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산행을 준비는 꾸준히 해왔지만 오늘 걸음이 올겨울의 첫 눈꽃산행이 될 줄은 몰랐다. 밤 사이 눈이 내렸다는 소식에 대수롭지 않게 '아이젠만 챙겨 가면 되겠지'라고 생각하고 나선 길이었는데 산은 이미 눈으로 가득 덮여 있었다. 그동안 작은 산들은 여러 곳을 다녔지만 큰 산은 오랜만이었기에 느낌이 남달랐고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사람이 있었기에 포근했던 겨울 지리산행이었다.


지리산. 3개의 도에 걸쳐있고 백두대간의 종착점인 우리나라 명산 중의 한 곳이다. 우리가 택한 길은 백무동에서 출발해 한신계곡을 따라 올라가 세석대피소에서 1박을 하고 장터목을 거쳐 천왕봉에 이르는 길이었다. 


백무동에서 거리만으로 볼 때는 천왕봉까지 큰 무리없이 다다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산행을 시작하고 나니 만만한 길이 아니었다. 


동서울터미날과 백무동터미날을 잇는 버스 시간표다. 17일부터 12월 15일까지는 산불방지기간으로 세석대피소가 한 달간 문을 닫기 때문에 백무동쪽으로 산행은 불가능하다. 원래 세석대피소의 폐쇄는 15일부터였는데 어쩐 일인지 이틀이 연장되었고 덕분에 계곡 풍광이 좋은 길로 오를 수 있어서 무척 다행이었다.


세석길의 시작. 산 아래에는 눈의 흔적을 볼 수 없었고 오히려 늦가을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지리산은 소위 '큰 산'이다. 이런저런 경로로 해서 정상까지 오르는 길이 크게 어렵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정말 겸손하게 많은 준비를 해야 산 자체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무턱대고 덤벼들어서는 산은 쉽게 길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석과 장터목 갈림길. 이곳에서 우리는 세석으로 향하는 길로 접어 들었는데 천천히 걸으며 주변의 경치들을 즐기며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며 저무는 가을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왼쪽 길로 가면 마치 설악산의 오색약수길을 연상시키는 계단길을 만나게 되는데(물론 오색의 계단에는 미치지 못 한다) 선택은 본인의 몫이지만 등산보다는 하산 루트로 권해본다. 


그리고 도착한 세석대피소. 군데군데 녹지 않은 눈의 흔적들이 보인다. 입산통제가 이틀 연장됐지만 많이 알려지지 않은 까닭인지 이날 대피소에 머문 사람은 우리 두 명과 남성 등산객 두 명 이렇게 4명이 전부였다. 대피소가 이렇게 텅텅 비는 경우도 있나 싶었고 덕분에 여유있게 쉴 수 있겠다 했는데 사람이 적어서 그런지 우렁찬 코고는 소리가 온 방에 울려퍼지는 부작용도 있었다.


세석을 벗어나 조금 걸으면 이제 사방이 눈밭이다. 한겨울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은 풍경들이 사방에 가득 했다. 눈이 온전히 자리잡기 전이어서 굳이 아이젠이 없어도 그럭저럭 다닐만하긴 했지만 오늘 이후로 이곳을 찾는다면 아이젠은 초반부터 착용하는 것이 좋겠다. 세석에서 장터목에 이르는 길은 풍광이 참 멋드러졌다. 1박 장소를 바로 장터목으로 잡지 않고 세석으로 잡은 것도 이 경치를 놓치기 아깝다는 그녀의 판단이었고 덕분에 이른 설산의 풍경을 온몸으로 감상할 수 있었다.


멀리 촛대봉이 보이고 풍경을 만끽하는 등산객의 모습이 보인다. 11월 중순에 이런 눈밭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참 즐거운 일이다. 얼마 안 있으면 사방이 눈으로 덮일 날이 오겠지만 시간을 앞서 이런 풍경 속에 빠져보는 것도 꽤 매력적인 경험이 아닐까 싶다. 세석에서 장터목에 이르는 길은 역시나 사람이 많지 않았다.


