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륜산(대둔산)은 한반도 최남단에 자리잡은 산이라 한다. 해남에서 찾은 산이니 이보다 더 남쪽의 산이라면 한라산이 있겠지만 바다를 건너는 수고를 들여야 하니 온전히 걸음을 걸어서 만날 수 있는 마지막 산이라 불러도 어색함이 없다. 그 두륜산에 자리잡은 사찰이 바로 대흥사다. 예사롭지 않은 일주문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대흥사는 규모면에서 찾는 이를 압도한다. 보통 사찰을 떠올린다면 넓지 않은 터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불전들을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이곳 대흥사는 어디서부터 사찰의 시작인지조차 알기가 어려웠다. 오히려 그 덕분인지 사찰 경내를 걷는다는 느낌보다는 공원을 걷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사진의 돌에 '13대종사도량'이라 적혀 있다. 대흥사는 불교의 맥을 잇기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인 사찰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서산대사가 이곳에서 후학들을 양성했다고 한다. 일주문을 지나 조금 걷다보면 서산대사를 비롯한 고승들의 부도가 자리한 '부도밭'을 만날 수 있는데 무려 54기라 하니 대흥사의 법력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대흥사에서 만날 수 있는 다채로움 중에 이 '연리근'은 유난히 우리의 관심을 끌었다. 가지가 이어진 '연리지'는 종종 만날 수 있지만 뿌리가 이어진 '연리근'은 희귀하기도 하고 연리지에 비해 더 끈끈하달까 좀 더 각별하달까..그런 느낌이 드는 나무였다. 이렇게 대흥사는 전각들 외에도 볼 거리들이 많은 것이 특별한 점인데 남도 여행을 하게 된다면 하루 정도 온전히 대흥사만을 위해 할애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이란 무엇일까 생각을 해 본다. 특히나 여행을 좋아하는 우리에게 여행은 각자의 삶의 연장인 동시에 두 사람의 삶이 마주치고 얽히는 그런 순간이었다. 오감으로 느끼는 모든 것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참 대단한 일이 아닌가. 같은 길을 걷고 같은 풍경을 바라보면서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들이 어색하지 않고 부드러운 바람처럼 두 사람을 감싸고 있었기에 각별했던... 그런 모든 순간들의 이어짐. 그것이 우리의 여행이었다.


사진은 셔터버튼을 누르는 그 순간에 내가 느낀 감정을 온전하게 프레임 안에 담아낼 수 있으면 더할나위 없이 좋다. 뷰파인더 안에서 본 느낌이 나중에 집에 돌아와 모니터를 통해 그대로 느껴진다면 그것으로 한 번의 셔터가 움직인 수고로움은 모두 사라지는 셈이다. 사진에 대한 생각이 예전과는 약간 달라진 부분인데 세월이 지난다는 것은 그렇게 생각에도 변화를 주는 모양이다. 


예전에는 저 문을 열고 들어가야만 무언가 달라지고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 문을 열고 들어가 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굳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지 않더라도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저 문 뒤의 삶이 궁금하지 않게 됐다.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이라는 것을 이제사 깨달은 까닭이다.

그러고보니 35mm 렌즈 하나로 지낸 지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나고 있다. 사람마다 기준은 다르겠지만 내 경우는 28mm와 35mm가 가장 내 눈과 일치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화각이다. 35mm말고도 55mm가 하나 더 있지만 좀처럼 손이 가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요즘은 표준화각대의 줌렌즈가 하나 더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는데 아마도 사람을 찍어야 할 일이 늘어났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Nikon D700, AF 35mm f/2.0


작년에 북한산 둘레길을 완주한 이후 걷기가 잠시 주춤했다. 이런저런 이유가 있었겠지만 새해 들어서도 다시 걷기를 시작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런데 흔히 말하는 '강제력'이 작용한 것인지 산림청에서 주관하는 블로그 기자단에 선발이 되면서 원고 작성을 위해 한 달에 적어도 한 번은 걸어야 하는 의무(?)가 생겼다. 

어디를 돌아볼까 생각을 하다가 이전에 후배와 성균관대 후문 쪽으로 걸었던 성곽길이 생각이 나 이 코스를 네 번에 걸쳐 돌아보기로 했다. 우선 이 길은 한양도성길로도 불리고 한양성곽길, 서울도성길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공식적으로는 문화재청이 '서울 한양도성길'로 이름짓고 있고 이곳에서는 한양도성길로 부르기로 하겠다. 이번 글은 사진이 많아 두 개의 글로 나누어 올릴 생각이다. 그리고 글자 폰트도 조금 키워보았다.

한양도성길의 시작점으로 택한 것은 북악산길이다. 북악산길도 3곳은 진입로가 있는데 내가 간 곳은 지하철 5호선 한성대입구역에서 출발하는 길이다. 지하철 출구에서 한 10여 분 정도 직진을 하면 되는데 언덕으로 올라설 즈음 건널목 건너로 진입로가 보인다. 올라 오는 도중에 간송미술관으로 가는 길과 나뉘기도 한다.


안내표지판을 뒤로 하고 걷기 시작하면 평탄하게 잘 포장된 길이 이어진다. 초입부터 시작된 성곽이 이제 이 길을 마무리하는 지점까지 죽 이어지게 된다. 성곽을 쌓은 돌의 재질이 위치마다 어떻게 달라지는지 그리고 왜 그런지 생각해보면서 걷는 것도 좋겠다.


