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철의 '나에게 쓰는 편지'는 90년대 학번이었던 내게 말 그대로 충격이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의 분위기에 휩쓸리면서도 미래에 대한 불안과 현재에 대한 절망.. 그런 여러 감정들 속에서 고시라는 당시는 어쩌면 당연한(그리고 현실을 외면하는) 선택을 해야했던 내게 이 노래는 가장 아픈 곳을 찌르고 또 찔렀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난 지금. 다시 이곡을 들었을 때 여전히 그 가사 속의 모든 상황들이 그대로 나에게 적용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당시와 처한 상황이나 환경은 다르지만 근본적으로 내게 던져진 질문은 같았고 나는 여전히 머뭇거리며 적당한 답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 어쩌면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바닥에 깔아두고 그것을 기반으로 살아가야 하는 그것을 나는 이리저리 외면하고 모른 척했다. 순간순간의 위기를 넘기기 위해 적당한 핑계를 대고 그 순간만 넘기면 되겠지..라는 안이한 생각.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는 그 어려움만 극복된다면 무엇이든 할 거라고 다짐하지만 막상 그 어려움을 넘기고 나면 다시 주저 앉아 버리고마는 나태함과 안일함.. 

그리고 지금 90년대 학교 도서관의 내 모습으로 현재의 나를 다시 일치시키려 한다. 감정이나 의지나 노력, 사랑같은 것들은 객관적인 수치로 보여줄 수가 없기에 나는 이 선택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낯선 단어들로 가득 차 있는 법전과 법서를 펼치고 앉아 바깥에서 들려오는 시대의 흐름에 귀를 막고 가끔 마주치게 되는 순진한 인연으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하루 끼니 걱정을 하는 그 시절로 돌아간다는 것은 내게 있어 가장 큰 트라우마와 정면으로 부딪히는 일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마주쳐야 했고..이걸 넘어서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저 차일피일 시간만 미뤄두고 있었을 뿐이다. 그 미룸이 얼마나 내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미치고 있는지 알면서도 그 사실과 맞부딪히기가 너무 싫었는데..이젠 뭐랄까.. 참 초연하고 담담한 마음으로 그 녀석을 다시 마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90년대의 어느 날. 최루탄 냄새 매캐한 도서관에 앉아 선배들, 친구들과 나누던 이야기들, 수줍은 얼굴로 지나치며 눈을 내리감던 첫사랑 그녀의 모습, 붕어빵 한개로 하루를 버티며 스스로 대단해했던 어느 유치한 날들, 지하철 역 아래 소주집에서 못 마시는 술을 마시며 시대를 이야기하던 나날들..그 모든 풍경들이 문득 새롭게 컬러가 업혀지며 내눈 앞에 다시 선명하게 보인다. 같은 기억도 어떻게 되돌리느냐에 따라 이렇게 다르다..

지금의 나는 아무도 탓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아쉬운 감정을 느끼지 않고 서운하다거나 섭섭하다거나 하는 감정도 들지 않는다. 그것이 가족이건 혹은 다른 누구건 그들이 내삶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그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뿐이다. 그만큼 내가 살아온 날들 역시 그대로 받아들일 뿐이다. 이루지 못해 안타까웠던 과거 역시 내 삶이었다.

과거의 기억과 과거의 사람들 모두 현재의 나를 만들어온 존재들이니까. 그리고 이젠 그 모든 것들에 감사함을 느낀다. 편하게 과거를 마주할 수 있고 말을 건넬 수 있다.

다시.. 시간을 그렇게 되돌린다. 모든 기억을 안고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1. 난 잃어버린 나를 만나고 싶어 모두 잠든 후에 나에게 편지를 쓰네
내 마음 깊이 초라한 모습으로 힘없이 서있는 나를 안아 주고 싶어
난 약해질 때마다 나에게 말을 하지 넌 아직도 너의 길을 두려워하고 있니
나의 대답은 이젠 아냐

