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길상사를 들르기로 하고 한성대 입구역에 도착하니 시간이 조금 남아 길 건너에 있던 아름다운가게를 찾았다. 잘 뒤져 보면 생각보다 좋은 물건들을 찾을 수 있는지라 이것저것 보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얘, 이거 봐라!"며 나를 부르셨다. 어머니 손에 들린 것은 작은 소 인형..

이 별로 귀엽지도 않고 어디 하나 뚜렷한 개성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인형을 왜 어머니는 그렇게 기뻐하며 나를 부르셨을까. 사실 이 인형은 우리집에 있던 인형이다. 워낙 인형을 좋아하시는 어머니의 성격 탓에 집안에 제법 인형들이 많았는데 이 녀석하고 꼭같이 생겼지만 크기만 좀 더 큰 녀석이 1988년 우리집에 있었단다.


나도 이 녀석을 제법 오래 봐왔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아무래도 낡을 수밖에 없었고 어머니는 여기저기 튿어진 곳을 실로 꿰매며 계속 간직해오셨다. 그리고 아마 몇 년 전인 것으로 기억하는데 더 이상 인형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어 집에서 내보냈는데 전의 그 녀석과 꼭 같은 크기만 좀 작은 녀석을 찾은 것이다.

인연(글쎄 인형과 인연을 이야기한다는 것에 반감을 가질 분도 계시겠지만)이라는 것이 참 오묘한 것이어서 아침에 불쑥 길상사에 가겠다고 집을 나선 것. 한성대 입구에 생각보다 일찍 도착해 셔틀버스를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남았다는 것. 길 건너에 아름다운가게가 보인 것과 그 안에 이 녀석이 있었다는 것은 그저 인연이라고밖에 달리 설명할 길은 없었다.

남들에게는 그저 작은 소모양을 한 인형이고 크게 매력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팔리지 않고 그렇게 남아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에게 이 인형은 한 세월을 같이 해 온 복덩이요 재산이었던 것이다. 

세상의 모든 가치라는 것은 결국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고 그 결정은 살아오는 동안의 경험과 기억들이 바탕이 된다. 인형 하나 가지고 무슨 철학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삶이란 그렇게 복잡한 것 같으면서도 단순한 것이다. 

아무튼 이 작은 인형은 어머니에게 지난 20여년의 시간을 잠시 되돌릴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이 정도면 충분한 가치가 있지 않은가?


시간이 흐를수록 인간의 삶은 선형에서 비선형으로 크게 이동하고 있다. 말 그대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 저 멀리 중동의 기름 사정이 내 주머니 사정에 영향을 주듯 내 의지와 상관없는 일들이 내 삶의 본질적인 부분에 영향을 주는 시대다.

젊어서 열심히 일해서 노후를 준비한다는 것이 미덕이었던 시절이 있었지만 청춘을 불살라가며 힘겹게 일을 해도 남는 건 얼마 안 되는 잔고와 피로에 지친 몸뿐. 미래를 위해 오늘의 고통을 감수하고 희생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 일인가하는 원초적인 질문이 반복될 뿐이다.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자아의 본질적인 가치조차 버려가고 하루라도 더 지금 직장에 남아 있기 위해 마지막 자존심마저 잃어가며 살아가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인가?

어차피 인간이란 홀로일 수밖에 없는 존재다. 누가 내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스스로의 존재감과 가치를 확인하는 것이 목적이어야 함에도 요즘 인간들의 삶이란 주객이 전도되어도 한참 전도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돈이 있어야 세상을 살고 세상을 살아야 가치도 찾을 것이 아니냐? 그러다보니 어쩔 수 없이 싫어도 일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지만 과연 얼마만큼의 돈을 그네들은 필요로 하는 것일까 반문하고 싶다. 물욕이란 끝이 없는 것인데 ‘이 정도면 나 스스로의 가치를 찾을 수 있는 돈을 벌었다’고 말할 수 있는 시기란 대체 언제란 말인가?

많은 이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도 많이 벌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런 일거리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경제적인 개념은 어느 정도 접어두고 시작해야 가능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뜻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 하고 마음속에만 담아두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종종 신문에 나오는 사표 쓰고 세계일주 떠난 이들이 마냥 부러운 것이다. 마음은 그들의 행동에 박수를 보내지만 현실에서는 용기를 내지 못 한다. 그리고 시간은 흐르고 ‘이때쯤이면 되겠지’라는 시기가 되고 나면 이미 몸이 따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비선형적인 방정식이 지배하는 요즘 바람직한 삶의 모습이란 무엇일까? 답은 본인이 이미 알고 있다. 그것을 실천할 용기가 없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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