입춘이 지났지만 아직 봄은 오지 않았다. 성벽에 기댄 채 말라 붙은 가지가 아직 오지 않은 봄을 탓하듯이 그리고 지난 겨울의 흔적을 기억하듯이 이제는 따스해진 겨울 햇살을 온몸으로 쬐고 있었다. 


제법 넓어지는 구간이 나온다. 와룡공원과 이어지는 곳인데 지역 주민들의 휴게 공간 역할을 하고 있어서 의자나 운동 기구들 같은 것이 여기저기 배치되어 있다. 미리 말하지만 본격적인 성곽길 걷기를 시작하면 마땅히 쉴 곳이 없으니 미리 충분한 휴식과 에너지 보충을 하는 것이 좋다.


그러고보니 우리 역사 유적 찾기도 하겠다고 야심찬 선언을 한 지도 제법 오래됐다. 한동안 그 작업도 거의 못 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이곳이 사적 10호다. 보통 여행을 다닐 때 안내문 읽기를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은데 잠깐 멈춰서서 안내문을 보면 자신이 어디에 그리고 왜 왔는지 다시 확인할 수 있고 무엇에 중점을 두고 여행의 방향을 잡아야할지 분명해지기 때문에 안내문은 꼭 읽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좋다.


이렇게 보면 마치 조선의 어느 시대에 와 있는듯한 느낌이 든다. 세월이 흐르고 사람들의 모습은 다 사라졌지만 성벽은 남아 그 시절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 자리에도 어느 인물의 인생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을텐데 낯선 이는 그 사연을 알 수 없고 그저 차가운 벽돌에 기댄 햇살만 바라볼 뿐이다.


북악산길의 시작점인 말바위안내소로 가는 길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제법 멀다. 말바위 안내소에서 시작하는 북악산길의 길이보다 그 전에 걸어야 할 거리가 훨씬 길기 때문에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주변 경관을 감상하면서 걷기를 권한다. 날이 따뜻해졌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겨울인지라 오가는 이들이 그리 많지 않아 조용히 산책하기에 더없이 좋았다.


생각해보면 여러 국가의 수도 역할을 했던 서울에 당연히 유적이 많아야 함에도 우리 주변에서 과거의 유적을 찾아보기란 쉽지가 않다. 일제강점기와 전란을 거치면서 많이 소실된 부분도 있겠지만 개발이라는 이름 하에 사라진 유적들도 꽤 많지 않을까? 과거를 기억한다는 것은 발전을 거부하고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바탕으로 현재를 그리고 미래를 키워나가는 주춧돌이 되는 것인데.. 아쉬운 부분이다.


한양도성길 중 북악산길은 입장 제한이 있다. 지역 자체가 청와대에 인접해 있고 1.21사태라는 분단 시대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장소기 때문이다. 이곳을 걷기 위해서는 신분증이 필요하다. 안내판에 써 있는대로 준비만 하면 입장하는데 전혀 무리는 없으니 참고하도록 하자. 다만 입장 시간이 짧은 편이기 때문에 가급적 오전에 집을 나서는 것이 좋다.


시내에서 좀처럼 구경하기 힘든 표지석이다. 이 돌을 기준으로 성북구와 종로구가 나뉘는데 기술이 발달하기 전에는 이런 표지석들이 곳곳에 있어 사람들이 왕래하면서 현재 위치를 묻곤 하지 않았을까 싶다. 요즘이야 스마트폰만 켜면 아주 자세한 위치가 나오지만 말이다. 때로는 너무 자세한 정보는 정신에 부담이 가기도 하는데 오히려 이런 표지석이 정감있고 아날로그적이다.


이제 성곽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끼인지 풀인지 모를 식물들이 세월을 간직한채 성벽에 옹기종기 붙어 있다. 지난 겨울을 버틴 힘으로 이제 봄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 역시 다르지 않아 슬픔과 기쁨은 늘 그 자리를 바꿔가며 우리에게 삶이란 이런 것이라고 교훈을 준다. 힘들다고 좌절하지 말고 기쁘다고 교만하지 말 일이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제법 높이가 만만치 않다. 전란 시대에는 이 성벽을 지키느냐 오르느냐에 한 국가의 운명이 정해졌을텐데 오르는 자나 지키는 자나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맞부딪힌 장소가 바로 이곳은 아니었을까? 자세히보면 아랫부분의 돌과 윗부분의 돌의 재질이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처음 성곽이 만들어질 때의 상태를 보존하고 있느냐 아니면 이후 보수공사가 이루어졌느냐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고 한다.


한참을 걸었지만 아직 안내소는 보이지 않고 안내문만 나타난다. 위에도 적었지만 실제로 안내소를 지나 걷는 거리는 얼마 되지 않는다. 창의문 쪽에서 오르는 길을 선택했다면 바로 북악산 길부터 길이 시작되지만 말바위 안내소로 오는 길을 택했다면 이렇게 먼저 걸어야할 길이 있으니 경로 선택을 할 때 참고하면 되겠다.


이제 얼마 뒤면 이곳은 개나리가 펼치는 노란색의 물결로 뒤덮이겠지만 아직은 숨을 죽이고 있는 모습이다. 이미 남부지방에는 봄을 알리는 징조들이 속속 선을 보이고 있지만 서울은 여전히 겨울이다. 하지만 자연의 순리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것인지라 경칩이 지날 무렵이 오면 지난 겨울의 흔적은 거의 사라지리라.


