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뉘엿뉘엿 넘어가는 11월의 첫날 둘레길을 다시 찾았다. 오랜만이라고 반갑게 맞아주지는 않는 것 같지만 산은 언제나 그렇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고보면 산처럼 한결같은 것도 많지는 않다. 자연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빠르게 변화하기에 이렇게 무뚝뚝하지만 늘 제자리에 버티고 서서 나를 반기는 산은 어쩌면 내게 하나의 큰 버팀목 같은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오늘 코스는 서울을 벗어나게 된다. 서울의 북서쪽 외곽을 지나 경기도 남부에 이르는 길인데 마무리되는 지점은 대충 송추, 장흥 부근이다. 송추라면 기억하시는 분들은 전투방위가 생각나실테고 장흥은 커피 한 잔 -행간을 읽으시는 분들은 다른 것을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정도가 생각나실까? 가을도 아니고 그렇다고 겨울도 아닌 11월의 첫째날은 아침에 집을 나설 때는 제법 차가운 바람이 걱정됐지만 막상 길을 걸을 때에는 비교적 두껍게 입지 않아도 걸을 만하다 싶을 정도였다.


북한산국립공원에서 안내하는 12구간 충의길의 거리는 3.7km로 대략 1시간 45분이 소요되며 난이도는 중급 수준이고 실제로 걷게 되면 4.2km정도에 시간은 1시간 20분 정도 소요된다. 이번 구간은 시작점이 지하철 구파발역에서 버스로 제법 멀리 와야 한다. 이번 구간과 다음 구간이 서울에서 출발하는 경로로는 마지막인데 구파발역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출발점으로 이동한 다음 북한산 등반로로 향하다보면 중간에 갈림길을 만나게 된다.


사람은 습관의 동물이라던가. 몇몇 구간을 혼자 걷지 않다가 불쑥 혼자 걷게 되니 뭔가 허전한 마음이 걷는 내내 가시질 않았다. 딱히 뭐라 설명하기는 애매한 그런 느낌이랄까. 입구로 가는 중간에 은행잎 위로 서리가 내린 것인지 밤사이 내린 비가 얼은 것인지 모를 얼음 알갱이들이 제법 보였다. 아직 그 색이 바래지 않은 은행잎과 물방울과 얼음조각들이 이번 걷기의 시작을 알려주는듯 했다.


오늘은 LX5만 들고 나갔는데 집에 두고 온 카메라가 자기 생각을 해달라는 것인지 색감이 니콘 비스무리하게 나왔다. 이번 구간은 말그대로 사방이 온통 낙엽으로 가득 차 있었다. 변화를 위해서는 무언가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연의 단순한 진리를 어렵거나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이 그저 눈으로 보고 발로 밟아 느끼면 그만일 정도였다. 북한산에는 이미 단풍은 남아있지 않았다. 가장 화려한 시간이 지난 후에는 이렇게 회색빛의 세상이 오는데 단풍의 시기에 이곳을 왔다면 한 가지만 보고 다른 한 가지는 놓칠 수도 있었으니 차라리 오늘이 적당한 때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12구간 충의길은 다른 구간의 이름짓기법과는 조금 다른데 사실 이 구간에는 무언가 특징적인 것이 없다. 그래서였는지 국립공원측도 고민 끝에 '주변에 군부대가 많으니 충의길이라고 하자'라고 결심한 것처럼 보인다. 구간 자체는 중급 난이도라 하지만 실제로 걸어보면 하급 정도가 아닐까 싶은데 정말 걷기 편하고 인적도 아주 드문 편이니 데이트 하기에 꽤 어울리는(사람 나름이겠으나) 구간이다. 


길은 대부분 흙길이라 걷기에 편하고 낙엽들이 푹신푹신한 느낌도 더해주기 때문에 천천히 걸으며 저물어가는 가을을 배웅하기에 적당한 길이 아닌가 생각됐다. 지난 밤에 내린 비의 흔적들이 여전히 남아 있음에도 미끄럽지 않아 큰 어려움은 없었다. 구간을 마칠 때까지 딱 두 명과 마추쳤다. 북한산국립공원도 이 구간의 특징으로 인적이 드물다고 하고 있는데 꽤나 좋은 구간임에도 왜 사람들이 적은지는 알 길이 없다. 서울에서 이동하기에 멀다는 점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출렁다리'라고 불리는 다리인데 이런 다리가 2개인가 3개가 있다. 다리 위를 걸으면 위아래로 출렁거리는 느낌이 제법 강한데 평지로 나온 다음에도 몇걸음은 출렁거리는 느낌이 유지되는 점이 재밌다 다리 자체는 아주 튼실하게 만들어져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구간에 들어서기 전에 깜빡하고 음료수를 준비하지 않았다. 늘 들고 다니는 묘한 빗깔의 파워에이드가 오늘따라 그리웠다. 결국 종착점에 가서야 그 녀석을 만날 수 있었다.


