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새 올 한 해도 달력 마지막 장만 남기고 있다. 시간이 흐르는 물과 같다는 이야기를 굳이 꺼내지 않아도 세월이라는 단어의 한자를 곱씹어보지 않아도 우리네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인지 아마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또 절실하게 느끼고 있지 않을까? 돌아보면 매 해마다 겪는 일들이 새롭다. 전에는 겪을 수 없었던 아니 관심조차 갖지 않았던 일들이 내게 직접 일어난다. 하지만 한편 생각해보면 이 새로움들이라는 것이 다른 어떤 이들에게는 이미 겪은 일일 수도 있는 것. 결국 우리네 삶이란 대개 비슷한 경험들을 공유하며 서로 엮이는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겨울을 좋아하고 겨울에 어디건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나지만 올해는 예전처럼 그렇게 자주 밖으로 돌아다니지는 못한다. 아직 혼자 잠드는 것이 걱정스러운 어머니때문이다. 올해는 내게 '가족'이라는 단어를 가슴 시리게 새겨주었다. 그리고 '삶', '생명'이라는 단어를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고 고민하게 해 주었다. 또 하나 얻은 것이 있다면 이 짧은 삶 속에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라는 것. 부귀영화를 좇으며 살아갈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들은 정말 봄날 눈녹듯 사라져버리는 허상 자체다. 인간으로서 세상에 태어나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이제는 더 고민하게 되었다.


자연 앞에 서면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작고 하찮기 그지 없다. 여행을 통해 배울 수 있는 큰 교훈 중의 하나인데 요즘은 돌아다니지를 않으니 예전 사진첩을 꺼내어 들춰보는 것으로 대리만족을 하고 있다. 예전에 찍은 사진들을 지금 다시 보면 그 때 찍었던 느낌과 생각과는 또 다른 느낌 그리고 또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어서 좋다. 물론 사진에 반영되는 이미지는 셔터버튼을 누르는 순간의 감정과 당시의 마음상태가 고스란히 찍혀 나오지만 과거의 그 감상을 현재에 극복할 수 있다면 같은 사진으로 두 장의 서로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사진과 여행, 이 두 가지가 정말 축복된 것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아무튼 정신없이 분주하던 한 해의 큰 일들을 마무리하고 이제는 나의 일을 찾기 위해 조금씩 나아가는 요즘이다. 사람과 사람의 인연도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듯히 사람과 일의 인연도 전혀 생각지도 않게 마주치는 인연이 있으리라 생각해본다. 그리고 새로운 인연과 만나게 되는 날. 다시 카메라를 들고 겨울을 걸어보고 싶다. 



겨울은 내게 매년 어김없이 커다란 기억의 선물 보따리를 안겨 주곤 했다. 올 겨울은 아직 뭔가 크게 기억이 될만한 일은 없지만 1월과 2월이 남아 있으니 무슨 일이 일어날지 한편에서는 기대도 되고 한편에서는 불안한 마음도 없지는 않다. 겨울은 무채색의 계절이고 무채색과 어울리는 사진은 역시 흑백이다. 흑백사진은 언뜻 보면 색이 없는 것같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컬러사진보다 더 많은 빛의 흐름을 발견할 수 있다. 디지털로 넘어오면서 흑백현상이라는 단어가 사라져버리고나서는 좀처럼 흑백 사진을 찍지 않게 되지만 그래도 역시 사진은 흑백..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분명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컬러인데 왜 흑백이 주는 느낌이 더 강할까 생각을 해본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흑백 사진을 찍을 때 좀 더 신경을 쓰는 것도 한 원인이 아닐까 한다. 흑백사진을 찍을 때는 소위 존 시스템을 머릿속에서 부지런히 계산해야 한다. 여기는 얼마고 저기는 얼마니 전체적으로 얼마나 나오겠다..이런 계산을 하고 구도를 잡고 조리개와 셔터 속도를 조절하고 하는 그 모든 과정이 순식간에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사실 흑백 사진을 찍는 일은 꽤나 고된 작업이기도 하다. 


요즘이야 그냥 RAW모드로 차라락 찍어 버리고 집에 와서 컴퓨터로 수정을 하면 되니 예전의 그런 고됨이 없어 편리할지는 몰라도 왠지 사진에 영혼이 없는 느낌이 든다. 막말로 쨍하고 화려한 사진은 많지만 마음에 와 닿는 사진은 갈 수록 적어진다는 말이다. 사진을 마우스로 이리저리 클릭해서 만들어낸다는 게 여전히 어색하지만 이것도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면 받아들여야 할텐데 그게 쉽지가 않다. 