오래된 돌과 다음 세대의 돌 그리고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바위들과 그 사이의 나무들이 어루어진 풍경에 한참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장소. 시간과 세월, 흔적과 기억 그런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맴돌면서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시간여행이라도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길을 걷기 시작했을 때의 잘 닦인 길은 이제 거의 보기 힘들어졌고 좁은 길과 성벽 그리고 나무들을 벗삼아 걷는 구간이다. 성곽길이라고 표현이 되어 있어서 자칫 산책로 정도로 생각하기 쉽지만 북악산길은 그 이름 그대로 북악산 정상을 통과하는 길이다. 물론 등산 장비를 착용하고 걸을 필요까지는 없지만 대략 5km정도의 거리를 걸어야하기 때문에 등산화 정도는 신고 가는 것이 몸에 무리가 가지 않을 것 같다. (2편에서 계속)




사적 10호는 '한양도성'이다. 내가 아는 한도에서 가장 큰 사적이 아닐까 싶은데 서울을 원의 형태로 빙 둘러서 하나의 성을 쌓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이 한양도성은 서울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존재인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일단 오랜 전쟁과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성곽이 대부분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한양도성을 둘러싼 8개의 문은 4대문과 4소문으로 나뉘는데 동쪽의 흥인지문(동대문), 서쪽의 돈의문(서대문), 남쪽의 숭례문(남대문), 북쪽의 숙정문(북대문)이 4대문이다. 이 중에 제대로 남아있는 것은 동대문과 숙정문이다. 서대문은 일제 강점기 때 철거되어 아직 복원이 되지 않았고 한양의 관문인 숭례문은 이전의 화재로 아직 복원이 완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4대문 중 흥인지문은 보물 1호, 숭례문은 국보 1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이 4대문을 중심으로 북동쪽에 혜화문(동소문), 북서쪽에 창의문(자하문), 남동쪽에 광희문(수구문), 남서쪽에 소의문(서소문)이 있는데 혜화문은 일제가 철거한 후 복원이 되지 않았고 서소문 역시 일제 때 철거되었기 때문에 현재 남아 있는 것은 광희문과 창의문이다. 혜화문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뉘지만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다. 아무튼 이 8개의 문을 빙 둘러서 쳐진 성곽이 사적 10호인 한양도성으로 오늘 찾은 곳은 한양의 북서 관문인 창의문(자하문)이다.


멀리 창의문이 보인다. 창의문은 한양의 북서쪽에 있는 문이지만 한양의 실제 북문인 숙정문이 거의 열린 적이 없어 창의문이 북문의 역할을 대신했다고 한다. 숙정문은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 문이 열리면 한양의 풍기가 문란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늘 닫아 두었다고 한다. 현재 숙정문은 활짝 열려 있는 상태인데 서울의 문란함이 증가되었는지는 알길이 없다.


창의문(彰義門)은 자하문(紫霞門)이라는 애칭으로 더 많이 불렸다고 하는데 보라색 노을을 의미하는 자하가 이 문을 중심으로 많이 보여 그렇게 불렸다고 한다. 창의문은 4소문 중에 가장 보존도가 높은 문으로 1396년 태조 당시 축조된 상태가 거의 그대로 보존되고 있으며 1958년 완전하게 보수를 마쳐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위의 그림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인왕산에서 북악산에 이르기 위해서는 창의문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조선 시대에는 이 문의 이용이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창의문의 특징 중의 하나가 목계 즉 나무로 만든 닭인데 추녀에 닭을 매달아두었다는 이야기, 망루에 닭을 올려두었다는 이야기 등 이런 저런 말이 많은데 직접 가서 보니 저게 닭인가 싶어 한참을 바라봐야했다. 창의문은 다른 문들과 달리 항상 열려 있어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 있는 문이다. 다른 문들이 닫혀 있거나 접근이 어려운데 반해 이문만큼은 가장 잘 보존이 되고 있음에도 늘 사람들에게 길을 열어주고 있었다.


창의문을 시점으로 서울성곽길 코스가 하나 있는데 사진에서 오른쪽에 입구가 있다. 북악산 서울성곽길로 여기는 신분증을 내고 서류를 작성해야 입장을 할 수 있는데 오늘은 그 코스를 따라가지는 않았다. 서울성곽길도 전체적으로 한번 둘러볼만한데 북한산둘레길의 완주가 끝나면 성곽길을 주제로 글을 써볼까 싶기도 하다. 


문의 보존이 아주 잘 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문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몇백 년의 세월이 지난 것을 생각해보면 이문을 통해 얼마나 많은 우리네 조상들의 삶의 희로애락이 교차되었을까 싶어 새삼 느낌이 새롭다. 겨울 햇살에 살짝 몸을 녹이고 있는 작은 문을 바라본다. 겨울이 아닌 다른 계절에 이곳을 찾았다면 좀 더 생동감 있는 모습이지 않을까 싶지만 역시 겨울에 제 빛을 낼 수 있어야 다른 계절에도 그 빛이 강해지는 법. 


단청의 색은 언제 봐도 참 알록달록한 것이 사람 마음을 즐겁게 한다. 이렇게 보니 닭머리(주: 사실 동물은 머리라고 쓰지 않지만 언어순화를 위해 머리로 적습니다)도 좀 더 잘 보인다. 윗부분은 바람 등의 영향을 적게 받아 색이 온전히 남아 있지만 아래 부분은 색이 조금씩 바래고 있는데 그래도 이 정도로 남아있다는 것이 다행이다 싶다. 


