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대청봉을 오르는 코스는 제법 많은데 내가 고른 아니 내게 주어진 길은 오색약수터를 시작으로 하는 가장 쉽다는 코스였다. 설악산 대청봉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높고 험한 산이라는 사전 지식은 당연히 없었고 사진을 딱히 찍을 의도도 없었던 지라 비상용으로 들고간 2G휴대폰과 20년은 됐음직한 똑딱이 디지털카메라가 전부였다.


등산에 대해 지식이 전무하던 시절이어서 이날 내 복장은 산 좀 타는 분들이라면 황당하다 싶을 정도였는데 청바지에 면티(그것도 카라가 있는 남방 안에 면티를 받쳐 입었다!) 하나 딸랑 입고 올라갔었다. 그것도 8월에 말이다. 오르내리는 와중에 마주쳤던 사람들이 왜 나를 유심히 봤는지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었다.

아무튼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내 배낭에는 파워에이드 1.5리터 짜리 한 병과 김밥 한 줄 그리고 초콜릿 서너 개가 전부였는데 나중에 지인들에게 들려주니 살아돌아온게 신기하다는 반응이었다. 아무튼 깊은 산이라 그런지 동네 다람쥐들도 딱히 사람 경계는 안 하는 모양새..


처음에는 '설악산이다~' 라는 기쁜 마음에 정말 아무 생각없이 씩씩하게 돌격 앞으로를 했는데.. 시간이 갈 수록 정신이 몽롱해지고 게다가 날씨는 비가 왔다가 바람이 불었다가 맑았다가.. 도통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무슨 계단이 그리 많은지 살다살다 그렇게 많은 계단은 처음 봤다. 보통 오색약수를 기점으로 대청봉을 찍고 내려오는 시간은 9시간 정도를 잡는다고 한다. 거리상으로는 5km정도인데 고도차가 워낙 커서 만만하게 볼 코스는 아니다.. 물론 나는 이런 것들을 내려온 후에야 알았다.


당시 정상에는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듯한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는데 정상에 올라와 있는 사람도 단 두 명뿐이었다. 정말 한 치 앞도 보기 힘들고 바람때문에 서 있을 수도 없었는데 옷은 이미 폭싹 젖은 상태고 그래도 인증샷을 날려야 한다는 집념에 정말 간신히 담은 사진 한 장. 

문제는 내려가는 길이었다. 올라가는 것은 어찌어찌했는데 이미 다리는 힘이 다 풀렸고 솔직한 말로 '이대로 죽는구나' 싶을 정도의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무엇보다 계단의 숫자와 경사가 내려갈 때는 훨씬 강하게 느껴졌다. 몇 번을 넘어질 뻔하기를 반복한 끝에 하산은 성공. 대충 전체 등반 시간은 7시간 정도였다. 

등반이라하기도 뭐한 것이 시내 어딘가에 약속이 있어 나가는 복장으로 비바람치는 대청봉을 올라갔다왔으니 무식하면 용감한 것은 둘째치고 인간이란 그렇게 약한 것만도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다시 그 복장으로 어디든 산에 올라가라면 이제는 고개부터 저을 테지만 말이다. 이후 좋다는 등산장비들을 하나 둘 구입도 해봤지만 아직 그 장비들을 쓸만한 곳은 가 보지 못 했다. 


무식하면 용감했던 그날의 복장. 이 정도 복장으로도 비바람 몰아치는 대청봉을 오를 수는 있다. 그러나 자칫 생사가 엇갈리는 광경과 마주칠 수도 있으므로 기본적인 등산 장비는 반드시 갖추기를 권한다. 무엇보다 청바지 입고 등산하려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기를 바란다.



오색약수에서 출발하여 대청봉으로 가는 길은 여러 코스 중에서 가장 무난한 코스라고 한다. 그러나 무난하다는 것이 비교적 오르기 쉽도록 배려가 되어 있다는 점이지 결코 그 코스 자체가 만만하지는 않다. 위의 계단만 보고 '이 정도야?'하고 살짝 무시를 하며 올랐던 대청봉은 그리 쉽게 사람의 도전에 응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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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청봉에 올랐다. 비바람인지 알 수는 없지만 바람이 몹시도 세차게 불어

  안경 너머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그곳에 올랐다. 마지 못해 오른 것이 아니라 올라가야 했기에 올랐다.

  그리고 내려오는 길에 난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 이제 내가 가야할 길을 분명히 깨달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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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곳에서 바라보면 삶은 아주 작은 점으로 표상화될 뿐이다. 여기저기 치이고 아웅다웅하는 모습들이 그저 작은 점들의 부딪힘으로 비출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네들의 삶은 그 점에 집중되어 있어 보다 큰 의미를 찾지 못하곤 한다..


한 걸음만...한 걸음만 물러서서 바라보면 될 것을 오히려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우리네 삶의 모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진실을 발견하셨습니까?


D300, AF-S 17-55mm f/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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