편의 TV 드라마로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국내에서 구해볼 방법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야기는 런던에서 파리로 이동하며 시작되고 결국 파리에서 런던으로 돌아오며 끝이 난다. 런던파리라는 두 도시에서 우리는 마치 흑 아니면 백과도 같은 극단적인 상황들에 직면하게 되고 그 극단이 부딪혀 서로를 파괴해 나가는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참 아이러니하게도 양 극단의 종말은 '너무나도 비슷함'으로 마무리된다. 아마 이 소설만큼 극단적으로 인간의 감정의 대립을 묘사한 소설은 많지 않을 듯하다. 복수와 용서, 미움과 사랑이라는 이 양극단의 감정은 최종장에 이르러 마치 예수의 순교와 같은 대속으로 마무리된다.

이 소설의 주해를 달고 있는 리처드 맥스웰은 이 양극단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이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면서 곧 절망의 겨울이었다." 그리고 이 양극단은 파리와 런던이라는 두 도시에서 처절한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는데 사실은 파리가 곧 런던이고 런던이 곧 파리였던 셈이다. 세상 어느 곳에서건 인간의 이런 모습은 다르지 않음이고 또한 그 해결 방법 역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디킨스는 이야기하고 싶었던지도 모를 일이다.

디킨스는 여느 작가와는 달리 '소외'에 초점을 둔 작가였다. 혁명이라는 세상이 소용돌이치는 그 와중에도 귀족이나 혁명 세력이 아닌 소시민들 그것도 철저하게 바닥으로 내동댕이 쳐진 나약한 소시민들의 삶에 집중한다. 이점에서는 우리는 까뮈를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역사를 이야기할 때 그 역사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보통 관심을 둔다. 어느 왕이 어떠했고 어느 수상이 어떠했고 혹은 어느 신하가 어떠했고는 자세하게 다루지만 정작 그들의 지배하에 있었던 대다수의 사람들 -즉 우리들- 에 대해서는 좀처럼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지배자는 수가 적고 피지배자는 수가 많아 일일히 이름을 언급하기 어렵다는 식의 이론은 철저하게 권력과 힘에 기댄 역사서술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 방식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사실 중요한 것은 '어느 왕'이 아니라 '갑돌이와 갑순이'인데 우리는 갑돌이와 갑순이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래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안타까운 노릇이다. 디킨스는 바로 그 '우리'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그 내용이 처절하고 진솔하고 때로는 뼈에 사무치기까지 한다.

소설의 마지막에 예수의 모습으로 죽어간 주인공의 모습은 어떤 이들에게는 한없이 나약한 모습으로 비칠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죽는다는 어쩌면 정말 소설에서나 있음직한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디킨스는 그 죽음.. 예수의 대속(Redemption of Christ)과도 같은 그 죽음을 결코 값싸게 다루고 있지 않다. 숭고한 죽음이란 아주 평범한 사람에게도 가능한 것이라는 점. 이점은 그의 마지막 말에서 등장하는데 바로 다크나이트인 웨인이 그의 유언장에 적은 그 내용이다.

'I see a beautiful city and the the brilliant people rising from this abyss. I see the lives, for which I lay down my life. Peaceful, useful, prosperous and happy. I see that I hold a sanctuary in their hearts And in the hearts of their decedents. Generations ends. That's the far, far better thing that I do...than I had ever done. and It's a far, far better rest that I go to...'

두 도시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난다.

"...내가 지금 하려는 행위는 지금까지 해온 어떤 행동보다 훨씬 더 숭고하다. 지금 내가 가려는 길은 지금까지 걸었던 어느 길보다 훨씬 평안한 길이리라"

앞서 마지막 장에 한참을 머물게 된다고 적었는데 실제로 그렇다. 사실 책의 줄거리나 내용을 인용하지 않는 것이 내 서평의 원칙이라면 원칙인데 이 마지막 문장을 적지 않고서는 이책이 주는 강렬한 느낌을 옮겨오기 어려울 것같아 적어본다. 

결국 중요한 것은 각자의 개인의 삶이다. 그 삶에는 귀하거나 천한 것이 있을 수 없고 누구도 인간이라는 존재인 이상 고귀하고 가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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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뷰와 반디앤루니스에서 선정하는 금주의 리뷰에 선정되었네요. 감사드립니다. (__)


쉽지 않겠다 싶었다. 두 권으로 이루어진 책의 분량을 떠나 줄거리가 만만치 않아 보였다. 흔히 접하는 불륜으로 인해 상처 입은 아내가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 과정과는 반대의 상황이다. 주인공은 남편이다. 이 독특한 시점은 기존에 다른 매체 등을 통해 짐작할 수 있었던 주인공의 심리 상태를 지레 짐작조차 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물론 이것 역시 남성적인 편견이라는 점은 부인하지 않는다)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나가며 파악하는 수밖에 없었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겪은 가장 큰 저항은 특유의 편지 쓰기식 서술이었다. 이 부분은 독자에 따라서는 꽤 마음에 들어하는 분도 있을 수 있겠지만 내게는 결국 작가가 작품 안에 온전히 생각을 담아내지 못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들게 했다. 수신자로 등장하는 수 많은 이들이 과연 허조그의 심리상태 나아가 이책의 흐름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의문마저 들었으니 말이다.

두 번째 저항은 -적어도 내 입장에서는- 찌질하기 그지 없는 주인공의 신세한탄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독자에 따라서는 인간적이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무능력 그 자체고 그 무능력을 스스로 돌파하기보다는 그저 흘러가는대로 놔두고 이런저런 변명으로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생각하는 수동적인 면이 지나칠 정도여서 읽기가 수월치 않았다. 물론 작가의 의도겠지만 이렇게까지 무능력한 주인공은 참 오랜만에 만났다.