천장을 보면 참 잘 짜여진 구조로 지어졌구나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세월을 지탱하는 힘은 이 뼈대에 있다. 밖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안으로 튼튼하게 지어진 틀들이 모진 세파를 이겨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오밀조밀한 나무들과 그 틈 사이로 오래된 역사가 숨쉬는 느낌이 든다. 오른쪽에 뭔가 현판이 하나 보이는데 여기에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제법 넓어 보이지만 광각렌즈의 효과다. 중앙 부분은 보존 차원에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두고 있다. 가끔 보면 이런 걸 그냥 무시하고 들어가는 분들이 있는데 잠시의 자기 만족을 위해 역사를 후세에 물려주는 일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하지 말라고 하면 하고 싶어지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지만 그 본성때문에 사라진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인조반정 당시 반정군은 이 창의문을 뚫고 창덕궁으로 진격했다고 하니 이 문에 서린 피의 역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남아 주위를 맴돌고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새삼스러운 순간이다. 아무튼 영조는 그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창의문을 보수하고 저 현판을 매달아 두었다고 한다.


당시 반정공신들의 이름이라는데 가까이 갈 수가 없어 망원으로 당겨보았지만 120mm로는 아주 약간의 글자만 읽을 수 있을 뿐이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데 정말 저렇게 이름을 남겨 두고 있다. 문득 이름을 남긴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일까라는 생각이 든다. 이름이라는 것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말해줄 수 있을까. 하지만 한 사람 혹은 한 존재의 내면을 속속들이 알 수 없는 우리로서는 눈에 보이는 것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셈이니 역사에 적힌 이름이나 글자들이 진실을 반영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참고자료: 한국관광공사 홈페이지,  위키피디아, 다음 백과사전, 서울성곽 홈페이지 등


한양도성 창의문 (彰義門)

1396년 건축 사적 제10호

주소: 서울 종로구 부암동

북악산 서울 성곽 홈페이지 



창의문에 가는 길은 도보로는 약간 멀다. 경복궁 역에서 4번 출구로 나온 다음 경북궁 돌담길을 끼고 그대로 직진하면 되는데 대략 2km정도의 거리로 천천히 걸으면 30분 정도 소요되므로 경복궁 역에서 버스를 타고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서 내리는 교통편을 이용해도 좋다. 


창의문으로 가는 길에서 만날 수 있는 최규식 경무관의 동상이다. 121사태 당시 종로경찰서장으로 근무하다가 김신조 일당의 총격으로 사망한 분이다.


창의문 입구에서 만날 수있는 청계천 발원지를 알리는 표지다. 예전에 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에 가본 적도 있지만 정말 강의 시작은 미미하지만 그끝은 창대한 것같다. 발원지 표지만 보고 약수터를 직접 보지 못한 것은 아쉬운 점이었지만 다음 번 걸음으로 이 또한 미뤄둔다.

걷는다는 것은 사람에게 참 많은 것을 준다. 무엇보다 세상을 이제까지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르게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점이 큰 것이라 생각된다. 틀 안에 갇혀 있어서는 변화를 줄 수 없다. 물론 그 변화의 끝에 행운이 함께 할지 아닐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문밖으로 나가 세상과 마주하지 않으면 삶 자체가 경직될 가능성이 많다. 올해 들어 이곳저곳을 온전히 내 발 끝으로 걸어보면서 드는 생각들은 이런 것들이다.

올해의 마지막 산행을 준비해본다. 어디를 가야할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지만 그날이 되면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Panasonic LX5


인왕산은 조선의 한양을 기준으로 볼 때 우백호 즉 오른쪽의 흰호랑이라 불리는 영산이다. 인왕산은 조선 개국 초기에 서산(西山)이라 지칭하다가 세종때부터 인왕산(仁王山)이라 불리게 되었다. 본래 인왕이란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신(金剛神)의 이름인데 조선왕조를 수호하려는 뜻에서 산의 이름을 개칭하였다고 한다. (출처: 다음) 강감찬 장군이 호랑이를 호통으로 몰아냈다는 전설도 들려오는 등 여러 기이한 이야기들이 많아 한양에 사는 이들에게는 아주 친숙한 산이 이곳 인왕산이다.


오늘 코스는 여러 코스 중에 독립문역에서 출발하여 인왕산 정상을 거쳐 창의문을 들러 경복궁역으로 내려오는 코스로 정했다. 고도가 313미터로 나오는데 정확한 인왕산의 높이는 338미터라고 한다. 인왕산은 청와대에 가까운 까닭에 특정 구간은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고 오르내리는 동안 내내 경찰들을 마주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여유가 된다면 경복궁까지 가보는 것도 괜찮다.


어제 눈이 내려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었다. 내심 눈 덮인 산을 기대했지만 뽀드득 소리를 내며 눈을 밟을 일은 거의 없어서 조금 아쉽기는 했다. 평생을 서울에 살면서 인왕산을 이제야 올라가봤다는 것에 의미를 좀 더 두기로 하자. 독립문역 2번 출구로 나와 왼쪽 샛길을 따라 아파트를 곁에 두고 조금 오르다보면 인왕산에 오를 수 있는 등산로가 나온다.


