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르 베르베르. 천재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을 남자다. 그리고 작가다. 사실 나는 이 사람의 책에 대한 선입견이 제법 컸는데 뭐랄까 인기에 영합하는 그렇고 그런 류의 작가 중의 한 사람은 아닌가 오해하고 있었다. 마치 최근의 하루키와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의 책은 전혀 읽지 않았었는데 반전이 이루어진 것은 '타나토노트'였다.

이후로 그의 책을 마치 스펀지에 물을 빨아들이듯이 읽었는데 흔히 알려진 3부작이 준 정신적 충격은 대단했다. 물론 '신'의 마지막 결론 이후 꽤 오랜동안의 사색이 필요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나무'는 단편집이다. 그의 다른 책처럼 독자의 부담이 비교적 적은 책이다. 물론 페이지가 적을 뿐이지 담겨 있는 내용들을 고민하자면 또 끝도 없다. 그럼에도 군더더기없이 짧게 끊어지는 맛이 일품이다. 초창기의 하루키 작품을 읽는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인데 읽어나가는동안 하루키의 단편과 제법 공감이 되지 않는가? 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책에 실린 단편들 그리고 그 단편에서 이어져나오는 장편들을 굳이 연결지을 필요는 없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그 책의 내용 그러니까 내 눈 앞에 보이는 활자에 푹 빠지는 것으로 충분하다. 아니 오히려 눈 앞에 펼쳐진 내용들을 모두 소화하기에도 벅차기 때문에 굳이 생각의 영역을 지나치게 확장할 필요는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책은 특히나 연관성이 대단히 넓은 책이기에 무엇보다 '단절'작업이 크게 요구된다. 그래야 내용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워낙에 신출귀몰한 이야기와 구성 그리고 영역을 가지고 있는 베르베르이기에 이 방법이 이책을 읽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나 나름대로 정해버린 것이다. 물론 수많은 연관성들을 모두 아울러 가며 읽는 것도 나쁠 것은 없다. 하지만 오직 이책에만 빠져보고 싶다면 그다지 권하고 싶지는 않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18편이나 되는 단편들이 담겨 있다. 각각의 내용에 대한 이야기는 모음집에서는 별로 의미가 없을 듯 하여 적지 않겠지만 아무 작품이나 눈이 가는 것을 골라 읽어도 충분하다. 가능하다면 베르베르의 장편들을 읽은 다음에 쉬어 가는 시간에 읽어보면 어떨까 싶다. 그의 장편이 주는 피로감을 풀기에 이 단편들은 제법 치밀한 구성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어느 작품의 어느 부분만을 네모난 모양으로 잘라서 찍어보았다. 이것으로도 의미의 전달은 충분하다. 굳이 모든 문장을 한데 엮어 순서대로 맞추어 놓지 않더라도 말이다. 나는 이 문장이 꽤나 마음에 든 모양이다.



[도서]오셀로

윌리엄 셰익스피어 저/최종철 역
민음사 | 2001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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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질투, 미움과 배신 그리고 죽음이란..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사랑을 전제로 한다. 지난 번 서평을 쓴 멕베스가 권력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했다면 오셀로는 전형적인 남녀간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 남녀간의 사랑이야 워낙에 오래된 주제다보니 오래 전에 쓰인 글이라 해도 지금 읽어도 별로 이질적이지가 않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질투에 휩싸인 남자가 아내를 죽이고 그것이 오해와 음모에서 벌어진 것을 깨닫고 자살을 하게 되는...어쩌면 요즘도 흔히 일어나는 비극이다. 가만 생각해보면 예나 지금이나 사랑을 깨는 큰 원인 중의 하나가 질투와 오해라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지 그리고 그 본성이 세월이 지나도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흥미를 끈다.

오셀로의 비극은 단지 오셀로가 데스데모나를 오해하고 살해했다는데 있지 않다. 오셀로가 데스데모나라는 지고하고 순수한 여성을 오해하고 살해하도록 만든 제3자가 있다. 오셀로와 데스데모나 두 사람과 직접적인 연관도 없는 이아고의 등장과 그의 모함이 이 비극을 이끌어간다. 어쩌면 이 작품의 주인공은 이아고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오셀로의 행동이 이 비극을 만들어가도록 부추겼을지는 몰라도 막상 음모를 계획하고 추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본인의 선택이기 때문에 이아고라는 인간 내면의 사악함이 없었다면 이 비극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한 인간의 증오심과 복수심이 전혀 다른 양상에서 비극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이점이 셰익스피어의 다른 비극들과의 차이점이 아닐까 싶다.

