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 한자로 '無情'이다. 뜻풀이를 보자면 '남의 사정에 아랑곳하지 않음.' 이라는 의미가 있다.

다른 표현을 빌려보자면 '삭막'이라는 단어가 이 '무정'과 일맥상통한다.

요즘의 우리네 삶이 정이 없고 삭막해진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디지털'이 미친 영향이 압도적이지 않을까. '편리'를 위해 끝을 모르고 발전하고 있는 기술의 뾰족함에 아날로그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몸과 마음이 이리저리 찟기고 있는 모습이다. 집 밖으로 나가 몇 걸음만 걸으면 고개를 푹 숙인 채 스마트폰 속의 세상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모습들이 더 이상 어색하거나 낯설지 않다

스스로 세상과 벽을 만들어 가고 있는 셈이다. 누구도 스마트폰 속에 빠져들라고 강요한 적이 없는데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들 거북목이 되어 거리를 떠 돈다. 디지털이라는 거창해보이는 단어에 빠진 유령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다.

'영화일 뿐이지'라며 가볍게 넘겨버린 데몰리션맨의 세계가 현실 속에서 벌어질 날도 얼마 남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두려운 것은 그런 세상이 바로 눈 앞의 현실로 펼쳐져도 우리는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스캔한 필름들을 뒤적여본다. 한 장 한 장 마운트 되어 박스 안에 들어있는 아날로그 세상을 형광등에 비춰본다. 내개 남은 얼마되지 않는 슬라이드들은 그렇게 방 한 구석에서 먼지에 덮여 가고 있지만 난 이것들을 버릴 생각은 없다. 고장난 턴테이블 위에 낡은 LP판을 올려보는 어리석음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여름의 한복판으로 시계바늘이 움직인다. 가만히 있어도 등 뒤로 땀이 흐르는 계절이다. 

여름이니 어쩌겠어? 라고 생각하는 외에 달리 방법은 없어 보인다.

어제 서점에서 한참을 들여다본 실존주의 몇몇 문장이 여전히 두통을 불러오는 밤이다.

담배를 끊은 지 한 달이 되어 간다. 엄밀하게 말하면 연초를 끊은 것이지만...

2014년 여름은 이렇게 흘러간다.


Nikon F5, 135mm f/2 DC, Soft filter, LS-40




마음이 산란한 탓인지 담배 한 대를 피워야겠다고 생각하고 밖으로 나갔다. 집 앞 구석에 누군가 버려둔 유리판이 몇 주째 있는데 제법 크기도 크고 게다가 3조각으로 잘려있어서 위험하겠다 싶었지만 누가 거기에 가져다놨는지 알 길이 없어 그냥 무시만 하고 지내다가 갑자기 무슨 일인지 저 유리판들을 치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에는 그래도 그 유리판들이 어쩐지 시원해보이기도 하고 각도를 잘 잡으면 거울처럼 주변 풍경을 보여주기도 해서 가만히 있었지만 오늘따라 왜 저 유리판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알 길은 없다. 그냥 위치도 잘못되어 있는 것 같고 처음엔 맑기만 했었는데 시간이 지날 수록 먼지를 뒤집어써서 흐려지는 것이 싫었나보다.

담배 한 가치를 입에 물고 아무 생각없이 가장 큰 조각을 오른손으로 잡아올렸는데 내가 생각한 무게와 큰 차이가 있었는지 그대로 미끄러지며 오른손을 가르고 지나갔다. 잡은 면이 당연히 마모작업이 되어 있을 거라고 착각을 한 것이 가장 큰 문제였겠지만 순식간이란 단어가 그렇게 실감이 날 줄은 몰랐다.

오른손 엄지와 검지사이로 유리판이 미끄러졌는데 뭔가 묘한..말로 표현하기 힘든 찰라의 통증이 잠시 스치고 지나가더니 금세 붉은 피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우습게도 그 순간 든 생각은 '나도 살아있긴 하구나' 였으니 참... 아무튼 이제껏 살아오면서 내 몸에서 그렇게 많은 피가 흐르는 것을 본 것도 처음인데 왼손으로 지압을 하며 '힘줄은 안 끊어졌어야 하는데...'라고 중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유리란 물과 같이 투명하다. 다만 물은 그 모양과 흐름을 그저 맡겨둘 뿐이고 유리는 누군가에 의해 그 모양이 정해진 것에 차이가 있다. 그렇게 강제로 만들어진 투명함은 본래의 맑음보다는 억지로 만들어진 것에 대한 상처를 그 내면에 담고 있어 누군가 자기에게 상처를 줄 것 같으면 가차없이 상대의 살을 베어버린다. 그리고 상대의 상처에서는 피가 흐르지만 정작 유리는 깨끗하다. 그 유리에 은가루를 입혀 거울로 쓴다는 것은 또한 아이러니다...

아무튼 모든 문제는 그 유리를 마주하는 이의 마음이다. 자기의 마음이 좋을 때는 한없이 맑고 투명해보이기만 했던 유리가 자신의 마음이 헝클어졌다는 이유로 탁하게 보인다. 애초에 유리 자체는 변한 것이 없다, 그냥 원래 주어진대로 존재할 뿐인데 그것을 대하는 사람만 달라졌을 뿐이다. 결국 모든 문제는 상대가 아닌 나에게서 비롯된다는 단순한 진리를 다시 확인할 뿐이다. 

가장 맑은 것, 가장 투명한 것이 가장 날카롭다. 


Canon EOS-1Vhs, EF 28-70mm f/2.8L, Kodak Supra, LS-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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