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다시 북한산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대로 두다가는 눈 덮인 겨울산을 더 보기 힘들 것 같아 없는 시간 쪼개서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이번에 다녀온 구간은 17구간과 18구간으로 드디어 경기도에서 다시 서울로 접어드는 나름 의미가 있는 걸음이었다. 다행히 오늘은 날이 제법 맑고 하늘이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았던 데다가 며칠 새 눈이 제법 왔으니 설산을 보기에는 제격이다 싶었다. 물론 마음은 백운대에 가 있었지만 우선은 이 걸음을 마무리해야 한다.


17구간 다락원길은 지하철 1호선 망월사 역에서 시작한다. 이 구간은 이전 글에서 적은 지점에서 바로 이어지는 형식이어서 따로 출발점이 있진 않다. 지하철 역에서부터 본격적인 둘레길 코스에 진입하는 동안 길가에 쌓인 눈은 정말 대단해서 인도는 거의 치워지지 않아 차도로 걸어야 했다. 멀리 도봉산 자락이 손짓해 부른다. 강북5산이라 불리는 불-수-사-도-북의 네 번째 산인 도봉산. 둘레길 완주가 마무리되면 천천히 돌아볼 생각이다.


멍하니 산만 바라보다가 갑자기 앞에 시커먼 녀석이 있어 깜짝 놀랐다. 대충 3-4미터 정도의 거리였던 것 같은데 까마귀가 그렇게 큰 줄을 몰랐다. 아니면 이 녀석만 유달리 발육상태가 좋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 폼이 대단했다. 까마귀는 우리나라에서는 흉조로 여겨지지만 길조로 여기는 나라도 있다. 아마도 이름이 좀 이상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머리도 좋다고 한다. 검은색에 대한 어딘가 모를 타부 의식이 아닐까 싶다.


이 구간은 사실 이제까지 걸어온 여러 구간들 중에서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은 구간으로 꼽을만하다. 뭐랄까 특징이 없는 길이랄까 그런 느낌이 강한데 이 구간을 걸으며 아쉬웠던 마음은 18구간인 도봉옛길에서 모두 사라지게 된다. 아무든 이 근처에는 군 부대가 여럿 있는데 오늘은 사격일인지 총소리가 제벱 요란했다. 총소리라면 군 시절 지겨울 정도로 많이 들었었는데 오랜만에 들으니 반갑기도 하다.


이제 제대로 된 산길에 접어든다. 아이젠을 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 고민하다 일단 그냥 가보기로 한다. 하지만 겨울산에는 무조건 아이젠과 등산스틱(마운틴 폴)을 이용해야 한다. 무엇보다 눈 아래 무엇이 있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스틱은 미리 길을 짚어보는 용도로 유용하다. 아이젠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눈이나 얼음에 미끄러지지 않으려면 번거로워도 채우고 출발하자. 가끔 보면 산을 잘 탄다는 호기에 혹은 몰라서 아이젠을 기피하는 경우가 있는데 아이젠 없이 눈길을 성큼성큼 달려간다고 해서 누가 대단하다고 칭찬해주진 않는다.


사방이 온통 눈이고 나무다. 무척이나 보고 싶었던 풍경이다. 선글라스를 챙기지 않은 게 오늘은 좀 실수였다. 햇빛이 제법 강해서 눈에서 반사되는 빛이 상당히 강렬했다. 할 수 없이 실눈을 뜨고 걸어가곤 했는데 누가 보기라도 했으면 참 우스웠을 표정이 아니었을까? 이 근방의 눈은 정말 많이 쌓여있었다. 사람 한 명정도 지나갈 정도의 길만 그나마 눈이 적고 그 주변은 발을 집어 넣으면 발목을 쉽게 넘을 정도였다.