약간 시점을 바꿔 보자. 데스데모나는 이 비극에서 어떤 위치일까? 단지 이아고가 오셀로에게 복수하기 위해 선택한 대상일뿐일까? 그렇다면 데스데모나의 위치는 너무도 하찮게 된다. 정절과 고귀함의 상징인 데스데모나를 그녀와는 상관도 없는 제3자가 파멸시키도록 만든 작가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아직 이 부분까지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인종과 계급과 나이를 넘어서 오셀로라는 인간을 사랑하게 되고 그때문에 죽게 된다. 작품에서는 그게 전부다. 셰익스피어는 남녀차별주의자였던 것일까? 다른 작품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점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이 작품에서의 데스데모나는 너무나 무기력하게 무너져 버린다. 작가의 의도는 무엇일까...이 점을 알기 위해서는 한 번의 독서로는 부족하리라...

그리고 결말에서의 오셀로의 자결..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그것을 죽음으로 속죄하는데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고들 하는데 나는 오히려 그가 무책임하다고 생각된다. 죽음이란 모든 것으로부터의 도피다. 아무 것도 듣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것 외에는 말이다. 결국 오셀로는 데스데모나로부터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친 것은 아니었을까..

햄릿, 멕베스에 이어 읽은 오셀로다. 세 권 모두 출판사와 번역자가 다른데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열린책들의 번역이 제일 낫지 않나 싶다. 민음사의 오셀로는 전반적으로 희곡이라는 느낌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마치 그냥 소설을 읽듯이 술술 넘어가는 방식인데 이런 편집을 좋아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내 경우는 열린책들처럼 연극의 대본처럼 된 방식이 읽기에 편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독자의 선택이니 가능하다면 직접 서점에 가서 읽어보기를 바란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은 모두 희곡이기 때문에 한 번 읽어볼 양으로 책을 펼쳤다가도 쉽게 읽히지 않는 경험을 하고 나면 그저 제목만 기억할 뿐 내용은 아무래도 좋다는 식이 되기 십상이다. 내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아 햄릿은 그나마 서평을 쓰기 위해 완역판을 읽었지만 나머지 3편은 읽지 못했었다. 그리고 이번에 큰 마음 먹고 시도한 작품이 맥베스다.

4대 비극이라 불리는 작품들 중에 심리묘사가 가장 잘 된 작품을 꼽으라면 나는 '맥베스' 이책을 꼽는다. 햄릿을 꼽지 않은 이유는 그 머뭇거림이 때로는 구차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차라리 맥베스의 과단성에 조금 더 점수를 준다. 물론 이 생각은 현재의 내 심리상태를 반영한 것이니까 시간이 지나면 맥베스의 과단성을 무모함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맥베스에는 비현실적인 공간과 시간과 대상이 존재하는데 바로 마녀들의 존재다. 그리고 이 마녀들은 극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 마녀들의 노래 중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아름다운 것은 추한 것, 추한 것은 아름다운 것. 안개 낀 더러운 대기 속을 날아다니자."

아름다운 것은 추한 것이고 추한 것은 아름다운 것이라니.. 한번에 와 닿지는 않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느 순간 이 문장이 확 와닿을 때가 있다. 이 문장만을 떼어 놓고 보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지만 맥베스 전편을 읽어 나가다 보면 이 문장이 적절하게 사용되었다는 느낌이 온다. 

맥베스의 감정 변화, 맥베스 부인의 감정의 기복.. 첫장에 등장하는 충성과 반역, 마지막장에 등장하는 충성과 반역.. 아름다운 것이 곧 추한 것이고 추한 것이 곧 아름다운 것이라는 문장을 줄거리를 통해 보여주고 있었고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이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허나.. 이 문장은 이 희곡을 읽는데서 그치기에는 왠지 아깝다. 어쩌면 하루하루의 나의 삶 혹은 타인의 삶과 세상의 번거로움에 빗대어 보아도 크게 어색하지 않은 문장이다. 아니 바로 우리네 삶의 현장에서 이 문장은 1초도 거르지 않고 적용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특히나 '이익'이 끼어들게 되면 아무리 숭고한 이상과 생각일지라도 그것이 나의 이익과 어긋나면 곧 추한 것이 되고 비열하고 더러운 생각과 행동일지라도 나의 이익에 도움이 되면 아름다운 것이 되는 경우를 우리를 직접 삶 속에서 겪고 있지 않은가.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국가의 존망이 달린 일까지.. 그 영역은 무한대에 가깝지 싶다.