그냥 편하게 걸으면 족했다. 이제까지 걸어온 어느 길보다 걷기가 편했다. 길도 널찍하고 크게 오르내리는 구간도 없기 때문에 주변의 바람소리와 신발 밑으로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걸으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낙엽은 영어로는 'dead leaves'라고도 하는데 그 표현에 비하면 물론 한자기는 하지만 우리말이 더 운치가 있어서 좋다. 그래도 길을 걷는 내내 뭔가 허전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든 사람은 몰라도 난 사람은 안다던가... 


이것은 버섯일까? 쓰러진 나무 위로 피어 오르는 또 다른 생명들이 묘한 부조화를 이루며 있었다. 하나의 생명이 사그라짐으로 인해 또 다른 생명이 살게 된다는 것은 한편 생각해보면 잔인해보이기도 하지만 조금 큰 틀에서 생각해보면 결국 그렇게 생명이라는 것이 이어지는 것인 셈이고 그것이 자연스러운 순리일테니 오히려 새로운 생명을 반길 일이다. 산길을 나서 일반도로로 접어들었을 때 길가에 반듯하게 누운 채 식어있는 강아지 한 마리를 보았는데 이때의 감정이 그때까지 이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온통 낙엽이다. 내년 봄을 맞이하기 위해 산은 가을부터 준비를 한다. 계절에 맞게 그저 흐르는 순리대로 받아들인다. 나무들이라 해서 싱싱한 나뭇잎을 떨구는게 내키겠냐만 그것이 주어진 순리라면 그저 묵묵히 받아들임을 늦가을의 이 산길은 내게 보여주고 있었다. 아마도 그 큰 흐름에 맞서는 것은 우리네 인간밖에 없지 않을까.


햇빛은 산의 구석구석을 비춘다. 자기가 선 자리에 볕이 들지 않는다 해도 나무들은 그저 기다릴 뿐 달리 말이 없다. 그리고 언젠가 싸늘한 바람을 뚫고 한 조각의 빛이 내려오면 그 빛에 온몸을 기대고 선다. 빛이 자기 자리에 들 때까지는 묵묵하게 스스로의 길을 갈 뿐이다. 그것이 자연이고 그것이 순리다. 그저 수동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능동적인 기다림이다.


흔히 미래에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꿈을 갖는다. 그리고 그꿈을 이루기 위해 여러가지로 노력을 한다. 미래란 현재의 다른 모습이다. 현재가 이제까지 내가 걸어온 결과이듯 말이다. 현재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과거의 내가 그런 생각과 결정을 했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와 제자리에 선다. 모든 것의 시작이자 과정이자 결과는 나로 인한다는 것. 미래에 어떤 모습의 나를 만나고 싶다면 현재의 나를 보면 된다. 구태여 점을 볼 것도 막연함에 두려워할 것도 없도 없다. 지금의 모습이 미래의 모습이니 말이다.


이제까지 둘레길을 걷다가 이런 표지판은 처음 만났는데 생태계 보호를 위해 사람들이 오고가는 것을 막아둔 것이다. 실제로 나무로 울타리가 쳐져 있어 더 이상 이길을 따라 위로 가지 못 하게 하고 있다. 우리는 쉽게 나뭇가지 하나를 꺾을 수 있지만 나무가 그렇게 자라는데 걸리는 시간은 십 수년에 이를 수도 있다. 무언가를 파괴하는 것은 순간이지만 창조하는 것은 기다림이 필요하다. 사람도 모양이 갖추어져 나오는데 10달이나 걸리지 않는가.


이 구간은 대체로 좌우가 막혀 있는 편인데 가끔 이렇게 뻥 뚫린 여백을 만나게 되면 절로 마음이 시원해진다. 길을 걷다보면 간간히 총성이 들려오는데 근처 군부대에서 훈련을 하는 경우다. 총소리를 듣기도 참 오랜만이다. 소대장 시절 연말에 그동안 쓰지 않은 총알을 모두 소모해야 한다며 분대장 몇 데리고 나가 연발로 원없이 총을 쏴야했던 날이 문득 떠올랐다. 사실 총소리는 굉장히 큰편이다.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감당하기 쉬운 수준은 아니다. 전쟁 중에 총소리, 포소리 때문에 공황이 생긴다는 말이 이해가 갈 정도로 크다.


