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고 벚꽃이 흩날릴 무렵이 되면 다시 한 번 보게 되는 작품이 신카이 마코토의 '초속 5Cm'다. 처음에는 무슨 제목이 이럴까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작품을 보고 또 보게 되면 그 의미가 좀 더 마음속에 새겨진다. 

벚꽃이 떨어지는 속도인 초속 5Cm..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숫자일 수도 있다. 정확히 꽃잎이 날리는 속도를 잰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찰라의 속도는 사랑하는 두 연인에게 있어서는 둘만의 약속. 그리고 영원한 의미를 가진다. 영원이란 동시에 순간인 것. 사랑을 하는 이들에게 순간은 영원이고 영원은 곧 순간이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설레고 또 애틋하다. 이 이상의 다른 표현이 있을까 모르겠다. 사랑을 하면서 겪는 행복한 시간이 많았을까 애틋한 시간이 많았을까 도돌이켜 보면 나는 후자가 아닐까 싶다. 서로를 생각하고 서로를 바라보고 또 둘이 한곳을 향해 함께 걸어간다는 것은 평범한 우리네 인간의 삶에서 정말 큰 힘이 된다. 그리고 그 사랑을 지킨다는 것은 삶 자체의 목표가 되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일이라 생각된다. 

혼자서 세상과 맞서는 일은 역시나 버거운 일이다. 그러나 같은 방향으로 걸으며 곁에서 손을 꼭 잡아 힘이 되어 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내 삶의 길은 물론 상대의 삶의 길도 굳건하게 지켜나가는 바탕이 된다. 사랑에 있어서는 힘겨움은 서로 나누어야 한다. 고통도 함께 해야 한다.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절반이 되는 것이 사랑이다. 그렇지 않다면 사랑이라 부를 수는 없으리라...


서로를 서로가 존재하는 그 자체로 받아들일 때 그 사랑은 진실이 되고 비록 다른 길을 걷게 되어 다시는 마주칠 수 없더라도 영원이 된다. 아마도 세상이 끝나는 날 가장 사랑했던 이를 떠올려보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 사람은 정말 짧은 바람처럼 스쳐갔던 그런 사람일 수도 있다. 사랑에 있어 함께 한 시간보다 중요한 것이 있는 까닭이다. 

그 사람이 단지 그 사람이기에 내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 그 사람 자체가 전부인 것. 누구나 사랑을 이야기할 때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이것을 실제로 지키는 일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세상의 편견과 그 편견에 물든 혹은 물들어가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낸 후에야 당당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이다.


사랑이 변한다는 말이 정말 맞는 말일까? 애초에 사랑 자체는 변하지 않는데 사람이 변할 뿐일까? 그 사람을 사랑하지만 할 수 없이 헤어진다는 말이 정말 맞는 이야기일까?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그 감정 자체는 변하지 않는데 자신이 변할 뿐이다. 그리고 변해버린 자신이 어색하고 참을 수 없기에 사랑이 변한다는 말을 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당신은 분명 잘 지내고 있을 거에요"라는 말로 스스로 위안을 삼는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변해버린 자신을 용서할 수 없기에...


시간이 지나면서 외로움에 혹은 허전함에 누군가 다른 이를 만나게 되고 그것을 또 사랑이라 부르고 그 관계에 열중해보지만 그것은 어쩌면 이미 사라진 어느 시간에 대한 보상심리일지도 모른다. 지금 내 앞에 내가 바라보고 있는 누군가와 과거의 누군가가 여전히 겹쳐 보이지만 그 겹침이 한 번 두 번 반복되다 보면 정작 어느 기억이 자신의 사랑에 대한 기억이었는지조차 망각해버리게 된다. 우리네 삶은 그렇게 겹침 속의 망각이 반복되는 셈이다. 그리고 다들 그렇게 익숙해져간다. 내가 그렇듯 그녀가 그렇듯...

"마음은 1Cm 정도 밖에 가까이 가지 못했다." 는 대사는 그렇게 이루어진 공허한 사랑이 결국 각자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서로에 대한 거리를 말하는 것은 아닐까. 아무리 오랜 물리적인 시간을 함께 보냈을지라도 마음의 거리는 벚꽃이 땅에 떨어지는 그 짧은 거리만큼도 다가서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 공허한 사랑조차 사랑이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지만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렇게 이야기하면 너무 쓸쓸할까?


이 작품의 부제 '그들의 거리에 관한 짧은 연작'은 

벚꽃이 비처럼 내리는 아직은 이른 봄날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가

눈이 비처럼 내리는 어느 겨울날 내 마음 속으로 잦아들었다.


기억의 순서는 시간의 순서가 아닌 추억이 깊이에 따라 정해진다.

지금 가장 먼저 떠오르는 누군가와의 추억..그것이 가장 소중했던 그리고 평생 가장 소중한 순수한 사랑이다.



어제, 꿈을 꿨다

아주 옛날 꿈…

그 꿈 속에서는우리는 아직 13살로…

그곳은 온통 눈으로뒤덮인 넓은 정원으로

인가의 불빛은한참 멀리 보일 뿐으로…

뒤 돌아본 깊게 쌓인 눈에는우리가 걸어온 발자국 밖에 없었다


- 그렇게

- 언젠가 다시


함께 벚꽃을 보는 것이 가능하다고

나도, 그도 아무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초속 5Cm, 사랑의 거리에 관한 짧은 기억"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인생은 하나의 길을 선택하는 순간 다른 길을 갈 수 없게되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선택을 하느냐는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어떠한 모습으로 그려질 지를 결정하는 밑그림이 된다.

일단 하나의 길을 선택하고나면 그 길을 나아가는 동안 만나게 되는 또 다른 숱한 갈림길을 거쳐야 하고 결국 처음 내가 고민했던 두 가지의 선택은 아득하게 멀어져버린다. 세상의 사람 수 만큼이나 많은 인생들이 존재하지만 그 어느 하나 같지 않은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렇다면...원초적인 질문인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이것은 '잘 산다'의 정의를 어떤 식으로 내리느냐에 따라 즉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물음이지만 적어도 내 기준에서 '잘 산다'의 정의를 내리자면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면서 그 날을 돌아봤을 때 '미소'가 지어지는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Nikon F5, AF-S 17-35mm f/2.8, Fuji RDP III, LS-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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