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이 애초에 유럽에서 발명된 필기구이기 때문에 영문 계열의 언어를 필기하기에는 좋지만 한글이나 한자와 같은 동양문화권의 문자를 쓰기에는 쉽지가 않습니다. 이유는 간단한데 대부분의 유럽형 만년필이 글씨가 굵게 나오기 때문이죠. 글이 굵다보니 우리말의 받침이나 한자를 쓰기가 어럽습니다. 이런 난점을 극복한 만년필이 일본산 만년필입니다. 파이로트, 플래티넘, 세일러 3사의 펜들은 펜촉을 아주 가늘게 세공한 제품들을 내놓고 있습니다. (파커에서 한글을 쓰기에 좋다는 '복'이라는 제품을 내놓기도 했었지만요)

오늘 소개할 제품은 세일러의 프로기어슬림입니다.



첫 느낌은 가볍고 통통합니다. 크기도 상당히 작은 편이어서 들고 다니기에도 아주 무난합니다. 가격대도 비슷한 급의 유럽산 만년필에 비해서는 저렴한 축에 듭니다.


촉에 새겨진 1911은 세일러라는 회사가 만들어진 연도를 나타냅니다. 1911년 일본의 히로시마에서 세일러가 처음 제작이 되었죠. 세일러라는 이름은 창립자가 처음 만년필을 접하게 된 계기가 외국 선원이 들고온 펜을 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일본 제품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이라랄까요? 정밀함과 세밀함 그리고 절제된 느낌이 펜촉에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만년필을 좀 만들면 제법 잘 만들 것같기는 합니다만.. 이미 역사를 만들기에는 너무 늦었죠. 종이는 우리나라의 종이가 참 좋은데..그점을 펜으로 살리지 못한 것은 아쉽습니다.


가장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는 몽블랑 145의 닙과의 크기 비교입니다. 확실히 큼직한 크기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크기 역시 145에 비해서는 작습니다. 대충 짐작이 되실까요? 좀 더 비교를 위해 펠리컨의 M150을 맨 아래애 놓아보았습니다.


캡의 각인은 배의 닻 모양을 형상화해서 새겨 놓고 있습니다. 각 제조사별로 특징적인 부분이죠. 몽블랑의 육각별이나 펠리컨의 새 그림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줍니다.

세일러 EF닙의 경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하이테크 포인트펜보다 얇은 굵기로 글을 쓸 수 있습니다. 만년필로 어떻게 이렇게 얇게 글을 쓸 수 있을까..싶을 정도인데요. 사실 더 얇은 펜들도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플래티넘의 UEF촉이나 세일러의 사이비토기 같은 제품은 극세를 넘어서 초극세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습니다.

세필펜은 글을 얇게 쓸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장시간 필기하기에는 손에 부담이 많이 가는 단점도 있습니다. 주력으로 쓰기는 조금 어려운 펜이지만 한글이나 한자를 자주 쓰는 환경이라면 하나 정도 필요한 펜이 아닌가 합니다.

 


펜 세 자루 모두를 카트리지로만 사용하기 때문에 소위 주사기 신공으로 잉크를 충전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보통 한 카트리지에 충전을 하면 일 주일 안에 재충전을 하게 되는데 그때에는 같은 회사의 같은 잉크를 쓰더라도 카트리지와 펜촉 모두를 세척하고 다른 카트리지로 교체해 사용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귀차니즘이 발동했는지 그냥 중간에 잉크를 보충해버렸습니다. 얼마 후 잉크 잔량을 확인하기 위해 들여다봤는데 거의 안 보이더군요..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잉크를 모두 뽑아냈습니다.


보통 사용하는 빈 카트리지는 위 사진처럼 잉크를 뽑아내고 나면 투명한 상태가 유지됩니다. 잉크를 재충전할 때도 깨끗하게 닦은 다음 말려주기 때문에 늘 새것같은 상태를 유지합니다.

그런데


어제 나온 녀석이 맨 아래에 있는 카트리지입니다. 2차 대전때 미군이 사용하던 탄피도 아니고 아주 색기 가관입니다. 잉크가 플라스틱에 그대로 착색이 되어 버린 모양새입니다. 나름대로 만년필과 카트리지를 오래 써 왔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네요.

사용한 잉크는 세일러 젠틀 블랙인데 세일러 잉크가 착색에 대한 말이 좀 있기는 하지만 블랙의 경우는 그래도 괜찮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악명 높은 극흑 잉크의 경우도 저 정도 착색은 생기지 않았는데 조금 당황스럽네요. 앞으로 세일러 잉크(무려 3병이나 있는데...)는 딥펜용으로만 써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착색과 관련해서 비교적 말이 많은 잉크가 세일러 컬라 잉크와 누들러 잉크라고 합니다. 직접 겪어보니 이거 무시할 정도가 아니네요..물론 사용자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저와 세일러 잉크는 확실히 여러 면에서 안 맞는 것 같네요.




