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들이라면 한 번쯤은 찾는 곳이 이곳 정동진이 아닐까 싶다. 정동진이 유명해진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우리가 이곳을 찾은 것은 새벽열차를 타고 떠나는 거의 마지막(?) 여행이 아닐까 싶은 마음에서였다. 청량리에서 11시 넘어 출발해 새벽 4시경에 도착하는 무박열차는 한창 나이 때는 별 무리 없이 즐기며 다녀올 수 있는 낭만이 있겠지만 한 두 해 나이가 들다보면 어쩐지 낭만보다 고단함이 점점 더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청량리에서부터 스냅식으로 여행을 죽 그려보고자 했던 생각은 덜컹거리는 열차와 자는둥마는둥하는 밤샘에 금세 어디론가 사라졌다. 35mm를 들고가야 한다는 내면의 압박은 극심했지만 결국 가벼움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LX-7만 들고 왔는데 일상의 스냅과 여행 스냅은 확실히 달라서 줌렌즈의 유용성에 새삼 놀랐달까.. 그래도 최대한 괜찮은 사진을 건져보겠다고 RAW 파일로 찍었더니 돌아와서 편집이 만만치가 않았다.


동해의 일출이란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는건지 좀처럼 해가 뜨는 모습을 보기는 어려웠지만 하루의 시작을 연인과 바라본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아무튼 파인더가 없는 똑딱이 디카는 여전히 사용법이 익숙지가 않아서 노출을 잡는데 늘 애를 먹는다.- 그래도 해가 뜨는 순간. 주변이 어둠에서 단 몇 초 사이에 환한 빛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역시나 감동적이다.


나는 바다를 유난히 좋아한다. '바다에 와서 소원 풀었네요?'라는 그녀의 말에 새삼 내가 얼마나 바다 이야기를 많이 했나 싶기도 했다. 한 없이 멀리 펼쳐진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모습, 약간은 비릿한 냄새와 함께 얼굴을 스치는 바람.. 이 두 가지만 해도 바다를 찾을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어쩌면 일상이 지나치게 도심에 집중이 된 삶을 평생 살아오다보니 막히지 않은 공간 자체에 대한 동경이 늘 내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지 않았을까..


단 몇 분 사이에 어둑했던 역 주변에 햇살이 드리우고 보이지 않던 길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온다. 그렇구나..원래 길이 있었는데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았을 뿐이구나.. 우리네 삶도 그런 것 같다. 어딘가 분명히 내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이 곧게 뻗어 있음에도 잠시의 어둠에 마음을 빼앗겨 그 길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는 것은 아닐까. 해 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했다. 그 어둠만 이겨내면 사방이 환해지는 공간 속에 내가 걸어갈 길이 또렷하게 놓여있음을 찾을 수 있다.


사진은 많이 찍고 볼 일이다. 예전처럼 필름을 현상하고 인화해야 하는 수고로움(물론 그 기다림의 즐거움은 없어졌지만)이 사라진 지금은 다다익선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다. 사진이 몇몇 특별한 계층들의 전유물이 되던 시대도 이미 지난 지 오래고 휴대폰에 붙어 있는 카메라만 해도 좋은 사진들을 많이 만들어내는 게 요즘이다. 어색함에 혹은 결정적인 순간에 대한 욕망에 누르지 못한 한 컷에 나의 소중한 기억들이 담길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한다면 사진 찍는 일에 인색할 것은 아니다. 


그녀를 만난 이후 내 사진에 대부분은 소위 '셀카'가 주를 이루고 있다. 내 사진의 색이 변한 부분 중의 하나기도 한데 처음에는 나도 어지간히 어색했었지만 지금은 내가 먼저 카메라를 들고 포즈를 잡을 정도가 됐으니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 맞는 모양이다. 아무튼 덕분에 DSLR은 점점 더 제습함 속에 들어갈 일이 많아졌다. 그나마 들고 다니는 것이 크게 어렵지 않은 35mm인데도 말이다.


여담이지만 요즘 새로 출시된 두 녀석이 마음을 어지간히 흔든다. LX-7의 후속기(사실 따져보면 완전히 달라졌다.)인 LX-100, 그리고 항상 나와 궁합이 맞지 않았던 캐논의 G7X다. LX시리즈를 제법 오래 사용을 했었기에 어쩌면 LX-100으로 넘어가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겠지만 내 사진인생에서 늘 뭔가 나와 엇갈렸던 캐논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생각보다 크게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겠다. 뭐.. 직접 내 손에 오려면 내년은 훨씬 넘은 언젠가가 되겠지만 가끔은 이런 상상으로도 즐겁다.