세상에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이 있을까..라는 의문을 우리는 많이 가지지만 그에 대한 뚜렷한 대답은 하지 못 한다. 그러나 세상에 상대적인 진리라는 것이 있을까? 라고 묻는다면 누구나 어렵지 않게 긍정할 수 있을 것이다. 맥베스는 그런 상대적인 진리 안에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인간의 심리를 꿰뚫고 있어 읽는내내 가슴이 찔리는 느낌이다. 

내면에 감추어둔 욕망을 비밀을 꿰뚫림당하면 불편한 법이다. 맥베스는 그런 불편함을 독자들에게 있는 그대로 선사한다. 장르는 다르지만 이전의 하루키가 그랬었고 그때의 하루키의 글에 나는 푹 빠지기도 했었다. 물론 지금은 그 궤도를 많이 벗어난 모습에 관망 중이긴 하지만..

번역은 제법 마음에 든다. 뭐랄까 상황상황의 격정적인 감정을 잘 살리고 있어 책을 읽어내려가는 동안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또한 상대적인 것이니 번역자의 번역이 지나치게 극적이다라고 느끼는 분도 계시리라..

이제 4대 비극 중 햄릿과 맥배스에 대한 감상이 마무리됐다. 곧 이어 올라갈 글은 '오셀로'다 이번에는 민음사의 번역이다.



[도서]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상)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 저/이대우 역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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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주는 의미를 적나라하게 구현해냈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이책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중학교 때다. 우리 반에 참 조용한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지금은 많이 변했지만) 어 날 그 친구가 이책을 들고 다니며 보는 것을 봤다. '제목 참 희안한 책이네'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정작 읽어볼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그후로도 가끔 도스토예프스키라는 작가의 이름이 나오거나 이책의 제목이 들려올 때면 '아, 언젠가는 읽어야지..'하고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막상 서점에서 이책을 펼쳐보니 만만해보이지가 않았다. 분량도 분량이지만 언뜻 읽어보기에도 여간 난해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이제서야 이책을 읽게 되었다. 열린책들의 양장판..무려 3권이나 되는 데 1Q84같은 책은 3권이어도 부담이 없다는 생각이 들지만 어쩐지 고전은 권수가 이렇게 많으면 상당히 부담스럽다. 쉽고 자극적이고 큰 고민이나 생각없이 보는 책들에 너무 길들여진 탓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크게 두 개의 스토리로 이루어져 있다. 큰 주제인듯한 형제들의 이야기와 작은 주제인듯한 어느 아이의 이야기. 그러나 어느 한 쪽이 더 중요한 주제를 담고 있다고 함부로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두 주제 모두 깊이 생각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내게는 형제들의 이야기. 그 중에서도 둘째인 이반의 이야기가 좀 더 와 닿았다. <대심문관>이 등장하는 줄거리인데 전체적인 내용과 별개로 그 부분만 따로 떼어 놓아도 한 편의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신학적인 그리고 인간에 대한 성찰은 상당히 깊은 수준까지 내려가 있다.

문장을 읽고 또 생각을 하고 다시 읽어가기를 반복하다보니 3권의 책을 모두 다 읽는데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책의 내용의 절반도 이해하지 못 했다는 생각이 든다. 워낙에 범위가 넓고 다루고 있는 주제주제마다 숙고에 또 숙고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에 부적합한 것도 아니다. 인간군상들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시간의 흐름을 따라 죽 읽어내려가도 괜찮다. 책을 읽는 데 있어 정해진 규칙이란 없는 것이고 제 아무리 사상이 심오하고 주제가 복잡하다해도 자신이 어떻게 이책을 읽을 것인가 미리 정해만 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책은 문학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에 대한 하나의 해답이 될 것 같다. 단순히 정신적인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에 그치지 않고 무언가 책을 읽는 이로 하여금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궁극적으로 우리 인간은 어디에서 왔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원초적인 질문이다.

