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클래식 리뷰단에서 이번에 보내온 책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입니다. 한 번 정도는 들어보셨을 듯한 제목이지요. 아마 줄거리도 막연하게나마 알고 계신 분들이 계시리라 생각이 됩니다. 제 서평에 줄거리는 적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막연하게나마 알고들 계신 줄거리는 한 남자가 유부녀를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을 이루지 못 하게 됨을 아쉬워하며 자살한다는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그게 이 소설의 줄거리만 끌어내자면 전부입니다. 어쩌면 큰 이슈가 될만한 것도 아닌 이책이 거의 30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여전히 읽히고 있다는 것은 단순히 줄거리만 보고 읽을 책은 아니라는 의미도 됩니다.

이책의 내용은 괴테의 경험에서 끌어낸 것입니다. 흔히 고백 문학의 시초로 이책을 꼽는 것도 그런 이유지요. 여주인공 로테(혹은 롯데)는 괴테가 실제로 사랑한 로테의 이름에서 그대로 가져온 것입니다. 소설에서처럼 괴테가 자살을 하지는 않은 것이 차이라면 차이일까요. 자, 이제 한번 생각을 해보도록 하지요. '사랑을 위해 죽다.' 그것이 가능하리라 생각하시나요? 여러 상황이 있겠지만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한 사람만을 살려야할 때 사랑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는 일은 최근에도 적지 않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루지 못한 사랑때문에 생명을 끊는다는 것은 요즘의 사고방식에서 본다면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릅니다. 

"세상에 남자가 혹은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훌훌 털고 다른 사람을 만나면 돼" 아마도 요즘 사람들이 내리는 결론은 대부분 이렇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베르테르처럼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을 어리석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오히려 사랑하는 이의 마음에 상처를 준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비난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멀리서 사랑하는 이의 행복을 빌어줄 수 있을까요? 다른 이와 결혼한 사람의 미래가 행복하기를 바라며 축복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쉬운 질문은 아니라 생각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각자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책의 대부분은 편지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주인공 베르테르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서 모든 이야기들이 펼쳐 집니다. 초반부만 해도 베르테르의 냉철함과 확고한 철학이 빛납니다.  

"인생이 꿈이라는 사실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 바이지만, 나 역시 어딜 가나 그런 느낌을 받는다네. 인간이 지닌 활동적인 탐구력 역시 한계에 갇혀 있음을 볼 때, 그리고 인간의 모든 노력이 궁극적으로는 욕망을 채우는 쪽에 머물며 이 욕망이라는 것도 사실은 우리의 불쌍한 생을 연장하는 데 봉사할 뿐..."

이라는 문장을 읽게 되면 베르테르가 감정적이라기보다는 이성적인 인물이고 나름의 확고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적어도 로테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죠. 베르테르는 욕망에 의해 흔들리는 인간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 역시 한편에서는 욕망의 일종인데 다른 편지에서는 남자가 여자에게 끊임없는 헌신을 바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까지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던 그가 로테를 만나고 기존의 생각이 무너지게 됩니다.

"사랑이 없는 세상이 우리의 가슴에 무엇일까! 빛이 없는 마법의 등잔이 다 무슨 소용인가!"

사람이 변해도 이렇게 변하나 싶습니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을 해 본 분들이라면 공감이 되실텐데 저는 그런 사랑은 해 본 적이 없어서 누군가를 한번 만나고 이렇게까지 변하게 되는 것이 잘 이해는 가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기는 하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는 꼭 겪어보고 싶은 감정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베르테르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이루어진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사랑의 완성은 무엇일까요? 결혼일까요? 적어도 베르테르에게 있어서는 그런 것처럼 보입니다. 어떠신가요? 사랑을 한다면 최종적으로는 결혼을 해야 그 사랑이 온전해 지는 것인가요? 저는 이 질문에 선뜻 대답하기는 어렵습니다.

베르테르는 말합니다. "꼭 이래야만 하는가? 인간의 행복의 원천이 그의 불행의 근원이 되다니" 라고 부르짖습니다. 사랑으로 인해 행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괴로워해야 하는 것이 그에게는 커다란 무게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로테의 남편에게서 총을 빌려 그 총으로 자살을 합니다. 물론 로테에게 장문의 편지를 남기고 말이죠. 어쩌면 굉장히 치졸하고 비겁한 행동처럼 보입니다. 이 모든 것을 겪는 로테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감정에만 도취된 모습을 보입니다. 

"나는 이 옷을 입은 채로 묻히고 싶습니다. 로테, 당신이 만져서 성스러워진 이 옷을 입은 채로 말입니다. 당신의 아버지에게 그것도 부탁해 놓았습니다."

