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손글씨를 즐기는 편인데 아마 어려서 어머니께서 억지로(?) 글씨 연습을 시킨 것의 영향이 크지 않나 싶기도 하다. 아무튼 그런 이유인지는 몰라도 손으로 글을 쓰는 것에 별다른 거부감은 없고 오히려 가능하면 손으로 무언가 쓰는 경향이 있다. 얼마 전에 연필 관련 글을 쓰기도 했지만 사실 내가 가장 오래 써온 필기구는 만년필이다. 한때는 만년필 동호회에서 맹활약(?)을 하며 온갖 종류의 만년필을 두루 섭렵했었는데 결과적으로 내 손에 남아있는 만년필은 현재 2자루다. 몽블랑의 P146과 펠리칸의 M250 이 두 펜은 일기나 뭔가 심각한 글을 쓸 때 사용한다. 라미의 비스타도 있지만 이 펜은 일상용이랄까 그런 용도로 사용한다. 덧붙여 플래티넘의 1회용 만년필인 프레피도 있는데 이 만년필은 워낙 소모성이 강해서 별도로 분류하기는 애매하지 싶다.


펠리칸의 만년필은 참 종류가 많은데 역시 숫자로 등급을 정하고 있다. 250이라는 말은 쉽게 말하면 200시리즈 중 하나라는 의미다. 이전에 M205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배럴(만년필의 몸통)과 캡 등에 크롬이나 백금(또는 은) 도금이 되어 있을 때 5을 뒤에 붙인다. M250은 펠리컨의 표준형 만년필로 생각하면 된다. 100시리즈도 있지만 성인 남성이 쓰기에는 조금 작은 편이고 200급으로 올라가면 길이가 어느 정도 적당하다 싶은 느낌이 든다. M200과 이 녀석의 차이는 촉이 금도금이냐의 여부이고 나머지는 동일하다고 보면 된다. 아쉽게도 M250은 이제 단종이 되었다고 한다.


펠리컨이란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고 이 만년필을 만든 독일의 회사 이름이자 로고다. 시대에 따라 캡과 촉에 새겨지는 아기새의 모양과 숫자가 달라지는데 오래 전 모델의 경우 아기새가 두 마리고 요즘 모델은 한 마리다. M250의 경우 현재 단종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래도 비교적 현대 모델인지라 한 마리의 아기새가 보인다. 이전에 꽤 오래 사용했던 M150은 새가 두 마리였다. 가끔 내 손에 익을대로 익은 그 녀석이 그리울 때가 있지만 요즘은 이 녀석에 정을 붙여보려고 노력 중이다. 아래 촉 사진을 자세히 보면 아기새가 두 마리 있는 게 보인다.


M250은 14K금도금이 되어 있는데 금도금 촉(닙)의 경우 부드러운 것이 장점이라 하지만 이것도 제품마다 워낙 편차가 커서 딱 어떻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부분이다. 촉 아래 적혀 있는 EF란 Extra Fine의 약자로 아주 얇다는 의미지만 유럽 제품들이 그렇듯이 아주 가늘지는 않다. 그래도 펠리컨 제품은 비교적 가는 편이고 한글이나 한자를 적기에 크게 어려움은 없다. 더 얇은 촉은 일본 제품인 세일러나 플래티넘 것이 있다. 금촉의 특징이라면 스테인리스 촉에 비해 서걱거리는 느낌이 적고 대신 미끄러지는 느낌이 강하다는 점이다. 사람마다 이 느낌에 대한 평가는 다르지만 종이에 펜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더 좋은 내게 금촉은 조금 아쉬운 감이 있다.


펠리컨의 만년필은 배럴 안에 잉크를 넣는 방식이다. 플런저 방식이라고 하는데 사람에 따라 편리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촉 채로 잉크병에 담근 다음 잉크를 빨아들이는 방식으로 남아 있는 잉크의 양은 위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약간 투명한 창을 통해 알 수 있다. 펠리컨 제품은 통상 다른 제품에 비해 잉크가 많이 들어가 고시용 만년필로 인기를 끌기도 했다. 그러고보니 지금 내게 남은 만년필은 모두 이런 방식이다. 잉크를 넣기 위해 어느 정도 수고를 해야 하는 번거로운 녀석들인데 내게는 그것이 더 정겹다.

펠리컨이라는 이름은 클립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저 클립을 자세히 보면 눈도 달려 있다. 펠리컨의 머리 모양을 표현한 것인데 제조사별로 자신들이 내놓은 제품의 고유한 특징을 나타내는 방식이다. 몽블랑의 하얀별처럼 펠리컨은 저 클립을 통해 쉽게 구별할 수 있다. 하지만 뭐랄까 저 모양이 그리 근사해보인다고는 말하기 어렵겠다. 이것도 사람 취향이기는 하지만...