요 며칠새 내린 눈은 습기를 많이 머금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눈 쌓인 나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고개를 늘어뜨리고 있다. 눈 무게가 상당한 까닭인데 나무는 그저 허리를 숙여 눈을 온몸으로 버텨낼 뿐 아무 불평도 없이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었다. 눈이 내린 이후 사람들의 왕래가 그리 많지 않은 길이어서 정말 원없이 눈을 즐길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


대충 이 정도로 발이 푹 들어가는데 위에서 보니 감이 잘 오지 않지만 발목 위로 훌쩍 올라온다. 어림짐작으로 20Cm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러고보니 둘레길 시리즈를 쓰면서 내 몸이 출연하기는 처음이다. 전신 사진도 있긴 하지만 눈이 피로해질 분들이 상당수 되지 않을까 싶어 차마 그 사진을 올리지는 못 하겠다. 카카오스토리에 올려둔 게 있긴 한데.. 아무튼...


대체로 무난한 산책로 정도의 구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오르막이나 내리막도 없다. 맨 아래에 트래킹 기록을 붙여 두었는데 17, 18구간을 참 천천히 걸었음에도 2시간 30분이 걸리지 않을 정도니 두 구간은 걷기 편한 길. 산책하기 좋은 길이라고 여기면 될 것 같다. 발 아래에서 들여오는 뽀드득 하는 눈 밟히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다. 


어딜 가나 눈이고 나무다. 볼 수 있는 색은 단 몇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이건 참 매력적이다. 도시로 돌아오면 정말 눈이 혼란스러울 정도의 많은 색들에 눈이 시달려야 하는데 눈 덮인 산을 걸으면 몇 개 안 되는 색밖에 볼 수 없고 그 색들에 푹 빠지게 되니 말이다. 산은 그렇게 어느 계절에 찾아와도 우리 인간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다. 그게 자연이다.


길가로 조금 나오면 다락원 캠프장이 보인다. 참 좋은 지역에 캠프장이 있다 싶은데 누가 와서 캠핑을 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YMCA에 대해 생각나는 건 야구단 주제로 한 영화밖에 없기도 하고...다락원이라는 이름은 다른 게 아니라 조선시대에 공무로 출장을 가던 이들이 머물던 곳이라 한다. 이 다락원길이 나름의 의미를 가지는 것은 경기도와 서울에 걸쳐 길이 이어져 있다는 것인데 하나의 경계를 넘어서는 일은 별 것 아닌 것 같으면서도 많은 것들을 달라지게 만든다.


자, 이제 경기도를 벗어나 서울로 접어 든다. 북한산둘레길을 걸어보자고 생각한 이래 서울에서 출발해 경기도로 나갔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온 것이다. 거리 상으로야 얼마 되지 않지만 이 길을 걸어오는데 걸린 시간은 제법 오래 걸렸다. 오늘 17구간과 18구간을 마무리했으니 이제 남은 구간은 단 세 구간뿐.. 19,20구간은 서울의 동쪽을 그리고 마지막 우이령길은 출발점을 어디로 잡건 경기도로 한 번 더 나가야 한다.


얼마 걷지 않았다 싶은데 17구간이 끝나고 18구간인 도봉옛길이다. 이 구간은 정말 괜찮다. 산을 오르는 듯한 재미도 있고 풍광도 근사하다. 그리고 이 구간의 끝부분에 다다르면 도봉산의 주등산로와 만날 수 있기도 하다. 평일임에도 이 구간에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는데 아마도 도봉산으로 향하는 이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이 구간은 사찰이 여러 곳 있다. 자세히 들여다볼까 하다가 뭐랄까 그 화려함에 조금은 기가 죽어 글로 적지는 않기로 한다.


사람이 다니면 길이 만들어진다. 이 계단에 누군가 지나지 않았다면 저렇게 길이 나지는 않았을 것. 어디가 계단의 시작이고 끝인지조차 알 수 없었을 것 같은데 누군가 부지런히 걷고 또 걸으며 길이 만들어진다. 눈 덮인 산은 이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물론 본격적인 등산을 시작해 눈을 헤치고 가야 하는 상황이라면 여유를 부릴 틈은 없겠지만 말이다.