지리산의 매력은 무엇보다 마치 벨벳을 늘어놓은 듯 산자락이 겹겹이 펼쳐져 있는 이런 모습이다. 어디가 끝인지 모르게 산자락이 이어지고 또 이어져 장관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사진으로 담아내기에 풍경이 워낙 압도적인 것이냐 사진 실력이 부족한 것이냐면 당연 후자일테지만 한참을 서서 바라보던 이 풍경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 아쉬움은 산행 내내 남아있었다.


멀리 보이는 낮은 봉우리들은 눈이 녹아 가을산이지만 내쪽으로 가까워질 수록 봉우리들이 높아지면서 눈이 그대로 남아 있어 겨울산의 모습을 하고 있다. 좀처럼 보기 힘든 이 모습은 요즘이 아니면 만나기 어려운 풍경이다. 여름을 뺀 3개의 계절이 시간의 순서에 따라 아래에서부터 위로 변화하는 그래프처럼 그림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능선길을 따라 걷다보면 눈 사이사이로 때이른 눈에 놀란 푸른 잎새들이 보인다. 한겨울이 오면 이 약간의 푸름마저 사라져버릴텐데 참 재밌는 경험이었다. 그녀는 오늘 날씨가 도왔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는데 생각해보니 초입부터 장터목에 이르기까지 쨍한 날씨였고 능선길에서 마주하는 바람도 그리 강하지 않아 경치를 진득히 감상할 수 있었으니 운이 좋았다기보다는 산이 도와주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다.


한발한발 내딛는 걸음마다 눈 밟는 소리가 조용한 겨울산에 잔잔하게 퍼진다. 오고가는 이들이 거의 없으니 정말 여유를 가지고 산의 면면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갑자기 내린 눈에도 이런 멋진 설경이 펼쳐지니 정말 제대로 눈이 내린다면 이 풍경이 또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라는 기대도 한껏 해 본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면 여기도 이른 눈에 놀란 나무들이 보인다. 몇몇은 내린 눈을 그대로 받아들여 눈꽃을 피우고 있고 몇몇은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내린 눈을 털어내 원래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렇게 하나의 계절과 또 하나의 계절이 맞물리며 눈으로 볼 수 없는 시간이라는 존재를 볼 수 있게 해 주고 있었다.


문명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온전히 생존본능만 가지고 버텨야 하는 시간이었지만 함께 하는 이가 있어 힘겨움보다는 따뜻함으로 지낼 수 있었던 이틀이 아니었나 싶다. 지리산 초행인 나를 챙겨가며 열심히 걸어준 그녀에게 감사한 마음이다. 


장터목 대피소에 다다르니 이제야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취사장을 가득 메운 산객들. 무엇이 이들이 이 높은 곳까지 사서 고생을 하며 오르도록 만들었을까. 산의 부름. 그 이상의 다른 대답은 생각나지 않았다. 몸 어느 한 구석 아프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의 고통을 감내하며 산을 오르는 것은 그 부름을 들은 사람의 몫이다.


Panasonic LX-7


겨울 산행은 다른 계절에 비해 소위 '장비'가 필요해진다. '명필이 붓을 탓하랴'는 말도 있지만 겨울의 산에 대해서는 이 말이 어느 정도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겨울 산행에 필수적인 장비들을 적어보자면 이것저것 많겠지만 가장 우선적으로 장만(?) 해야할 품목에 배낭을 꼽아본다. 왜냐하면 겨울산에 오르기 위해 준비해야 하는 여러가지 장비나 의류들을 담을 수 있는 시작이자 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민고민 끝에 한 녀석을 들였다.