인왕산의 특징 중의 하나는 바위가 많다는 것과 서울성곽길 중의 일부가 이곳에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서울성곽길 엄밀하게는 한양도성(길)로 사적 10호로 지정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사적 10호는 한양도성 전체를 포괄하고 있어 내가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 전체를 다 소개하기는 어렵지만 될 수 있는 한 여러 곳을 다녀볼 생각이다.


서울성곽에 대한 안내 표지판을 볼 수 있다. 서울 전역에 이런 안내판들이 대개 반사재질을 택하고 있는데 항상 깨끗하게 하지 않으면 글자를 제대로 알아보기 어렵다는 점은 단점이랄까...2중으로 되어 있어 글자가 겹쳐 보이기도 하는데 미적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실용성면에서는 그다지 좋은 평가를 하기는 어렵겠다.


인왕산 등산로는 거의 계단으로 이루어져있다. 어찌 보면 편한 것같지만 상대적으로 무릎에 무리가 많이 가는 형식이다. 사진에서 보다시피 계단에는 눈의 흔적은 거의 없고 그나마 하얀 것들은 염화칼슘인데 주변에 경찰들이 경비를 서고 있어 눈이 쌓일 틈이 없다. 문득 전방 군생활 기억이 떠올랐던 순간인데 눈이 내림과 동시에 쓸어야했던 그런 시절이 지금도 여전한가보다.


애초에 등산 시작점의 고도가 높아서인지 얼마 가지 않아 정상이 보인다. 성곽을 옆에 끼고 걸으면 제설작업이 되어 있지 않아 눈 밟는 느낌이 좀 나긴 하는데 성곽만 따라가다가는 중간에 길이 끊어지기도 하니 주의가 필요하다. 그리고 길이 거의 능선 형태로 되어 있어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막을 대책이 없으니 겨울에는 준비를 철저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겸재 정선이 그린 인왕제색도가 정확히 어느 방향인지는 모르겠지만 얼핏 비슷한 것같기도 하다. 그림에 나오는 집은 지금은 무엇이 되어 있을까? 휴일이라 사람들이 제법 있을 줄 알았는데 열 명도 채 만나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근무서는 경찰들을 더 많이 만났다. 인왕산에 이렇게 경계가 삼엄한 것은 과거 1.21사태로 알려져 있는 그 사건의 여파가 아닐까 싶다.

성곽을 따라 눈이 쌓여있고 그 눈을 따라 길이 보인다. 그리고 그길을 조용히 걸어가본다. 바람은 제법 찼지만 찬바람이 오히려 머릿속을 싹 비워주는 그런 느낌이 들어 꽤나 괜찮았던 산행이었다. 하늘이 흐린 곳과 맑은 곳이 나뉘어 있어 어느 방향에서 바라보면 파랗고 어느 방향에서 보면 회색빛이었던 것도 재미있었던 점이랄까.


오르고 내리는 길이 거의 계단이다. 흙길을 걸을 때에 비해 발이나 무릎에 가해지는 충격은 훨씬 크다. 그런 충격을 줄이는 방법은 천천히 가는 것. 정상에 오르는 것을 목표로 앞만 보고 씩씩거리며 산에 오르면 산은 오만한 인간에게 피로감을 선사한다. 주변 경관도 즐기며 차분히 산과 이야기하며 걸으면 힘도 들지 않고 어느새 정상에 다다르게 된다. 산에 오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겸손이다.


눈이 좀 더 내렸다면 하는 아쉬움도 남지만 그래도 어제 눈이 내린 것이 참 다행이다 싶었다. 눈 쌓인 산은 참 볼 때마다 멋지다. 그리고 그 속을 걸어나간다는 것은 꽤나 즐거운 일이기도 하다. 인왕산은 전체적으로 등산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기 때문에 어느 코스를 선택하더라도 오전에 출발한다면 점심 전에 내려올 수 있다. 


멀게만 느껴지던 정상이 바로 눈앞까지 다가온다. 좌우로 넓게 펼쳐진 서울 시내가 죽 둘러서 보이는데 제법 시원스럽고 볼만하다. 오른쪽 멀리 청와대도 보이는데 사진 금지라고 써 놓은 표지판이 하도 많아 그쪽은 그냥 눈으로만 보고 말았다. 굳이 사진으로 남길만한 것도 아닌 것 같고...


제일 헷갈리기 쉬운 구간인데 성곽길 따라서 올라가면 길이 없다. 좀 더 오른쪽에 길이 나 있으니 그곳으로 가야 한다. 나도 처음엔 이곳이 길인가 해서 올라가다가 중간에 보이는 작은 계단으로 얼른 방향을 바꿨다. 성곽들이 복원된 것은 좋은데 너무 깨끗해서 주변과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 느낌도 든다. 가능하면 오래된 돌을 구해다가 만들었으면 어떨까 싶기도 한데 쉬운 일은 아니겠지 싶다.

이길을 올라가면 정상이다. 역시나 눈은 거의 없어 미끄러지는 위험없이 편하게 오를 수 있었다. 다른 계절에는 인왕산에 사람들이 제법 많다는데 겨울이라 사람이 없는 것인지 크리스마스라 없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사람이 적은 것이 산에 오르기에는 좋은지라 오히려 오늘 인왕산을 찾은 것이 괜찮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다.


