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바다는 마치 산처럼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수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다녀간다. 각각의 사연들로 가득 메워진 겨울 바다는 사람들이 떠난 후에도 그 사연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이곳저곳에 새겨 놓고 다시 돌아올 그들을 기다린다. 세월이 지나 다시 바다를 찾는 이들은 때로는 처음 그 바다를 함께 찾은 사람과 함께 일 수도 있고 때로는 둘이 아닌 혼자가 된 이일 수도 있지만 바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그네들을 혹은 그를 바라볼 뿐.

지날 것같지 않던 시간들이 벌써 이렇게 흐르고 있다. 잊힐 것같지 않은 기억도 서서히 옅어져 간다. 그 시간 속에서 누군가는 다른 인연을 만나 새로운 미래를 꿈꾸고 누군가는 과거의 인연을 간직한채 고독한 걸음을 걷고 누군가는 인연이라는 끈조차 놓아버린채 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바다 앞에 서면 그 모든 복잡하고 가슴 아프기만 한 일들이 모래 사장에 부딪혀 부서지는 물방울처럼 순간의 기억으로 터져 나가버린다. 순간 나는 모든 감정을 잊게 된다.

살 속으로 파고드는 겨울 바닷바람과 부서지는 파도 속에서 우리네 삶의 혹은 인연에서 겪는 희로애락애오욕이라는 것이 결국은 찰라의 감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지만 막상 그 각각의 감정들을 온전히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던 순간에는 그것이 마치 삶의 전부인양 그 순간에 몰입할 수밖에 없다. 또 그것이 사람의 솔직한 모습이기도 하고...

하지만 그 몰입이 미래의 긴 시간을 담보로 한 것이라는 것을 나중에서야 깨닫게 되고 결국 시간이 많은 것을 해결해준다는 아주 흔한 문장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것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구태여 부정하려들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또한 삶을 순리대로 살아가는 방법 중의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겨울은 늘 이렇게 차가움 속에서 머리를 맑게 해 주는 매력이 있다. 여름날의 뜨거움 속에서는 잠시의 판단조차 흐려지지만 겨울의 차가움 속에서는 조금은 냉정하지만 스스로 납득할만한 판단을 할 수가 있다. 그것이 겨울이 내게 주는 또 하나의 선물이 아닐까 생각을 해 본다. 12월도 어느덧 중반...곧 새해다. 언제나 그렇듯이 한 해 한 해 그 해가 가장 격변의 한해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매해 겪다보니 내년엔 올해보다 더 대단한 변화가 있을 거라는 기대반 걱정반의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요 며칠 새 아니 몇달 사이 평생 아팠던 것보다 더 많이 그리고 자주 몸에 이상이 생기다보니 마음만 조급해진 모양이다. 시간이란 것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것이라면 그 시간을 앓아 누워서 보낸다는 것은 그만큼 나아갈 길을 가지 못 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압박을 한 탓이기도 하다.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역시나 좋은 점이 없다. 반성과 질책은 분명 다른 것이니까...

아무튼 시간이 갈 수록 나를 지탱할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내가 나일 수 있도록 해 주는 것... 그것이 사람이고 내 반려자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지금의 내게는 무엇이 나를 온전한 나로 버틸 수 있게 만드는 것일까...

그래도 아직은 산에 오를 수 있고 바다를 볼 수 있고 사진을 찍을 수 있고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된다. 

홀로 산에 오르고 홀로 바다를 보고 홀로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것에 적응만 하면 될 일이다. 

글은 애초에 혼자 쓸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O형은 생각보다 적응을 잘 하는 편이다.


Nikon F5, Ai Nikkor 105mm f/1.8S, Kodak 100SW, LS-40 film scan






한때는 연탄은 우리네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필수품이었다. 연탄이 없으면 추운 겨울날을 보낼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오래 전 기억 속에서 떠올려보는 그런 존재가 되었다.

문득 나를 둘러 싼 주변에서 사라진 것들은 무엇이고 새롭게 얻은 것은 무엇일까 생각을 해 본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것이 있는가 하면 시간이 흘러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아 억지로 사라지게 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얻는 것이 있는가 하면 시간이 흘러도 좀처럼 얻을 수 없어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어떤 것을 잃고 어떤 것을 얻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을 하지만 "자연스럽게" 잃고 얻는 것들에 대한 생각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

'욕망'이 '자연'에 앞서는 것이 우리네 사람의 본성이지 싶다. 

하지만 때로는 그저 시간의 흐름에 몸과 마음을 던져보는 것도 좋으리라 싶다.

'무엇'을 얻고 잃는 것에 몸과 마음을 집중하지 말고 그저 흘러가는대로 놓아두면 어떨까..

굳이 노자의  '上善若水"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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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을 담은 필름은 RDPIII이라는 녀석입니다. 시중에는 '프로비아'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후지의 슬라이드 필름이죠.

후지의 슬라이드는 프로비아와 벨비아(RVP)가 유명한데 벨비아는 ISO가 50인 특이한 필름이죠 

이 두 필름은 아마 올해말에 모두 단종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오래 전 많은 추억과 이야기들을 만들어 준 필름도 시간이 흐르면서 제 의지와 관계없이 사라져버리네요..

시간되면 슬라이드 필름 이야기를 한 번 써볼까 싶기도 하네요..

사진 윗부분은 슬라이드 스캔의 흔적인데 자를까 하다가 그냥 두었습니다.


Canon EOS 1-Vhs, EF 28-70mm f/2.8L IS USM, RDPIII, LS-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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