풍뎅이처럼 불룩 튀어나온 전면부가 인상적인 그레고리 Z40 2014년형이다. 그레고리 배낭이 이름값을 하는지는 이전에 사용해본 적이 없어 알 길은 없었고 고어텍스처럼 과대 평가된 것이 아닌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무렵 우연히 찾은 매장에서 등에 메본 이후 다른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거다! 라고 유레카를 외친 배낭이기도 하다.


뒷면은 이렇게 생겼다. 등산 배낭이 뭐 저리 복잡한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산행 중 땀이 등에 차서 흐르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이전에도 이런 비슷한 류의 배낭을 사용해본 일이 있지만 심하게 땀이 나는 경우라면 이런 기능성 장치로도 사실 감당하기는 어렵다. Z40의 무게 배분은 아래에 보이는 허리끈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데 허리끈을 조인 상태에서 흔한 말로 어깨 부분에 달걀이 하나 들어갈 정도의 여유가 생긴다.


옆에서 바라보면 대략 이런 모양새인데 곡선으로 프레임이 들어가 있고 그것을 지지하는 이중 구조로 되어 있어서 전체적인 배낭의 수납력은 떨어지게 된다. 40리터급 배낭이면 1박 2일 정도의 산행에 무난해야 하는데 이 독특한 프레임 구조 덕분에 패킹을 신경 써서 하지 않으면 넣을 것 못 넣고 가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통기 시스템은 사용자마다 호불호가 분명히 갈릴 부분이기도 하다.


상단 헤드 부분에는 안쪽과 바깥쪽으로 각각 수납 공간이 있다. 자주 사용하는 물건은 바깥쪽에 배치하면 되는데 전체적으로 내부 파티션은 없는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작은 물건을 패킹해야 하는 경우는 별도의 디팩이나 주머니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이런 점은 다소 불만이긴 하지만 말이다. 재질은 일단 어느 정도 방수성을 갖고 있으며 내장된 레인커버가 있어서 악천후 대비는 무난할 것으로 보인다.


튼실한 허리벨트에 비해 늘 욕을 먹는 허리벨트 주머니는 신형 모델에서도 별반 개선된 것이 없어 보인다. 아이폰5S가 들어가고나면 거의 여유 공간은 없는 편인데 간단한 행동식이나 랜턴 정도는 수납이 가능하지만 문제는 벨트가 배낭을 맸을 때 허리 좌우로 많이 치우치기 때문에 물건을 넣고 꺼내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40리터급 배낭에 너무 많은 것을 바랄 수도 있겠지만 아쉬운 부분임은 분명하다.


이전 모델과 다르게 신형 Z40은 하단부 개방이 되지 않고 경사가 진 형태로 되어 있다. 덕분에 배낭을 똑바로 세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2014년형의 경우 백패킹을 염두에 두고 제작했다는 말도 있는데 사진에 보는 것처럼 하단에 깔판 같은 것을  묶을 수 있는 고리가 추가되어 있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 그런 의도로 제작된 것 같기도 하다. 침낭을 묶기에는 조금 짧아 보이기는 한다.


전면의 풍뎅이 같은 부분은 그 형태 그대로 통짜의 수납 공간인데 가벼운 바람막이 정도는 수납이 가능하지만 우모복 같은 패딩류는 넣기에는 공간이 부족해보인다. 제조사의 설명으로는 옷을 넣는 곳이 맞기는 한데 역시 평가가 엇갈리는 부분이다. 도드라진 모습에 비해 애매한 수납공간이라 이곳을 어떤 용도로 쓰는 것이 좋을지는 고민이 좀 더 필요해보인다.


풍뎅이 부분을 들어올리면 나타나는 공간인데 또 하나의 수납공간이 등장한다. 그 공간은 제법 넓은데 역시 통짜 공간이라 애매하다. 아마도 내 패킹 습관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주머니가 많은 것이 좋은데 그런 면에서는 Z40은 꽤나 불친절한 배낭인 것은 분명하다. 착용감에 반해서 들인 녀석이긴 한데 앞으로 산행을 하면서 적당한 사용법을 찾아야 할 것같다.


