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산행을 준비는 꾸준히 해왔지만 오늘 걸음이 올겨울의 첫 눈꽃산행이 될 줄은 몰랐다. 밤 사이 눈이 내렸다는 소식에 대수롭지 않게 '아이젠만 챙겨 가면 되겠지'라고 생각하고 나선 길이었는데 산은 이미 눈으로 가득 덮여 있었다. 그동안 작은 산들은 여러 곳을 다녔지만 큰 산은 오랜만이었기에 느낌이 남달랐고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사람이 있었기에 포근했던 겨울 지리산행이었다.


지리산. 3개의 도에 걸쳐있고 백두대간의 종착점인 우리나라 명산 중의 한 곳이다. 우리가 택한 길은 백무동에서 출발해 한신계곡을 따라 올라가 세석대피소에서 1박을 하고 장터목을 거쳐 천왕봉에 이르는 길이었다. 


백무동에서 거리만으로 볼 때는 천왕봉까지 큰 무리없이 다다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산행을 시작하고 나니 만만한 길이 아니었다. 


동서울터미날과 백무동터미날을 잇는 버스 시간표다. 17일부터 12월 15일까지는 산불방지기간으로 세석대피소가 한 달간 문을 닫기 때문에 백무동쪽으로 산행은 불가능하다. 원래 세석대피소의 폐쇄는 15일부터였는데 어쩐 일인지 이틀이 연장되었고 덕분에 계곡 풍광이 좋은 길로 오를 수 있어서 무척 다행이었다.


세석길의 시작. 산 아래에는 눈의 흔적을 볼 수 없었고 오히려 늦가을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지리산은 소위 '큰 산'이다. 이런저런 경로로 해서 정상까지 오르는 길이 크게 어렵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정말 겸손하게 많은 준비를 해야 산 자체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무턱대고 덤벼들어서는 산은 쉽게 길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석과 장터목 갈림길. 이곳에서 우리는 세석으로 향하는 길로 접어 들었는데 천천히 걸으며 주변의 경치들을 즐기며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며 저무는 가을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왼쪽 길로 가면 마치 설악산의 오색약수길을 연상시키는 계단길을 만나게 되는데(물론 오색의 계단에는 미치지 못 한다) 선택은 본인의 몫이지만 등산보다는 하산 루트로 권해본다. 


그리고 도착한 세석대피소. 군데군데 녹지 않은 눈의 흔적들이 보인다. 입산통제가 이틀 연장됐지만 많이 알려지지 않은 까닭인지 이날 대피소에 머문 사람은 우리 두 명과 남성 등산객 두 명 이렇게 4명이 전부였다. 대피소가 이렇게 텅텅 비는 경우도 있나 싶었고 덕분에 여유있게 쉴 수 있겠다 했는데 사람이 적어서 그런지 우렁찬 코고는 소리가 온 방에 울려퍼지는 부작용도 있었다.


세석을 벗어나 조금 걸으면 이제 사방이 눈밭이다. 한겨울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은 풍경들이 사방에 가득 했다. 눈이 온전히 자리잡기 전이어서 굳이 아이젠이 없어도 그럭저럭 다닐만하긴 했지만 오늘 이후로 이곳을 찾는다면 아이젠은 초반부터 착용하는 것이 좋겠다. 세석에서 장터목에 이르는 길은 풍광이 참 멋드러졌다. 1박 장소를 바로 장터목으로 잡지 않고 세석으로 잡은 것도 이 경치를 놓치기 아깝다는 그녀의 판단이었고 덕분에 이른 설산의 풍경을 온몸으로 감상할 수 있었다.


멀리 촛대봉이 보이고 풍경을 만끽하는 등산객의 모습이 보인다. 11월 중순에 이런 눈밭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참 즐거운 일이다. 얼마 안 있으면 사방이 눈으로 덮일 날이 오겠지만 시간을 앞서 이런 풍경 속에 빠져보는 것도 꽤 매력적인 경험이 아닐까 싶다. 세석에서 장터목에 이르는 길은 역시나 사람이 많지 않았다.


지리산의 매력은 무엇보다 마치 벨벳을 늘어놓은 듯 산자락이 겹겹이 펼쳐져 있는 이런 모습이다. 어디가 끝인지 모르게 산자락이 이어지고 또 이어져 장관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사진으로 담아내기에 풍경이 워낙 압도적인 것이냐 사진 실력이 부족한 것이냐면 당연 후자일테지만 한참을 서서 바라보던 이 풍경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 아쉬움은 산행 내내 남아있었다.


멀리 보이는 낮은 봉우리들은 눈이 녹아 가을산이지만 내쪽으로 가까워질 수록 봉우리들이 높아지면서 눈이 그대로 남아 있어 겨울산의 모습을 하고 있다. 좀처럼 보기 힘든 이 모습은 요즘이 아니면 만나기 어려운 풍경이다. 여름을 뺀 3개의 계절이 시간의 순서에 따라 아래에서부터 위로 변화하는 그래프처럼 그림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능선길을 따라 걷다보면 눈 사이사이로 때이른 눈에 놀란 푸른 잎새들이 보인다. 한겨울이 오면 이 약간의 푸름마저 사라져버릴텐데 참 재밌는 경험이었다. 그녀는 오늘 날씨가 도왔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는데 생각해보니 초입부터 장터목에 이르기까지 쨍한 날씨였고 능선길에서 마주하는 바람도 그리 강하지 않아 경치를 진득히 감상할 수 있었으니 운이 좋았다기보다는 산이 도와주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다.


한발한발 내딛는 걸음마다 눈 밟는 소리가 조용한 겨울산에 잔잔하게 퍼진다. 오고가는 이들이 거의 없으니 정말 여유를 가지고 산의 면면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갑자기 내린 눈에도 이런 멋진 설경이 펼쳐지니 정말 제대로 눈이 내린다면 이 풍경이 또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라는 기대도 한껏 해 본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면 여기도 이른 눈에 놀란 나무들이 보인다. 몇몇은 내린 눈을 그대로 받아들여 눈꽃을 피우고 있고 몇몇은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내린 눈을 털어내 원래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렇게 하나의 계절과 또 하나의 계절이 맞물리며 눈으로 볼 수 없는 시간이라는 존재를 볼 수 있게 해 주고 있었다.


문명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온전히 생존본능만 가지고 버텨야 하는 시간이었지만 함께 하는 이가 있어 힘겨움보다는 따뜻함으로 지낼 수 있었던 이틀이 아니었나 싶다. 지리산 초행인 나를 챙겨가며 열심히 걸어준 그녀에게 감사한 마음이다. 


장터목 대피소에 다다르니 이제야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취사장을 가득 메운 산객들. 무엇이 이들이 이 높은 곳까지 사서 고생을 하며 오르도록 만들었을까. 산의 부름. 그 이상의 다른 대답은 생각나지 않았다. 몸 어느 한 구석 아프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의 고통을 감내하며 산을 오르는 것은 그 부름을 들은 사람의 몫이다.


Panasonic LX-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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