여기까지 읽으면 마음이 답답해 집니다. 황순원의 소나기의 마지막 부분과도 비슷한 느낌이 드는데 정녕 로테를 사랑한다면 이렇게까지 잔인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편지의 마지막은 클라이맥스를 보여줍니다.

"권총은 장전되었습니다. 시계가 12시를 치네요! 자 이제! 로테! 로테, 잘 있어요! 잘 있어요!"

이 정도면 상대방에 대한 만행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남아 있는 이에게 모든 짐을 떠안겨 버립니다. '너를 사랑하지만 맺어질 수 없으니 내가 죽겠다'는 것인데 죽으면 조용히 죽지 사방팔방 다 이야기를 하고 당사자에게 편지까지 남깁니다. 요새말로 찌질해도 이렇게 찌질한 인간상이 있을까 싶습니다. 물론 이책에 대한 해석은 독자마다 차이가 큰 편인데 적어도 제가 읽기에는 이렇습니다. 베르테르는 사랑을 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내던진 것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책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일꾼들이 유해를 운반했습니다. 성직자는 한 사람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결국 괴테는 베르테르의 모든 행동이 옳지 않음을 스스로 밝히고 있는 셈입니다. 가톨릭이 지배하던 사회 안에서 성직자의 축복도 받지 못한 장례식이란 말 그대로 버려진 죽음일 뿐입니다. 여기까지 읽고나서야 앞부분을 읽으면서 느꼈던 베르테르의 비겁함과 찌질함이 해소됩니다. 마치 술에 취한 듯 자신의 감정에 도취되어 타인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편한 대로 생각하고 행동한 베르테르라는 인간에 대해 괴테는 경고를 보내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의도와는 반대로 이책의 출간 이후 수많은 자살자들이 양산되었는데 아마도 마지막 문장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까닭이라 생각됩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천재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을 남자다. 그리고 작가다. 사실 나는 이 사람의 책에 대한 선입견이 제법 컸는데 뭐랄까 인기에 영합하는 그렇고 그런 류의 작가 중의 한 사람은 아닌가 오해하고 있었다. 마치 최근의 하루키와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의 책은 전혀 읽지 않았었는데 반전이 이루어진 것은 '타나토노트'였다.

이후로 그의 책을 마치 스펀지에 물을 빨아들이듯이 읽었는데 흔히 알려진 3부작이 준 정신적 충격은 대단했다. 물론 '신'의 마지막 결론 이후 꽤 오랜동안의 사색이 필요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나무'는 단편집이다. 그의 다른 책처럼 독자의 부담이 비교적 적은 책이다. 물론 페이지가 적을 뿐이지 담겨 있는 내용들을 고민하자면 또 끝도 없다. 그럼에도 군더더기없이 짧게 끊어지는 맛이 일품이다. 초창기의 하루키 작품을 읽는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인데 읽어나가는동안 하루키의 단편과 제법 공감이 되지 않는가? 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책에 실린 단편들 그리고 그 단편에서 이어져나오는 장편들을 굳이 연결지을 필요는 없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그 책의 내용 그러니까 내 눈 앞에 보이는 활자에 푹 빠지는 것으로 충분하다. 아니 오히려 눈 앞에 펼쳐진 내용들을 모두 소화하기에도 벅차기 때문에 굳이 생각의 영역을 지나치게 확장할 필요는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책은 특히나 연관성이 대단히 넓은 책이기에 무엇보다 '단절'작업이 크게 요구된다. 그래야 내용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워낙에 신출귀몰한 이야기와 구성 그리고 영역을 가지고 있는 베르베르이기에 이 방법이 이책을 읽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나 나름대로 정해버린 것이다. 물론 수많은 연관성들을 모두 아울러 가며 읽는 것도 나쁠 것은 없다. 하지만 오직 이책에만 빠져보고 싶다면 그다지 권하고 싶지는 않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18편이나 되는 단편들이 담겨 있다. 각각의 내용에 대한 이야기는 모음집에서는 별로 의미가 없을 듯 하여 적지 않겠지만 아무 작품이나 눈이 가는 것을 골라 읽어도 충분하다. 가능하다면 베르베르의 장편들을 읽은 다음에 쉬어 가는 시간에 읽어보면 어떨까 싶다. 그의 장편이 주는 피로감을 풀기에 이 단편들은 제법 치밀한 구성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어느 작품의 어느 부분만을 네모난 모양으로 잘라서 찍어보았다. 이것으로도 의미의 전달은 충분하다. 굳이 모든 문장을 한데 엮어 순서대로 맞추어 놓지 않더라도 말이다. 나는 이 문장이 꽤나 마음에 든 모양이다.