헤드를 들어올리면 이런 모양이다. 앞서 이야기한 내부 수납 공간이 하나 더 있다. 중간쯤에 보이는 삼각형 모양쪽으로 수낭의 빨대(?)가 나오게 되어 있는데 수낭을 쓸 일은 없으니 내게는 불필요한 부분이다. 다른 배낭들도 그렇겠지만 Z40은 유난히 체결되는 고리들이 많은데 군대 시절 생각하면 소위 끈처리를 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 정도다.


배낭의 메인(?)부분은 이렇게 되어 있다. 상단을 조이는 방식인데 끈을 한쪽으로 당기면 배낭 입구가 개방되고 다른 쪽을 당기면 조여지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이 좋은 것이 배낭의 크기를 어느 정도 사용자가 조절할 수 있다는 점때문이다. Z40도 이곳저곳에 배치된 끈들을 타이트하게 정리하면 제법 컴팩트한 크기로 작아진다.


위에서 보면 이런 모양인데 사진상으로는 잘 티가 나지 않지만 손을 넣어보면 프레임 구조때문에 수납 공간이 넉넉하다는 느낌보다는 좁다는 느낌이 먼저 든다. 패킹을 효율적으로 하는 기술이 많이 부족한지라 결국은 디팩을 채워넣은 다음 나머지 공간을 활용해야 할 것 같은데 패킹을 잘 하는 분들은 넉넉한 공간일 수도 있겠다.


배낭을 거꾸로 돌리면 이렇게 보이는데 이전 버전과 달라진 것은 스틱 걸이가 고무줄식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화면 상단에 좌우로 고리 2개가 보이는데 이 줄을 당긴 다음 스킥 하단부를 고정시키는 방식이다. 아무튼 Z40에서도 스틱을 걸고 풀기 위해서는 여전히 배낭을 등에서 벗어야 한다. 중간에 보이는 아래로 처진 고리 모양은 전면부를 개방할 수 있는 지퍼다.


지퍼를 열면 이렇게 배낭의 전면이 개방되는 형태인데 배낭을 위에서 부터 열지 않고 바로 내용물을 꺼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디팩 사용자라면 전면부가 개방되는 코끼리 디팩을 사용하는 것이 좀 더 편리하고 Z40의 경우는 미스테리월의 스몰-롱 디팩이 적당한 크기로 잘 어울린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이 지퍼에 연결된 천끈인데 끈을 지퍼에 고정시킨 부분이 바깥쪽으로 되어 있고 마무리가 약간 날카롭게 되어 있어 급하게 끈을 잡고 지퍼를 열 때 손이 다칠 수도 있는 점이다. 보통 지퍼를 열 때 좀 더 많은 힘이 들어가는 점을 생각한다면 방향을 반대로 고정시켰으면 어땠을까 싶은 부분인데 사용자가 주의를 하는 수밖에 없다.


글을 적다보니 처음 내가 Z40을 등에 메보고 느낀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아 보이는데 아마도 직접 산행을 하고 난 이후의 감상이 아닌 방안에서 리뷰를 하듯 이것저것 비판적으로 바라봤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정말 쓸만한 배낭인지는 꽤 많은 산행을 함께 한 다음에 비로소 알게될 것같다.

사진에 한창 빠져 있을 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 사진을 찍는 것보다 바디나 렌즈에 더 신경을 썼던 기억이 있는데 등산에 한창 빠지고 나니 정작 산에 가는 것보다 산행 장비들에 정신이 팔리는 요즘이다. 취미라는 게 결국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 아니냐는 서툰 변명을 해 본다.



올해를 마감하는 날. 어디를 올라가볼까 생각을 했다. 원래는 북한산을 오를까 했는데 왠지 마음이 남쪽으로 향해 청계산으로 발길을 돌렸다. 

