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카이 마코토는 내가 꽤나 좋아하는 감독이자 프로듀서다. 흔히 그에 대해 영상미가 뛰어나다거나 대사가 매력적(혹은 난해하다)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이번에 개봉된 작품인 '언어의 정원(言の葉の庭)'은 그 두 가지를 한데 어우러지게 한 작품이 아닐까 생각된다. '단어'의 사용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작품들은 해당 언어의 원어로 보고 듣는 것이 가장 좋은데 워낙 뜬구름 잡기식으로 공부한 일본어인지라 듣기는 엉망이어서 꽤나 고생이었다. 혹 의미의 해석이 어색하다면 전적으로 내 탓이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언어'라는 단어에 쓰인 한자인데 아마도 언어라면 언어(言語)가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言の葉이라고 적고 있다는 점.



이 작품이 주요 시간적 배경은 여름이다. 그리고 비가 많이 내리는 장마철이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이 비오는 날 시작되고 비오는 날 끝이 난다. 비가 내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생각을 해보게 되는데 언어의 정원에서 펼쳐지는 비는 아마도 기다림과 설렘 사랑과 아픔 등 여러가지 의미를 복합적으로 가지고 있지 않나 싶다. 전작인 초속 5cm에서 펼쳐졌던 영상미는 언어의 정원에서 극치를 보인다. 마치 사실주의 화가의 작품을 보는 느낌이랄까. 


사랑이라는 감정은 언제 생겨나는 것일까 생각을 해 본다. 어느 노래의 가사처럼 정말 '아주 우연히 만나'는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를 만나 익숙해지다보니 자연히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이어지는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사랑'이라는 감정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고 그 익숙함이 일상이 되어 버리는 것인지 어느 것이 맞는 것일까 알 수는 없다. 그렇기에 '사랑'은 영원한 인간의 주제가 아닐까. 


신카이 마코토는 '언어의 정원'에서 조금은 특별한 사랑을 다룬다. 하긴 이전에 그가 다룬 작품들도 어느 하나 평범한 것이 없었지만 이번에는 한국 사람들이라면 조금은 거부감(?)이 들지도 모를 그런 사랑이다. 하지만 그것도 일종의 편견이 아닐까? 나이나 사회적인 신분 혹은 그외의 배경들은 어차피 눈에 보이는 형식일 뿐은 아닐까.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하는데 이유가 딱히 달린다면 그것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 생각에 반대하는 분들도 많겠지만...


비 내리는 어느 초여름날 우연이라면 우연하게 시작된 이 만남에서 '사랑'이 시작된다. 그러나 그 사랑은 서로에 대한 사랑이전에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즉 사랑 이전의 사랑이야기를 먼저 써 내려간다. 그리고 그 써 내려감이 잠시 멈춰 어디로 가야할지 도무지 갈피를 찾지 못 하고 있을 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손을 잡아 그 이야기를 마저 써 내려간다. 이 작품은 그렇게 사랑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사랑이란 불완전함과 불안전함이 만나 서로의 결핍을 채워가는 과정이기에...


모든 사랑이 아무런 역경없이 행복하기만 할 리는 없다. 아니 어쩌면 행복하고 즐거운 날들보다 힘겹고 고통스러운 날들이 함께 한다는 것에 더 많이 담겨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그 고통을 그 힘겨움을 함께 한다는 것은 서로의 삶을 지켜내겠다는 다짐과 의지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사랑의 과정 속에는 오해도 갈등도 있을 수 있다. 아니 오히려 그것들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마음에도 없는 말로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것처럼 사랑에 독이 되는 것도 없다.


사랑은 행복한 일이고 즐거운 일이고 기쁜 일이다. 하지만 그 행복한 순간에 이르기 위해서는 긴 기다림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긴 기다림 끝에 서로를 마주 보고 섰을 때 비로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평온함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난 어느 날 우연히 만나 그날로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쉽게 믿지 않는다. 설령 그렇게 시작되더라도 지속되기는 어렵다. 오랜 기다림의 시간 끝에 시작된 사랑도 때로는 너무나 쉽게 깨질 수 있기 때문에...


흔히 '너를 위해 떠나겠다'든지 '당신에게는 내가 부족해', '더 좋은 사람 만나' 라든지 하는 말들을 하곤 하는데 이런 말은 결국 서로에게 큰 상처만 줄뿐이다. 왜 스스로 선택한 사랑에 책임을 지지 못하는가. 자신이 선택한 사랑이라면 상대에 대한 약속 이전에 자기 자신에 대한 약속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일까. 물론 그 순간순간에 이런 것들을 생각할만큼 이성적이지는 못한 것이 또 우리네 사람이니 그토록 많은 만남과 이별이 존재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끝내 그 순간을 이겨낸다면 그것으로 사랑은 한 번의 기회를 더 얻은 것이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랑의 날들은 그렇게 이겨내고 버텨내야 하는 날들이 대부분이다. 아름답고 달콤한 시간만으로 가득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사람의 삶이란 그리고 사랑이란 그렇지가 않은 법. 결국 사랑이란 두 사람이 하나가 되어 세상과 맞서 이겨내는 순간순간들의 기록이 아닐까. 사랑을 하는데 사랑을 하기 전보다 왜 마음이 더 아플까를 묻지만 그게 정상이다.


오랜만에 진득하게 앉아서 본 작품이었다. 상영시간은 1시간이 채 안 되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의미들을 생각하기에는 충분했다. 워낙 감독이 영상과 단어에 의미를 많이 부여하는 까닭에 장면장면에 꽤 신경을 써야했고 안 들리는 일본어에 귀를 세우고 있느라 피로도가 올라가기는 했지만 내게는 괜찮은 작품이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호불호가 많이 갈릴 것 같다. 신카이 마코토의 이전 작품을 몇 편 보고 간다면 조금은 도움이 되지 싶다.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이게 뭐야?'라는 인상을 줄 지도 모르겠다.


