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은 모두 희곡이기 때문에 한 번 읽어볼 양으로 책을 펼쳤다가도 쉽게 읽히지 않는 경험을 하고 나면 그저 제목만 기억할 뿐 내용은 아무래도 좋다는 식이 되기 십상이다. 내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아 햄릿은 그나마 서평을 쓰기 위해 완역판을 읽었지만 나머지 3편은 읽지 못했었다. 그리고 이번에 큰 마음 먹고 시도한 작품이 맥베스다.

4대 비극이라 불리는 작품들 중에 심리묘사가 가장 잘 된 작품을 꼽으라면 나는 '맥베스' 이책을 꼽는다. 햄릿을 꼽지 않은 이유는 그 머뭇거림이 때로는 구차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차라리 맥베스의 과단성에 조금 더 점수를 준다. 물론 이 생각은 현재의 내 심리상태를 반영한 것이니까 시간이 지나면 맥베스의 과단성을 무모함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맥베스에는 비현실적인 공간과 시간과 대상이 존재하는데 바로 마녀들의 존재다. 그리고 이 마녀들은 극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 마녀들의 노래 중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아름다운 것은 추한 것, 추한 것은 아름다운 것. 안개 낀 더러운 대기 속을 날아다니자."

아름다운 것은 추한 것이고 추한 것은 아름다운 것이라니.. 한번에 와 닿지는 않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느 순간 이 문장이 확 와닿을 때가 있다. 이 문장만을 떼어 놓고 보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지만 맥베스 전편을 읽어 나가다 보면 이 문장이 적절하게 사용되었다는 느낌이 온다. 

맥베스의 감정 변화, 맥베스 부인의 감정의 기복.. 첫장에 등장하는 충성과 반역, 마지막장에 등장하는 충성과 반역.. 아름다운 것이 곧 추한 것이고 추한 것이 곧 아름다운 것이라는 문장을 줄거리를 통해 보여주고 있었고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이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허나.. 이 문장은 이 희곡을 읽는데서 그치기에는 왠지 아깝다. 어쩌면 하루하루의 나의 삶 혹은 타인의 삶과 세상의 번거로움에 빗대어 보아도 크게 어색하지 않은 문장이다. 아니 바로 우리네 삶의 현장에서 이 문장은 1초도 거르지 않고 적용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특히나 '이익'이 끼어들게 되면 아무리 숭고한 이상과 생각일지라도 그것이 나의 이익과 어긋나면 곧 추한 것이 되고 비열하고 더러운 생각과 행동일지라도 나의 이익에 도움이 되면 아름다운 것이 되는 경우를 우리를 직접 삶 속에서 겪고 있지 않은가.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국가의 존망이 달린 일까지.. 그 영역은 무한대에 가깝지 싶다.

세상에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이 있을까..라는 의문을 우리는 많이 가지지만 그에 대한 뚜렷한 대답은 하지 못 한다. 그러나 세상에 상대적인 진리라는 것이 있을까? 라고 묻는다면 누구나 어렵지 않게 긍정할 수 있을 것이다. 맥베스는 그런 상대적인 진리 안에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인간의 심리를 꿰뚫고 있어 읽는내내 가슴이 찔리는 느낌이다. 

내면에 감추어둔 욕망을 비밀을 꿰뚫림당하면 불편한 법이다. 맥베스는 그런 불편함을 독자들에게 있는 그대로 선사한다. 장르는 다르지만 이전의 하루키가 그랬었고 그때의 하루키의 글에 나는 푹 빠지기도 했었다. 물론 지금은 그 궤도를 많이 벗어난 모습에 관망 중이긴 하지만..

번역은 제법 마음에 든다. 뭐랄까 상황상황의 격정적인 감정을 잘 살리고 있어 책을 읽어내려가는 동안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또한 상대적인 것이니 번역자의 번역이 지나치게 극적이다라고 느끼는 분도 계시리라..

이제 4대 비극 중 햄릿과 맥배스에 대한 감상이 마무리됐다. 곧 이어 올라갈 글은 '오셀로'다 이번에는 민음사의 번역이다.