하지만 세상이 변화하고 있는데 계속 제자리에 앉아서 '디지털 세상은 반갑지 않아. 아날로그가 제일이야'라고 외쳐보아야 그저 과거에 집착하는 것일뿐이다. 디지털 시대에 어울리는 아날로그를 찾아야 그것이 제대로 아날로그를 즐기는 법이다. 나는 여태 이런 생각은 하지 않고 변화된 세상이 낭만이 없네 하며 팔짱만 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래서는 그저 과거에 매여 사는 꼴밖에 되지 않는데도 말이다. 마찬가지로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에 영혼이 있네 없네 하는 것도 같은 속좁음이다. 그래도 옛것이 좋아라고 하기보다 좋은 옛것을 요즘의 것과 어울리게 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흑백 사진은 인화물을 받아 들고 그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에 뭔가 쿵하고 내려 앉는 것들이 있다. 물론 이 모든 느낌들이 나 혼자만 느끼는 그런 것이라 해도 나는 그런 느낌이 좋다. 현상된 슬라이드를 라이트박스에 비추어 보는 일보다 흑백 사진이 인화된 인화지가 더 반가운 것이 내 사진 생활의 특징이라면 특징이었다. 지금도 방 한 구석에 가지런히 쌓여 있는 필름 보관함과 인화된 사진 앨범을 열어보면 그렇게 오래된 내 추억들이 하나 둘 현실처럼 느껴지곤 한다. 분명 2차원의 종이인데도 말이다.

디지털로 넘어온 지금도 흑백에 대한 미련은 여전하다. 하지만 아직 디지털 카메라로 적극적으로 흑백 사진을 만들어본 적은 없다. 다음에 카메라를 들고 나가면 온전히 흑백만으로 찍어볼 생각이다. '디지털이니 현상도 안 되고 아날로그의 느낌이 없어!' 라고 계속 이야기하는 것보다 그래도 이 녀석들을 가지고 이전의 느낌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를 연구해보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RAW모드에도 흑백 모드가 있다. 단순히 컬러 사진을 흑백으로 변환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흑백으로 이미지를 잡아내는 것인데 아직 이 모드는 사용해본 적이 없다.

디지털로도 이전의 필름 카메라가 만들어낸 느낌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도구가 아니라 그 도구를 이용하는 사람이다. 만약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필름 카메라로 만들어냈던 그 느낌을 만들어낼 수 없다면 기계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내가 변한 것일 것이다. 과거가 아름답고 추억이 아름답다고 느끼면서 현재에는 그런 기억을 만들려 하지 않는 것 역시 내가 변한 것일뿐이다. 바라봐야 하는 것은 더 이상 지난 기억이 아니라 지금 눈을 뜨고 바라보는 오늘의 하늘이다.


Leica M6, Summicron 35mm f/2.0 asph, Ilford PanF, LS-40



겨울 바다는 마치 산처럼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수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다녀간다. 각각의 사연들로 가득 메워진 겨울 바다는 사람들이 떠난 후에도 그 사연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이곳저곳에 새겨 놓고 다시 돌아올 그들을 기다린다. 세월이 지나 다시 바다를 찾는 이들은 때로는 처음 그 바다를 함께 찾은 사람과 함께 일 수도 있고 때로는 둘이 아닌 혼자가 된 이일 수도 있지만 바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그네들을 혹은 그를 바라볼 뿐.

지날 것같지 않던 시간들이 벌써 이렇게 흐르고 있다. 잊힐 것같지 않은 기억도 서서히 옅어져 간다. 그 시간 속에서 누군가는 다른 인연을 만나 새로운 미래를 꿈꾸고 누군가는 과거의 인연을 간직한채 고독한 걸음을 걷고 누군가는 인연이라는 끈조차 놓아버린채 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바다 앞에 서면 그 모든 복잡하고 가슴 아프기만 한 일들이 모래 사장에 부딪혀 부서지는 물방울처럼 순간의 기억으로 터져 나가버린다. 순간 나는 모든 감정을 잊게 된다.

살 속으로 파고드는 겨울 바닷바람과 부서지는 파도 속에서 우리네 삶의 혹은 인연에서 겪는 희로애락애오욕이라는 것이 결국은 찰라의 감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지만 막상 그 각각의 감정들을 온전히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던 순간에는 그것이 마치 삶의 전부인양 그 순간에 몰입할 수밖에 없다. 또 그것이 사람의 솔직한 모습이기도 하고...

하지만 그 몰입이 미래의 긴 시간을 담보로 한 것이라는 것을 나중에서야 깨닫게 되고 결국 시간이 많은 것을 해결해준다는 아주 흔한 문장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것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구태여 부정하려들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또한 삶을 순리대로 살아가는 방법 중의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겨울은 늘 이렇게 차가움 속에서 머리를 맑게 해 주는 매력이 있다. 여름날의 뜨거움 속에서는 잠시의 판단조차 흐려지지만 겨울의 차가움 속에서는 조금은 냉정하지만 스스로 납득할만한 판단을 할 수가 있다. 그것이 겨울이 내게 주는 또 하나의 선물이 아닐까 생각을 해 본다. 12월도 어느덧 중반...곧 새해다. 언제나 그렇듯이 한 해 한 해 그 해가 가장 격변의 한해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매해 겪다보니 내년엔 올해보다 더 대단한 변화가 있을 거라는 기대반 걱정반의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요 며칠 새 아니 몇달 사이 평생 아팠던 것보다 더 많이 그리고 자주 몸에 이상이 생기다보니 마음만 조급해진 모양이다. 시간이란 것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것이라면 그 시간을 앓아 누워서 보낸다는 것은 그만큼 나아갈 길을 가지 못 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압박을 한 탓이기도 하다.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역시나 좋은 점이 없다. 반성과 질책은 분명 다른 것이니까...