엔딩 크레딧이 모두 올라가고나면 이후의 이야기들이 짧게 펼쳐지는데 여주인공 유키노가 보낸 편지의 날짜가 내년 2월인 점이 재밌다. 비오는 날이 거의 대부분이다보니 여름만을 배경으로 하는 것 같지만 사실 남자 주인공의 이름에는 가을이 여자 주인공의 이름에는 겨울이 담겨 있다. 그리고 이 편지의 끝부분에 등장하는 '따뜻한 계절' 즉 봄까지 포함하면 4계절이 모두 들어있는 셈이다. 봄은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그래서 아직은 알 수 없지만 긍정적인 두 사람의 미래를 암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무엇보다 손글씨로 안부를 묻는다는 설정이 마음에 든다.

그리고 이 작품에는 고전 문학 선생인 유키노가 일본의 고대 문학 작품집인 '만엽집'에 실린 작품으로 이야기를 건네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미 여러 곳에 소개가 되었기 때문에 문장을 옮겨 오기보다 의미만 적어 보면 먼저 

"멀리서 천둥 소리가 들리고 구름이 낀 것을 보니 비가 올 것 같다. 비가 오면 당신을 잡아둘 수 있을텐데.."라고 말을 건네고  이에 대해

"천둥 소리가 작게 들리고 비가 내리지 않더라도 나는 여기에 머무르겠습니다. 당신이 그러기를 바란다면.."이라고 답을 한다. 

꽤나 낭만적인 문답인데 이 대사가 오고 가는 장면이 제법 처리가 멋드러진 탓인지 '아, 멋진 대사를 하고 있군'이라는 인상을 남겼다. 이 두 대사는 작품의 시작과 끝에 나뉘어져 등장하고 천둥과 구름 그리고 비는 여러 곳에서 복선으로 등장하는데 작품 전체의 줄거리와 이들의 관련을 연결해서 보는 것도 좀 더 작품에 몰입해서 볼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한 번만 보고 여러 복선들을 맞추기는 아무래도 어려워보인다.

"사랑, 기억하고 있나요?" 라는 대사가 문득 떠오른다.





데리다와 들뢰즈..현대 철학은 물론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두 사람이 아닐까 싶다. 이책은 이 두 사람을 묶어서 이야기한다. 제법 적절한 묶음인데 김영사의 '지식인마을'이라는 일종의 기획물 중의 한 권이다.

이런 시도는 제법 신선한데 일반인들의 경우 직접 저자가 쓴 책(1차 문헌)을 읽기가 쉽지 않은 점을 고려하면 2차 문헌인 이와 같은 책들은 적당한 안내자의 역할을 해 주는 동시에 해당 저자들의 저서를 본격적으로 읽기 위한 몸풀기로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2차 문헌은 제3자에 의한 재해석인 경우가 많아(물론 번역 작품에 대해서도 나는 같은 생각이다) 온전히 원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기 힘들거나 혹은 아예 왜곡된 지식을 습득할 위험도 동시에 안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2차 문헌을 피할 수 없는 것은 해당 언어에 대한 지식의 부족과 해당 철학에 대한 지식의 부족때문이다.

이책의 저자도 지적하고 있듯이 특히나 언어의 유희에 정통한 데리다의 저작을 읽기 위해서는 프랑스어를 원어민 이상으로 구사할 수 있어야 하는데 사실 외국인인 우리에게 이것은 쉽지 않은 부분이다.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는 번역물 혹은 2차 문헌으로 지식을 습득할 수밖에 없는데 이때 중요한 것은 번역자와 2차 문헌 저자의 실력이다.

김영사의 지식인마을 시리즈는 아직 이책밖에 읽지 않아 뭐라고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이책에만 한정을 둔다면 잘 짜인 구조는 성공적이지만 그안에 담은 내용은 어색하다는 인상이다. 초대-만남-대화-이슈라는 4단계의 편집방식을 택한 이책은 처음에는 '상당히 인상적이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대화'부분에서는 상당히 실망할 수밖에 없었는데 뭐랄까 저자 자신도 헷갈리는 듯한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러 명의 인사들을 불러 모아 그들의 입을 빌어 생각이나 사상을 설명한다는 의도는 좋았지만 저자 자신이 이 대화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주장이나 생각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 듯 '대화'라기보다는 '설명'에 치우는 분위기였다. 이런 방식의 글을 전개는 오히려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가 보다 잘 이끌어가고 있는데 내 지식의 빈약함때문인지는 몰라도 이책의 저자가 풀어간 설명들은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책의 도입부인 초대-만남 부분은 상당히 잘 쓰여져 있다. 데리다와 들뢰즈의 사상, 생각, 인생을 초심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글을 잘 풀어가고 있다. 아마 이런 이유로 대화 부분이 영 어색하게 생각되었는지도 모르겠는데 앞부분의 저자와 뒷부분의 저자가 다른 사람은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물론 내가 이 블로그에서 여러 번 적듯 책에 대한 판단은 온전히 독자의 몫이다. 내가 이책에 대해 느낀 점은 내 느낌일 뿐이다. 다른 이가 이책을 접할 때 오히려 대화 부분이 매끄럽고 앞부분이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다. 어찌되었건 제법 신선한 시도와 전개 방식인 것은 분명하니 스스로 읽어 보고 판단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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