멀리 보이는 정상이 자운봉일까. 나는 아직도 산을 멀리서 보고 저기가 무슨 봉우리고 무슨 능선이고 하는 것을 알지 못 한다. 이름을 알고 찾아간다면 좋겠지만 때로는 그냥 아무 것도 모르고 바라보는 것으로도 충분하기도 하다. 아마 저 봉우리들을 몇 번 다니다보면 자연스레 이름도 알게 되고 길도 알게 되겠지만 그때까지는 그냥 이렇게 바라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운해라고 하기에는 조금은 어색해보이지만 그래도 꽤 멋진 풍경이다. 저 정상 위에서 내려다본다면 감탄사가 절로 나오지 않을까. 이렇게 먼 발치에서 바라만 봐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말이다. 정상 근처에 뭐가 뭍은 것처럼 보이는데 사진을 눌러보면(그래도 자세히는 안 보이지만) 까마귀 한 마리다. 모니터에 뭐가 뭍은 거 아니니 혹 모니터 닦고 계신 분은 안 그러셔도 된다. 


있는 줌 없는 줌 다 당겨서 찍어본다. 120mm로 당긴 사진인데 똑딱이로는 확실히 아쉬운 면이 있다. 크롭을 해볼까 했더니 여지 없이 해상도가 무너져 버려 그냥 원본을 올린다. 그래도 이 정도로 보이는 것만 해도 어딘가 싶다. 이럴 때는 니콘의 신병기인 D800이 멀리서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데 뭐 그건 나중 일이다. 그래도 똑딱이가 이 정도로 사진을 잘 담아내는 게 오히려 기특하다.


자운봉 3.2Km.. 0.7Km 남았다 이러면 유혹에 끌려 한참 고민을 할 수도 있겠지만 3Km가 넘어가면 빨리 포기할 수 있다. 산행으로 3Km면 도봉산의 난이도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눈길을 감안하면 3시간은 족히 걸리지 않을까 싶다. 이미 시간이 꽤 되었고.. 또 어딜 갈 때 내가 늘 그렇듯이 먹을 것을 전혀 챙겨오지 않았기 때문에 별 미련없이 둘레길로 발길을 옮긴다.


그리고 만나게 되는 이 웅장한 건물(광각렌즈 효과일 뿐이다)은 도봉산 주등반로의 시점을 알리는 도봉분소다. 여기서부터 도봉산 등산을 시작하면 비교적 무난한 코스로 오를 수 있다. 내가 가장 가 보고 싶은 코스는 사패산에서 도봉 능선을 따라 북한산 백운대로 이어진는 코스인데 부실한 체력으로 산 3개를 넘어갈 수 있을까 싶어 일단 간만 보는 중이다.


평일임에도 참 많은 사람들이 도봉산을 오르고 있었다. 사람 사진을 잘 찍지는 않지만 그래도 왠지 분위기가 괜찮아 보여 한 장 남겨 본다. 강북5산 중에 도봉산과 북한산이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산이 아닐까 싶다. 사패산이나 불암산, 수락산과 같은 이름은 어쩐지 조금은 낯설다. 아무튼 서울의 북쪽으로 이렇게 방대한 산자락이 이어져 있다는 것은 참 근사한 일이다.


도봉산 등산객들과 갈라져 다시 둘레길 코스로 돌아오면 한적한 길이 이어진다. 이쪽 길은 휠체어를 탄 이들도 둘레길을 돌아볼 수 있도록 만든 길이라고 하는데 아마 둘레길 전 구간에 걸쳐 이곳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여러 구간에 이런 시설을 마련해두면 물론 좋겠지만 그래도 비교적 경치가 좋고 접근성도 괜찮은 이곳에 마련해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그리고 길을 걷고 또 걸어 하늘의 파란색과 땅의 하얀색이 만나는 길을 끝까지 오르면 18구간 도봉옛길도 어느새 종착점에 다다른다. 이제까지 걸어온 둘레길의 여러 코스 중에 단 한 구간을 고르라면 이곳 도봉옛길을 추천한다. 누구나 걷기에 부담이 없고(난이도도 '하'다). 주변에 둘러볼 수 있는 곳들도 많고 경치도 꽤나 좋은 편이다. 계절 가리지 않고 걷기에 참 좋은 길이 아닌가 싶다.


아무렇게나 묶여 있을만한 녀석이 아닌데 묶여 있다 싶어 한참 서로 바라본다. 저 녀석은 저기 서 있으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접하게 될까. 나는 저 녀석이 만난 수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겠지만 그래서 저 녀석에게는 금방 잊히고 마는 그런 존재일 수도 있겠지만 내게 저 개는 단 한 마리로 기억되고 이렇게 집에 돌아와서도 여전히 기억 속에 맴돈다.