그럼에도 주인공의 심리 묘사는 대단하다. 처음부터 거의 끝부분에 이르기까지 자포자기하고 무기력에 찌든 상태를 한결같이 유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두 권으로 이루어진 책의 대부분은 이 신세한탄으로 채워져 있다. 어떤 독자라면 이 어둡고 찌든 분위기가 몸서리쳐지도록 싫을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긍정적으로 바라보기란 영 쉽지가 않았는데 결국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주인공은 자주적인 결정을 스스로 내리지 못 한다. 이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네 인간군상의 나약함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이런 이유로 결말 역시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뭐랄까 자신에게 닥친 황당하고-그 성격에 당연한 결론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불운한 상황들을 나름 희극적으로 돌파해보려는 의지가 아주 가끔 엿보이기는 했지만 과연 결론이 허조그 자신에게 만족스러운 것이었을까? 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나는 글쎄..라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 결국 스스로의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살아짐을 당한 전형적인 수동태적인 삶을 산 허조그이고 그런 일관된 흐름 안에서 마지막 결론은 작가에 대한 배신감마저 느끼게 했으니 말이다. 

번역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원서는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교적 현대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번역자가 풀어가는 방식은 제법 진부했다. 솔 벨로의 문체 자체가 그렇다면 달리 할 말은 없겠지만 지나치게 어려운 단어와 복잡한 표현이 작품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한다. 특히나 작품 해설은 독자를 생각하고 쓴 것이라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않다. 책에 대한 감상이라는 것이 워낙에 주관적인 것이긴 하지만 나로서는 감당하기 쉽지 않았던 번역이었다.

아무튼 책을 읽는 내내 '작가의 의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왜?'라는 의문은 책을 펼친 이래 마지막까지 가시질 않았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이와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이 작가의 의도라는 생각도 든다. 생각보다 쉽게 상처입고 쉽게 넘어지는 우리네 삶의 모습 그리고 그 상처와 넘어짐을 쉽게 극복하지 못 하고 절망의 나락 속에 빠져드는 우리네 보통 사람들에게 때로는 현실의 복잡함과 마음의 괴로움을 잊고 그저 흘러가는대로 받아들이라는 메시지는 아니었을까? 시간이 좀 더 지나고나서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마키아벨리에 대해 갖고 있는 선입견은 "피도 눈물도 없는 냉정한 인간" 정도가 아닐까.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비도덕적인 일도 서슴지 않는 냉혈한이라는 시각도 있다. 나 역시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군주론을 직접 읽기 전에는 사실 이책을 굳이 읽을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판단이라는 것은 자신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남들의 이야기만 듣고 지레 손사래를 쳐 버린다면 그것처럼 위험천만한 생각도 없지 않을까 싶다. 마치 인터넷에서 영화평을 보고 나서 "아, 난 이 영화는 안 봐야겠어" 라거나 "이렇게 재미있는 영화가 있나!"라는 반응을 보이는 것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남들의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남들의 이야기다. 즉 하나의 의견으로 생각해야지 타인의 의견이 무조건 맞는 것처럼(비록 그가 저명한 사람일지라도) 생각하고 자신의 경험을 사전에 차단해버리는 것은 스스로 쌓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내치는 꼴이 된다.

서론이 길었는데 아무튼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16세기라는 시대적 관점에서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건 모든 고전 -굳이 고전이 아니더라도 소설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에 있어 공통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군주론이 집필된 시점은 16세기 이탈리아다. 르네상스라고도 하는 낭만적인 이름으로도 불리는 시기였지만 정치적으로는 마치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혼란기였다.

중국의 전국시대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통일한 것이 한비자의 법가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당시 이탈리아 도시 국가의 어지러운 시기에 등장한 군주론을 현대적 시각에서 무조건적으로 폄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된다. 역자도 적고 있듯이 "정치가 더러운 것임은 모두가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 현재의 우리도 누군가 정치를 한다면 어느 정도 뇌물도 받겠거니 생각하고 비리도 있겠거니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어느 정도는 수긍하고 들어간다. 모순이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역자는 "단기적 전망에서 비윤리적인 것일뿐 장기적 전망으로 보면 결국 윤리적인 것보다 더 윤리적이라는 마키아벨리의 주장은 우리가 속으로는 그럴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는 것을 있는 것을 너무도 적나라하게 드러냈기에 불편하다"고 이야기한다. 바로 이점이 군주론의 핵심이 아닐까 싶다. 

국가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서는 어떤 수단이나 방법도 허용된다는 국가지상주의의 정치 이념인 마키아벨리즘. 단기적으로 보기에는 비도덕적이고 잔인해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국가의 안정과 평화를 이끌어낸다는 그의 사상이 비단 당시의 이탈리아에서만 타당한 이론이라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이미 현대의 우리도 이와 같은 정치 논리를 수 없이 보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무조건적으로 그의 주장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마키아벨리즘 역시 하나의 주장이고 하나의 사상일 뿐이다. 그의 사상에 동의하고 실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주장이나 사상에 대해 비판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책을 읽고 그를 비난하건 추종하건 그 역시 독자의 자유다. 

펭귄클래식에서 출간된 이책은 상당히 가벼워 들고 다니면서 읽기에 적당하다. 물론 주제 자체야 지하철의 흔들리는 차내에서 고민하기에는 부적합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번역도 자연스러워(군데군데 오타가 있기는 하다) 마키아벨리의 주장을 이해하기에 쉽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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