이책을 읽어내려가는 동안 아마도 많은 독자들이 그런 생각을 갖게 되리라 생각된다. 나 역시 그랬고 지금도 그 고민은 계속되고 있으니 말이다.



조르주 심농의 메그레 시리즈가 2011년이 되서야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셜록 홈즈와 메그레를 비교할 수 있는지는 논외로 하고 해외에서 그의 인기는 결코 부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심농 본인의 나름대로 복잡한 개인사도 이슈거리였지만 메그레 반장이라는 인물 역시 꽤나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메그레 시리즈를 읽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시대적 배경이다. 셜록 홈즈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의 인물(!)이라면 메그레 반장은 1930년 경의 인물이다. 역사에 대해 박식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장소적 배경이나 인물의 성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필요한 작업이지 싶다.

이 시대적인 상황은 감안하지 않는다면 소설을 읽는 내내 뭔가 어색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1930년대는 전 세계적으로 격변의 시대였다.세계 공황, 세계 대전 등 우리 역사에서 가장 긴박한 장면들이 스쳐 지나간 순간이었고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한 메그레 시리즈 역시 그러한 시대적인 상황들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수상한 라트비아인은 메그레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다. 심농에게 있어서도 상당히 초기 작품이라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정확하게 짜여진 추리 구조라던가 뭔가 독자의 호기심을 확 풀어줄만한 "꺼리"가 잘 보이지 않는다. CSI류의 첨단 범죄수사물에 길들여진 우리네들에게는 더더욱 그렇게 느껴질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이책을 읽으면서 색다르게 느낀 점은 추리소설임에도 마치 심리소설과 같은 인상을 받았다는 점이다. 물론 많은 추리소설들이 주인공들의 세밀한 심리상태를 다루고 있지만 수상한 라트비아인의 인물들에게서는 개개인의 인생사, 삶의 역정 등과 그에서 비롯된 현재의 고단함 심리상태가 잘 드러나고 있다.

범인들 혹은 피의자들의 고단한 심리가 그대로 묻어나는만큼이나 그들을 대하는 메그레의 태도 역시 그 시대와 그 인간들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메그레를 성공적으로 만든 요소라고 생각한다.

"가지"..

"경찰서로 말입니까?"

"아니.."

위의 짧은 대사에서 우리는 메그레를 읽을 수 있다. 아니 그렇게 메그레를 읽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책을 다 읽고났을 때...멋진 추리로 시원시원하게 사건이 해결되었다는 느낌보다 각각의 등장인물들의 아픔이나 상처 그리고 그것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해결하려한 메그레의 노력이 더 기억에 남았다. 통쾌하다는 느낌보다 씁쓸한 느낌도 없지 않았는데 이 역시 독자로 하여금 자신이 창조한 세계에 몰입하도록 만든 심농의 기술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서인지 추리소설이라는 느낌이 상대적으로 적게 드는데 이런 점 때문에 독자마다의 호불호가 갈릴 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심농의 수상한 라트비아인은 심농을 그리고 메그레를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리게 된 계기가 된 책이다. 역사적인 면에서도 제법 가치가 있다.


열린책들에서 나온 책을 좋아하는 여러 이유 중의 하나는 장정에 상당한 신경을 쓰고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덕분에 같은 책임에도 양장본을 추가로 구입한 경우도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이번에 읽은 조르주 심농의 수상한 라트비아인은 '역시 열린책들'이라는 기존의 생각을 한층 더 해 주었다.

처음 책을 받았을 때 표지가 양장이 아니어서 겉표지가 없이 배송이 되었나 싶기도 했는데 이번 메그레 시리즈의 장정은 이렇게 나올 모양이다. 두꺼운 종이의 느낌을 그대로 살리고 있는 점이 특이한데 전체적으로 책이 가벼워 한손으로 읽기도 좋고 실로 꿰매는 사철 방식은 조금은 과격하게(?) 책을 읽어도 거뜬히 버텨준다.

덕분에 복잡한 오전 출근 시간에 내려야할 역을 무려 두 정거장이나 그냥 지나치고 말았으니 적어도 '나'라는 개인에 한정해 보면 심농에게 펀치를 한 방 맞은 셈이고 메그레 반장에게 푹 빠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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