Panasonic LX-7 & iPhone5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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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사진 폴더를 뒤적이다보면 미처 지우지 못한 기억들을 담고 있는 사진들과 마주할 때가 있다. 조금은 소심한 일이겠지만 이별을 하고 나면 그 사람과의 기억이 담긴 사진은 모두 삭제를 하는데 연애를 하는 동안에는 대개 사진을 많이 찍는 데다가 여기저기 백업본을 만들어두다보면 온전히 지우지 않고 남아있는 폴더가 어디선가 툭 튀어나올 때가 있다. 

사람의 흔적이 남아있는 사진은 그 자리에서 바로 지우지만 장소가 남아있는 사진은 한동안 들여다본다. 사람은 잊을 수 있지만 장소는 잊기 어려운 까닭이다. 이전에도 비슷한 글을 적은 적이 있는데 우리의 기억이란 특정한 장소에 남겨진다. 그리고 그 장소에 남아있는 기억 속의 우리는 10년 전이건 20년 전이건 혹은 다른 어떤 시기건 그때의 우리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 세월이 지나 백발이 되어 그 장소를 다시 찾더라도 그곳의 우리는 10대의 혹은 20대의 젊은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그곳을 찾은 우리는 한동안 그 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다. 남겨진 기억 속의 나를 만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추억이라는 것은 어쩌면 그런 이미지들이 주는 평온함이나 행복감이 아닐까 싶다. 이제 세월이 지나 떠나간 이의 손을 잡을 수도 없고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지만 함께 걷던 길을 함께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던 장소를 오늘도 여전히 걷거나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비단 연인의 경우만이 아니라 가족 혹은 반려동물과의 기억도 다르지 않다. 고향을 떠난 이들이 고향에 대한 향수를 느끼고 끝내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물론 그 장소가 반드시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때는 무의식 중에도 특정한 장소를 피해 돌아가곤 하는데 이것 역시 장소가 우리에게 남겨둔 기억 때문이다. 사람은 떠났지만 그 장소에는 여전히 우리의 모습이 남아있으니까... 그 모습과 마주하는 것이 내키지 않는 것이다. 그래도 가능하면 어떤 장소에 남아있는 기억들은 좋은 것이길 바란다. 

사람이 기억을 자신의 마음속에서 되새기지 않고 어떤 장소나 어떤 사물에 의지하는 것은 사실 그렇게 바람직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 어쩌면 그만큼 각별한 마음이 희미해져간다는 의미도 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이성적으로 하나하나 따져가며 추억을 되새길 일은 아니지 않을까? 우연이건 혹은 일부러 시간을 내서건 그래도 좋은 기억이 남아있는 곳을 찾아가 이전의 행복했던 모습을 떠 올려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너무 복잡하게 너무 어렵게 혹은 너무 이성적으로 살 일은 아니다. 삶이란 그리 길지 않고 그 삶 속에서 만나는 많은 인연들과의 기억은 나라는 사람의 삶 자체기 때문이다. 이제 한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어디건 자신에게 좋은 기억이 남아있는 장소를 한 번 찾아가 걸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과거에 연연하고 미련을 못 버리고 그런 차원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행복했던 기억과 마주해보는 일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창경궁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날따라 결혼식 야외촬영이 많은 날이었다. 결과적으로 보는 사진은 신랑과 신부가 밝게 웃고 있는 사진들이지만 그 사진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제법 분주하고 한편은 피곤스러워 보였다. 결혼을 해 본 적이 없으니 야외촬영이 얼마나 많은 수고를 동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신랑신부 모두 제법 힘들어보이는 표정. 

요즘은 디지털카메라가 일반적이니 사진에서처럼 중형 판형의 카메라를 쓰는 일은 없지 않을까 싶은데.. 아무래도 디지털보다 불리한 점이 많으니 한 컷을 찍는 데도 제법 많은 과정들이 필요한 모양이다. 나름 괜찮은 구도라고 생각해 찍었지만 호수 건너에서 35mm로는 무리.. 크롭을 해보니 좀 나아보이긴 하지만 표정을 담지 못한 점은 아쉬웠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차라리 표정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이 그래도 행복한 날의 사진을 담는 이들에게 예의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이동 중에 워낙 힘들어하는 분들이 많았기에..