청계산은 높이 618 m이며 주봉인 망경대(望景臺)를 비롯하여 옥녀봉(玉女峰) ·청계봉(582 m)·이수봉(二壽峰) 등의 여러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이수봉은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된 정여창이 이곳에 숨어 위기를 두번이나 모면하였다고 지어진 이름이다. 서쪽에 관악산(冠岳山), 남쪽에 국사봉(國思峰)이 솟아 있으며, 이들 연봉과 더불어 서울의 남쪽 방벽을 이룬다. 남북방향으로 뻗어 있는 능선은 비탈면이 비교적 완만하며 산세도 수려하다. 서울 근교에 위치한데다 서쪽 기슭에 서울대공원을 안고 있어 하이킹 코스로 찾고 있다. 정상인 망경대는 출입이 통제되어 있어 북쪽의 청계봉이 정상을 대신하고 있다. 남서쪽 중턱에는 신라 때에 창건된 청계사가 있고, 동쪽 기슭에는 경부고속도로가 동남방향으로 지난다. -출처 두산대백과 사전


청계산도 오르는 코스가 제법 많은데 보통 매봉까지 많이 가는 편이다. 오늘은 옥녀봉에 들러 매봉까지만 가보기로 했다. 만경대와 이수봉은 미뤄두어도 괜찮다. 흔히 산에 오를 때 봉우리를 많이 정복한다던가 얼마나 빨리 올랐다던가 하는 이야기들을 많이 하는데 그렇게 한번에 다 올라가 버리거나 마치 달리기를 하듯이 산을 오르는 것은 어쩐지 나와는 어울리지 않다 싶다. 산이 줄 수 있는 것들은 가능한 많이 받아오려면 천천히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며 걸어야하지 않을까...

북한산둘레길에 대한 글을 쓸 때도 그렇고 이전의 산에 대한 글을 쓸 때도 거리와 시간이 적힌 도표를 올리곤 했는데 이제사 생각해보니 그런 숫자에 얽매어있었던 것은 아닌지 반성이 된다. 물론 그 자료들이 후에 비슷한 곳을 가는 이들이나 나 자신에게 참고자료가 될 수는 있겠지만 자칫 그 수치에 연연하며 정작 보고 듣고 느껴야할 것들을 잃고 있지는 않았었는지 아쉬운 마음이다. 일단 이번 글에서는 거리, 시간이 적힌 도표는 한번 빼보기로 한다.


등산로 입구에서 간단하게 정비를 하고 길게 난 길을 천천히 걷는 것으로 산행을 시작한다. 역시 산은 눈에 덮혀 있을 때 제맛이 난다. 발 아래로 들려오는 뽀드득 소리, 스틱이 눈에 미끄러지는 소리...그렇게 눈이 만들어내는 소리와 겨울이 주는 차가운 바람의 향기에 취해 천천히 길을 가 본다. 오늘은 오랜만에 메인 카메라를 들고 나왔다. 겨울에 이 녀석을 들고 다니는 것은 꽤나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서울 날씨가 올해 들어 가장 추운 상황에서 믿을 것은 역시 이 녀석뿐이다.


사람들이 주로 가는 매봉으로 가는 길도 제법 많다. 하지만 일단은 옥녀봉에 갈 생각이다. 왠지 하얀 소복을 입은 처자가 '서방님 어서 옵소서'라고 부르는 것같은 느낌이 들어서인데 정말 그런 처자를 만나게 되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은 아닐테니...