쉽지 않겠다 싶었다. 두 권으로 이루어진 책의 분량을 떠나 줄거리가 만만치 않아 보였다. 흔히 접하는 불륜으로 인해 상처 입은 아내가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 과정과는 반대의 상황이다. 주인공은 남편이다. 이 독특한 시점은 기존에 다른 매체 등을 통해 짐작할 수 있었던 주인공의 심리 상태를 지레 짐작조차 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물론 이것 역시 남성적인 편견이라는 점은 부인하지 않는다)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나가며 파악하는 수밖에 없었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겪은 가장 큰 저항은 특유의 편지 쓰기식 서술이었다. 이 부분은 독자에 따라서는 꽤 마음에 들어하는 분도 있을 수 있겠지만 내게는 결국 작가가 작품 안에 온전히 생각을 담아내지 못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들게 했다. 수신자로 등장하는 수 많은 이들이 과연 허조그의 심리상태 나아가 이책의 흐름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의문마저 들었으니 말이다.

두 번째 저항은 -적어도 내 입장에서는- 찌질하기 그지 없는 주인공의 신세한탄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독자에 따라서는 인간적이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무능력 그 자체고 그 무능력을 스스로 돌파하기보다는 그저 흘러가는대로 놔두고 이런저런 변명으로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생각하는 수동적인 면이 지나칠 정도여서 읽기가 수월치 않았다. 물론 작가의 의도겠지만 이렇게까지 무능력한 주인공은 참 오랜만에 만났다.

그럼에도 주인공의 심리 묘사는 대단하다. 처음부터 거의 끝부분에 이르기까지 자포자기하고 무기력에 찌든 상태를 한결같이 유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두 권으로 이루어진 책의 대부분은 이 신세한탄으로 채워져 있다. 어떤 독자라면 이 어둡고 찌든 분위기가 몸서리쳐지도록 싫을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긍정적으로 바라보기란 영 쉽지가 않았는데 결국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주인공은 자주적인 결정을 스스로 내리지 못 한다. 이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네 인간군상의 나약함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이런 이유로 결말 역시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뭐랄까 자신에게 닥친 황당하고-그 성격에 당연한 결론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불운한 상황들을 나름 희극적으로 돌파해보려는 의지가 아주 가끔 엿보이기는 했지만 과연 결론이 허조그 자신에게 만족스러운 것이었을까? 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나는 글쎄..라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 결국 스스로의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살아짐을 당한 전형적인 수동태적인 삶을 산 허조그이고 그런 일관된 흐름 안에서 마지막 결론은 작가에 대한 배신감마저 느끼게 했으니 말이다. 

번역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원서는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교적 현대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번역자가 풀어가는 방식은 제법 진부했다. 솔 벨로의 문체 자체가 그렇다면 달리 할 말은 없겠지만 지나치게 어려운 단어와 복잡한 표현이 작품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한다. 특히나 작품 해설은 독자를 생각하고 쓴 것이라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않다. 책에 대한 감상이라는 것이 워낙에 주관적인 것이긴 하지만 나로서는 감당하기 쉽지 않았던 번역이었다.

아무튼 책을 읽는 내내 '작가의 의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왜?'라는 의문은 책을 펼친 이래 마지막까지 가시질 않았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이와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이 작가의 의도라는 생각도 든다. 생각보다 쉽게 상처입고 쉽게 넘어지는 우리네 삶의 모습 그리고 그 상처와 넘어짐을 쉽게 극복하지 못 하고 절망의 나락 속에 빠져드는 우리네 보통 사람들에게 때로는 현실의 복잡함과 마음의 괴로움을 잊고 그저 흘러가는대로 받아들이라는 메시지는 아니었을까? 시간이 좀 더 지나고나서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




조금 오래 전 잡지를 만들 때 인터뷰를 위해 이외수 작가를 찾아 직접 강원도 화천을 방문했었다. 작가가 직접 책에 서명과 날인(정확한 표현은 아닐지 모르겠지만..)을 해 주니 이외수 작가가 쓴 책 중에 한 권을 골라야했고 문득 손에 들어온 책이 이책 '칼'이다.

기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가서 그런지 독대를 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었는데 참 재미있는 분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던 인터뷰였다. 사실 아침에 자다가 갑자기 불려나간거라 나보다는 외부 인터뷰어가 거의 모든 대화를 했고 옆에서 조용히 듣거나 집구경을 했던 걸로 기억된다. 겨울도 겨울이었지만 도로가 얼어붙을 정도의 화천을 운전해가기는 쉽지 않았었다.