그래도 경찰들이 여기의 눈은 안 치워주는 배려를 해서 처음으로 눈을 쓸어주고 한 바퀴 빙 돌며 서울 시내를 바라본다. 셀카라도 찍어보고 싶었지만 바로 앞에 초소가 있고 경찰들이 왔다 갔다 하고 있어서 영 민망해서 그만 두기로 했다. 혼자 산에 다니면 아쉬운 점 중의 하나가 내가 담긴 사진이 없다는 것인데 여태 사진을 취미로 했으면서도 나를 찍은 사진은 거의 없는지라 그냥 그려려니 하기로 했다.


이쪽 방향으로는 사진을 찍어도 딱히 뭐라 하지 않길래 한장 담아봤다.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일찍 정상에 올라와서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고 다른 산과는 다르게 초소와 근무하는 이들이 왔다갔다 하고 있어 정상에 올랐다는 느낌이 그리 들지 않는 것도 인왕산의 특징이라면 특징이겠다. 나는 배낭에 등산 의류 끼어 입고 올라가고 있는데 휙휙 날아다니는 젊은 경찰들을 보면 좀 민망한 느낌도 있고...


하산길 역시 깔끔하게 제설작업이 되어 있다. 이쪽 방향은 창의문으로 가는 방향이다. 멀리 보이는 풍경이 참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아마도 눈이 쌓인 덕분이 아닐까 싶은데 눈이 쌓이지 않은 겨울산은 뭐랄까 조금은 쓸쓸한 느낌이 강한데 눈이 이렇게 덮혀 있으면 쓸쓸한 느낌은 여간해서는 들지 않는다.


희한하게 생긴 큰바위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뭔가 전설이라도 담겨 있음직한데 주변에 뭐라 적혀있지는 않았다. 분명 무슨 사연이 담겨 있는 것이 분명한데 집에 돌아와 검색을 해봐도 알 길이 없다. 오늘 산행에서 본 것 중에 제일 특이한 것은 이 바위 두 개였다.


조금 걷다가 이정표를 만나게 되는데 사진에 보이는 기차바위로 향하는 길과 창의문으로 향하는 길이 갈리게 된다. 기차바위는 수락산이 유명하다고 하는데 인왕산 기차바위도 꽤 괜찮다고 한다. 사실 인왕산에서 바위 구경하는 것도 흥미진진한 일인데 독립문역에서 올라오는 코스에서는 유명한 바위들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 아니면 내가 모르고 지나쳤는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오늘 목표는 창의문 방향이니 기차바위는 다음으로 미뤄둔다.


성곽을 따라 죽 내려가는 계단이 이어져 있다. 계단만 보고 걷는 것도 좋지만 가끔 멈춰서 주변을 둘러보면 경치가 꽤나 볼만하다. 멀리서 바라보는 도시는 그래도 운치가 있다. 그안으로 들어가 삶 자체와 마주치면 여러 감정들이 몰아치겠지만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 보면 그저 하나의 풍경처럼 다가온다. 가끔은 삶 자체도 멀리서 볼 필요가 그래서 있는 것이 아닐까.


멀리 보이는 북한산 자락. 이렇게 보니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웅장해보인다. 산은 멀리서 보는 것도 좋고 가까이 보는 것도 좋다. 인왕산도 저 북한산 자락에서 이어진 것처럼 보인다. 중간중간 잘리긴 했지만 산줄기가 뻗어있는 모양을 보면 능선따라 죽 걸어가면 북한산에 이를 것만도 같다.


그리고 이제 본격적인 하산길이다. 이길을 따라 죽 걸어내려오면 오래지 않아 도로와 만나게 된다. 그 도로를 가로질러 조금 더 걸어가면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만날 수 있고 조금 더 걸어가면 창의문이다. 창의문에 대해서는 다른 글로 올리기로 하겠다. 그곳에 대해 적을 내용도 제법 되고 서울성곽길 전반에 대한 글도 있어야 할 것같다는 생각에서다.


이정표를 보다가 뭔가 희한한 게 보인다. "인왕산에서 굴러온 바위" 저것은 대체 무엇인가.. 인왕산이 바위로 유명하다고 하긴 하지만 바위가 굴러 내려온 것이 있나 싶어 호기심이 발동한다. 창의문으로 바로 이동하려다가 잠깐 들라보기로 했는데...


바위 하나가 굴러 내려온 것이 아니라 여러 바위(?)들을 묶어 놓은 것이다. 나름 바위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가 되는 녀석도 있지만 대개 작은 돌들이다. 인왕산 자체가 바위산이다보니 이런저런 이유로 바위들이 굴러내려오는 모양인데 굴러내려온 바위들을 저런 식으로 모아둔 것도 재밌다.


그리고 만나게 되는 장소가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다. 이곳이 윤동주의 이름을 따게 된 것은 그가 실제로 이 근처에 살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이지만 큰 바위 하나에 시인의 시를 앞뒤로 적어두고 있어 제법 분위기가 괜찮다. 여기서 창의문 쪽으로 좀 더 이동하면 윤동주 기념관도 있다는 데 어쩐 일인지 내가 가는 방향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시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쉽지 않다고 생각된다. 자기 내면을 깊게 그리고 투명하게 들여다봐야 만날 수 있을까말까한 자신의 본질. 그 본질을 온전히 밖으로 끄집어 내어야 하는 고통을 감수한 후에야 비로소 시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너무나 익숙한 시지만 한참 그 앞에 서서 싯구를 반복해서 읽어본다. 나는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가...부끄럽다면 떳떳해지자고 생각을 하면서...