언제부턴가 세상은 점점 빨리 변해만 가네 나의 마음도 조급해지지만
우리가 찾는 소중함들은 항상 변하지 않아 가까운 곳에서 우릴 기다릴 뿐

이제 나의 친구들은 더이상 우리가 사랑했던 동화 속의 주인공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고호의 불꽃같은 삶도 니체의 상처 입은 분노도 스스로의 현실엔 더이상
도움될 것이 없다 말한다. 
전망 좋은 직장과 가족 안에서의 안정과 은행구좌의 잔고액수가 모든 가치의 척도인가. 
돈 큰집 빠른 차여자 명성 사회적 지위 그런 것들에 과연 우리의 행복이 있을까. 
나만 혼자 뒤떨어져 다른 곳으로 가는 걸까.
가끔씩은 불안한 맘도 없진 않지만
걱정스런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친구여
우린 결국 같은 곳으로 가고 있는데

2.때로는 내 마음을 남에겐 감춰왔지 난 슬플 땐 그냥 맘껏 소리내 울고싶어
나는 조금도 강하지 않아

언제부턴가 세상은 점점 빨리 변해만 가네 나의 마음도 조급해지지만
우리가 찾는 소중함들은 항상 변하지 않아 
가까운 곳에서 우릴 기다릴 뿐



바로 어제 만년필 관련 포스팅을 했지만 처음 만년필을 쓰는 분이라면 잉크가 생각보다 진하지 않다고 느낄 경우가 많지 싶다. 물론 잉크 본연의 색상이기 때문에 그 자체에 더 매력을 느낄 수도 있고 한편에서 보면 그렇게 잉크를 사용하는 것이 가장 그 메이커의 진수를 느낄 수 있는 방법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내 경우는 아주 진한 잉크를 좋아한다. 잉크는 제조사마다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까다로운 만년필들은 같은 제조사에 최적화 되어 있는 경우도 종종 있어서 제조사와 잉크가 다른 경우 필기가 제대로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100% 그런 것은 아니지만 세일러의 '극흑' 잉크가 그런 성향이 있는데 이 잉크는 세일러의 만년필에 적합하게 되어 있다. 세일러 만년필은 가는 글씨인 세필이 특징인데 잉크 역시 세필에 맞춰져 있어서 다른 만년필 특히 촉이 굵은 만년필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이 잉크 외에도 라미의 잉크가 비교적 진한 잉크로 알려져 있는데 이미 집에 몇 종의 잉크를 가지고 있을 경우 굳이 비용을 들여 새로 잉크를 사기보다는 예전 고시생들이 애용하던 "잉크 말리기"를 이용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과거 고시 2차에 만년필이 주로 사용되던 시절에는 고시생들은 답안을 좀 더 도드라지게 하기 위해 잉크를 진하게 할 다양한 방법들을 연구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잉크를 말리는 것이다. 잉크를 말린다면 그냥 뚜껑을 열어두면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는데 어느 정도 맞긴 하지만 한 가지 팁이 있다.

그냥 뚜껑을 열어 두면 당연히 공기 중의 먼지나 불순물이 잉크병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만년필을 고장나게 하는 원인이 된다. 뚜껑을 열어 놓되 그 위에 휴지를 가볍게 올려 두면 된다. 이렇게 되면 잉크는 말 그대로 숨을 쉬는 상태가 되고 불순물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 다만 여기서 얼마나 뚜껑을 열어 두고 잉크를 말려야 할까 고민이 되는데 딱 어느 정도가 좋다는 기준은 없다. 아무리 휴지로 입구를 막았다해도 잉크가 공기 중으로 날아가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기 때문에 계속 잉크의 양이 줄어드는 점도 문제기 때문이다.

내 경우는 보통 하루 정도를 말리는데 일단 한번 말려보고 색을 확인한 다음 시간을 조절한다. 그리고 이렇게 작업을 해 둔 잉크는 쓰면 쓸 수록 진해지기 때문에 무작정 길게 말릴 필요는 없지 싶다. 특히나 한 병에 2만 원이 넘어가는 고가 잉크라면 말리는 것은 둘째치고 날아가는 잉크가 아쉽기 때문이다. 아무튼 바로 전의 글에도 적었지만 조금이라도 진한 느낌을 원한다면 몽블랑, 세일러 잉크를 권하고 싶고 이국적인 색을 원한다면 까렌다쉬 잉크를 추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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