청계산은 서울에서 접근성이 워낙 좋고 연예인들이 자주 출몰한다하여 남녀노소가 자주 찾는 산이다. 산세가 그리 험한 편도 아니고 길도 잘 나 있어서 그렇겠지만 역시 간밤의 눈은 이미 여러 등산객들의 발자국을 따라 잘 다녀진 후였다. 겨울 산행이 매력적인 이유는 역시 눈이다. 눈 내린 산을 걷는 느낌은 참 무엇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가 막히달까


청계산에도 진달래 능선이 있다. 조금 더 위로 올라가면 개나리 능선도 있는데 주변에 그 꽃들이 많이 피기때문에 그런 이름을 지어주었지 싶다. 물론 겨울이니 진달래꽃 만발한 풍경은 볼 수 없지만 대신 눈꽃이 핀 것을 볼 수 있으니 나무 위에 쌓인 눈꽃들을 때로는 진달래로 때로는 개나리로 생각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사람들이 많이 다녔다고는 하지만 계단들은 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눈에 푹 파묻혀 있다. 겨울 산행에는 스틱(콩글리쉬라 한다)을 꼭 가져가는 것이 좋은데 눈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눈으로만 봐서는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스틱은 미끄러짐을 예방하는데 아주 중요한 수단이다. 오늘도 여러 번 넘어질뻔 했는데 스틱을 부여잡고 버텼다. 물론 대신 손에 가해지는 무리는 어쩔 수 없지만...


진달래의 어원은 이렇다. 피맺힌 슬픔이 꽃잎에 닿아 붉은 색이 되었다는 것. 이별의 한이 어느 정도이면 피눈물이 날 수 있을지 상상하기도 어렵다. 그러고보면 우리 설화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참 많이 있다. 망부석 설화도 그렇고 대부분 이별을 겪은 여인들의 한이다. 왜 우리 여인들은 그리도 한이 많았을까.


능선길은 역시 바람이 차다. 안경을 쓴 탓에 뭔가 얼굴에 쓰면 안경이 온통 뿌옇게 되는 까닭에 그냥 귀만 가리고 걷는다. 두툼한 겨울용 잠바는 이미 배낭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얼굴을 바람으로부터 막을 대책이 없다. 마스크를 쓰고 고글을 끼면 된다고도 하는데 안경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겨울 산행의 특색이기도 하다. 


진달래능선을 타고 옥녀봉으로 이르는 길은 아주 무난하다. 게다가 천천히 걸으면 땀이 날 틈도 없다. 오히려 찬바람을 어찌 피할까 고민을 하다보면 어느새 정상에 이르게 된다. 산행이 부담스럽거나 처음 가보는 경우라면 옥녀봉만 간단히 둘러 보고 내려오는 것도 괜찮다. 무난한 길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주 짧은 길은 아니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거나 산책을 하기에 적당하다.


능선에서 바라본 양재쪽 전망. 35mm렌즈는 참 편하기도 하면서 어떤 때는 애매하기도 한 화각인데 보통 사람이 두 눈을 뜨고 바라보는 각도가 대충 35mm렌즈와 비슷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렇게 넓게 펼쳐진 풍경을 접하게 되면 뭔가 부족해보인다. 실제로 보이는 것은 사진보다는 가깝고 넓기 때문인데 그런 화각이 어느 정도일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어떤 렌즈도 사람 눈보다 나을 수는 없으니까..


나 다시 진달래로 피어 그대 가슴으로 스몄으면, 나 다시 진달래로 피어 그대 타는 가슴으로 스몄으면... 작사가들은 시인들 못지 않다. 거기에 음악까지 어우러지면 감정의 전달은 몇배가 된다. 겨울산에서 빨갛게 물든 진달래를 떠올릴 수 있게 만든 그런 가사였다. 


산에 오르는 목적이 정상에 다다르기 위함은 분명 아니지만 정상이란 한번 숨을 고를 수 있는 그런 여유를 주는 곳이다. 오를 때가 있으면 내려갈 때가 있다는 표현으로 인생을 등산에 비유하기도 하지만 살아간다는 것이 그렇게 정상이 있고 바닥이 있고 하는 식으로 구분지어지지는 않는다고 생각된다. 굳이 산행을 인생에 비유하기보다는 걸음걸음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어느 소원들이 쌓여 저렇게 돌탑이 되었나. 아니면 다른 무엇을 기리기 위한 것일까. 오늘 돌아본 코스 중에 유일하게 만난 돌탑이었는데 쌓인 폼이 예사롭지 않다. 저 돌을 쌓은 사람은 이미 이곳에 없지만 그 사람이 남긴 감정이랄까 그런 느낌은 여전히 이곳을 맴돌고 있었다. 그 바람은 이루어졌을까? 아니면 영원한 꿈으로 남아 있을까?


