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작을 읽을 때는 굉장한 전율을 느낄 수밖에 없는데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읽게 되면 보통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번에 읽게 된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를 그 전율의 서책 목록에 덧붙인다.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인류 역사상 가장 중대한 격변기를 다루고 있는 이 소설은 겉으로 드러난 혁명의 충격만큼이나 인간의 내면을 철자하게 파고 들어 있어 사실 읽기가 쉽지만은 않은 책이다.

사실 우리에겐 조금 낯선 이책이  -물론 방대한 독서량을 자랑하는 분들에게는 실례가 되겠지만- 우리에게 친근한 느낌으로 다가선 것은 크리스토퍼 놀란이 다크나이트라이즈의 일부 장면을 이책의 내용을 모티브 삼아 만들었다고 밝힌데서 비롯된다.프랑스 혁명과 배트맨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관계지? 한발 더 나아가 책의 결말부분에 이르러서는 그리스도교의 예수의 모습마저 볼 수 있다. 아마 내가 잡아낸 부분보다 더 많은 관계들이 이책에는 들어있을 것이다. 한번의 독서로 모든 것을 느낄 수는 없다. 적어도 두세 번은 곱씹어 읽어볼 책이다.

아래 사진은 이책의 초판본인데 영문 제목을 들여다보자. 'Tales'라고 써도 되지만 디킨스는 'A Tale'을 택했다. 작가의 의도는 이 모든 이야기가 한편의 이야기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책은 하나의 이야기만 담고 있지는 않은데 여러 이야기들이 결국은 하나로 모이고 그것이 디킨스가 바랐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여전히 각각의(Each)라는 단어가 이책에 좀 더 적합하다고 생각된다. 도저히 하나의 이야기로만 읽고 넘기기에는 아까운 까닭이다. 그렇다면... 왜 차라리 'The'를 붙이지는 않았을까? 두고 생각해볼 일이다.

펭귄클래식에서 출간된 이책은 주석까지 합쳐 588면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어서 처음 책을 집어들고나면 '이책을 언제 다 읽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지만 책장을 넘기다보면 어느새 프랑스 혁명 당시의 런던의 어느 길거리를 걷고 파리의 어느 선술집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들고 그 분위기에 흠뻑 취해있다보면 마지막장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고전 특히 명작이 주는 감동이란 대개 그런 것이어서 현대 문학 작품들이 좀처럼 줄 수 없는 일종의 은총에 가까운 매력이다.

혁명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기본으로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인 명예, 사랑, 재물 등에 대한 끊임없는 욕망과 갈등이 휘몰아친다. 물론 책이 씌여진 시기를 생각하고 디킨스의 장황한 어투를 생각하면 쉽게 쉽게 문장이 읽어지지는 않지만 그 안에 펼쳐진 방대한 서사시를 읽어나가다보면 그런 부수적인 어려움이 오히려 반갑기까지 하다. 

이책의 주제는 사실 독자가 선택하기 나름이라고 생각된다. 목숨을 내줄만큼 숭고한 혹은 무의미할 수도 있는 '사랑'일까? 시대의 풍파 속에서 갈등하고 충돌하는 '계급'일까? 아니면 그 모든 것을 끌어안는 "욕망"일까? 어느 주제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줄거리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는 것이 이책만이 가지고 있는 큰 특징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그 주제들만 따로 끌어내어 연결을 시켜도 훌륭한 한권의 책이 만들어진다.

실제로 외국에서 논의되고 있는 이책의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Recalled to Life"

Water

Darkness and light

Social justice


책을 읽어가다보면 책의 문체가 희곡에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실제로 두 도시 이야기는 지컬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외국에서는 6편의 영화와 한편의 TV 드라마로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국내에서 구해볼 방법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야기는 런던에서 파리로 이동하며 시작되고 결국 파리에서 런던으로 돌아오며 끝이 난다. 런던파리라는 두 도시에서 우리는 마치 흑 아니면 백과도 같은 극단적인 상황들에 직면하게 되고 그 극단이 부딪혀 서로를 파괴해 나가는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참 아이러니하게도 양 극단의 종말은 '너무나도 비슷함'으로 마무리된다. 아마 이 소설만큼 극단적으로 인간의 감정의 대립을 묘사한 소설은 많지 않을 듯하다. 복수와 용서, 미움과 사랑이라는 이 양극단의 감정은 최종장에 이르러 마치 예수의 순교와 같은 대속으로 마무리된다.