이번에 읽게된 책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입니다. 4대 비극의 하나로 꼽히지만 사실 작품의 이름만 들어왔거나 TV나 영화로 대략적인 내용만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이 보통이지요.  그나마 대중적인 것은 로미오와 줄리엣이고 햄릿의 경우는 제목은 잘 알려져 있지만 정작 내용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번에 다행스럽게도 완역판이 출간되어 셰익스피어 본래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햄릿은 아시다시피 희곡입니다. 따라서 책 전체는 대화로 이어져 있죠. 개인적으로는 소설이나 수필을 쓰는 것보다 대화로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면에서 셰익스피어(실존 논란은 다루지 않겠지만)의 문학적인 재능은 대단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

셰익스피어가 살던 시대의 남녀관은 오늘날과는 많이 다르지만 아무튼 많이들 들어본 대사 중의 하나입니다. 자신의 어머니를 비난하는 장면에 사용된 이 대사는 요즘은 본래 의미와 다르게 패러디용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기는 합니다만..이 말이 나오게 된 배경과 이후의 햄릿의 행동과 대사들을 생각하면 쉽게 패러디에 사용할 표현은 아닌 듯 합니다.

햄릿은 마지막까지 여자들에게 극단적인 실망을 하게 됩니다. 모친에 대한 실망을 전체 여자라는 범주로 확대를 한 것이랄까요. 결국 오필리아도 그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 하고 죽음을 맞게 되죠.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햄릿과 오델로는 여자에 대해 그다지 좋은 감정을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마치 니체의 여성관과도 비슷한 경멸조의 대사들이 종종 비치죠. 사람에 따라서는 너무 극단적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부분만이 아닌 큰틀로 파악하면 될 것 같습니다. 물론 니체의 경우는 좀 다르지만요.


햄릿은 우유부단의 극치였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바는 햄릿은 우유부단하고 결단력이 없는 인물입니다. 'To be or not to be'로 시작되는 연극 상연 전 장문의 독백은 그의 우유부단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지만 전체 대사를 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내면의 고민을 적극적인 행동으로 승화시킨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 어떤 일이건 결의를 하기 전에는 그만한 고뇌와 번민의 시간은 있는 것이고 그만한 고뇌없이 행해진 일이라면 차라리 즉흥적인 것이 아닐까요.

처음 부왕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마지막 장면에 이르기까지 햄릿은 부왕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고 그것을 완수합니다. 중간중간에 나오는 고민과 방황은 오히려 본래의 마음을 숨기기 위한 가장이 아니었나 생각이 들 정도로 햄릿의 복수극은 철저하게 이어집니다. 우유부단이라는 말은 차라리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적당한 것이 아닌가 저는 생각이 됩니다. 




햄릿의 고민은 상당히 깊습니다. 그가 던지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단지 그만의 고민이 아닌 인간으로 살아가는 우리 역시 똑같이 고민해봐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셰익스피어는 햄릿의 독백을 통해 상당히 심오한 인간 본성과 그 방향에 대해 나름의 의견을 제시하고 있고 동시에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바른 것이라는 그만의 가치관까지 제시하고 있다는 점을 여러 번 문장을 새기면서 알 수 있었습니다. 물론 작가의 의도가 진리인 것은 아니지만 생각할 '꺼리'가 주어진다는 것이 우리가 문학작품을 읽음으로써 얻는 또 하나의 보물이 아닐까 합니다.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라는 대표적인 인용구 다음의 문장들입니다. 무려 한 장이 넘게 햄릿의 독백은 이어지는데 햄릿 전체를 관통하는 고뇌와 번민이 모두 담겨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너무도 짦군요. 여자의 사랑같이