일포드 XP2는 언제나 이렇게 부드러운 흑백을 그려준다..


Contax Aria, Carl Zeiss 35mm Distagon f/2.8, Ilford XP2, LS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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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라는 이름은 우리나라의 어떤 시기에는 금기시되는 이름이었다. 막스 베버도 오해를 사곤 했었던 시절이니 칼 마르크스라는 이름은 아무래도 조심스러운 그러나 한편에서는 호기심의 대상인 양면성을 가진 그런 존재였다. 대학 시절 김수행 선생의 자본론을 들고 다니며 폼을 잡았지만 정작 그안에 담긴 내용들은 거의 소화해내지 못했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지금 류동민 교수의 마르크스을 만나게 되었다.

이책은 마르크스의 저작은 아니다. 정치경제학 교수인 저자가 마르크스 철학을 이 시대의 상황에 대입해 좀 더 이해하기 쉽게 풀어쓴 책이다. 쉽게 풀어쓴 책이지만 마르크스 철학의 큰 틀을 가능한 많이 담고자 노력을 한 까닭에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아니 글자글자를 읽어가는 동안 제법 오랜 생각을 해야한다는 표현이 옳을 것 같다.

류동민 교수는 마르크스 철학을 사랑과 희망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마르크스의 이미지와는 많이 다르다. 아마도 시대적인 흐름에 의해 마르크스가 왜곡된 탓이리라. 류 교수는 마르크스 철학과 오늘날 우리나라의 현실을 연결지어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래서인지 공감되는 부분이 많고 이해가 조금 쉬워진다. 마르크스와 시대 모두를 이해하지 않고는 쓰기 어려운 작업을 담담히 이어가고 있다.

류 교수가 사랑과 희망을 마르크스에 대입한 이유. 그것이 이책의 주제다. 책의 마지막장을 덮을 때 독자 스스로 그 해답을 어렴풋하게나마 깨닫는다면 필자의 노고는 위로받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어려울 것 같지만 천천히 그리고 꼼꼼하게 문장을 읽어가다보면 '왜'라는 처음의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된다.

책을 읽기전 우선 제목을 들여다봤다.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 아프다...아프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 아픔은 사람마다 느끼는 것이 다르고 그 원인 역시 제각각일테다. 실연이 원인일 수도 있고 경제적인 것이 원인을 수도 있고 세태가 혹은 정치하는 모양새가..등등 나를 둘러 싼 모든 것들이 나를 아프게 하는 원인일 수 있다. 

류 교수는 이런 원인들 그리고 그 해결책을 마르크스로부터 찾는다. 그리고 참 신기하게도 우리를 아프게 한 많은 원인들이 마르크스의 언어로 풀이가 되어 가는 것을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느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체제의 바깥에서 체제를 전체로서 비판하는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견해를 바탕으로 관계성을 끌어 내고 연인들의 관계로 이어간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서로의 사람이라는 관계 속에서만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 사랑이 갖는 진정한 한계를 깨닫지 못합니다'라고 류 교수는 풀어 간다. 그리고 그 관계의 바깥에서 그 체계를 성찰할 때 그 사랑의 한계를 깨닫게 된다고 설명 한다. 책 전체가 대개 이런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어 마르크스 철학의 딱딱함과 인간적인 부분들을 적절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저자가 서두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책은 인간의 개인적인 소외에서 출발하여 사회적인 관계로 그리고 그 사회적인 관계에서 규정되는 개인으로 돌아오는 흐름을 타고 있다. 그리고 그 관점은 비록 마르크스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는 다를지 몰라도 마르크스를 이해하는데는 더없이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동안 마르크스라는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저었다면 류 교수가 이끄는 여행에 참가해보자. 조금은 친근해진 마르크스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기다림은 대상을 의미하지 않아도 좋다. 그저 기다림이라는 그 자체만으로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끔은 빈 벤치에 앉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기다려볼 때가 있다.

그 기다림의 대상이 헤어진 연인일 수도 있고

그 기다림의 대상이 다가올 어느 계절의 따스함일 수도 있고

그 기다림의 대상이 새벽같이 일터로 향한 아버지일 수도 있다.

기다림은 대상을 의미하지 않아도 좋다.

그저 기다림이라는 그 자체만으로 의미가 있다.

Nikon F5, AF Micro NIkkor 105mm f2.8D, Softfilter, LS-40 film scan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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