조금 더 내려가면 일반 도로(39번 도로)와 만나게 되는데 어지간해서는 여기까지 걷고 이 구간은 종료하는 편이 낫다. 여기서부터 포장된 길을 정말 하염없이 걸어야 한다. 혹 산길에서 낭만적인 데이트라도 했다면 바로 차를 타기를 권한다. 이제까지 만들어둔 낭만적인 분위기가 완전히 깨질 수 있으니 말이다. 특히나 계절이 극단적인 여름이나 겨울에는 몸에 무리가 갈 수도 있으니 주의를 요한다.


좌우로 보이는 것은 멀리 보이는 산들과 군부대가 전부인 길이다. 차들도 그리 많이 다니지는 않아서 조금 휑하다 싶을 정도의 길인데 이제까지 나무들이 가려준 덕분에 맞지 않았던 늦가을 바람이 제법 얼굴을 때리고 지나갔다. 이 포장도로에 진입하면 경기도에 들어선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처음 시작한 지점이 서울에서도 제법 동쪽이었는데 북한산 자락이 참 넓게 그리고 멀리 뻗어있구나 싶다. 


조금 더 걸으면 예약제로 운영되는 둘레길의 마지막 구간인 우이령길로 갈 수 있는 갈림길을 만날 수 있다. 우이령길을 가는 것은 역시나 내년이나 되어야 가능하지 싶다. 이제 12구간을 마쳤으니 올해가 두달 남은 지금으로서는 굳이 무리할 이유도 없으니 말이다. 산자락에는 늘 뭔가 수상해보이는 모텔들이 있는데 소문으로 들리는 그런 이야기가 실제로 있긴 한가 보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꼭 산이라 해서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상황이기에 두드러질 뿐이다. 


이 하염없이 길기만한 길은 1km가 넘게 이어진다. 사실 이때만 해도 어느 정도 걸으면 다음 구간 안내가 나오겠지 싶어 거기까지만 가자는 생각이었다. 다음 구간은 거리가 5km가 넘기 때문에 오늘 이어서 가기는 어차피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생각은 잠시 후에 바뀌게 된다. 아무튼 발바닥이 조금 피곤해지는 길이기는 하지만 천천히 걷는다 생각하면 직선으로 난 길이기 때문에 죽 걸어갈 수는 있다. 사방에 바람막이가 없으니 옷깃은 단단히 여밀 필요가 있다.


이번 구간을 마쳐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이 표지판을 만나고나서다. 가는 방향과 수평으로 있기 때문에 어쩌면 못 보고 지나칠 수도 있는데 그런 점을 생각했는지 제법 크다. 표지판의 의미는 12구간과 13구간은 달리 분기점이 없다는 말이다. 이 지점을 시작으로 13구간이라는 말인데 앞을 보니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같은 모양의 직선 도로가 죽 이어져 있다. 더 이상 걷기는 무리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여기서 조금 더 가면 건널목이 나오고 길을 건너 34번이나 704번을 타면 구파발로 돌아갈 수 있다.

전체적으로 12구간 충의길은 뚜렷한 특징은 없는 그러나 편하게 산책하듯이 걸을 수 있는 그런 길이었다. 낙엽이 푹신한 길을 걸으며 이런저런 생각도 해 보고 제법 차가워진 바람을 느끼며 또 하나의 계절이 오고가는구나라는 상념에 젖어볼 수고 있었다. 서울에서 경기도로 이어지는 점도 이제까지 제법 많이 걸어왔구나 라는 생각을 들게 했는데 21개 중에 이제 12개가 마무리되었으니 많으면 9번의 걸음만 하면 하나의 추억의 책이 완성된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조금 멀리 남겨둘까라는 생각도 해 보는데 크게 시간이나 구간에 구애받지 않을 생각이니 내년 초쯤에는 마무리가 되지 싶다.

사전에 일정이 있던 것도 아니고 갑작스레 걷게됐는데 한 가지 생각을 결정을 짓고자 함이었다. 길이 마무리될 때까지 대충 결심을 했는데 걷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생각을 바꾸었다. 무엇인가 스스로 단정을 짓고 그것을 옳다고 자기최면을 거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 없다.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하고 무엇보다 조율을 해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일방적으로 내린 결정은 당시에는 그것이 옳다고 느낄지는 몰라도 멀리 보면 정말 소중한 것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산의 어느 이름모를 꽃처럼 주어진 자리에 충실하며 순리를 기다려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니 말이다.