오랜만에 진짜 펜을 들어 글을 써봤습니다.

잉크를 찍어 쓰는 펜은 어쩐지 글을 정말 쓴다는 느낌도 들도 과거의 어느 시간으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하다보니 필기구에 이리저리 마음이 끌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Rubinato, Sailor Jentle Bl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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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다시 하기로 마음 먹은 다음 가장 먼저 장만한 것이 필기구였습니다. 특히 만년필은 초등학교 때부터 손에 익숙해져 있어서 이번에는 남은 평생을 쓸 3자루의 펜을 장만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렇게 처음 장만했던 것이 이전에 잠시 소개한 비스콘티였는데 이 펜은 동생의 생일선물로 보내주었죠. 그동안 동생에게 뭐 하나 제대로 해준 적이 없는 데다가 사회에서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녀석이니 고급펜 하나는 있어야 겠다 싶어서 보내주었죠.

제가 구상하고 있는 3자루의 펜은 검정 잉크를 담은 주 필기용 펜과 청색 잉크를 담은 펜 그리고 아주 얇은 글씨를 쓸 수 있는 정리용 세필펜 이렇게 3자루입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잉크는 청색 계열인데 이렇게 보면 사실 두 자루 모두가 주력펜이 되는 셈이죠. 아무튼 전에도 한 번 적었던 것 같은데 어떤 물건(이건 조금 더 넓게 해석하면 사람에게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을 구입할 때는 그 방면에서 가장 잘 알려진 제품을 장만하는 것이 소위 수업료를 가장 덜 낼 수 있는 방법입니다. 한참 사진에 빠져 있을 때 뼈저리게 겪은 부분이기도 하죠.   




제가 가지고 있는 필통(?)인 펜파우치입니다. 비교적 흔한 몽블랑의 시에나 3구 파우치인데 딱 3자루의 펜을 넣을 수 있습니다. 이 녀석을 어떤 펜들로 채울까 고민을 제법 오래했죠. 만년필은 제조사의 특색에 따라 닙이라고 불리는 펜끝이 강성이나 연성이냐로 일단 구분을 해 볼 수 있습니다. 강성이란 닙이 잘 휘지 않는 강직한 느낌을 주는 것이고 연성이란 마치 붓처럼 사용자가 자유롭게 압력을 주어 글의 굵기를 조절할 수 있는 유연한 펜입니다. 물론 강성펜도 굵기 조절은 가능합니다. ^^ 저는 강성펜이 제  필기 스타일에 가장 맞는데 그런 면에서는 워터맨과 오로라 제품이 가장 적절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파우치를 열어 보면 2자루의 펜이 들어 있습니다. 왼쪽에 보이는 것은 몽블랑 P145입니다. 연성촉인 몽블랑이지만 이 녀석은 EF촉이고 그 중에서도 상당히 까칠한 펜인지라 지금도 길들이는데 꽤나 애를 먹는 녀석입니다. 검정이나 블루블랙을 주로 사용하고 있죠. 오른쪽에 보이는 펜은 저렇게 봐서는 뭔지 짐작도 안 가는 펜입니다.





이렇게 꺼내 놓으면 조금 구별이 되려나요? 흔히 소개글로 자주 보이는 리틀 에드슨이나 요트 모양의 우아한 자태..는 사실 그다지 느낌이 오지 않는 펜으로 워터맨의 까렌입니다. 까렌의 특징은 나중에 다시 포스팅을 하겠지만 촉이 잘 마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비행기로 이동을 할 때 잉크를 담아 움직일 수 있는 몇 안 되는 펜이기도 하고 공부를 하다보면 펜을 멈추는 시간이 제법 많은데 다른 펜들이 그 사이에 펜촉의 잉크가 말라버리는 것에 반해 까렌은 제 테스트로는 20분은 가볍게 버텨줍니다. 심각한 과목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제격이 아닐까 생각이 되네요. 가격만으로 보면 까렌이 145보다 높습니다. 하지만 인지도는 아무래도 145가 높죠. 대신 까렌은 까렌으로 145는 몽블랑으로 인식되는게 보통입니다.