내게 남은 두 개의 만년필이다. 왼쪽의 몽블랑은 촉이 화려하고 펠리컨은 수수하다. 두 펜 모두 이리듐(펜촉 끝부분을 구성하는 금속)도 쌩쌩하고 아마 죽기 전까지 써도 저 두 펜 모두 닳게 만들기는 어려울 것 같다. 두 펜 모두 소장용이 아닌 순수한 필기용이다. 만년필을 소장하는 재미도 쏠쏠하다고 하지만 나는 글을 쓰는 재미가 더 쏠쏠하다. 두 촉 모두 EF지만 글을 써 보면 몽블랑이 펠리컨의 두 배 정도는 굵다. 

요즘은 전자문서가 보편화되어 만년필을 들고 결재란에 서명을 할 일도 없어졌다. 그런 면에서 만년필이 그나마 대중적으로 쓸모가 있던 시대도 지나가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필름 카메라가 이제는 골동품이 되어 우리 주변에서 사라져가듯이 만년필도 이제는 필기구가 아닌 소장용 수집품 대열에 끼는 것 같아 아쉬운 느낌이다. 이 녀석들을 한참 보다가 방 구석에 놓여 있는 작은 박스를 열어본다. 작은 상자 하나를 가득 메우고 있는 잉크들과 노트들... 역시 난 어쩔 수 없는 아날로그인가보다.

어찌 되었건 이 두 펜은 남은 내 인생을 함께 할 펜들이다. 내 손에 온 지 이제 3년이 조금 지났으니 이전에 사용하던 M150의 세월을 채우려면 10년도 더 넘는 시간을 글을 써야 한다. 이 녀석들이 적어 나갈 앞으로의 나의 이야기는 어떤 것일까...그리고 세월이 지나 빛바랜 잉크로 적혀 있는 그 글들을 다시 읽게 되는 날의 내 마음은 어떨까...

내년 정도에는 필름 카메라를 다시 들여볼까 생각을 해 본다. 사진에 가장 푹 빠져 지내던 시절 항상 내 손을 떠나지 않던 니콘의 F3와 F5를 다시 내곁에 두고 싶은 마음이다. 이젠 흑백필름이나 슬라이드를 현상해 주는 곳도 거의 없어졌지만...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필기구의 경우는 자기 손에 맞는 것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글씨만 잘 써지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글쓰기를 즐기는 그리고 만년필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경우라면 내 손에 맞는 그리고 내 글씨를 제일 잘 표현해 줄 수 있는 펜을 찾기 위해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하게 됩니다.

한참 카메라에 빠져 있을 때에도 내게 맞는 장비를 찾기 위해 참 많은 노력이 들었었는데 만년필에 와서도 역시 같은 과정을 거치게 되더군요.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비교적 빠른 시간과 적은 비용으로 손에 맞는 펜을 찾았다는 점입니다.


이번에 영입한 펜은 146라인 중 P옵션이 붙은 펜으로 클립과 장식부가 크롬 처리된 펜입니다. 흔히 CT(Chrome Trim)라고 불리지요. 저는 금장보다는 이런 스타일을 좋아하는데 일전에 소개한 펠리칸의 경우도 205 즉 CT였습니다.



몽블랑 마이스터스튁 라인은 146까지도 닙은 14K입니다. 149로 올라가야 18K를 사용하는데 실제 사용에 있어서는 14K가 부담은 덜한 편입니다. 금 함량이 높아지면 아무래도 닙이 쉽게 다칠 우려가 많지요. 물론 필자에 따라서는 금의 함량이 높은 것을 좋아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막상 찍어 놓고 보니 지포와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군요.. 저 지포가 약간 특이한데..티타늄 도금이 된 녀석입니다. ^^



146의 닙은 시대에 따라 그 모양과 디자인이 변해왔는데 80년대 146의 경우는 닙이 단색입니다. 단색의 경우를 보통 원톤닙, 현대 146처럼 금과 백금이 혼합되어 있는 경우를 투톤닙이라고 합니다. 닙에 세공된 글자나 문양은 아무래도 현대펜이 보다 선명합니다.



왼쪽이 구형 146이고 오른쪽이 오늘 들어온 신입인 현대 146입니다. 클립 부위의 색으로 GT(Gold Trim)와 CT를 구분합니다. 몽블랑에서는 P 즉 Platinum이라는 단어를 써서 이를 구별하지만 P모델이 가격이 약간 상위일 뿐 근본적인 차이는 없습니다.