다른 나무들과 떨어져 눈밭에 나무 하나가 던져진 듯이 자라고 있다. 조금 더 가까이서 사진에 담았다면 큰 나무라 해도 손색이 없겠지만 실제로 이 녀석은 아주 작아 눈에 잘 띄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줄기며 가지며 무엇 하나 큰 나무들에 비해 손색이 없다. 이 추운 겨울날을 온전히 몸으로 받아내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작은 존재일지라도


옥녀봉 정상에서 보이는 과천 방향. 저 멀리 관악산이 보인다. 이렇게 보니 꽤 웅장하다. 오늘 관악산에 오른 분들도 제법 많겠지 싶다. 사진에는 잘 안 보이는데 아래 쪽으로 경마장이 보인다. 경마장은 전에 연애할 때 한번 가봤는데 돈을 쓰지 않을 생각이라면 꽤 괜찮은 데이트 코스다. 물론 지독한 담배연기는 감수해야 하는데... 경마장도 금연이 추진될까?


온길을 되돌아 이제 매봉으로 향한다. 옥녀봉 쪽에서 매봉으로 가려면 가장 빠른 길은 역시 이길인데 지도에서 깔딱고개라고 부르는 곳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깔딱고개와는 아주 다르게 생겼다. 계단이 전체적으로 한 1,500개 정도 되는 것같다. 올라갈 때는 괜찮은데 하산길로는 이길은 택하지 않는 편이 좋다. 무릎에 무리가 많이 가고 저렇게 눈이 쌓인 계단은 아이젠이 없으면 넘어지기 십상이다.


계단마다 번호를 적어두었다. 이렇게 번호가 적혀 있으면 사람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사람들은 기운이 나기보다는 힘이 더 든다. 게다가 위를 올려다봐도 계속 계단만 있다면 약간 막막한 느낌도 든다. 하지만 청계산의 이 구간은 그리 길지 않기 때문에 숨이 넘어갈 정도의 깔딱고개라고 하기는 약간 어색하다. 설악산 오색약수쪽 계단 정도 되면 '아, 이거 보통 일은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지만...


길은 계단과 약간의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서초구에서는 인체공학적 설계를 한 계단이라고 강조를 하고 있는데 내 몸이 이상한 건지 그렇게 강조가 된 계단은 오르기가 더 어려웠다. 오르는 계단은 다리 힘보다는 팔 힘으로 올라가야 피로가 덜 하다. 오늘은 SLR을 가져와서 목에 매고 다녔던지라 양손이 비교적 자유로워 스틱을 제대로 활용했다.


이 정도 오면 거의 다 와간다고 생각하면 된다. 청계산의 정기를 준다는 바위인데 누구 생각인지 참 기가 막히게 이름을 붙여놨다. 덕분에 저기 조금 서 있으면 사람들이 저 틈 사이로 부지런히 빙빙 도는 것을 볼 수 있다. 많이 돌 수록 정기를 많이 받는 모양인지 4-5번 도는 처자분도 있었다. 기가 많이 부족해 보이는 얼굴이긴 했지만...