이 소설의 주해를 달고 있는 리처드 맥스웰은 이 양극단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이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면서 곧 절망의 겨울이었다." 그리고 이 양극단은 파리와 런던이라는 두 도시에서 처절한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는데 사실은 파리가 곧 런던이고 런던이 곧 파리였던 셈이다. 세상 어느 곳에서건 인간의 이런 모습은 다르지 않음이고 또한 그 해결 방법 역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디킨스는 이야기하고 싶었던지도 모를 일이다.

디킨스는 여느 작가와는 달리 '소외'에 초점을 둔 작가였다. 혁명이라는 세상이 소용돌이치는 그 와중에도 귀족이나 혁명 세력이 아닌 소시민들 그것도 철저하게 바닥으로 내동댕이 쳐진 나약한 소시민들의 삶에 집중한다. 이점에서는 우리는 까뮈를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역사를 이야기할 때 그 역사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보통 관심을 둔다. 어느 왕이 어떠했고 어느 수상이 어떠했고 혹은 어느 신하가 어떠했고는 자세하게 다루지만 정작 그들의 지배하에 있었던 대다수의 사람들 -즉 우리들- 에 대해서는 좀처럼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지배자는 수가 적고 피지배자는 수가 많아 일일히 이름을 언급하기 어렵다는 식의 이론은 철저하게 권력과 힘에 기댄 역사서술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 방식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사실 중요한 것은 '어느 왕'이 아니라 '갑돌이와 갑순이'인데 우리는 갑돌이와 갑순이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래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안타까운 노릇이다. 디킨스는 바로 그 '우리'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그 내용이 처절하고 진솔하고 때로는 뼈에 사무치기까지 한다.

소설의 마지막에 예수의 모습으로 죽어간 주인공의 모습은 어떤 이들에게는 한없이 나약한 모습으로 비칠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죽는다는 어쩌면 정말 소설에서나 있음직한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디킨스는 그 죽음.. 예수의 대속(Redemption of Christ)과도 같은 그 죽음을 결코 값싸게 다루고 있지 않다. 숭고한 죽음이란 아주 평범한 사람에게도 가능한 것이라는 점. 이점은 그의 마지막 말에서 등장하는데 바로 다크나이트인 웨인이 그의 유언장에 적은 그 내용이다.

'I see a beautiful city and the the brilliant people rising from this abyss. I see the lives, for which I lay down my life. Peaceful, useful, prosperous and happy. I see that I hold a sanctuary in their hearts And in the hearts of their decedents. Generations ends. That's the far, far better thing that I do...than I had ever done. and It's a far, far better rest that I go to...'

두 도시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난다.

"...내가 지금 하려는 행위는 지금까지 해온 어떤 행동보다 훨씬 더 숭고하다. 지금 내가 가려는 길은 지금까지 걸었던 어느 길보다 훨씬 평안한 길이리라"

앞서 마지막 장에 한참을 머물게 된다고 적었는데 실제로 그렇다. 사실 책의 줄거리나 내용을 인용하지 않는 것이 내 서평의 원칙이라면 원칙인데 이 마지막 문장을 적지 않고서는 이책이 주는 강렬한 느낌을 옮겨오기 어려울 것같아 적어본다. 

결국 중요한 것은 각자의 개인의 삶이다. 그 삶에는 귀하거나 천한 것이 있을 수 없고 누구도 인간이라는 존재인 이상 고귀하고 가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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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뷰와 반디앤루니스에서 선정하는 금주의 리뷰에 선정되었네요. 감사드립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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