Panasonic LX-5


둘레길도 어느덧 중반이다. 처음 1구간을 걸을 때 막연하게 '완주를 해보아야겠다'고 생각만 했었는데 어느새 11구간이다. 시작이 절반이라는데 절반을 왔으니 끝까지 걷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으리라. 오늘은 어느 여름날처럼 제법 한낮의 햇살이 따가왔다. 처음 걷기로 한 구간은 9,10구간이었지만 한 구간 더 나아가 11구간까지 걷기로 했다.

9구간은 이전 8구간의 종료지점에서 바로 시작하기 때문에 8구간에서부터 이어서 걸은 경우가 아니라면 어느 정도 거리 손실이 있게 된다. 오늘은 9구간의 시작지점을 북한산국립공원의 안내에 따라 잡았기 때문에 생각보다 구간의 종료가 빨랐는데 집에 돌아와서야 이런 사실을 알았으니 이점은 유의하시는 게 좋을 듯하다. 

9,10,11구간은 11구간만 약간 난이도가 있고 9,10구간은 무난한 난이도여서 전체 구간을 한번에 걷는 것도 크게 부담스럽지 않다. 위의 표를 보면 마지막 효자길에서 고도가 급격하게 높아지는데 생각만큼 힘들지는 않으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좀 더 자세한 이동경로는 이곳을 참조하시면 되겠다.

9,10,11구간을 전부 완주할 경우 전체 소요거리(버스정류장 이동거리 포함)는 7.91km고 성인 남녀 기준(조금 느긋한 걸음)으로 3시간 10분 가량 소요된다. 시작점은 3호선 연신내역에 내린 다음 3번 출구로 나가 그대로 직진을 해서 30여 미터쯤 걸어가면 버스정류장이 있다. 여기서 7211번을 타면 된다. 중앙 차로에는 이 버스가 없으니 주의하자.


전형적인 가을의 파란색이 두드러졌던 하루였다. 진관사(하나고) 입구 버스정류장에 내려 조금 걸어가면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길목에서 마실길 구간임을 알려 주는 이정표와 만날 수 있다. 멀리 북한산이 보인다. 마음은 산 정상에 있지만 몸은 둘레길이다. 9구간 정도 오게 되면 서울의 서쪽으로 제법 많이 이동한 셈이다. 북한산을 아래에서부터 왼쪽으로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는 코스라고 생각하면 된다.


북한산둘레길은 각 구간별로 주요 지점을 이정표에 기록하고 있는데 9구간은 효자동을 대표 이름으로 삼고 있다. 휴일이어서 그런지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 구간을 오고 가는 모습이었는데 이쪽에서 북한산 등반로가 이어져 있어 그렇다고 한다. 사실 오늘 연신내역에서 마주 친 등산객들의 숫자가 내가 평생 만나본 등산객 숫자보다 많은 것 같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다. 한편 생각해보면 내가 그만큼 산을 자주 찾지 않았다는 말이 되기도 하지만...


분명 9구간의 진입 통로는 8구간의 종료점에 표기 되어 있지만 이곳에서 한 번 더 만날 수 있다. 여기서부터 생각을 하면 실제로 걷는 9구간의 거리는 매우 짧은 편이다. 구간 이름인 마실길답게 정말 가벼운 동네 산책하는 수준의 길이 이어져 있는데 좌우 둘러보고 오고가는 사람들과 마주치다 보면 어느새 구간이 종료된다.


팔자 편하게 늘어져 있다는 표현이 어울리게 잘 자는 녀석이다. 누가 와서 업어가도 모를 지경이다.(물론 시도하려는 분은 없겠지만) 그늘이 진 것이 꼭 이불을 덥고 있는 것 같은 모양새인데 아직은 오전이라 햇살이 그렇게 따갑지는 않아 편히 잘 수 있나 보다 싶었다. 늘 드는 생각이지만 개발을 보면 꼭 잡아보고 싶다. 오래 전 기르던 강아지 생각도 나고... 동물을 기른다면 역시 개를 길러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 번 해 본다.


마실길은 정말 편하게 걸을 수 있다. 휴일이라 오고가는 사람들에 잠깐잠깐 지체되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오고가는 모습도 나름 볼거리가 되는 셈이다. 가끔 다른 분들의 사진을 찍어 드리기도 하고 사진에 찍히기도 하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걸으면 된다. 휴일에 둘레길을 걷기 위해 내가 나온 것처럼 다른 이들도 그런 생각으로 나온 것인데 '왜 사람이 이리 많아?'라고 생각하고 불평을 할 일은 아닌 것이다. 다른 이들도 나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할테니 말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조금 걷다보니 이미 9구간은 종료되어 있었다. 10구간 내시묘역길 구간이다. 이 지점을 경계로 9-10구간이 갈리는데 조금 더 진행하면 10구간 입구를 알리는 문을 만나게 되지만 사실상 이곳이 분기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근처에 수방사 교육대가 있어 지도에 상세하게 표시되지는 않는 지점이기도 하다. 