관계란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어떤 만남은 스치는 순간 바로 잊기도 하고 어떤 만남은 평생에 걸쳐 기억 속에 남아 있기도 하다. 기억에 오래 남거나 혹은 바로 기억에서 사라지거나 그렇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만히 생각해본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얼굴들을 떠 올려 본다. 힘들여 기억해보려 하지 않아도 곧 떠오르는 얼굴들은 분명 내 삶에 좋은 면이건 그렇지 않은 면이건 큰 영향을 준 이들이다.

그렇다면 나는 다른 이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남아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좋지 않은 모습으로 기억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스친 후 잊히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세월을 돌이켜 생각해볼 때 그 사람을 만난 것은 참 후회스러운 일이었어..라고 기억하거나 기억되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도 그 사람을 만난 것이 다행이었어..라고 서로 기억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아무튼 오랜만에 눈 덮인 산에 이끌려 걸어본 둘레길이었다. 이제 정말 막바지구나 싶다. 앞으로 남은 구간은 3구간. 두 구간은 하루에 걸을 수 있고 우이령길은 예약제로 운영이 되기에 편한 날을 잡아 걸으면 된다. 총 21개 구간 71Km에 이르는 길. 어쩌면 별 게 아닐 수도 있지만 이렇게 하나의 맺음을 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여러 의미를 주는 것 같아 또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둘레길 완주가 끝나면 북쪽의 산들부터 하나둘 다녀볼 생각이다. 아마 첫 번째 대상은 사패산이 아닐까 싶은데 언제가 될 지는 역시 정해두지 않기로 하겠다.




Panasonic LX-5


새벽 4시 50분, 세상이 깨어나기에는 약간 이른 시간 집을 나선다. 왜 태백에 가려고 했는지 뚜렷한 이유는 없었다. 비우고 싶다는 생각이 우선이었고 차가운 바람을 좀 맞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달까. 


시외버스를 타고 태백시외버스터미널에 내려 유일사행 버스로 갈아탄다. 예전에 올랐던 코스와 반대로 걷는다. 1년 전에 이곳을 지나며 남겼던 발자국과 기억들을 홀로 걸으며 하나 둘 떠올려 보고 또 그렇게 지워나간다. 조금은 가라앉은 기분으로 산행을 하게 된 것이 조금 아쉽긴 했지만 언젠가는 거쳐야할 일이라고 생각을 하고 천천히 발길을 옮겨본다. 유일사 입구는 어느 산악회인지 단체로 와서 줄을 서서 올라가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바위 위에 나무가 자란다. 생명력이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살아있다는 것에 새삼 감사하게 된다. 비록 유한한 삶이지만 그 살아가는 동안에 적어도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가족이 있다면 그 가족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스스로의 삶을 온전하게 지켜가는 일이다. 자신을 우선 지키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유일사에서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제법 가파른 오르막의 연속이고 사방이 막혀있어서 경치를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어느 정도 올라가면 서서히 주변이 밝아지며 산의 웅장함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순간이 온다. 그래서 한 걸음 한 걸음이 소중하다. 앞으로 걷지 않으면 아무 것도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주목 군락지에 다다랐지만 아쉽게도 눈꽃은 피지 않았다. 내심 지난 날에 눈이 내려 눈꽃을 기대했지만 고고하게 서 있는 나무들은 가지 위에 눈이 쌓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슬슬 칼바람이 불어 온다. 머릿속이 하얗게 될 정도로 차고 강한 바람. 그 바람에 그냥 기대본다. 발 아래로는 어디가 끝인지 모를 긴 산자락이 펼쳐져 있다. 


역시 태백산은 설경이 제맛이다. 눈이 이렇게 아름답다는 것에 그저 감탄할 따름이다. 새벽같이 일어나 집을 나온 피로도 이곳에 이르면 느껴지지 않는다. 올라오는 동안 숨을 헐떡이며 내뱉었던 땀방울들도 찬바람에 날아가 버리고 이곳 민족의 영산이라 불리는 태백산 정상에서는 그저 바람 소리만 거세게 들려올뿐이었다. 