이렇게 2자루를 구비하는데도 제법 많은 시간과 비용과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가 남았는데 위에도 적었듯이 세필이 가능한 아주 얇은 펜이 마지막으로 들여놓을 펜이죠. 위의 두 펜 모두 촉은 EF 즉 Extra Fine으로 얇은 편이지만 제가 원하는 얇은 정도는 정말 얇은 하이테크 포인트 정도의 펜이어야 합니다. 그 대상은 그러다보니 자연히 일본산 만년필로 정해졌고 아마 세일러의 펜이 되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다만 고민은 세일러의 라인업 중에서 무엇을 선택하느냐 정도가 남아 있는 셈이죠.

세일러 펜 역시 상위 라인으로 올라가면 가격대가 만만치 않고 이미 2개의 펜(동생 선물로 준 것까지 합하면 3자루)을 장만하느라 허리가 휠 대로 휜 상태라 아마 다음 달 월급날이 지나야 마지막 녀석을 들여놓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어쨌건 만년필을 장만할 때도 애초에 한방(?)을 크게 저질러 버리니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것은 확실히 줄었습니다.

물론 145가 몽블랑 라인업에서 가장 하위에 있는 기종이고 몽블랑의 진가는 149다라던가 리틀 에드슨이 아니라 진짜 에드슨을 써봐야 하는 것이 아니냐 혹은 워터맨의 정점에 있는 세레니떼의 필기감을 느껴보라는 등의 주변의 충동질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수집가가 아닌 실사용가로서 제가 가진 두 자루만 해도 과분할 지경이니 그런 유혹들은 그저 달나라의 토끼 방아소리만큼이나 유혹은 되지 않습니다. (다만 확신은 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나약함입니다)




만년필을 쓰는 이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무엇일까?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습기를 빼 놓을 수 없겠습니다. 모처럼 장문의 연애편지를 썼는데 들고 가는 중에 소나기라도 맞았다면? 소나기는 아니더라도 땀이 많이 나 편지지에 습기가 배었다면 어떻게 될까요? 또 공공문서에 만년필로 서명을 하는 경우도 많은 데 보관 상의 부주의나 천재지변 등으로 습기가 문서를 습격한다면 문서는 멀쩡하게 살아 있을까요?


위에 보이는 종이는 중성지로 일반 산성지에 비해 내구성이나 보존성이 좋은 종이입니다. 그리고 각각의 문장은 제가 가지고 있는 5종류의 잉크로 글을 적은 것입니다. 테스트는 좀 과격하게 했는데 종이에 글을 쓴 다음 잉크가 마르기를 기다렸습니다. 분무기로 뿌려줄 수도 있지만 아주 극단적인 상황이다 생각하고 수돗물을 흘려 보냈습니다.

완전히 물에 담글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 상태가 되면 사실 어떤 잉크도 버티기는 어렵다는 판단이 들어서 물을 흘려보내는 수준으로 테스트를 했는데 결론적으로는 물에 담가도 버티는 잉크가 있기는 있더군요.

자, 위에 사용된 잉크는 모두 5종입니다. 몽블랑의 블랙 잉크, 파카의 퀸크 잉크, 세일러의 극흑 잉크, 오로라의 블랙 잉크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이허빈의 사파이어블루입니다. 제이허빈의 잉크는 까렌다쉬로 납품을 하고 있으니 까렌다쉬도 비슷한 결과가 나온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물론 제이허빈의 잉크는 워낙 종류가 다양하니 100%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펜 좀 만져보신 분(?)은 일단 대충 각각의 번호에 맞는 잉크를 벌써 맞추셨을 수도 있겠네요. 원문이 거의 사라지지 않고 버틴 잉크 즉 2번은 역시 세일러의 극흑 잉크입니다. 그리고 원문이 대체 뭔지 알 수도 없게 지워진 잉크는 짐작하시는 대로 몽블라의 블랙 잉크입니다.

1번은 파카의 퀸크 잉크로 버티려고 노력은 했는데 번짐이 생겼고 4번은 오로라의 블랙 잉크인데 대충 글씨는 알아볼 수는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청색은 제이허빈의 사파이어블루로 번짐이 생기기는 했지만 그래도 제법 잘 버텨주었습니다.

세일러 - 제이허빈 - 오로라 - 파카 - 몽블랑의 순으로 습기에 대한 저항력이 강하다고 볼 수 있겠네요. 아니 방탄 잉크라는 몽블랑이 왜 저래? 하실 수도 있는데..사실 몽블랑 블랙 잉크는 습기에 약합니다. 그래서 보통 보존을 위한 경우에는 블루블랙을 주로 사용합니다. 몽블랑 블루블랙의 경우는 어느 정도의 내수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을 흘려 보니 블랙 잉크의 경우라도 제각기 고유의 색이 다르다는 것을 보실 수 있을 텐데요. 블랙 잉크 중에 어떤 것을 고를까 할 때도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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