내시묘역길 구간을 담은 블로그에 한결같이 소개되는 비석이다. 경천군이라는 이에게 나라에서 하사한 토지니 소나무를 베기 위해 들어가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문이라고 보면 된다. 세월이 흐르면 사람은 간 곳이 없고 그 흔적만 남아 그 사람을 기억하게 된다. 100년도 못 살면서 1,000년의 근심으로 사는 것이 사람이라 한다. 나는 지금 100년의 근심을 하고 있을까 1,000년의 근심을 하고 있을까.. 근심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나은 일이지 싶다. 그저 주어진 순간에 최선을 다할 뿐... 


10구간은 전반적으로 길이 평탄하고 걷기에 큰 부담이 없는 그러면서도 한적하고 고요한 느낌이 강한 구간이다. 물론 나들이 인파들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 속에서도 '묘역'이라는 이름에서 오는 왠지 모를 적막함이랄까..그런 것이 느껴졌다. 실제 내시들의 묘역은 사유지 안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이 구간을 걸으면서 만나기는 어려웠다.


하늘이 정말 '가을이구나'싶은 날이었다. 혼자서 길을 걷는 것도 좋지만 같은 목적지를 공유하는 누군가와 걷는 것은 또 다른 느낌과 의미가 있다. 그 시간이 짧건 혹은 길건 한 방향을 바라보고 걸어간다는 것이 참 소중하다. 그 길을 끝까지 함께 걷건 혹은 중간에 다른 길로 멀어져 각자의 길을 가게 되건 적어도 함께 한 시간만큼은 좋은 기억으로 남게 되는 것이니 살아가는 동안 그런 기억들을 모아둔다는 것 아니 모을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기억을 새긴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삶의 전부일지도 모르겠다. 만나는 사람들, 하는 일들, 나를 둘러 싼 모든 것들이 하루하루 매시간시간 하나둘 쌓여가고 그것이 나의 역사가 되고 결국은 그것이 나의 삶이 된다. 과거를 돌아볼 필요도 없고 미래를 바라볼 필요도 없다. 그저 지금이 최선이다. 현재에 만든 기억이 과거가 되고 또한 미래가 된다. 지나치게 과거에 얽매이고 지나치게 미래를 갈구했던 시간들 속에서 정작 현재를 잃고 살지는 않았는지 반성하게 된다. 현실적이라는 건 현재에 충실하라는 말이다.


살아가는 이야기, 살아온 이야기 속에 어느덧 10구간도 종료. 전체적으로 9구간과 10구간은 난이도가 거의 없고 평지를 걷는 수준이어서 손쉽게 걸을 수 있다. 그만큼 속도도 빠르다. 11구간 효자길도 하급 난이도의 구간인데 거리는 내시묘역길보다 짧지만 체감상으로는 중하 정도의 난이도랄까. 이전 구간보다는 약간 높낮이도 있고 산길도 있어 조금 시간이 걸리는 구간이다.


처음 이 구간에 접어들면서 마주치는 황당함인데 도로 옆으로 난 길이 끝없이 이어져 있다. 이쪽편의 북한산 자락이 험한 편이어서 산으로 길을 내지 못 하고 할 수 없이 돌려돌려 길을 낸 것이라는 말을 듣고 이해는 갔지만 이건 좀..이라는 생각이 든다. 둘레길도 초반부는 제법 각종 시설이 원칙대로 잘 구비되어 있지만 이 정도쯤 오게 되면 여기저기 부실한 부분들이 눈에 띄는데 '어쩔 수 없나..'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앞으로는 개선이 되겠지라고 기대를 해 본다. 한여름이었다면 이곳을 걷기는 제법 힘들었겠지 싶다.


어느 정도 걸어가면 이 이정표를 만날 수 있는데 사실 여기서부터 제대로 된 구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제법 산길이고 밤골을 지나게 되면서 정말 많은 밤들을(물론 거의 대부분 알맹이는 없는) 볼 수 있다. 가끔 머리 위로 밤송이가 떨어지기도 하니 모자 정도는 챙기도록 하면 좋겠다. 이쪽으로 올라가면 북한산의 등반 코스 중의 하나인 백운대 코스를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전 구간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효자의 길은 멀고도 험한 법인가 제법 산길이다. 일반 도로를 걷다 흙길을 걸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발 밑으로 구르는 돌부스러기나 흙들의 느낌이 포근하다. 맨발로도 걸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흙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 속에 풀들이 나무들이 돌들이 그렇게 뒤로뒤로 스쳐지나간다.


