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작가나 철학자를 골라보라면 그 사람의 생각이나 분위기 혹은 감상이 어느 정도 느껴진다. 어떤 작가나 철학자의 필체나 사상에 공감이 간다는 것은 본인 스스로 그와 어느 정도 일체감이 있기 때문이다. 내 경우에는 내가 좋아하는 저자들을 통해 현재의 내가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들을 간접적으로 해소한다. 그리고 그네들의 삶의 궤적과 사상의 흐름을 바라보며 때로는 내가 작가가 되어 그 시대를 그 시간을 살아보기도 하고 때로는 그들이 내가 되어 현재 나의 삶의 그림자를 따라오도록 하기도 한다.

기형도, 짧은 삶동안 그가 남긴 시작들은 어느 하나 처절하지 않은 것이 없고 그의 시들을 읽노라면 가슴 한 구석이 왜 그리도 시리고 아픈지 모르겠다. 죽음조차도 그다웠다고나 할까. 물론 그의 시작들이 밝은 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받아들이고 나를 대신해주기 바랐던 그는 철저하게 외롭고 우울한 시인이었다. 눈이 아닌 마음이 먼저 읽을 수 있는 시를 썼던 시인.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지금도 가장 자주 회자되는 기형도의 마지막 시작인 빈집(1989)은 읽는 이의 시점에 따라 독자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이 시 한 편으로 인해 나 역시 내가 처한 지금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었고 그렇게 내 내면의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와 움츠러진 내 영혼을 밖으로 끄집어낸 그에게 부끄러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문학의 힘이란 얼마나 위대한가..

그리고 랭보

나는 차라리 이 시인을 만나지 않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가뜩이나 비관에 익숙해진 내게 랭보 그리고 니체가 준 영향은 아주 확고했으니 말이다. 기형도가 조금은 완곡한 어조로 감정을 풀어냈다면 랭보는 말 그대로 생각나는대로 내뱉었다. 그리고 그렇게 내뱉은 시구 하나하나가 내 가슴에는 얼음비수처럼 그대로 박혀버렸다. 지극히도 이기적인 이 시인은 20대가 되기 전에 자기 할 말을 다 해버리고 아프리카로 떠나버렸다. 기형도와 랭보 두 사람은 특히나 겨울에 어울리는 시인이다. 황량함, 쓸쓸함, 그리고 고독과 따스함에 대한 욕망...

아, 나는 이제 인생에 아무런 미련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나의 삶 자체가 매우 피곤한 것이었고
또 그렇게 사는 것이 습관화 되어 있었습니다.
요즘은 하루 하루가 피곤의 연속이며 기후 또한 참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우스꽝스러우리 만큼
격렬한 슬픔에 빠진다 할지라도
스스로 생명을 단축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도 평생을 살아가면서 몇년 쯤의
참된 규칙을 가져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이 단 한 번으로 끝난다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사실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라르에서 쓴 랭보의 편지 중에 보이는 이 문장은 제법 많은 젊은 회의주의자들의 환영을 받았지싶고 나 역시 이 문장에 꽤나 공감한다. 다만 철저하게 인생에게 내침을 당하면서도 그래도 삶을 이어가야 한다고 말한 부분에는 그다지 찬성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보통 기형도와 보들레르의 시적 연관성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하지만 보들레르와 랭보를 묶어서는 별로 이야기 하지 않는다. 내 문학적인 지식이 짧아 전자보다는 후자가 맞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여전히 기형도는 랭보에 좀 더 가깝다. 물론 보들레르의 문학적인 맥을 이었다는 관점이라면 그 둘은 이미 같은 스승을 두고 있는 것이겠지만...


잘 가거라, 언제나 마른 손으로 악수를 청하던 그대여 
밤 세워 호루라기 부는 세상 어느 위치에선가 용감한 꿈 꾸며 
살아있을 그대. 
잘가거라 약기운으로 붉게 얇은 등을 축축이 적시던 헝겊같은 
달빛이여. 초침 부러진 어느 젊은 여름밤이여.
 

기형도 <비가2 - 붉은 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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