이책의 줄거리에 등장하는 모티브를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는데 내 기억으로는 일본의 전설이 아니었나 싶다. 피를 먹어야 완전한 명검이 탄생한다는 이야기..그 이야기와 비슷하다는 생각으로 집어든 책이었는데 책을 읽어 가는 동안은 칼 자체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무기력한 주인공 박정달에 좀더 마음이 갔다.

무기력한 주인공이라고 적었는데 뭐랄까..박정달이 살아온 삶이나 살아갈 방향을 들여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과 조금은 주인공을 폄하하고픈 생각도 간간히 들었는데 어느 순간엔가 주인공의 무기력과 공상, 환상과 집착이 결국은 내게도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현재의 내 삶이 사실은 내 의지와는 관계없는 타인의 혹은 외부 환경 때문에 정해져버렸으니 나는 아무 책임이 없다는 무기력과 그래도 살아가기 위해서 무언가 자신만의 이상을 찾아야 한다는 집착.. 그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삶으로만 보기에는 어쩐지 현실과의 오버랩이 수상쩍다.

박정달은 고지식한..그리고 세상의 원칙에 순응하려는 사람이었지만 소위 그 상식이 실제로는 별 필요도 없고 오히려 자신에게 불리한 일들만 만들어낸다는데에 반발한다. 이 역시 우리네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리고 찾아낸 자신만의 꿈이자 존재 그 자체..

스스로를 완성하기 위해 자신의 가장 큰 이상과 꿈을 실현하기 위해 결국은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결말은 한편에서는 신파조로 들리지만 한편에서는 애처롭다. 그리고 돌아온 현실의 나를 바라볼때 나는 어떤 칼을 만들고 있는가 묻게 된다. 아니 아직 만들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는 것은 아닐까?


[도서]부활 1

레프 톨스토이 저/박형규 역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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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문학의 절정

이 책을 읽기 전 부활의 여주인공은 아나스타샤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아나스타샤라는 말이 부활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에 가지고 있었던 착각이긴 했지만 왠지 어울리지 않을까 싶었다. 민음사의 부활은 두 권으로 나뉘어 있다. 두 권 모두 제법 두꺼운데 읽는 데 오래 걸리지 않을까 싶었지만 생각보다 몰입이 잘 된 편이다.

네흘류도프와 카츄샤라는 두 주인공이 있고 둘 사이의 연결고리는 제법 단단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어쩌면 두 개의 서로 다른 줄거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고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그 생각은 확실해졌다. 아마 각자의 이야기만 가지고 별도의 소설을 써도 전혀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남자와 여자. 사랑이야기가 나오지만 사랑이라는 주제보다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친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각각의 주제들에 대한 톨스토이의 성찰력은 놀라워서 가끔 던져지는 문장들을 곱씹어 생각해야할 때가 많았다.

네흘류도프 쪽에서 보자면 철모르는 귀족 집안의 남자가 한 여자를 통해 그리고 그 여자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성숙하게 변모해가는 과정이 이어진다. 세상 부러울 것 없이 지내다가 평민들의 삶을 직접 들여다보고서야 사회의 부조리와 차별을 깨닫고 그 과정 속에서 성숙해져가지만 때로는 이전의 화려한 생활의 편안함을 갈구하기도 하는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카츄사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끌려가게 되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불신, 사랑에 대한 불신을 간직한 채 그저 흘러가는 대로 체념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 안에는 순수함에 대한 동경, 사랑에 대한 믿음을 동시에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끝내 내리는 마지막 선택은 의외의 반전인 듯 하면서도 그녀의 지고지순함을 보여준다.

그야말로 모든 인간군상들의 모습을 톨스토이는 이 책에 담고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수 많은 인물들 속에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네들의 모습이 모두 다 들어있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다. 이 책의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 지위가 높건 그렇지 않건 평민이나 죄수, 혹은 간수와 정치가, 빈농들과 지주들...

요즘의 어느 나라의 풍경에 빗대어봐도 인물을 대입해보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결국 세월이 흘러도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겉에 걸친 옷이 달라지고 마차 대신 차를 탈지언정 그 근본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인간들의 심리와 본성을 적나라하고 진지하게 담아 내는 톨스토이의 통찰력에 새삼 놀랄 뿐이다.

아마도 이 책은 읽는 이의 상황(사회적인 신분, 처지 등)에 따라 제각기 달리 해석될 지도 모르겠는데 이 점 또한 이 책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다. 만약 노동운동을 하는 이가 읽는다면 아마도 계급투쟁을 위한 지침서가 될 수도 있겠고 순수한 사랑을 동경하는 이가 읽는다면 아가페적인 사랑의 표본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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