제목으로 제가 삼았던 이 문장은 사실 한 문장이 아닌 햄릿과 오필리아의 대화입니다. 첫 번째 대사는 오필리아의 두 번째 대사는 햄릿의 대사입니다. 여자에 대해 어쩌면 극도록 경멸적이 되어 버린 햄릿의 자조적인 대사이기도 하죠. 이 대사에 대해 오필리아는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사실 햄릿과 오필리아의 많은 대화들을 보면 햄릿은 내뱉듯이 이야기를 하고 오필리어는 적극적인 반격(?)을 하지 않습니다. 순결하고 정숙한 아름다움을 모두 가지고 있는 이상적인 여성이라고 할 수 있는 오필리아가 왜 뒤틀린 햄릿의 생각들에 구원의 메시지를 주지 않았는지는 조금 더 고민을 해봐야할 것 같습니다. 차라리 그런 면에서는 리어왕이 좀 더 구체적으로 구현이 되었다는 생각입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매력적인 작품

햄릿은 상당히 양이 적은 편입니다. 집중해서 읽으면 반 나절이면 충분히 읽을 수 있고 내용 역시 어렵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안에 담겨 있는 고민거리는 상당히 많아서 책을 읽고난 후에도 한참의 여운이 남습니다. 저는 보통 이런 책은 한 번 가볍게 읽고 묻어 두었다가 기억이 사라질 즈음해서 다시 읽습니다. 이전의 독서의 편견을 비우고 새로운 해석을 하기 위함인데 햄릿 역시 그럴만한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햄릿이 쓰여진 시기를 생각하면 내용이 진부하고 따분할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웬만한 소설들보다 오히려 매력적인 책입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 희곡의 특성을 감안해서 조금 두께가 늘어나더라도 장별로 확실하게 구분이 지어진 편집이 되었으면 좋았겠다는 점 그리고 글자 크기가 면마다 일정하지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데 편집 상 그런 배려를 한 것이라면 이유를 명시해주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합니다. 또 하나 욕심이라면 햄릿과 같은 책은 평생 소장판으로 가치가 있는데 소장용 양장본이 나와 주면 어떨가 싶기도 합니다. 

한 동안 외부 리뷰를 많이 했는데 시간에 쫓기듯이 책을 읽어야 하는 점이 많이 아쉽네요. 한 권 더 신청을 해 둔 것이 있기는 한데 아무튼 그동안 리뷰를 위해 묵혀만 두고 있던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다시 꺼내 들어야겠습니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 코헬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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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잉크는 일단 자부심이 대단해보입니다. 블랙이라는 문구도 없이 'carbon' 이 한 단어뿐입니다.



전반적인 잉크의 느낌은 점성이 제법 높습니다. 잉크가 번지지 않고 한곳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입니다.



Brause 361입니다. 워낙 많이 써서 닙이 다 닳았네요. 수명이 그리 길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잉크의 색을 보세요.



제가 사용해 본 검정 잉크 중에서 이렇게 진하게 나오는 잉크는 처음이네요. 글은 햄릿이 자기를 버린 것을 탓하는 오필리어에게 하는 대사 중의 한 부분입니다. 원래 자기 성질이 그 모양이라 당신을 사랑한 적이 없다고 하는군요..


몽블랑이 잉크 흐름이 좋은 덕에 빡빡한 카본도 이어 쓰는데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만 굵기 적응이 안 되어서 들쑥날쑥합니다. 세필 펜에 카본을 넣었더라면 자연스러운 이어쓰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까렌다쉬 잉크는 세 병이 있는데 가장 놀란 잉크는 이 카본입니다. 물론 블루 스카이의 경우도 상당한 진함을 보여주긴 했지만 이 잉크만은 못합니다. 진하기로 말하면 정말 최고가 아닐까 싶습니다. 진한 검정으로 유명한 오로라는 이 잉크에 비하면 흐릿한 수준이고 몽블랑이나 파커 퀸크는 물 빠진 검정 수준이 되어 버립니다.. 아직 누들러 잉크는 써보지 않아 비교는 할 수 없지만 카본을 따라오기는 어렵지 않을까..추측만 해봅니다.

까렌다쉬 잉크가 상당한 퀄리티를 보임에도 역시 높은 가격과 30ml라는 적은 양은 쓰는 이에게 제법 부담을 줍니다. 그럼에도 종이 위에 표현되는 색을 보고 있자면 그 비용이 크게 아쉽지는 않을 듯합니다. 또 무척이나 무거운 잉크병은 문진으로 쓰기에도 아주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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