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 카메라에서 디지털로 기기변경을 한 이후에 가장 큰 변화는 무엇보다 슬라이드 필름북에 더 이상 담을 슬라이드가 없어졌다는 점입니다. 예전에는 출사를 나가고 보통 다음날 정도에 충무로에 들러 필름을 맡기고 근처의 카메라샵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죠. 한 두 시간 정도 지나 현상이 완료되면 라이트박스와 루뻬를 이용해 마음에 드는 사진을 체크합니다.

집으로 돌아오면 이제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됩니다. PC를 켜고 스캔 작업에 들어가기 때문이죠. 제가 애용했던 LS-40은 롤 단위 스캐닝은 불가능한 기종으로 보통 5-6장 단위로 잘린 필름을 넣고 스캔을 해야 했습니다. 이게 어찌 보면 참 지루한 과정입니다. 스캔을 하는 동안은 다른 작업을 하기는 PC가 버티지를 못하기 때문에 스캔을 시작하고 나면 사진 관련 서적을 뒤적이는 게 보통이었죠.

스캔이 끝나면 날짜와 사용한 필름, 바디와 렌즈별로 별도의 폴더를 만들어둡니다. 좀 더 꼼꼼한 분들은 촬영지나 당시의 노출 상황 같은 것들도 같이 기록하지만 제 경우는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습니다.

아무튼 스캔 작업이 완료되고 폴더별 정리가 끝나면 인화를 할 사진들을 고르고 그냥 보관만할 사진들을 고릅니다. “야, 이거 좋은데..”라고 생각하는 필름들은 다시 주섬주섬 챙겨서 충무로로 가 인화를 하지만 대부분은 온라인 사진관을 통해 인화를 합니다.

스캔 작업이 끝난 필름은 하나하나 잘라서 마운트를 한 후 슬라이드북에 보관합니다. 이후 인화된 사진이 도착하면 이것역시 바인더에 보관을 하게 됩니다. 보통 필름 카메라를 사용하면 대충 이 정도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디지털로 전향(?)을 한 이후에는 이런 과정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무엇보다 촬영 습관이 바뀌더군요. 슬라이드를 사용할 때는 솔직히 롤 당 만원이 넘는 금액이 부담스러워서 브라케팅은 좀처럼 시도를 못하지만 디지털 카메라를 쓰게 되니 브라케팅을 자주 사용하게 됩니다. 덕분에 노출에 대한 이해가 좀 더 깊어진 점은 장점이네요.

게다가 촬영일이나 노출 정보와 같은 데이터들이 메타데이터로 파일에 모두 포함되니 사진을 찍는 입장에서는 솔직히 할 일이 엄청나게 줄어든 셈입니다. 하지만 뭔가 허전한 느낌은 지울 수 없습니다. 사진을 조금 오래해 온 사람들이 느끼는 손맛..이라는 것이죠.

필름은 현상이 되기 전에는 결과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셔터를 누르는 매 순간순간이 긴장과 고민의 시간이고 현상된 필름을 루뻬로 들여다볼 때 느끼는 그 성취감(?)이랄까요? 그런 것들이 사라지고 나니 허전한 감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인화를 마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적당하게 빛이 바래버린... 그래서 가끔 바인더를 뒤적일 때 빠지곤 하는 애틋한 감상을 느낄 수 없게 된 것도 아날로그에 익숙한 사진가들의 마음을 허전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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