오랜만에 등장하는 계단길이다. 사실 계단은 산행에서 그리 반가운 존재는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하나의 이정표가 될 수 있다. 사람의 손길이 닿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니 많이 지쳤다면 이 계단을 보고 힘을 얻을 수도 있다. 인공물이 하나 없는 산길은 가끔은 막연한 피로를 불러올 때도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똑딱이 카메라는 색감을 잡기가 쉽지가 않다. 내 SLR의 경우는 철저하게 내 세팅으로 되어 있어 잘 나오건 안 나오건 그려려니 하는데 이 녀석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이런저런 코치를 받아가며 색감을 바꾸어 봐도 영 마음에 들지는 않는데.. 그렇다고 기계를 탓할 노릇은 또 아니니...


계곡을 감싸고 도는 다리의 느낌이 또한 포근하다. 날은 덥고 땀은 흐르지만 이런 풍경은 잔잔한 감동을 준다. 사계절의 풍경이 제각기 주는 느낌은 다르겠지만 역시 가을과 겨울의 풍경이 내게는 마음에 와 닿는다. 머지않아 겨울이고 백색으로 물든 계절이 오면 이곳은 또 어떤 느낌과 생각을 던져줄까 미리 생각을 해 본다. 그래도 올해는 둘레길을 걸으며 여름과 초가을 사진이 많아져서 흐뭇하기도 하다. 사진에 늘 겨울만 나오면 그 또한 식상한 일이다.


오늘의 걷기가 거의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다. 조금 더 진행하면 밤골탐방지원센터를 만나게 되고 그곳에서 백운대와 다음 구간으로 그리고 하산 코스로 길이 나뉘게 된다. 갈림길이란 늘 사람에게 선택을 요구하는데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문제다. 온전히 자신의 결심만으로 하나의 길을 택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허나 내가 내린 결정이 능동적이건 수동적이건 결국 그 결정에 책임을 져야 하는 건 자신이다. 가끔 이 단순한 진리를 잊게 되는데 그럴 경우 꼭 문제가 생기곤 한다. 시작이 '나'라면 그 끝도 '내'가 내야 한다.


12구간 충의길을 알리는 문을 만날 수 있다. 충의길은 중급 난이도로 이제까지 걸어온 거리와 시간을 생각하면 이어서 가기는 쉽지 않다. 이 구간은 다음 주 정도에 혼자 와 볼 생각이다. 이곳을 뒤로 하고 내려 와 길을 건너 버스를 타면 연신내역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 내려가는 길은 제법 긴 편인데 휴일일 경우는 오고가는 차들이 많으니 주의하도록 하자. 연신내역으로 이동해 조금은 늦은 점심을 먹고 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시간이 정말 어찌가는 줄도 모르게 빨리 갔다. 

어떤 이는 잠깐 이야기를 나누어도 마치 몇 시간을 이야기를 한 것처럼 피로한가 하면 어떤 이는 몇 시간을 이야기해도 잠깐 이야기 한 것처럼 신선하다. 만나자마자 곧 헤어지고 싶어지는 이가 있는가하면 헤어짐이 아쉬워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는 이가 있다. 살아가는 동안 마주치는 수 많은 사람들 중에 후자와 같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어느 새 이만큼을 왔다. 거리상으로는 절반을 더 걸어온 셈이다. 막막함이 구체화되고 현실이 되니 이루어지는 셈이다. 거북이 걸음이고 황소걸음이지만 목표를 가지고 한 걸음씩 나아가다보면 아예 시작도 안 한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일단 시작하자. 일단 밖으로 나가 걸어보자. 한 걸음.. 그 시작이 절반이고 그 절반이 전부가 된다. 

 

가을입니다. 라고 이제는 이야기를 해도 좋으려나요? 그렇지만 아직도 한낮에는 여름을 쉽사리 놓아버리지 않으려는 계절의 마지막 안간힘이 느껴지네요. 그렇지만 강하게 내리쬐는 햇살도 한여름이 그것마냥 따갑지는 않은 그래서 어쩐지 가는 여름이 아쉽기도 한 그런 계절이 요즘이 아닌가 합니다.