아무튼 시간이 갈 수록 나를 지탱할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내가 나일 수 있도록 해 주는 것... 그것이 사람이고 내 반려자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지금의 내게는 무엇이 나를 온전한 나로 버틸 수 있게 만드는 것일까...

그래도 아직은 산에 오를 수 있고 바다를 볼 수 있고 사진을 찍을 수 있고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된다. 

홀로 산에 오르고 홀로 바다를 보고 홀로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것에 적응만 하면 될 일이다. 

글은 애초에 혼자 쓸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O형은 생각보다 적응을 잘 하는 편이다.


Nikon F5, Ai Nikkor 105mm f/1.8S, Kodak 100SW, LS-40 film scan






어제오늘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내일도 또 눈소식이 있군요. 일전에 말씀 드렸지만 전 겨울 사진이 무척 많은 편인데..아마 3분의 2이상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원래 계획은 오늘 인왕산 기차바위를 구경가는 거였는데 이런 날씨에 어디 가냐는 어머니 호령에 포기하고 말았네요. 인왕산은 그리 높지도 않고 풍광도 좋은 편이라 조만간 올라가볼 생각입니다. 


제목에 적은 이야기는 특별한 것은 아니고 "조금 있으면 결혼하는 애가 '이 사람과 함께라면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하는 건 쉽지만, 이 사람과 함께라면 불행해져도 열심히 살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결혼할 결심을 한거야.'" 라는 이야기였습니다. 행복을 함께 나누는 것이 어려울까 불행을 함께 나누는 것이 어려울까 생각을 해 봅니다. 사실 쉽지는 않은 일이지요. 

제가 저 이야기에서 본 것은 "불행해져도 열심히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부분이었습니다. 사실 살다보면 온갖 일을 겪기 마련인데 불행이 닥쳤을 때 그래도 이 사람과 함께라면..이라고 생각하고 삶에 집중하고 열심히 할 수 있다면 그 불행마저 행복으로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예전에도 그랬겠지만 요즘은 결혼을 하려면 집도 있어야 하고 차도 있어야 하고 혼수는 얼마에 등등 복잡한 것들이 참 많지요.. 온전히 사람만을 보고 맺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이런 생각은 비현실적이고 세상을 모르는 어리석음으로 치부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제가 아는 분들 중에는 정말 "없이" 시작한 분들이 많습니다. 결혼할 때 통장 잔고가 100만원이었던 분도 있고 남편이 직업도 없이 공부만 하는 학생인 분도 있고(몇 달 전에 취직을 했다고 하더군요).. 그분들의 선택에는 온전히 사람만이 있었을 뿐이었지요. 사람이 아닌 외적인 부분을 보고 만나게 되는 관계는 그 외적인 부분이 사라지게 되면 금방 식기 마련입니다. 아니 애초에 따스한 온기 자체가 없었겠지요. 아무튼 참 큰 용기를 가진 아가씨라는 생각이 들면서 앞으로 참 잘 살아가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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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라이카R로 찍은 것인데 아마 R의 사진은 올라온 적이 없지 않나 싶네요. 지금은 R시리즈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유물이 되었는데(물론 렌즈는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지만요) 라이카가 그렇게 우수하다는 렌즈 성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SLR에서 참패를 한 것은 꽤나 재미있는 부분입니다. 물론 디지털로 넘어오면서는 S라는 괴물을 만들어냈지만요.. 사견으로는 라이카는 역시 M이 나은 것 같습니다. 

Leica R6.2, Summicron-R 50mm F2 , Kodak Supra, LS-40 


사람인지라 마음이 늘 한결같을 수는 없지 싶다. 이것도 나약함에서 오는 변명이라면 어쩔 수 없으려나 싶지만...

살다보면 슬럼프를 겪는 때도 있고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하며 앞으로 죽죽 달려가는 때도 있는 것을 알면서도

가끔은 푹 주저 앉고 싶기도 하고 그렇게 주저 앉아 있을 때 누가 손을 내밀어 일으켜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나름 꿋꿋하게 죽 달려오다가 철퍼덕 넘어졌는데... 마음이란 역시 간사해서 나약해질 때는 끝을 모르고 나약해지나보다.

유난히 정에 약한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럴 땐 곁에 누군가 있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커진다.

하지만 내가 힘들 때 누군가 곁에 있다는 것은 상대에게도 그만큼의 짐을 지워야 하니 역시나 이기적인 생각이다.

아무튼 요 며칠새 정신이 달에 갔는지 별에 갔는지 모르겠다. 시간은 꽤나 빨리 지나가는데 일상은 뭔가 어긋난채 돌아간다.

이럴 때는 그저 숨을 죽이고 웅크리고 앉아서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지 싶다. 물론 가능한 빨리 정신을 수습하고 일어서야 하지만...


Leica M6, Summicron 35mm f/2.0 asph, Kodak EBX, LS-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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