Panasonic LX-5





1905년 11월 17일 정확하게는 11월 18일 새벽 1시경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이 들어 있을 무렵 광무황제(이하 고종황제)의 처절한 외침을 뒤로 하고 일본의 주한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대한제국 외부대신 박제순이 한 장의 종이에 서명을 하고 도장을 찍는다. 우리가 을사조약, 을사보호조약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을사늑약은 이렇게 황제의 승인도 없는 가운데 을사오적이라 불리는 친일파들의 손에 의해 처리되고 이 늑약을 시작으로 500년을 이어온 조선 그리고 대한제국은 종말로 치닫게 된다. 이 조약 이후 대한제국은 모든 외교권을 상실하게 되고 일본의 식민지로 빠르게 편입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이 치욕적인 역사가 만들어진 장소가 바로 이곳 덕수궁 중명전이다. 중명전은 한자로 重明殿이라 적는데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 전각'이라는 뜻이다. 중명전이 세워진 것은 1897년으로 바로 대한제국이 성립된 해기도 하다. 러시아인 사바찐에 의해 설계된 서양식 건물로 당시에는 황실도서관의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중명전이 우리 근대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제법 크다. 을사늑약이 강제되었고 고종황제에 의해 헤이그 특사가 파견된 장소이며 영친왕이 황태자로 책봉된 장소기 때문이다.

이 역사적인 건물은 대한제국이 성립된 이래 두 번이나 화재로 건물이 모두 타버리는가 하면 외국인들의 사교클럽으로 혹은 주차장 등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후 서울시가 1983년 유형문화재 제53호로 지정하고 2003년에 정동극장이 인수한 것을 2006년에 문화청이 넘겨 받아 2007년에 사적 제 124호로 덕수궁에 편입되는 과정을 겪는다. 그리고 2010년에서야 문화재청에 의해 복원이 완료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1897년 건축된 이래 100년이 지난 후에 비로소 제모습을 찾게 되었다는 말이니 한편에서는 씁쓸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일반에 개방된 것은 지난 2010년부터다.


현재의 중명전은 덕수궁 바로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원래 1910년 당시의 덕수궁은 현재보다 넓은 면적이었는데 1919년 고종황제 승하 후 여기저기 전각이 해체되면서 원래 면적의 거의 절반 크기로 줄어 들었다. 중명전 역시 당시에는 덕수궁 안에 있었지만 지금은 덕수궁과 이어지지 않고 정동극장 뒤켠의 길을 따라 들어가야 만날 수 있기 때문에 그 중요성에 비해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장소기도 하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덕수궁과 이곳을 어떻게든 이어 덕수궁을 찾는 이들이 이곳을 반드시 들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중명전은 2층 건물인데 2층은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어 올라갈 수가 없다. 아쉬운 점이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가 병력으로 고종황제를 억압하며 대신들에게 조약에 찬성하는지 여부를 물을 때 대성통곡을 하며 끝까지 반대를 하다 2층 어느 방으로 끌려간 한규설 참정대신의 흔적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8대신 중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을  제외한 이들 즉 우리가 기억하는 을사오적의 손에 을사늑약이 맺어진다. 늑약이란 한자로 勒約이라 적는데 '굴레 륵'자에 '조약 약'자를 적어 강제로 맺어진 것이라는 의미다. 최근 들어 정부 어느 부처인가에서 출판사에 중등 교과서에 적힌 을사늑약을 전부 을사조약으로 바꾸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는데 시대를 역행하는 느낌이다.


좌우로 3개의 방을 만날 수 있는데 왼쪽에 한 개 오른쪽에 두 개의 방이 있다. 왼편의 방으로 들어가면 을사늑약 체결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도록 설명을 해 둔 자료들을 만날 수 있다. 1905년 11월 17일로 알고 있던 날짜가 사실은 18일이었음을 오늘 이곳을 방문하고야 알게 되었다. 관심 부족이 무엇보다 큰 이유겠지 싶다. 그까짓 1일 정도가 무슨 상관이냐고도 할 수 있지만 을사늑약이 18일 새벽 1시가 넘어서야 체결되었다는 것은 이미 무언가 정상은 아니라는 말이다. 어느 국가간의 조약이 새벽 1시에 체결된다는 말인가


을사늑약의 복제본을 만날 수 있다. 제2조를 보면 "한국정부는 이 조약 이후 일본국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 국제적 성질을 가진 조약을 절대로 맺을 수 없다."는 문구가 적혀 있는데 이로써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일본에 온전히 넘겨주게 된다. 즉 한 국가로서의 존재 가치를 잃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중요하고도 처절한 문서가 작성된 곳이 이곳 중명전이다.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의 하야시 곤스케의 도장이 보인다. 박제순은 당시 고민하였다는 이야기도 들리지만 이후 승승장구하며 일본에 충성을 바쳐 대한제국의 마지막 영의정까지 거치면서 자손대대로 풍족하게 지냈다고 한다. 을사오적으로 이완용이 대표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에 못지 않은 인물이 또한 박제순으로 친일파 목록에서 빠지지 않고 상위권을 차지하는 인물이다.