 
많은 분들이 현대의 몽블랑의 닙 디자인이나 색상보다 구형 닙을 선호합니다. 디자인이나 색상은 단조롭지만 오히려 그 모습이 더 인간적이라는 생각에서죠. 역시 현대의 몽블랑은 정감어린 느낌이 든다기보다는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는 기계적인 느낌이 드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자필은 적지를 못했는데 세척을 하고 말리는 중이라 그렇습니다. 시필을 해 보니 현대 EF는 확실히 구형 EF보다 굵게 나옵니다. 하긴 몽블랑 만년필에서 글씨의 굵기를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는 일이긴 하죠.

대충 이렇게 해서 제 만년필 라인업(?)은 구성을 1차적으로 마쳤습니다. 146은 흑색 계열, M205가 청색 계열 잉크를 사용할 예정이고 국내 저명한 닙마이스터께 폴리싱을 의뢰한 팔콘이 도착하면 세밀한 문서 작성용으로 쓸 예정입니다.  

 

펠리칸 만년필은 실사용에 적합한 라인업에서부터 소장용 라인업까지 다양한 것이 장점이다. 이번에 소개할 펜은 얼마 전 국내에 출시된 M205 데몬스트레이션으로 흔히 '데몬'이라 불리는 속이 투명하게 처리된 펜이다. 사실 M200 데몬은 이미 출시된 적이 있는데 이번에 새롭게 업그레이드가 되었다고 할까?


국내에서 만년필을 구입하는 루트는 아주 비싸게 사는 방법에서부터 아주 싸게 사는 방법까지 다양한데 M205 데몬의 경우는 현재로서는 일반 온라인 샵에서 구입하는 것이 그나마 저렴한 축에 속한다.



케이스에 비해 아담해보인다. 사실 블루 데본이라고 했을 때 색상이 좀 어색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실제로 받아보니 전혀 촌스럽지 않은 세련된 청색 계열이어서 마음에 든다.



펠리칸의 특징은 역시 캡에 새겨져 있는 새 문양인데 이 문양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해왔다.. 현대의 펠리칸은 어미새 한 마리와 아기새 한 마리로 이루어져 있다.



청색 계열임에도 투명도가 높아 상당히 맑은 느낌을 주는 것이 이 제품의 장점 중의 하나다.



캡 안쪽으로 닙을 볼 수 있다. 투명도가 얼마나 우수한지 확인해볼 수 있다. 다만 스크래치가 날 경우에는 단점이 될 수 있겠다.



M205의 경우 스텐닙이다. 펠리칸의 스텐닙은 오랜 시간 써서 이리듐이 적당히 마모되면 어지간한 금촉보다 필감이 좋기로 유명한데 실제로 내가 사용 중인 M150의 경우 15년 이상을 써오면서 지금은 거의 미끄러지듯이 글을 쓸 수 있다.



M150과의 크기 비교다. 펠리칸 라인업은 200부터 본격적인 닙의 호환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표준적인 크기는 200부터라고 볼 수 있다. 150은 200에 비해 약간 작다.



내 M150은 촉이 도금되기 이전의 모델이라 그냥 스텐의 색상을 가지고 있다. 닙에 디자인적인 변화를 주지 않은 단순하고 직선적인 모양이다. 반면 200으로 올라가면 서서히 닙에 라인을 주기 시작한다. 데몬 버전에는 금색보다는 은색이 어울리는 것 같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캡에 새겨진 로고가 변화하는 데 이것으로 펜의 역사를 알 수 있다. 참고로 펠리칸의 제품명 표기는 한 종류일 경우 200, 205 등과 같이 변화를 주는 데 끝 자리에 5가 붙으면 은장(CT)을 말한다. 이외에도 중간에 1이나 5가 들어가는 조합 등 다양한 조합의 라인업이 나온다.


 
내가 펠리칸을 좋아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실제 필기에 최적화된 만년필이라는 점이다. 무엇보다 펜의 몸통 자체가 잉크 탱크 역할을 하기 때문에 잉크를 많이 담을 수 있고 가벼워서 장시간 필기에도 손이 피곤하지 않다. 물론 펠리칸의 경우도 수집용 제품들은 무겁기도 하고 실사용으로는 쓰기 어려운 제품군도 있지만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수집용이다. 적어도 순전히 글을 쓸 목적이라면 가장 좋은 대안 중의 하나가 바로 펠리칸이고 지금 내 책상 위의 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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