사진은 원어의 의미가 알려주듯 빛의 예술이지요. 그리고 보통 자연의 빛의 변화무쌍함을 가장 많이 느낄 수 있는 시간은 해 뜨기 전과 해 지기 전입니다. 맨 처음의 사진과 바로 위의 사진의 빛이 얼마나 다른지요. 같은 하늘이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렇게 다양한 색으로 보는 이들을 유혹합니다. 게다가 바람마저 불어준다면 그 기분이란..^^

같은 장소에서의 노을도 해가 떨어지는 속도에 따라서 정말 다양한 빛의 변화를 보여줍니다. 사실 이 시점에서 마음에 드는 사진을 잡아내려면 브라케팅 연사가 제일 좋은데 필름 시절에는 한 컷 한 컷이 500원짜리 동전 떨어지는 소리와 비슷한지라 연사란 그저 부유한 이들이나 할 수 있는 사치로 여겨졌지요. ^^

가난한 사진가는 브라케팅은 '아, 그런 기능이 있어!'라고 여기고 스팟 노출로 하늘을 잡는 것이 그나마 뭔가 건져볼 수 있는 기회기도 했었습니다. 물론 디지털 시대가 된 지금은 브라케팅이란 아주 일상적인 작업 중의 하나가 되어 버렸으니 이걸 좋다고 해야할지 사실 이야기하기는 애매합니다. 사진이 쉬워진만큼 소위 건질 수 있는 사진은 필름 시절보다 확실히 줄어들었으니까요.

제가 사진을 좋아하게 된 계기 중 하나는 외로워서였더랬습니다. 사진을 찍고 있으면 혼자라는 느낌이 들지 않아서였지요. 물론 기계 자체에 대한 흥미도 제법 큰 편이지만 뭐랄까 세상사의 번잡함같은 골치 아픈 것들이 사각 프레임 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전혀 생각나지 않았기에 사진에 빠졌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좋은 사진을 찍을 수는 없었죠.

사진에는 사진가가 셔터버튼을 누르는 순간의 감정이 그대로 실려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온 정신을 집중해 네모난 그림을 만들어내고 그 안에 마음을 담아 만들어내는 것이 사진인데 당연히 사진가의 감정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만약 사진에서 그런 느낌을 얻을 수 없다면 온전한 자신의 사진이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닐까요?

아무튼 그런 과정을 겪고 나서야 사진을 좀 더 가깝게 그리고 마주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진을 찍을 때는 온전히 그 시간에 그 장소에서 제가 받은 느낌만을 담아내도록 신경을 씁니다. 그래서 저는 카메라를 들고 어딘가를 나가도 가방에서 전혀 꺼내지 않을 때도 있는데 마음속에 뭔가 불필요한 감정들이 많을 때 주로 그렇게 합니다.

아마 사진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나름대로의 생각들을 가지고 계실텐데 저라는 사람은 이렇다..라는 것을 적다보니 좀 길어졌네요 ^^; 자, 이번 사진들은 코닥의 수프라라는 필름입니다. ISO100인 이 필름은 후지의 리얼라와 함께 네가티브 필름의 쌍벽이랄까..아무튼 그런 느낌을 주는 좋은 필름입니다. 코닥 특유의 붉은 기운을 잘 살리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필름이지요. 후지의 푸른색이냐 코닥의 붉은색이냐는 역시 그날의 분위기에 따라 달라집니다. ^^


Canon Eos-1Vhs, EF 28-70mm f/2.8LKodak Supra, LS-40

가끔 제 사진에 보면 위와 같이 장비를 적어 두는 경우가 있는데요. 이건 제 기억을 남겨두자는 차원도 있고 혹시 어떤 장비가 사용되었는지 궁금해하시는 분이 있을까 싶어 적어 두는 것입니다. 순서대로 설명드리면.. 

Canon Eos-1Vhs: 카메라 바디의 제조사가 캐논이고 Eos-1Vhs라는 바디라는 이야기입니다.

EF 28-70mm f/2.8L: 사용한 렌즈의 이름인데 해당 제조사의 공식 명칭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2개 이상의 렌즈가 사용될 때도 많은데 보통 1개만 대표적으로 적어 둡니다. 

Kodak Supra: 사용한 필름의 제조사와 보통 부르는 별칭을 적어 두었습니다.

LS-40: 제가 사용한 니콘의 쿨스캔 필름 스캐너의 이름입니다.



며칠 전만 해도 한낮의 태양이 따가울 지경이었는데 어느새 아침에 집을 나설 때 부는 바람은 '춥다'는 생각마저 들게 할 정도네요. 계절의 흐름 특히 우리네 24절기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제가 '백로' 였습니다. 한자로는 白露인데 하얀 이슬이라는 의미로 농촌의 농작물에 하얀 이슬이 맺히는 것에서 유래했다고 하네요. 요즘은 아쉽게도 점점 가을이라는 계절이 짧아지고 있지요. 