오른쪽으로 가면 작은 방이 하나 있다. 중명전의 모형과 당시의 사진들 몇 점을 볼 수가 있는데 우리나라의 국보, 보물, 사적 등의 관리가 대체로 불만족스러운 것은 많은 분들이 공감하는 것일텐데 중명전 역시 좀 더 효과적으로 관리를 할 수는 없을까라는 아쉬움이 문을 나설 때까지 이어졌다. 개인이 관리하는 곳도 아니고 국가가 국민의 세금으로 관리하는 곳인데 말이다. 문화재청을 '부'로 승격해도 모자랄 일이다.


오른쪽의 두 번째 방은 작은 방 하나와 큰 방 하나가 이어져 있다. 가장 먼저 만나는 방에서는 을사늑약 당시의 해외 보도 자료를 만날 수 있다. 사진 오른쪽 구석에 벽난로가 보이는데 벽돌로 꼭 막아두고 있어 조금은 인위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중명전 자체를 이렇게 전시공간으로만 활용할 것이 아니라 당시의 분위기대로 복원을 하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건물 자체가 을사늑약이 체결된 곳이라는 점을 빼면 사실 무언가 당시를 돌아볼만한 "꺼리"들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을미의병(명성황후 살해사건) 이후 잠시 활동이 뜸했던 의병이 다시 일어나게 되고 애국계몽운동이 본격화된다. 사진 맨 오른쪽에는 늑약 체결 3일 후에 황성신문에 장지연이 쓴 '시일야방성대곡'이 보인다. 장지연에 대해서는 애국자냐 친일파냐 워낙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어 자세히 적을 바는 아니지만 적어도 당시만큼은 그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이어진 문으로 들어가면 늑약체결 이후 고종황제가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보내어 늑약이 무효임을 주장하고자 한 노력들을 만날 수 있다. 우리가 '헤이그 특사'라고 부르는 세 분 즉 이준, 이상설, 이위종이 그들이다. 강대국들의 형식적인 만남일 뿐이었던 당시 회의에 결국 특사들은 발조차 들여놓지 못하게 되고 이준은 헤이그에 더 머물다가 갑자기 사망하는데 그의 사망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뚜렷한 원인를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헤이그 특사가 우리 근대사에서 또 중요한 이유는 일제가 이를 빌미 삼아 고종황제를 퇴위시켰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황제를 온갖 협박으로 물러나게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지만 이것을 도운 것 역시 우리나라 사람인 이완용과 송병준이라는 점이 무엇보다 씁쓸한 일이다. 당시 송병준은 "동경에 가서 사과하던지 자결하라"고 황제를 협박했다고 한다.


헤이그 특사 세 분의 사진을 볼 수 있다. 의연하고 떳떳한 모습이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이후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 그리고 순종황제의 즉위와 소위 한일신협약이라 불리는 정미7조약 등이 일사천리로 이어지게 된다. 결국 대한제국은 이때 군대마저 해산되게 되는데 외교권에 이어 나라를 지킬 군사력마저 모두 빼앗겨 버리게 된다. 그리고 이로부터 3년 후 대한제국은 완전히 일본제국에 병합되고 만다.


참고자료: 문화재청 홈페이지, 문화유산콘텐츠지도, 덕수궁 홈페이지, 위키피디아

참고서적: 한영우, 다시 찾는 우리 역사, 경세원, 2004. 이영철, 한국사총론, 메티스, 2012.


덕수궁 중명전(重明殿)

1897년 건축 사적 제124호

주소: 서울 중구 정동길 41-4 중명전

평일 오전은 제한없이 관람할 수 있지만 오후와 주말은 선착순 예약을 해야 입장할 수 있다.

덕수궁 및 중명전 홈페이지 


중명전에 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다. 지하철 1.2호선 시청역에 내려 덕수궁 방향으로 나가 대한문을 바라보고 왼쪽길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아는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걸으면 된다. 이곳이 바로 정동인데 정동에는 우리 근대사의 흔적들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는 장소다.


가을의 정취가 한껏 느껴지는 덕수궁 돌담길이다. 연인과 함께 걸으면 헤어진다는 전설이 서린 곳이라는데 왜 그런 이야기가 나오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이 길을 따라 걸으면 좌우로 근대사의 조각들이 조금씩 흩어져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문화재청에서 배포하는 '다같이 돌자 정동한바퀴'라는 안내 소책자가 있는데 지도와 해설을 잘 담아놓고 있으니 덕수궁이나 중명전에서 한 부 얻도록 하자.


오른쪽에 정동극장이 보인다. 정동 자체가 워낙 이런 시설들이 넘쳐 나는 공간이다보니 글 하나에 모두 소개하기란 벅찬 일이다. 정동의 우리 유산들은 천천히 한곳씩 소개해 나갈 생각이다. 이 글에서는 이런 곳이 있구나 정도로만 그치기로 한다.


정동극장을 지나 바로 오른쪽으로 난 작은 샛길에 중명전으로 가는 안내 푯말을 볼 수 있다. 평소에는 한 번도 눈에 띄지 않은 것인데 막상 찾아간다고 생각하고 가니 엄청나게 크게 보였다. 이길을 지나시는 분들은 눈 여겨 보셨다가 한 번 들러보시기 바란다.


길을 따라 약간만 올라가면 중명전 입구를 만날 수 있다. 생각보다 외진 데 있고 생각보다 초라하다는 생각은 지울 길이 없지만 그래도 남아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된다. 

이곳이 바로 "대한제국의 운명이 갈린 곳 - 덕수궁 중명전"이다.


Nikon D700, AF Nikkor 35mm f2D & Panasonic LX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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