좁고 급경사인 길을 올라오니 이런 넓은 공간이 있다는 게 참 신기할 정도. 여기서부터는 거의 평지로 이동하게 된다. 날이 제법 맑아서 눈에 반사되는 햇살이 강하다. 손을 내밀어 만져본 눈은 도시의 그것보다 훨씬 차갑고 투명한 느낌이 든다. 분명 같은 눈인데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이렇게 다르다. 이곳의 눈은 그냥 집어 입에 넣어도 괜찮을 것같다.


아마 눈이 없었다면 나무들이 을씨년스러운 느낌을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견딘다는 주목. 내가 보고 있는 이 나무들은 어느 천년의 흔적들일까 한참 바라본다. 천 년이라는 세월동안 나무들은 얼마나 많은 바람을 맞고 또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았을까. 그 세월동안 나무들은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모두 견뎌온 것이다. 인고의 세월. 태백의 주목이 살아온 시간은 그런 것은 아닐까.


그래서인지 나무들이 내밀고 있는 가지의 방향이며 모양은 우리의 상상을 넘어선다. 애초에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의 단위를 넘어선 것이고 나무들에게 내가 지금 바라보는 이 순간은 정말 찰라도 아닌 짧은 순간일테니 지금 내 눈으로 보는 나무의 모습은 그저 오묘하고 신기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저 나무들은 이곳에 서서 세월의 바람을 견디어 나갈테지..


여기쯤 오면 사람들의 흔적이 제법 줄어든다. 올라갈 때 그렇게 북적이던 사람들이 얼마 남지 않은 천제단으로 서둘러 이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풍경을 놓치고 빨리 정상에 오른다한들 아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 산행을 하다보면 무조건 빨리빨리 정상에만 이르는 것에 집중하는 이들을 보게 되는데 그 사람의 취향이니 뭐라 할 것은 아니지만 빨리 오르면 빨리 내려가야 하는 법이다. 힘들여 멀리까지 와서 눈만 돌리면 볼 수 있는 장관을 그냥 지나쳐버리는 것은 조금 안타깝다.


그리고 도착한 천제단 중의 하나인 장군단이다. 이 제단은 보존 상태가 조금 열악하고 규모도 작아 사람들이 몰리는 곳은 아닌데 내게는 태백산의 기억의 정점에 이른 곳이기도 하다. 한참을 이곳에 머문다. 


이 표지석은 기존에는 없던 것인데 작년 9월에 이곳에 새로 세워진 것이다. 1년만에 다시 찾은 태백의 정상에서 마주치게 된 유일하게 달라진 풍경은 이 표지석이었다. 백두대간의 중추이며 민족의 영산이라 불리는 태백산은 우리나라의 12개의 명산 중의 하나로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는 의미가 큰 산이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 태백의 정기를 받는다는 표현을 많이들 쓰는데 오늘 산행에서 정기를 받았을지 아니면 정기를 산에 나누어 주었을지는 감이 오지 않았다.


멀리 보이는 천왕단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태백산 사진에 자주 등장하는 모습인데 정상에 눈꽃이 피지 않아 극적인 느낌은 적었지만 나름 사람들이 걸어가는 모습이 멋드러져 보인다. 산이란 하루에도 수십 번 날씨가 변화하는지라 어느 방향에서 하늘을 바라보면 푸른물이 떨어질 정도로 새파랗지만 어느 방향에서 바라보면 당장이라도 뭔가 내릴 것처럼 어둡기도 하다. 내심 눈이라도 내리길 바랐지만...


어지간해서 이 표지석을 제대로 찍기란 불가능하다. 평일인데도 사람들이 제법 많았고 이 표지석 앞에는 늘 사진을 남기려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기 때문에 이리저리 카메라를 돌려 최대한 사람이 안 보이는 시점에 찍어야 하는게 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은 편이 아닌가 싶은데...표지석 위에는 사람들이 뭔가를 남기고 간 흔적이 조금은 흉물스럽게 남아있다. 자기들이야 떠나면 그뿐이지만 앞으로 수 천년의 세월을 이곳을 지켜야할 돌 입장에서는 반가운 일은 아니지 싶다.