여름과 겨울은 길어지고 간절기인 봄과 가을이 짧아진다는 것은 한편에서 생각해보면 이젠 날씨조차 양극단으로 치닫는 것 같아 아쉽기도 합니다. 올 겨울은 늘 그렇듯이 여느 때보다 더 춥다고 하니 미리미리 준비들 하셔야할 거에요. 옆구리 허전한 분들은 커다란 곰인형이라도 하나 구비하시길...(제 것도 하나 사주시면....)

물론 가을이 오고 바람이 슬슬 차지기 시작하면 저는 제철 만난 듯이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는데 겨울이 오면 그 방황이 절정에 다다라서 난리도 아니긴 합니다. 아마 겨울 사진은 많이 보실 수 있을 거에요. 여름 사진은 사실 거의 없죠..^^

아무튼 하나의 계절을 보내는 시기인만큼 또 다른 계절의 준비도 해야 하는 그런 시기가 왔습니다. 오랜만에 책상 정리도 해 보고 먼지 쌓인 카메라도 햇볕에 말려도 봅니다(D700은 지난 달 말로 무상보증기간이 만료가 되어서 이젠 조심조심 써야 합니다..;) 여름엔 사실 거의 카메라를 꺼내지 않는지라 애들이 아주 뽀송뽀송하네요..;;

보통 날이 추워지면 사진을 잘 안 찍는데 전 유난히 추운 날 찍은 사진이 많습니다. 겨울 태생이라 겨울에 적응을 잘 하는 것인지..아니면 고통을 즐기는 악취미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날이 추워진다는 것은 역마살이 도진다는 증거이니 나름 반가운 일이지요. ^^

이 사진들은 NPH400이라는 필름으로 찍은 건데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네요. 참 예전에는 필름마다 들고 다니면서 이럴 때는 이 필름을 저럴 때는 저 필름을 쓰는 맛이 있었는데 디지털로 넘어오고나서 그런 손맛이 싹 사라져버려 너무 아쉽습니다.. 뭐 그렇다고 요즘 필름카메라를 쓴다 해도 일단 필름이 없으니 이젠 다시는 되돌리기 힘든 추억이 되어 버렸지만요..


Canon EOS-1Vhs, EF 28-70mm f/2.8L IS USM, NPH400, LS-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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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추도 지난 지 2주가 넘었습니다. 23일이면 우리 24절기 중 '처서'지요. 더위가 물러간다는 절기입니다. 올 여름은 유난히 더워서였는지 참 견디기 힘들었는데 어느샌가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찬기운도 느껴집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가을입니다. 가을은 '아, 이제 가을인가?'라고 생각할 즈음이면 이미 가고 없는 특이한 계절입니다. 달로 따져보면 10월 정도가 그나마 가을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올해는 뭐랄까요 -이제껏 살아오면서 그렇지 않은 적이 없겠지만- 유난히 스펙타클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생이 여러 번 바뀌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아직 올해가 몇달이나 더 남아 있으니 -벌써 이런 말을 하게 되다니요- 어떤 일들이 더 생길지 참 흥미진진해지기도 합니다.

발이 아프다는 핑계아닌 핑계로 사진을 찍으러 밖을 다니지는 못 하고 있는 요즘입니다. 덕분에 북한산 일정도 가을이나 되어야 갈 수 있을 것 같고요. 사실 사진이라는 게 어디를 가야 찍을 수 있는 건 아니지요. 이 또한 게으름과 나태함을 감추기 위한 핑계가 아닐까 합니다. SLR이 무겁다고 서브카메라까지 들여놓고서 그놈 역시 제습함에서 쿨쿨자고 있으니까요..

마음은 여전히 허전합니다. 가을이 오고 그 가을이 깊어가면 그 허전함은 더해지겠지요. 살아가면서 가장 가까운 벗이 바로 이 허전함이라는 녀석이 아닐까요. 이 녀석이 항상 곁에 있으니 떨쳐버리고 싶어 이런 일도 저런 일도 해 보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올해는 연초부터 달라붙은 이 녀석이 영 떨어질 줄을 모르고 더 품으로 파고들고 있으니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모르겠네요.

세월은 가고 나이는 먹어가고 추억은 쌓여갑니다.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가게 될지 전혀 알 수 없는 삶인데도 우리는 너무나 당연스럽게 내일을 이야기하고 다음 주를 이야기하고 내년을 이야기하며 살아가지요.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이제까지 살아온 날들 중에 혹은 만났던 사람 중에 혹은 가졌었던 물건 중에... 딱 한 가지만 그대로 되돌려준다면 어느 것을 고르시겠습니까?


Nikon D100, AF-S Nikkor ED 17-35mm f/2.8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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