매봉은 항상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이른 아침에도 제법 많은 이들이 이쪽 코스로 오르고 있었다. 겨울 산행의 잔재 중의 하나는 다른 분들이 입고 온 옷이나 신고 온 신발 메고 온 배낭 등을 관찰하는 것. 청계산은 다른 산에 비해 오르기가 어렵지 않아 등산화를 신지 않고 운동화만으로 오르는 분들도 제법 많다. 다른 계절에는 괜찮겠지만 겨울 특히 눈 내린 날이라면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이제 거의 막바지다. 이곳을 오르면 매바위를 만날 수 있다. 사실 매봉보다 매바위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더 좋다. 오늘은 비교적 맑은 날이어서 제법 멀리 보이지 않을까 생각을 하면서 오른다. 사람들이 없는 틈을 노려 사진을 찍으려다 보니 제법 멈추는 시간이 많아서인지 그렇게 힘이 들지는 않았던 산행이었다. 나와 비슷하게 가던 오리털 패딩으로 무장한 어느 분은 결국 쉼터에서 얼굴이 시뻘개져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는데 땀이 죽죽 흘러내리는 상황에서 패딩을 입고 걸어가는 것은 정말이지 말리고 싶다.


청계산 매바위. 해발 578미터다. 이 바위는 제법 위가 널찍해서 여러 명이 올라가도 넉넉하다. 정면으로 뻥 뚫려있어서 아주 경치가 좋은데 생각보다 시야가 아주 멀리까지 보이지는 않아서 아쉬웠지만 그래도 속이 시원해질 정도로 멋진 경치를 볼 수 있는 장소다. 매봉은 이곳에서 100미터만 더 이동하면 되는데 매봉에 도착하면 사람들로 북적이기 때문에 정비할 것이 있다면 이곳에서 하는 것이 좋다.


매바위에서 바라본 전망이다. 이 사진은 파노라마로 붙여서 만든 사진이니 눌러서 크게 보면 된다. 아무래도 여러 장을 붙여서 만들다보니 이미지 정보의 손실이 큰 것이 아쉬운데 원본 파노라마는 제법 웅장하고 세밀한 맛도 있지만 이곳에 올리기에는 20메가나 되어 아무래도 무리다. 1280 해상도로 변경해봤다. 


그리고 청계산 매봉이다. 이곳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역시 산 정상에서 볼 수 있는 음주 문화가 여지 없이 벌어지고 있어 아쉬운 생각이다. 왜 산과 술이 연결이 되는지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지만 그것이 그 사람들의 산을 즐기는 방식이라면 달리 뭐라 할 여지는 없다. 다만 음주로 인해 다른 이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매봉에는 사람들이 많아 표지석만 따로 찍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몇몇 분 얼굴은 모자이크를 해서 올려본다.

이렇게 올 한해를 마무리했다. 잃은 것이 있는만큼 얻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인생은 제로섬이고 올 한해만으로 봐도 역시 그렇다. 잃고 얻은 것을 정확하게 하나하나 그 가치를 비교할 수는 물론 없는 일이지만 1년이라는 하나의 틀에서 보면 모든 것은 마치 아무 것도 없었던 것과 같은 상태로 돌아간 것이다. 그러니 서운해할 이유도 없고 기뻐할 이유도 없다. 냉정하게 생각될 수도 있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인생 역시 무수한 얻음과 잃음 속에서 결국은 시작하던 때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다음 산행은 어디로 할까 생각을 한다. 같은 자연이지만 산마다 주는 기운은 정말 다르기에 가능한 많은 곳을 그리고 여러 방법으로 다녀보고 싶다. 

그나저나 3년 전에 구입한 등산화가 슬슬 기능(고어텍스)이 다 했나 보다. 산에 간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하던 시절에 메이커만 보고 덥썩 집어온 녀석인데 어느 새 정이 들어 구석에 놓여 있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짠하기도 하다. 기능성은 비록 점점 사라져 가지만 발에는 점점 더 익숙해져 간다. 어찌 보면 모순같은 일인데  물에 빠지지 않게만 조심하면 몇 년은 더 내 발이 되어주지 않을까 싶다.


Nikon D700, AF Nikkor 35mm f2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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