여기서 한 번 고민을 한다. 문수봉까지 갈 것이냐 말 것이냐인데 오늘의 이동이 상당히 치밀한 동선을 따라 움직이는 지라 아직 가 보지 않은 문수봉을 거칠 경우 차 시간이 어찌될지 몰라 일단 오늘은 생각을 접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내려가보니 차 시간까지 20여 분 정도 여유가 있었는데 다음에 올라온다면 문수봉을 거치는 코스로 이동해볼 생각이다. 아마도 내년 겨울이 되어야겠지만...


당골로 하산하는 코스에서 단종비각을 마주칠 수 있다. 역사의 지난 끈들. 당사자들은 이미 없고 기억의 흔적조차 사라진 지금이지만 세월 속에 당시의 장면들은 이렇게 남아 오가는 이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우리네 삶 역시 언젠가 그 끝에 이르러 우리와 우리를 기억하는 이들조차 사라지겠지만 우리가 남겨 놓은 흔적들은 조각조각일지라도 여전히 남아 누군가 우리를 기억하게 해 줄 끈으로 남아있을 것을 생각하면 뭔가 마음이 애잔해지는 느낌도 든다.


용정의 물은 예나 지금이나 마셔볼 기회가 없다. 이곳을 찾을 때면 언제나 얼어있기 때문인데 용정의 물을 한 모금 마시기 위해서라도 눈이 내리지 않는 계절에 이곳을 다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라도 이유를 하나 만들어두면 된다. 그 이유가 비록 나에게만 해당되는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것만으로도 내몸을 움직여 다시 태백을 찾기에 충분할 테니 말이다.


그리고 휴게소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 먹는 사발면 한 그릇. 늘 그렇듯이 나는 산행을 할 때 무엇을 먹지 않는 나쁜 버릇이 있다. 물 한 통이나 이온 음료 한 통이 전부인데 습관치고는 몸을 꾸준히 움직여야 하는 산행에서는 좋지 않은 것이다. 아마도 예전에 운전을 할 때의 습관이 산행에 그대로 옮겨온 모양이다. 하지만 오늘은 어느 층계참에 앉아 멀리 산을 보며 라면을 먹는다. 다 내주었으니 이제 채우고 가야 한다는 생각이었을까. 뭔가 짠한 마음이 들어 라면을 먹는지 다른 무엇을 먹는지 모르고 먹는다. 하얀 수증기가 안경을 온통 뿌옇게 만든다.


하산길은 조금은 지루한 내리막의 연속이다. 이 사진에는 나도 나와있다. 이렇게 어느 겨울 날의 태백산에 내 그림자를 찍어 두었다. 해가 뜨면 이 길가에 내 그림자는 깨어나고 해가 지면 깊은 잠에 빠져들며 앞으로 남아 있는 시간들을 기억하겠지. 그리고 돌아서서 내려오는 길에 내 마음의 한 조각을 떼어 그림자의 주머니에 넣어 준다. 잘 간직하고 있으라고 말하면서...


"아직 만나지 못한 내 그리움을 찾으러" 나뭇가지에 묶여 있는 작은 천조각에 쓰인 글을 보고 또 본다. 오늘 내가 태백에 온 것은 이것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산행에서는 그 산행을 나 스스로에게 납득시킬 수 있는 이유가 불현듯 찾아지기도 한다. 기억을 지우려..라는 조금 엇갈린 이유로 집을 나섰지만 결국 내가 이곳을 찾은 것은 아직 만나지 못한 내 그리움때문이었다. 그 그리움의 대상이 무엇인지 혹은 누구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지만 그저 저 글귀를 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것이면 됐다.


그리고 다시 도시로 내려왔다. 짧고도 또 짧은 하루였다. 이른 새벽에 집을 나서 자정이 가까울 무렵 다시 집에 들어갔음에도 오늘 하루는 내게 너무나 짧았다. 


오늘 글은 산행기라 하기보다는 하루의 일기같은 느낌이다. 

하루의 일기라 하기보다는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는 해묵은 일기장같은 느낌이다.

해묵은 일기장이라 하기보다는 아직 만나지 못한 그리움을 찾아 떠나야 할 도착하지 않은 기차 시간표 같은 느낌이다.


Nikon D700, AF Nikkor 35mm f2D, Panasonic LX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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